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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25전쟁 60년/낙동강 혈전 22

[6 · 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㊽ 김일성의 조바심

[6 · 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㊽ 김일성의 조바심 1950년 여름 낙동강 전선 상황은 험악했다. 미 24사단의 방어를 뚫고 내려온 북한군 3사단(사단장 이영호)이 우리의 정면을 공격해 들어왔다. 전반적으로 다부동을 압박하는 적의 주공(主攻)이었다. 이화령과 조령을 넘어온 적 15사단(사단장 박성철)과 13사단(사단장 최용진)도 여기에 가세했다. 이들을 맞는 국군 1사단은 후퇴하면서 합쳤던 5사단 병력까지 모두 포함해도 9000명이 채 안 됐다. 정규적인 1개 사단 병력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황에서 3개 사단에 전차와 대포로 무장한 적을 맞았던 것이다. “8·15까지 부산 점령하라” 김일성 수안보까지 내려와 독려 김일성의 발이 바빠지고 있었다. 그는 개전 초기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얼마 안 있..

[6 · 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㊼ 최후의 방어선에 도달하다

[6 · 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㊼ 최후의 방어선에 도달하다 나는 광범위한 낙동강 41㎞ 전선에서 가까스로 적의 공세를 막아낼 수 있었다. 각 연대 예비 병력으로 야간에 치고 들어온 적군을 역습함으로써 주요 거점을 지킬 수 있었던 게 한 요인이다. 미군의 공중 지원도 큰 역할을 했다. 미 공군은 우리가 지원 요청을 하면 일본 후쿠오카(福岡)의 이타즈케(板付) 공군기지에서 폭격기를 발진시켜 30분 이내에 아군 상공으로 날아왔다. 이들은 한 차례 비행에서 두어 시간씩 폭격을 퍼부었다. 적군은 전차와 야포 및 주력 부대를 현지의 수많은 사과밭이나 야산에 숨겨 뒀다가 어두운 밤을 이용해 공격해 왔다. 이곳 다부동마저 뚫리면, 대한민국은 지도에서 사라진다 국군 1사단 작전처 소속이었던 남성인 중위는 공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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