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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좋은 글 .../최영미의 어떤 시 47

[날아가는 낙엽 (Das treibende Blätter)]

[날아가는 낙엽 (Das treibende Blätter)] 일러스트 = 이철원 날아가는 낙엽 (Das treibende Blätter) 마른 나뭇잎 하나가 바람에 실려 내 앞을 날아간다. 방랑도 젊음도 그리고 사랑도 알맞은 시기와 종말이 있다. 저 잎은 궤도도 없이 바람이 부는 대로 날아만 가서 숲이나 시궁창에서 간신히 멈춘다. 나의 여로는 어디서 끝날까. ㅡ 헤르만 헤세 (1877 ~ 1962) (송영택 옮김) 내 나이 또래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독일 작가, 한국에서는 ‘데미안’ ‘유리알 유희’ 등 소설로 더 알려졌지만 시도 곧잘 쓴 헤세. 중학생 시절에 그의 ‘수레바퀴 아래서’ 를 읽으며 나는 ‘사춘기 혁명’ 이라고도 할 만한 충격을 받았다. 헤르만 헤세의 책을 빌려 읽지 않았다면 나는 작가의 길을..

[너에게]

[너에게] 너에게 물같이 푸른 조석 (朝夕)이 밀려가고 밀려오는 거리에서 너는 좋은 이웃과 푸른 하늘과 꽃을 더불어 살라 그 거리를 지키는 고독한 산정 (山頂)을 나는 밤마다 호올로 걷고 있노니 운명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피할 수 있는 것을 피하지 않음이 운명이니라 ㅡ 유치환 (1908 ~ 1967) "물같이 푸른 조석 (朝夕)이" 생뚱맞아 한참 노려보았다. 푸른 아침도 푸른 저녁도 희귀한 일이 되어버린 지금, 희뿌연 도시의 아침과 저녁이 밀려가고 밀려오는 마포의 어느 도서관에서 '너에게' 를 읽었다. '좋은 이웃'에 공감하며 나의 행운을 저울질해 보았다. 살아갈수록 이웃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된다. 아파트 천장 누수로 위 아래층과 갈등을 겪고 이루 말할 수 없는 마음고생을 한 경험이..

[향수 (鄕愁)]

[향수 (鄕愁)] 일러스트 = 이철원 향수 (鄕愁) 나의 고향은 저 산 너머 또 저 구름 밖 아라사 (俄羅斯 · 러시아)의 소문이 자주 들리는 곳. 나는 문득 가로수 스치는 저녁 바람 소리 속에서 여엄ㅡ염 송아지 부르는 소리를 듣고 멈춰 선다. ㅡ김기림 (金起林 · 1908 ~ ?)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은 제목 ‘향수 (鄕愁)’ 를 보는 것만으로도 정겹고 아련하다. 어떤 요란한 기교도 부리지 않고 편안한 시어들. 3행이 1연을 이루는데, 아래 행으로 갈수록 행이 길어지고 넓게 퍼진 모양이 마치 산자락이 펴지듯 시각적인 재미를 준다. 김기림은 1930년대 조선 문단에서 가장 앞서가는 모더니스트 시인이자 산문 작가였다. 2행에서 ‘저 산 너머’ 뒤에 ‘저 구름 밖’ 의 대구도 절묘하다. ‘구름 밖’ ..

[중난산 오두막]

[중난산 오두막] 일러스트 = 이진영 중난산 오두막 (終南別業) 중년이 되면서 불도에 심취하여 중난산 구석으로 최근 집을 옮겼다 마음 내킬 때면 혼자 이리저리 다니니 스스로 깨침보다 나은 일은 없으리 계곡물 끝나는 곳까지 걸어가 앉아 있으니 구름 일어나는 것이 보이네 우연히 숲속 늙은 이를 만나게 되어 서로 이야기하던 중 돌아갈 시간을 잊었네 ㅡ 왕유 (王維 · 701 ~ 761) (류인 옮김) 당나라의 시인 왕유가 지은 오언율시 (五言律詩). 자연을 노래하나 그 속에 늘 인간이 있고 깨달음이 있는 왕유의 시가 좋아지니 어느덧 중년을 지나 노년이라네. 처음 볼 때는 특별한 게 없는 듯하나 볼수록 좋아지고 자꾸 생각나는 시를 그는 썼다. 소동파의 시가 톡 쏘는 강렬한 맛이라면, 왕유의 시는 누룽지처럼 구수..

[냄새가 오는 길목]

[냄새가 오는 길목] 일러스트 = 양진경 냄새가 오는 길목 무엇이든 냄새 맡기 좋았던 길목 다 왔으나 다 오진 않았던 길목에 들어설 때마다 그랬다. 언제고 한 집에서는 길과 맞닿은 부엌 창문으로 된장찌개 끓이던 냄새를 한 접시 가득 생선 굽는 냄새를 그랬다. 이 나라의 냄새가 아니게 뜨거운 열사 (熱砂)의 냄새 퍼뜨려주었다 퇴근길 혼자 가는 자취 생활자의 광막한 공복을 후비곤 했다 (···) 늦여름, 풀이 마른다 이 나라의 냄새가 아니게 풀이 마른다 열사의 타는 물의 향이 넘어온다 쓰라린 가을 길목 ㅡ 이진명 (1955 ~ ) 냄새가 ‘가는’ 길목이 아니라 ‘오는’ 길목. “다 왔으나 다 오진 않았던” 이라는 표현도 절묘하다. 퇴근길에 지친 몸을 끌고 자취방을 향해 골목길을 어기적어기적 걸어가는 사람의 ..

