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박물관] 02
[전기박물관] 02
건청궁의 빛, 근대국가를 꿈꾸다
전력산업은 세계적으로 1880년대에 형성돼 20세기 전반에 걸쳐 급속도로 성장했다. 근대 상공업 발달에 필수적인 조명과 동력을 제공하는 기초산업 basic industry으로서 화학과 금속 등 전력다소비산업 발전을 이끌어 제2차 산업혁명 시기에 중심역할을 수행했다. 또 기준의 석유등 · 가스등, 증기기관, 재래식 취사 · 난방 기구 등을 대체하면서 근대 도시민의 일상에 없어서는 안될 필수요소이자 공익사업 public utility으로 자리 잡았다.
조선은 강화도 조약 이후 부산 · 원산 · 인천을 개항하고, 물밀 듯 밀려오는 서구의 물결 속에서 근대화의 도태인 전기산업에 주목했다. 개항장을 통해 외국의 근대문물을 받아들이는 한편, 청 · 일본 · 미국 등 세계 강대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하고 여러 차례 사절단을 파견해 과학기술 분야의 선진문물을 배워오도록 했다. 바야흐로 전기는 부강한 나라의 상징이자. 근대를 열어가는 희망의 빛이었다.
한성전기회사
우리나라 근대적 의미의 전력사업은 한성전기회사의 설립과 궤를 같이 한다. 일찍부터 전력사업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 대한제국은 황실자본을 토대로 미국의 시술을 도입해 1898년 1월 우리나라 최초의 전력회사인 한성전기회사를 설립했다. 그 과정에서 주변국의 간섭을 막고자 이근배, 김두승이 청원해 민간회사로 설립하는 방식을 취했다. 초대 사장에 친미개화파인 이채연을 임명하고 주로 한성의 전차와 전등 등 부설사업을 수행하게 했다. 여기에는 주조선미국공사관의 추천으로 당시 경인철도 부설사업의 공사를 맡은 미국의 철도 전문가 헨리 콜브란 Henry Collbran이 주요 투자자이자 도급업자로 합류했다. 그러나 근대산업 진흥의 중심기구로 성장하리라는 처음 기대와 달리, 한성전기는 부족한 자본금과 기술력 때문에 콜브란이 실질적인 경영권을 ㅙㅇ사하는 구조로 운영됐다. 이는 한성전기를 둘러싼 정치세력의 갈등과 대립 속에서 한계로 작용하며 외세 침탈의 불씨가 되었다.
한성전기회사 사옥, 대한제국기 (좌), 해리 보스트 위크 H. R. Bostwick (중), 헨리 콜브란 H. Collbran (우)
한성전기회사 사옥, 대한제국기
한성전기회사 전경, 1900년대
한성전기회사 초대 사장 이채연 (우측), 1900년경
동대문발전소와 초기 한성전기회사, 1900년경
한성전기회사 사무실에 근무중인 직원들, 1901년
전차 사업의 착수
당시 수도 한양에는 인력거와 우마차, 자전거와 같은 초보 수준의 교통수단이 전부였다. 대한제국의 자립과 식산흥업 殖産興業 정책을 위해서라도 대량의 운송수단과 대중교통은 절실한 시대적 요구였다. 전차는 이를 아우르는 획기적인 교통수단이었고, 민간의 전차 이용을 통한 수익도 기대할 수 있었다. 따라서 한성전기회사는 첫 사업으로 전차 부설을 추진했다. 무엇보다 원활한 수송을 목표로 한 만큼 새로 부설되는 철도와의 연계도 중요하게 고려되었다. 이윽고 1898년 12월, 기차역이 들어설 예정이었던 돈의문 (서대문)에서 시작해 종로, 동대문을 거쳐 명성왕후가 묻힌 청량리 소재 홍릉 (현 남양주로 이장)까지 이어지는 7.5㎞의 단선 궤도 및 가설공사를 준공했다.
