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도 산악회와 수원화성을 가다] 01
[이어도 산악회와 수원화성을 가다] 01
수원역 8번 출구에서 바라본 수원역사
수원역 앞 순대골목
구 수원신사터 안내판
산루리 모ㅡ단길
산루리
과거 수원 원도심을 이끈 핵심지역이자 자주 독립 정신의 뿌리가 깃든 곳
모ㅡ단
Modernization, 모던의 당대 한국식 발음의 복고풍 단어
신작로, 근대를 걷다
구 수원신사터
한일병합 이후 일제는 '일본의 조선지배가 천황의 은혜' 라고 선전하며 전국 각지에 신사 (일본의 고유 종교인 '신도' 사원)를 건립했다. 수원신사는 1917년 수원향교 위에 세워졌고, 팔달산에 일장기 게양대와 고지소좌 (일본 군인) 기념비도 함께 설치되었다. 1930년대 후반부터 일제는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내선일체 (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라는 뜻)라는 구호를 앞세워 황국신민화정책을 실시하여 신사참배, 황국신민서사 암송, 일본어 상용 및 조선어 사용금지, 창씨 개명 등을 강요했다. 당시 수원신사는 인근에 위치한 일본인 소학교와 함께 수원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구심점 역할을 했고, 1945년 광복 후 소각되었다.
수원시민회관 / 수원시립중앙도서관 안내판
수원시립중앙도서관
1980년 7월 2일 개관한 수원시립중앙도서관은 수원시 최초의 시립도서관으로, 경기도립중앙도서관 (1970년 개관) 다음으로 수원시에서 오래된 도서관이다. 1979년 중앙일보 · 동양방송 (JTBC의 전신)에서 착공하여 수원시에 기증하였다.
지하 1층과 지상 2층으로 구성된 중앙도서관은 26만여 권의 도서를 보유하고 있으며, 1층에는 종합자료실 및 디지털실, 어린이 자료실이 있고, 2층에는 열람실과 정보자료실, 강의실 및 휴게실 등이 있다.
수원시민회관
수원시민회관이 자리잡은 곳은 일제강점기 '수원신사' (1917년 건립)가 있었던 곳이었으나 해방 후 철거되고 1917년 수원시민회관이 세워졌다. 개관 당시 경기도 내 최대 규모의 문화예술 공연장으로 경기도와 수원시의 주요 행사가 모두 이곳에 치러졌다. 건축물 또한 근대 유산의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김영중, 조성묵 작가의 협업 작품인 건물 내외부 조각과 외부의 모자이크 장식이 특징이다.
수원특례시 시민헌장탑
수원특례시 시민헌장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을 품은 역사도시인 수원은 영농과학의 중심지이자, 디지털 첨단산업의 중심도시입니다.
우리나라의 대표도시인 우리 수원시는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새로운 주민자치시대를 열어가는 특례시로 한 걸음 더 성장했습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자치분권의 역사를 만들어갈 수원특례시민으로서 그 권리와 책임을 이 헌장에 담아 수원특례시를 함께 만들어 가겠습니다.
하나. 공평하고 공정하며 서로를 따뜻하게 배려하는 자치공동체를 만들어 갑니다.
하나. 자연과 사람이 함께 공존하는 지속가능한 도시로 가꾸어 갑니다.
하나. 모두가 안전하고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풍요로운 복지도시를 만들어 갑니다.
하나. 인권은 존중하고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포용적 도시를 지향합니다.
하나. 세계 시민과 발맞추고, 세계 도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글로벌 도시로 나아갑니다.
팔달산 지석묘군 1호, 2호
팔달산 지석묘군 (1호, 2호)
경기도 기념물 제125호
팔달산 지석묘군은 팔달산 일대에 있는 4기의 지석묘 무리를 가리킨다. 지석묘는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한다. 수원시립중앙도서관 오른편 기슭의 구릉 위에 1호, 2호 지석묘가 있으며, 그 위쪽으로 약 100m 떨어진 곳에 3호, 4호 지석묘가 있다.
