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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좋은 글 .../문태준의 가슴이 따뜻해지는 詩 30

[장]

[장]    일러스트 = 양진경    장 이른 아침 아낙네들은 시들은 생활을바구니 하나 가득 담아 이고······업고 지고······ 안고 들고······모여드오 자꾸 장에 모여드오. 가난한 생활을 골골이 버려놓고밀려가고 밀려오고······저마다 생활을 외치오······ 싸우오. 왼 하루 올망졸망한 생활을되질하고 저울질하고 자질하다가날이 저물어 아낙네들이쓴 생활과 바꾸어 또 이고 돌아가오. ㅡ 윤동주 (1917 ~ 1945)    이 시의 여인은 윤동주의 다른 시 ‘슬픈 족속’ 에 등장하는,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라고 표현된, 고난을 견뎌내는 강인한 여인의 풍모, 그리고 성정과 닮아 있다. 온종일 장사를 하는..

[3월]

[3월]     일러스트 = 김하경    3월 못자리 볍씨들 파랗게 눈뜨리풀풀 흙먼지 날리고돌멩이처럼 순식간에 날아든꽁지 짧은 새숲 흔들어 연초록 파문 일으키리이마에 뿔 솟는 아이간지러워 이마 문지르리 ㅡ 이재무 (1958 ~)    새봄의 시간이 도래했다. 차갑고 단단하던 대지는 탄력을 회복하고 있다. 봄이 열쇠를 쥐고 자물쇠를 열어서 묶이고 감긴 것을 풀어주는 것만 같다. 논에 보드라운 흙을 붓는, 객토를 하는 농가도 있다. 봄의 기운이 더 완연해지면 물꼬로 봇물이 졸졸 흘러 논으로 들어가고, 농부는 볍씨를 성심껏 고르고, 또 파종을 할 것이다. 들판이며 언덕이며 숲은 어떠한가. 새순이 움트고 만화 (萬花)가 피어나리라. 시인은 꽁지가 짤따랗고 몸집이 작은 새의 날갯짓만으로도 연둣빛 신록이 번지고 ..

[농담 한 송이]

[농담 한 송이]    일러스트 = 양진경    농담 한 송이 한 사람의 가장 서러운 곳으로 가서농담 한 송이 따서 가져오고 싶다그 아린 한 송이처럼 비리다가끝끝내 서럽고 싶다나비처럼 날아가다가 사라져도 좋을 만큼살고 싶다 ㅡ 허수경 (1964 ~ 2018)    비탄에 잠긴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는 설움이 괴어 있다. 마음의 동굴에는 비애가 종유석처럼 매달려 있다. 빛이 차단된 우묵한 곳. 시인은 그 사람 마음의 공간을 바꾸려고 애쓴다. 그와 나 사이에 오가는 한마디 농담을 통해서. 화사한 꽃송이 같은 농말의 언어를 던지고 건넴으로써. 다른 시에서 썼듯이 그것을 “가장 마지막까지 반짝거릴 삶의 신호” 로 여겨서. 갓 딴 농담은 생것이므로 비릿할 테다. 게다가 농담은 곧 시들 것이다. ..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일러스트 = 김하경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잠풍 날씨가 너무나 좋은 탓이고가난한 동무가 새 구두를 신고 지나간 탓이고 언제나 꼭같은 넥타이를 매고 고운 사람을 사랑하는 탓이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또 내 많지 못한 월급이 얼마나 고마운 탓이고이렇게 젊은 나이로 코밑수염도 길러 보는 탓이고 그리고 어느 가난한 집 부엌으로 달재 생선을 진장에 꼿꼿이 지진 것은 맛도 있다는 말이 자꾸 들려오는 탓이다. ㅡ 백석 (1912 ~ 1996)    이 시의 인용은 이숭원 문학평론가의 책 ‘백석을 만나다’ 에 실린 현대어 정본을 따른 것이다. 백석은 이 시를 1938년에 발표했다. ‘잠풍 날씨’ 는 바람이 드러나지 않게 ..

[성주 (城主)]

[성주 (城主)]    일러스트 = 김성규    성주 (城主) 당신은 성주가 되었다성 하나에 한 사람뿐인그가 되었다사람들은 당신 앞에서 모자를 벗지만그때 웃음판이 멈추기도 한다당신의 고독은 깊어간다 탁월함이 인격인 건 아니고행복이 가치의 지표도 아니다재물은 너무 많아도 안 되고고독은 너무 적어도 안 된다 멀리 보며 전체를 생각하라좋은 꿀의 꿀물을 타서많은 이가 감미롭게 마시게 하라겸허히 기도하라 ㅡ 김남조 (1927 ~ 2023)    김남조 시인은 2020년에 마지막 시집 ‘사람아, 사람아’ 를 펴냈다. 시인의 열아홉 번째 출간 시집이었다. 이 시는 그 시집에 실려 있다. 시인은 시집을 펴내면서 자신에게 시 (詩) 혹은 시심 (詩心)은 “한 덩이의 작은 흙이었으면서 기적처럼 풀씨가 돋아나는 신비를 보여..