홍릉 부근 교외 선로 부설 작업, 대한제국기
양지아문 토지측량, 대한제국기
조선총대리인 프레이자 임명 에디슨 위촉 문서
1885년 6월 4일 / 17 × 21㎝ / 전기박물관 (복제)
경복궁의 전등 설비를 주문받은 에디슨이 1885년 6월 4일자로 프레이자 (Everett Frazar)를 에디슨 전등 플랜트 사업의 조선총대리인으로 임명한 위촉장. 에디슨은 프레이자를 조선총대리인으로 임명하고, 설비 확충 및 기계 판매를 위한 권한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이미 발주된 전등설비의 대금결제 등은 도쿄에 본사를 둔 아메리카무역회사가 대행하게 되었는데, 이 화사의 사장은 후에 조선의 이권에 깊이 관련되었던 모스 (James R. Morse)이다.
전등 · 전화사업 프레이자 요청 전문
1884년 / 미국
조선에서 전등 및 전화의 독점권 신청을 제의한 프레이자 (Everett Frazar)의 전문 (電文). 뉴욕 주재 조선명예 총영사인 프레이자가 조선에 있는 푸트 (Lucius H. Foote) 미국공사에게 에디슨이 조선에서 전등 · 전화사업을 독점할 수 있도록 요청한 전문이다.
에디슨 전등회사 업턴의 서신
1887년 / 미국
경복궁 후원 건청궁 전등공사를 담당한 업턴 (Francis Upton)이 에디슨에게 보낸 서신 (보고서)의 일부. 업턴은 이 서신에서 "경복궁의 전등시설은 동양에서 에디슨 제품의 판촉을 위해 모델 플랜트로 시공되었으며, 앞으로 일본 궁성에 설치될 시설과 함께 동양에서는 유일한 일류시설 (only first class plants in the East)이다." 라고 썼다.
건청궁 전등기사 맥케이의 여권 신청서
1886년 9월 18일 / 18 × 28.5㎝ / 미국, 미국무성고문서보관소 (복제)
경복궁 건청궁의 전등기사 백케이 (William Mackay, 麥溪)가 미국 국무성에 제출한 여권 신청서. 조선에서 전등설비를 시공, 운영하기 위해서 전기 전문 기술자의 초청은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전등기사 패인의 고빙 (雇聘 : [학식이나 기술이 높은 사람을] 예를 갖추어 초빙하는 것) 통지서
1889년 / 미국
조선정부가 프레이자 (Everett Frazar)에게 보낸 전등기사 패인 (佩仁)의 고빙 통지서. 패인을 경복궁 전등기사로 고빙 (1889. 8 ~ 1891. 8)한다는 것과 그의 급여 내역을 담고 있다.
콜브란과 보스트위크 상사의 로고
1900년경 / 6.4㎝ × 12.6㎝ / 미국, 보스트위크 기증 자료
조선의 한성전기회사 설립과 운영에 관여했던 미국인 콜브란과 보스트위크 상사의 로고. 왼쪽 조선을 상징하는 태극문에 한성전기회사 영문식 표기와 오른쪽 미국을 상징하는 미국 국기에 콜브란, 보스트위크의 한자식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로고 맨 왼쪽에 이들의 주요 사업을 나타내는 흥인지문 (동대문)의 전차 모습을 담고 있다.
한성전기회사 설립 관련 약식 보고서
1897년경 / 국사편찬위원회
한성전기회사 설립 전, 고종에게 약식으로 보고한 문서이다. 경인철도를 담당한 미국 회사가 자본금 일부를 지급하고 양사의 협의를 거쳐 전차, 전기등 (전기등)을 부설한다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민간인이 농상공부에 청원한 민간형식의 외양을 띠게 되었다.
대한제국 개국 기원절 경축회 예식 초대장
1898년 8월 27일 / 17㎝ × 24㎝ / 대한제국
1898년 대한제국 개국 기원절 경축회 예식 초대장. 대한제국은 1897년 10월 12일부터 1910년 8월 29일까지 존속하였던 한국 근대 국가이다. 갑오개혁으로 조선왕조 체제가 해체된 후 1897년 10월 12일, 고종이 새롭게 황제국을 선포하고 국호를 '대한 (大韓)' 으로 고쳤다. 중국에 대한 오랜 사대외교에서 벗어나 완전한 자주 독립국으로서 근대 주권국가를 지향하면서 부국강병 정책을 추진하였지만, 1910년 일제에 의해 병합되었다.