지석묘는 지하에 사람의 시신을 매장하여 흙으로 덮고, 그 위에 받침돌을 올린 후 덮개돌을 얹은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팔달산 지석묘군은 청동기 시대부터 수원지역에 사람이 거주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팔달산 지석묘군 3호, 4호
수원화성 팔달산 채석장
정조시대 화성 축성공사 당시 석재는 성곽에서 3 ~ 7리 떨어진 팔달산, 숙지산, 여기산에서 떠온 돌을 다듬어서 사용하였다. 일의 능률을 높이기 위해 관청에서는 미리 정해 놓은 석재 규격에 따라 값을 매겨 놓고 일꾼들이 돌을 떠오면 그만큼 값을 쳐 주었는데 그 덕분에 석재를 일정한 규격으로 통일할 수 있었다.
이곳은 팔달산에서 돌을 뜬 흔적이 남은 유적으로 바위 군데군데에 쐐기를 박았던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정을 사용해서 돌에 구멍을 뚫은 다음 그 속에 물푸레나무나 밤나무 등을 박고 물을 부어 두면 나무가 팽창하는 힘에 의하여 무거운 돌이 갈라지며 떠 어른다. '돌을 뜬다.' 라는 표현에는 이와 같은 공정이 담겨 있다. 채석장에서 크기별로 다듬은 석재를 거중기로 들어 올려 수레에 싣고 축성현장까지 운반한다. 화성축성 당시 네 개의 바퀴가 달린 동차 (童車), 비탈진 곳에서도 평행을 유지하는 유형거 (游衡車)라는 수레가 주로 사용되었다.
용도 (甬道)
용도는 좁고 긴 성벽으로 둘러싸인 통로를 가리킨다. 이곳은 좌우 지형이 급경사를 이루면서도 우뚝 솟아 있어 남쪽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만약 적에게 빼앗기면 성안이 노출될 수 있기 때문에 서남암문 밖으로 좁고 긴 성벽인 용도를 만들었다. 용도 중간에는 좌우에 치성*을 하나씩 만들어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게 했다. 용도 끝에는 서남각루가 자리잡고 있다.
* 치성 : 성곽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시설
● 1796년 (정조 20) 창건
● 1975년 복원
서3치 (西三雉)
서3치는 서포루 舖樓와 서남암문 사이에 성벽을 돌출시켜 쌓은 치성이다. 성벽 가까이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역할을 했다. 성벽에 8 곳, 용도에 2 곳의 치성이 설치되어 있는데 지형에 따라 형태가 조금씩 다르다. 서3치 바깥은 지형이 비교적 평탄하여 팔달산에 설치한 다른 치성에 비해 길이가 길다. 치성 안쪽으로는 여장에서 1 m 정도 돌출한 담을 쌓고 가운데 출입구를 냈다. 적대*와 비슷한 구조는 서3치와 남치에서만 볼 수 있다.
* 적대 : 성문 양옆에 외부로 돌출시켜 옹성과 성문을 적으로부터 지키는 네모꼴의 대
● 1796년 (정조 20) 창건
● 1975년 복원
지난 겨울 습설에 피해를 본 소나무들
서포루 西砲樓
서포루는 팔달산 중턱에 설치한 화포를 갖춘 시설이다. 화성에는 동포루, 서포루, 남포루, 북동포루, 북서포루 5 곳의 포루가 있는데 주변 지형 조건에 따라 크기를 달리했다. 서포루는 경사지에 지었기 때문에 평지에 설치한 북서포루와 북동포루보다 규모를 작게 만들고, 화포와 총을 쏘는 구멍의 숫자도 줄였다.
포루는 3층 구조로 아래 두 층에는 화포나 총을 쏠 수 있는 구멍이 있고, 상층에는 누각이 있다. 서포루 상부의 누각은 복원했으나 벽돌로 만든 하부에는 창건 당시의 모습이 일부 남아 있다.
● 1796년 (정조 20) 창건
● 1975년 복원
화서문
서북각루 西北角樓
서북각루는 화성 서북쪽 요충지에 세운 감시용 시설이다. 화성에는 모두 4 곳의 각루가 있다. 서북각루는 팔달산으로 오르는 경사지에서 성벽이 휘어진 곳에 자리 잡아 서북쪽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아래층에는 군사들이 머무는 방에 온돌을 놓았고 위층은 마룻바닥으로만들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사면에 널빤지 문을 달고 구멍을 내서 적을 감시했다.
