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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89) 대통령의 뒷모습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89) 대통령의 뒷모습 평양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이 시청 앞에 마련된 연단에서 기념 연설을 하자 수많은 평양 시민이 광장에 몰려들어 지켜보고 있다. [중앙포토] 나는 1950년 가을 평안북도 영변에 사령부 CP를 두고 운산 전투를 치르면서 만주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온 중공군을 본격적으로 맞아 싸웠다. 날씨는 이미 추워지고 있었다. 아직 하복(夏服) 차림이어서 냉기가 더 느껴졌다. 나는 우리 전선의 정면에 나타난 중공군과 함께 또 다른 중요한 일에 신경을 써야 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 이승만 박사 내외가 평양을 방문했기 때문이다. 이승만 평양 10만 군중 연설, 하지만 중공군은 멀지 않은 곳에 … 대통령은 애초 10월 25일 평양을 방문해 역사적인 연설..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88) “미군 공습이 너무 무서웠다”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88) “미군 공습이 너무 무서웠다” 2009년 10월 북한을 공식 방문한 원자바오 중국 총리(오른쪽)가 평안남도 회창군의 ‘중국 인민지원군 열사묘’를 방문해 마오안잉의 흉상에 헌화하고 있다. [회창군 AP=연합] 내가 전쟁 중에 만난 중국인이 있다. 차이청원(柴成文)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중국의 주 북한 대사관 초대 참사였다. 그러나 출신은 군인이었다. 나와의 인연은 1951년에 시작한 휴전회담에서였다. 그는 당시 휴전회담 중국 대표단의 비서장 신분으로 나를 먼발치에서 지켜봤다고 했다. 미군 공습 공포 … 김일성도 탄광으로, 농가로 숨어다녀 나중에 소개하겠지만 나는 6·25전쟁 휴전회담의 첫 한국 대표다. 강원도 강릉에서 국군 1군단장을 하고 있던 내게..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87) 김일성과 박헌영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87) 김일성과 박헌영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했던 김일성(왼쪽)과 박헌영이 회의장 바깥에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초기 북한 정권을 이끌었던 두 사람은 6·25전쟁을 일으킨 뒤 국군과 연합군이 반격을 시작하자 반목과 갈등에 휩싸였다. 박헌영은 휴전뒤 김일성에 의해 숙청됐다. [중앙포토] 이상하다면 이상한 인연이다. 나와 김일성, 그리고 한때 그 밑에서 북한의 2인자로 행세하던 박헌영과의 관계 말이다. 나는 김일성을 일찍 만났다. 1945년 광복 뒤였다. 나는 그때 스물다섯의 나이, 김은 나보다 여덟 살 위인 서른셋의 나이였다. 나는 당시 해방 정국의 민족지도자였던 고당 조만식 선생의 비서였다. 조만식 선생의 비서실에 그는 두..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86) 만약 이곳에서 …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86) 만약 이곳에서 … 미 10군단의 이동경로 정신없이 길을 재촉했다. 내가 길을 서둘렀던 것은 하루라도 빨리 북진해서 수풍댐을 장악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어느덧 여름의 기운이 다 가시고, 차가운 냉기가 느껴지던 무렵의 청천강을 건너갈 때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1950년 10월 북진은 실패였다, 청천강서 교두보 쳤어야 … 이곳에 머물며 청천강 방어선으로 대한민국의 전선을 형성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 점이었다. 나는 국군 1사단을 이끌고 전쟁 발발 뒤 정신없이 전선을 누빈 일선 사령관에 불과하다. 그 점에서 내가 6·25전쟁의 중요한 분수령이었던 북진과 평양 입성, 나아가 압록강으로의 진격을 전체적인 전략의 판도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어불..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85) 청천강의 차가운 강바람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85) 청천강의 차가운 강바람 1950년 10월 20일 평양 북방 숙천과 순천에 나타난 C-119 수송기에서 미군 공수부대원들이 낙하하고 있다. 김포에서 이륙해 평양 북방까지 날아온 미군의 C-119와 C-47 수송기는 4000여 명의 병력과 600t의 장비·보급품 등을 투하했다. C-119는 일명 ‘날아다니는 유개화물차’라는 뜻의 ‘플라잉 박스카’로 불렸다. 병력과 물자를 단시간 안에 지상으로 투하할 수 있도록 뒷부분에 문을 달았다.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제공] 낙동강 전선에서 아군의 첫 반격을 이끌어 낸 김점곤 12연대장에게 미군과의 연계작전이라는 중책을 맡겼다. 