한성전기회사 본사 신축 초청장
1902년 1월 2일 / 6.0㎝ × 9.7㎝ / 미국, 보스트위크 기증 자료
1902년 1월 2일 한성전기회사 본사 신축에 대한 초청장. 신축 축하연 (祝賀宴)은 1902년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진행되는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
한성전기회사 관련 신문기사
1900년대 / 미국, 보스트위크 기증자료
콜브란이 고향 콜로라도에 있는 친구에게 보낸 서신과 한성전기회사의 전차, 동대문발전소, 종로의 사옥을 소개하는 사진이 실린 신문기사이다. 기사 가운데 한성전기 사옥에 대해서는 "단연코 동양에서 가장 현대적인 사옥" 이라고 높이 평가한 부분이 눈에 띤다.
한성전기회사 인장이 찍힌 전차표
대한제국 / 20.2㎝ × 12.6㎝ / 미국, 보스트위크 기증 자료 (복제)
한성전기회사 인장 (印章)이 찍힌 1등석 허가표 (전차승차표). 「한성전기회사 장정 (章程)」에 따르면 한성전기회사의 인장은 '한성전기회사 신장 (漢城電氣會社 信章)' 으로 한다고 하였다.
보스트위크를 인터뷰한 신문기사
대한제국 / 18.6㎝ × 13.6㎝ / 미국, 보스트위크 기증 자료
한성의 전차에 대해 보스트위크와 인터뷰한 신문기사. 스크랩되어 있어 정확한 발간일은 알 수 없다. 이 중 여성의 전차 탑승이 여성 권리를 향한 첫걸음이라 말한 부분이 눈에 띈다. "우리는 여성들이 우리 차를 탈 수 있다고 광고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에서 여성의 권리를 향한 첫걸음이다. 이전에는 여성들이 낮에 거리를 다니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전차 개통식 초대장
1899년 4월 26일 / 미국, 보스트위크 기증 자료
1899년 5월 1일 예정되었던 전차 개통식 초대장이다. 전차 개통식은 기계 상태의 점검 등으로 연기되어 5월 4일 개통되었다.
구간별 요금표 料金表
1900년 8월 6일 / 21㎝ × 19.3㎝ / 미국, 보스트위크 기증 자료
전차 구간별 요금 및 노선을 안내하는 표. 5전의 차이로 상등석과 하등석이 나뉘며, 2.50엔만 내면 20명이 탈 수 있는 특별차를 빌릴 수 있었다. 동대문, 종로, 서대문, 남대문, 돌모루 끝 (원효로1가 방향으로 청파동, 남영동에서 돌아 들어오는 세거리 길), 용산을 지날 때마다 5전씩 부가되었다.
탑승 안내문
1899년 5월 1일 / 16.5㎝ × 31.9㎝ / 미국, 보스트위크 기증 자료
전차 탑승 시 주의사항과 요금을 적은 안내문이다. 1899년 5월 2일자 《독립신문》에도 해당 내용을 번역한 광고가 실려있다. 여러 주의사항 중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전차를 탈 수 있다' 는 문구가 눈에 띤다. 전차는 계층뿐 아니라 성별 간 이루어졌던 차별도 없애는 촉매 역할을 했다.
관보 官報 The Gazette
1895년 (高宗 32) / 28.5㎝ × 19.8㎝ / 조선
1895년 (高宗 32) 6월 1일부터 1910년 (隆熙 4) 8월 26일까지 정부에서 일간 (日刊)으로 발행한 제호 (諸號)의 관보 (官報)를 임의로 분책 (分冊)하여 합철한 것이다. 관보는 1894년 6월 12일부터 발행하기 시작하여 일제강점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호수 (號數)없이 발행하던 것을 1895년 4월 1일부터 호수를 붙여 제4,768호까지 발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