● 1796년 (정조 20) 창건
● 1975년 복원
북포루 北舖樓
북포루는 북서포루 砲樓와 서북공심돈 사이에 있는 치성 위에 군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누각을 지은 시설이다. 치성은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이다. 화성에는 모두 15 곳의 치성이 있는데 그중 중요한 5 곳의 치성 위에 동1포루, 동2포루, 서포루, 북포루, 동북포루를 만들고 적의 동향을 감시했다. 북포루는 화성에서 가장 평탄하고 시야가 트인 곳에 있어서 주둔하는 군사의 수도 많고 규모도 크다. '군포루' 라고도 불렀다.
● 1795년 (정조 19) 창건
● 1975년 복원
북서포루 北西砲樓
북서포루는 장안문 서쪽에 설치한 화포를 갖춘 시설이다. 화성에는 동포루, 서포루, 남포루, 북동포루, 북서포루 5 곳의 포루가 있는데 주변 지형 조건에 따라 크기를 달리했다. 이 중 평탄한 곳에 지은 북서포루가 가장 높다. 포루는 벽돌로 만든 3층 구조로 아래 두 층은 화포나 총을 쏠 수 있도록 만들었고, 상층은 군사들이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누각을 만들었다. 북서포루와 북동포루는 안팎의 지붕 형태가 다르다. 이는 「화성성역의궤」에 수록되어 있는 각 시설물 자재 목록을 바탕으로 복원된 것이다.
● 1794년 (정조 18) 창건
● 1975년 복원
북서적대 北西敵臺
북서적대는 장안문 서쪽에서 성문에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방어시설이다. 화성에는 장안문과 팔달문 좌우에 적대를 설치했는데 현재 장안문에만 남아 있다. 장안문 좌우 적대에는 현안* 세 줄을 설치한 반면 팔달문 적대에는 두 줄을 설치했다. 현안은 성벽 가까이 접근한 적의 동향을 살피고 동시에 공격도 가능하도록 만든 시설이다. 적대는 우리나라 성곽 중 유일하게 화성에만 있다.
* 현안 : 성벽의 바깥에 위에서 아래로 낸 홈
● 1795년 (정조 19) 창건
● 1968년 수리
장안문
장안문 長安門
장안문은 수원 화성의 북문이다.정조는 장안 長安의 의미를 '북쪽으로 서울의 궁궐을 바라보고, 남쪽으로 현륭원 (융릉)을 바라보며 만년의 편안함을 길이 알린다.' 라고 풀이했다. 문 밖에 항아리 모양의 옹성 甕城*을 만들고 방어를 위해 좌우에 적대를 세웠다.
장안문은 남문인 팔달문과 더불어 화성에서 가장 웅장하고 높은 격식을 갖춘 건물이다. 2층의 누각은 네 모서리 추녀가 길게 경사를 이루면서 용마루**와 만나는 우진각 지붕 형태다. 길고 휘어진 목재를 구하기 힘든 조선 시대에 우진각 지붕은 궁궐이나 도성의 정문과 같은 건물에만 쓰였다. 문루 처마 밑에는 다포 多包라는 화려하고 정교하게 다듬은 받침 목재를 짜 맞췄는데, 다포식 건물은 18세기 이후 궁궐에서도 거의 백년 동안 짓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히 강원도 출신의 승려 목수인 굉흡이 와서 건설을 도왔다. 서울의 숭례문, 흥인지문과 함께 조선시대 성문을 대표하던 장안문은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파괴되어 1975년에 다시 복원하였다. 석축에 총탄 자국이 남아 있다.