시간을 잘 맞춰야 하고 변하는 상황에 기민하게 대응해야 한다. 그는 과감하면서도 통솔력..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84) 처참한 평양 형무소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84) 처참한 평양 형무소 6 · 25전쟁 초기 남한의 상당 부분을 점령한 북한은 곳곳에서 이른바 ‘인민재판’을 벌여 협조적이지 않은 인사들을 처형했다. 사진은 전쟁 발발 직후 서울 국회의사당 앞에 차려진 인민재판소에서 유명 문인 김팔봉씨(양복 입은 이로 추정)가 즉결재판을 받고 있는 모습이다. 그는 사형 판결을 받아 뭇매를 맞고 버려졌지만 극적으로 살아남았다. [중앙포토] 평양형무소 정문을 들어서면서 뭔가 처참한 광경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짐작은 맞았다. 내가 들어서는 마당에 쌓여 있는 것은 시체들이었다. 적군은 쫓기듯 평양을 빠져나가면서 평양형무소에 있는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했던 모양이다. 지난 4개월여 동안 전쟁터를 누빈..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83) 낯선 평양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83) 낯선 평양 1950년 10월 국군과 연합군이 탈환한 평양은 아직 크게 부서지지 않았다. 평양에서 시가전을 펼쳤던 국군 일부가 평양백화점 앞에 서 있다. 평양은 같은 해 10월 말 중공군이 참전해 공산치하에 들어간 뒤 미군의 대대적인 공습을 받아 시내 전역이 성한 데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무너진다. [중앙포토] 아침 6시쯤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단 CP에 갔더니 미군들이 와 있었다. 미 2사단의 ‘인디언 헤드’ 마크를 단 사람들이었다. 100명 남짓이었다. “도강(渡江)을 허락해 달라”는 그들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도쿄 유엔총사령부(GHQ)에서 보낸 ‘문서 수집반’이었다. 북한이 남기고 간 모든 문서를 신속하게 확보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었다. ..

[6 · 25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82) 1950년 10월, 국군 점령하의 평양

[6 · 25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82) 1950년 10월, 국군 점령하의 평양 1950년 11월 말에서 12월 초까지 개마고원에서 중공군에 맞서 장진호 전투를 벌였던 미군 해병 1사단이 그해 12월 13일 함흥에 전사자들을 매장한 뒤 추도식을 열고 있다. 미군 2500여 명이 전사했다. 10배나 많은 적군에 포위된 상태에서도 투혼을 잃지 않고 싸움으로써 해병대의 위대한 전통을 세운 전투로 기억된다. 그러나 적은 오래 버틸 수 없었다. 지동리에서 평양 동쪽으로 우회한 뒤 북쪽 외곽의 모란봉으로 해서 시내에 진입한 15연대의 작전으로 적은 후방을 공격당했기 때문이다. 저들은 도망치기에 바빴다. 15연대는 내가 선교리에 도착한 시간에 모란봉과 김일성 대학에 진출한 뒤 평양 시내로 진입하는 데 ..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81) 대동강의 푸른 물결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81) 대동강의 푸른 물결 1950년 10월 19일 평양에 입성한 국군과 유엔군은 시내 곳곳에서 저항하는 북한군과 시가전을 벌여야 했다. 그러나 북한군의 저항은 평양을 우회해 북쪽으로 진입한 국군의 협공에 밀려 길게 이어지지는 못했다. 국군이 평양 시내에서 북한군과 교전하고 있다. 시가전은 오래 진행되진 않았어도 위험했다. [중앙포토] 내 머릿속에 늘 푸른 강이었던 대동강의 물결이 언뜻 보였다. 전쟁이 터지면서 나는 임진강에서 물러나, 대한민국 수도를 품에 안고 흐르는 한강을 넘었다. 다시 낙동강에서 대한민국의 숨결을 지켜내고 한 달 뒤, 나는 고향의 대동강에 다가서고 있었다. 동생 인엽과 늘 뛰놀면서 그 바닥까지 헤집고 다녔던 고향의 강. 나는 어느덧 ..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80) 저 눈앞에 평양이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80) 저 눈앞에 평양이 1950년 10월 19일 첫 평양 입성을 눈앞에 둔 국군 1사단의 백선엽 장군 일행이 대동교 선교리에 도착하기 직전 지뢰폭발 사고가 터졌다. 백 사단장의 뒤를 따르던 석주암 참모장 일행의 지프가 지뢰가 터지면서 전복돼 길에 누워 있다. 1사단은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이날 평양에 도착했다. [백선엽 장군 제공] 자욱한 아침 안개가 걷히고 있었다. 연기 같은 안개 사이로 점차 모습을 드러내는 그곳은 영국 등 유럽의 사진에서 흔히 보는 것과 비슷한 벌판이다. 낮은 구릉이 곳곳에 널려 있을 뿐 시야를 가로막는 산은 없었다. 그냥 그곳에서 평양까지는 허허벌판으로 툭 터져 있는 공간이었다. 평양을 먹여 살리는 곡창이기도 했다. “우리라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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