[매화를 찾아서]

[매화를 찾아서]    일러스트 = 박상훈    매화를 찾아서 구름떼처럼 모인 사람들만 보고 돌아온다광양 매화밭으로 매화를 보러 갔다가매화는 덜 피어 보지 못하고,그래도 섬진강 거슬러 올라오는 밤차는 좋아산허리와 들판에 묻은 달빛에 취해 조는데,차 안을 가득 메우는 짙은 매화향기 있어둘러보니 차 안에는 반쯤 잠든 사람들뿐.살면서 사람들이 만드는 소음과 악취가꿈과 달빛에 섞여 때로 만개한 매화보다도더 짙은 향내가 되기도 하는 건지.내년 봄에도 다시 한번 매화 찾아 나섰다가매화는 그만두고 밤차나 타고 올라올까. ㅡ 신경림 (1935 ~)   내가 사는 제주도 애월읍 장전리에는 매화가 피었다. 얼어붙은 땅에 뿌리를 박고서도 수선화가 함초롬히 피더니 이내 매화가 피었다. 앞집 마당에 핀 매화를 오가며 바라본다...

[오 따뜻함이여]

[오 따뜻함이여]    일러스트 = 이철원    오 따뜻함이여 군밤 한 봉지를 사서 가방에 넣어버스를 타고 무릎 위에 놨는데따뜻한 온기가 느껴진다.갓 구운 군밤의 온기 ㅡ 순간나는 마냥 행복해진다.태양과 집과 화로와정다움과 품과 그리고나그네 길과······오, 모든 따뜻함이여행복의 원천이여. ㅡ정현종 (1939 ~)    대설주의보가 내리고 큰눈이 오고 수은주가 영하로 뚝 떨어질 때 세상은 눈덩이와 얼음 속에 갇힌 듯해도 우리는 온기를 아주 잃지는 않는다. 시인은 무릎 위에 올려놓은 군밤 한 봉지에서 기쁨과 흐뭇함을 느낀다. 그러면서 이런 감정을 맛보았던 순간들을 떠올려 적는다. 동트는 빛이며 살림의 가옥이며 놋쇠 화로며 선심 (善心)이며 심지어 정처 없음까지도. 내게도 따뜻함을 안겨준 것이 많다. 꽃..

[사랑]

[사랑]    일러스트 = 이철원    사랑 더러운 내 발을 당신은꽃잎 받듯 받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흙자국을 남기지만당신 가슴에는 꽃이 피어납니다. 나는 당신을 눈물과 번뇌로 지나가고당신은 나를 사랑으로 건넙니다 당신을 만난 후 나는 어려지는데나를 만난 당신은 자꾸 늙어만 갑니다 ㅡ 이성선 (1941 ~ 2001)    책상에 올려놓고 수시로 들춰 읽는 시집들이 있다. 개중에는 이성선 시인의 시집도 있다. 어젯밤에는 ‘별똥’ 이라는 제목의 시를 읽었다. “별과 별 사이 / 하늘과 땅 사이 / 노오란 장다리꽃 밭 위로 / 밤에 큰 별똥 지나간다. / 소풍 가는 시골 초등학교 아이처럼” 이라고 짧게 쓴 시를 읽고 난 후 밤의 마당을 서성거렸다. 이성선 시인은 산 (山)을 소재로 해서 많은 시를 남겼고 정신..

[눈과 강아지]

[눈과 강아지] 일러스트=양진경 눈과 강아지 지그재그로 발자국을 찍으며 강아지 한 마리 눈 위로 겅중겅중 달린다 컹컹컹컹 달린다 한 골목을 지나 또 다른 골목으로 아무것도 씌어지지 않는 골목으로 아무것도 씌어지지 않는 골목으로 강아지는, 강아지는 달리고 또 달린다 이제 강아지의 앞발도 보이지 않는다 ㅡ 최하림 (1939 ~ 2010) 최하림 시인은 ‘이슬방울’ 이라는 제목의 시에서 “이슬 / 방울 / 속의 / 말간 / 세계 / 우산을 / 쓰고 / 들어가 / 봤으면”이라고 짧게 썼는데, 이 시에는 그야말로 ‘말간 세계’ 가 있다. 설레어서 가슴이 콩닥콩닥하는 동심도 들어 있다. 강아지도 흥분되어 심장이 두근두근한다. 강아지가 눈 위에 찍은 발자국을 보아도 그렇다. 펄펄 날리는 눈송이처럼 좌우로 뛴다. ‘겅..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일러스트 = 박상훈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 되므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녘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 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 아닌 시인이라고. ㅡ 김종삼 (1921 ~ 1984) 김종삼 시인이 이 시를 발표한 때는 등단한 지 서른 해 가까이 되었을 때였다. 거의 서른 해 동안 시를 썼지만 시인은 정작 시를 모르고, 시인이 되지 못한다고 말한다. 겸손의 말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지만 시행을 따라가며 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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