* 옹성 : 성을 지키기 위하여 성문 밖에 쌓은 작은 성
** 용마루 : 지붕 가운데 부분에 있는 가장 높은 수평 마루
● 1794년 (정조 18) 창건
● 한국전쟁 때 문루 파괴
● 1975년 문루 복원
일제강점기 장안문
「화성성역의궤」장안문 외도
「화성성역의궤」장안문 내도
평지 북성 (平地 北城)
평지 북성은 화성을 축성하면서 네 구간으로 나눈 성벽 가운데 평지로 이루어진 북쪽 성곽이다. 북문인 장안문을 중심으로 동쪽은 북동적대부터 북수문 9화홍문)까지, 서쪽은 북서적대부터 서북공심돈까지 모두 10 개 시설물이 있다. 이 일대는 지형이 평탄한 편이어서 방어에 유리하도록 다른 곳보다 성벽을 높게 쌓았다.
장안문 주변은 성벽이 약간 바깥으로 나온 편이다. 이는 처음에 화성의 성벽 위치를 결정할 때 민가가 밀집해 있는 지역을 피하고, 남문과 북문의 거리를 확보하라는 정조의 뜻을 반영하였기 때문이다. 북성 구간에서 눈 여겨 볼 곳은 성문 양쪽에 적대를 세운 장안문, 수원천과 누각이 조화를 이룬 화홍문, 빼어난 군사 시설인 서북공심돈을 들 수 있다.
용연
용연 龍淵
용연은 화성의 북쪽 성밖에 있는 연못이다. 금강산 구룡연을 비롯해서 전국의 이름난 명소에 용연이라는 명치이 두루 쓰였고 갖가지 전설이 있다. 화성의 용연은 용머리처럼 생긴 용두 바위에서 유래했다. 용두 바위 위에 있는 방화수류정은 '용두각' 이라고도 부른다.
「화성성역의궤」에는 용연이 반달처럼 생겼고, 용두 바위는 물고기를 잡는 조대 釣臺로 쓸만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용연의 물이 넘치면 서쪽의 출수구를 통해 수원천으로 흘러 나간다. 출수구에는 용이 되기 전 단계의 짐승인 이무기 상을 새겼는데 원형이 잘 남아 있다.
용연에 비친 달이 떠오르는 모습은 '용지대월 龍池待月' 은 화성에서 보아야 할 아름다운 경치로 꼽힌다.
1796년 (정조 20) 조성 | 1976년 주변 정비 | 2011년 주변 정비
「정리의궤」 방화수류정 외도
「화성성역의궤」 방화수류정 외도
일제강점기 용연
북암문 北暗門
북암문은 화성 북쪽에 낸 비상 출입문이다. 암문이란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설치하여 적이 모르게 출입하고 군수품을 조달하던 문을 의미한다. 화성에는 5 곳의 암문이 있었는데 모두 벽돌로 만들었다. 북암문은 지형에 맞춰 좌우 성벽까지 벽돌로 둥글게 만들었다. 문 위에는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기 위해 여장을 세웠는데 반원형은 원여장, 장방형은 비예라고 부른다. 축성 당시의 모습이 잘 남아 있다.
● 1796년 (정조 20) 창건
● 1972년 수리
「화성성역의궤」 북암문도
동북각루 東北角樓 (방화수류정 訪花隨柳亭)
동북각루는 화성 동북쪽 요충지에 세운 감시용 시설이다. 용두 龍頭 바위 위에 각루를 우뚝 세워 주변을 감시하고 화포를 쏠 수 있도록 했다. 군사시설이지만 아름다운 연못과 함께 있어 경치를 즐기는 정자로 많이 쓰였다. 정자의 별칭은 방화수류정 訪花隨柳亭이다. 정조는 이를 '현륭원이 있는 화산 花山과 수원 읍치를 옮긴 땅 유천 柳川을 가리키는 뜻' 이라고 풀이했다.
방화수류정에는 온돌방 한 칸이 있었다. 보통 군사들의 휴식을 위해 각루 1층에 온돌방을 만들었는데 방화수류정에는 임금을 위해 2층에 온돌방을 두고 창문을 설치했다. 조선 정조 21년 (1797) 정월, 정조는 방화수류정에서 활쏘기를 하고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읊은 시를 지었다. 지금은 온돌방과 창문이 사라졌지만 원형의 건축물이 잘 남아 있다.
1794년 (정조 18) 창건 | 1934년 해체 · 수리
「정리의궤」방화수류정 외도
「정리의궤」방화수류정 내도
방화수류정 포혈 (대포구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