[사랑 5 ㅡ 결혼식의 사랑]

[사랑 5 ㅡ 결혼식의 사랑] 일러스트 = 이철원 사랑 5 ㅡ 결혼식의 사랑 성체를 흔들며 신부가 가고 그 뒤에 칼을 든 군인이 따라가면서 제국주의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부케를 흔들며 신부가 가고 그 뒤에 흰 장갑을 든 신랑이 따라가면서 결혼 예식은 끝난다고 한다 모든 결혼에는 흰 장갑을 낀 제국주의가 있다 그렇지 않은가? ㅡ 김승희 (1962 ~) ‘사랑’ 이라는 낭만적인 제목이 붙어있으나 실은 섬뜩하고 차가운 시.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일본 정원’ 을 다녀온 날 밤에 김승희 시인은 이 시를 썼다. 그날 일본 정원에서는 마침 결혼식이 열리고 있었고 “그 흰 장갑에서 불현듯 차가운 파시즘의 냄새를 맡았다” 고 시인은 설명한다. “케이트 밀레트의 ‘성의 정치학’ 을 결혼과 식민주의 담론과 연결시켜본 시. 남..

[만강홍(滿江紅), 분노한 머리칼 투구를 쳐들어]

[만강홍(滿江紅), 분노한 머리칼 투구를 쳐들어] 일러스트 = 양진경 만강홍(滿江紅), 분노한 머리칼 투구를 쳐들어 분노한 머리칼 투구를 쳐들어 난간에 기대어 서니 세찬 비가 그쳤구나. 눈을 들어 둘러보다 하늘을 향해 크게 소리 지름은 사나이 품은 뜻 뜨거움이라 (···) 팔천 리 길, 구름과달을 벗하리라. 세월 가벼이 보내지 마라 청년의 머리 희어지면 공허한 회한에 사무치리니 정강년 (靖康年)의 치욕 아직도 씻지 못하여 (···) 전차 휘몰아 적진을 돌파하여 (···) 머리부터 발끝까지 옛 산하 수복하여 황제께 알현하리니. ㅡ 악비 (岳飛 · 1103 ~ 1142) (류인 옮김) 중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남송 (南宋)의 장군, 악비가 지은 시. 용맹스러운 군인의 기개가 하늘을 찌르는 “분노한 머리칼 투..

[남해 금산]

[남해 금산] 남해 금산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ㅡ 이성복 (1952 ~ ) 잘 다듬어진 조각 같은 작품이다. 그 아름다운 이미지가 단순 명료한 제목과 함께 내 뇌리에 박혀 있다 어느 여름날 불현듯 떠오른다. ‘그 여자’ 를 따라 돌 속에 들어간 사내. 사랑하면 어디든 못 가리. 지옥 불 속에라도, 망망대해 외딴섬에라도, 북극에라도 기꺼이 따라가겠지. 예스러운 ‘~네’ 로 끝나는 행들. 시를 베끼며 우리나라 오래된 시가의 전통과 맞닿은 ‘남해 금산’ 의 서정적 운율이 새롭게 다..

[억왕손, 하사 (憶王孫 · 夏詞)]

[억왕손, 하사 (憶王孫 · 夏詞)] 일러스트 = 이지원 억왕손, 하사 (憶王孫 · 夏詞) 작은 연못 물풀들 바람 스치는 소리 비 그친 뒤 정원 연꽃 향기 가득하고 우물에 담근 오얏과 참외 눈처럼 얼음처럼 시원하네. 대나무 평상 위에서 바느질거리 밀쳐 두고 낮잠에 빠져 버렸네. ㅡ 이중원 (李重元) (류인 옮김) 그 옛날 한가로운 우물가 풍경이 눈에 그려지지 않나. 무더운 여름날, 우물에 담근 참외를 먹고 평상에 앉아 바느질을 하려는데 졸음이 몰려와 단잠에 빠진 여인의 시각으로 묘사했으나 작자는 북송 말에 살았던 (남성) 문인 이중원이다. 여성이 문필 활동을 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남기기 힘들던 때 ‘하사’ 와 같은 노래 가사를 통해 당시 중국 여성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송나라의 문학 양식인 송사 (宋..

[호박 (南瓜歎)]

[호박 (南瓜歎)] 일러스트 = 이철원 호박 (南瓜歎) 장마비 열흘 만에 모든 길 끊어지고 성안에도 벽항 (僻巷)에도 밥 짓는 연기 사라졌네 태학 (太學)에서 글 읽다가 집으로 돌아오니 문안에 들어서자 떠들썩한 소리 들려 들어보니 며칠 전에 끼니거리 떨어지고 호박으로 죽을 쑤어 근근이 때웠는데 어린 호박 다 따 먹고 (중략) 항아리같이 살이 찐 옆집 마당 호박 보고 계집종이 남몰래 도둑질하여다가 충성을 바쳤으나 도리어 야단맞네 (중략) 작은 청렴 달갑지 않다 이 몸도 때 만나면 출세 길 열리리라 안 되면 산에 가서 금광이나 파보지 만 권 책 읽었다고 아내 어찌 배부르랴 (후략) ㅡ 정약용 (1762 ~ 1836) (송재소 옮김) 정약용이 22세에 지은 한시인데 소설 장면처럼 사실적이고 표현이 치밀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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