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박물관] 09
[전기박물관] 09
민간 전기업체의 난립
1900년 이후 일본인 거류민이 늘고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조선 내 전력수요도 덩달아 증가했다. 발전소에서 보내는 전기를 가정과 상점에 공급하려면 소규모 배전 配電이 필수였다. 조선총독부는 1910년 12월 제정한 회사령 會社令과 1911년 3월 공포한 조선전기사업취체규칙 朝鮮電氣事業取締規則을 통해 조선인 상업체계를 파괴하고 식민지 조선에 진출한 일본 자본의 보호를 꾀했다. 모든 회사의 설립은 총독부의 심사와 허가를 받아야 했고, 전력사업에서는 '1 지역 1 사업주의' 를 채택해 전기업체의 지역독점과 요금 인가제를 시행했다. 총독부의 보호 아래 일본인의 배전사업체가 주요 도시에 앞다투어 들어섰다. 소규모 배전사업의 난립에는 내년기관의 발달이라는 기술적 요인도 작용했다. 흡입가스기관이나 중유기관 重油機關을 원동기로 하는 발전은 보일러를 사용하는 기력발전 汽力發電과 달리 설비가 간단했다. 따라서 일본의 자본가는 작은 공간과 소액의 투자금, 소수 인원만으로 사업체를 운영할 수 있었다.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개성전기주식회사를 제외하면 전기업체 대부분은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잇속을 챙기는 도구에 불과했다.
영월화력발전소, 1930년대
전기사업 공영화와 전력사업체 통폐합
'1 지역 1 사업주의' 의 민간 독점 배전사업은 시민의 원성을 샀다. 비싼 요금과 낮은 품질, 형편없는 서비스에 대한 불만은 1920년대들어 전국적인 전기요금 인하와 전기사업 공영화 운동으로 번졌다. 특히 1927년 평양 부영화 府營化 운동의 성공은 부산 · 대구 · 경성 · 함흥 등으로 퍼져 일부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한편 회사령이 폐지된 1920년 이후 우후죽순 생긴 배전회사의 과도 경쟁으로 중복 설비 · 투자가 빈번했고, 이 때문에 전력공급 불안정, 자본 효율성 악화, 대규모 전원개발 電源開發 회피가 문제로 떠올랐다. 1929년의 세계대공황 여파로 긴축재정과 산업합리화 정책을 펴는 일본 군부에 발맞춰, 조선총독부는 '발전계획 및 송전망 계획' 을 세우고 1932년 2월 조선전기사업령 朝鮮電氣事業令을 공포했다. 전력산업을 발전 · 송전 · 배전 부문으로 분리해 발 · 배전 사업은 민영으로, 송전간선 送電幹線은 국영으로 운영하는 것이었는데, 예산 부족으로 송전 부분 또한 민간자본이 공동출자했다. 일본은 자본의 소유와 운용을 분리해 국가가 출자 부담을 지지 않고 자본 운용을 장악하는 민유국영 民有國營의 형태로 전력을 장악해 갔다.
구 남선전기 (주 ) 사옥
1936년 10월 지하 1층, 지상 4층, 옥탑 2층 규모의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세운 조선와사전기주식회사의 부산지점 사옥이다. 부산에서 처음으로 엘리베이터를 설치해 화제가 됐다. 외벽 저층부는 화강석, 상층부는 타일로 마감했고, 사각기둥 형태의 필라스터 (pilaster)로 출입구를 강조하는 한편 처마 아래는 인조석 조각재로 장식하는 등 르네상스풍의 아름다움이 특징이다. 지하 1층에 식당과 보일러실, 전기실이, 지상 1층에 숙직실과 영업부, 응접실이, 지상 2층에서 4층까지는 전차부와 경리부, 전화교환실, 회의실 등 사무시설이, 옥탑층에 엘리베이터 기계실이 있었다. 현재도 계단실 난간과 엘리베이터 출입구 장식 등 실내 마감과 구조 대부분 원형을 보존해 근대 사무용 건축물의 특징을 잘 드러낸다. 1937년 4월 남선합동전기주식회사에 병합되어 부산지점 사옥으로 쓰이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남성전기주식회사 임시본사로 쓰였다. 상업 · 무역 · 공업 등의 정부 업무를 보는 상공부가 피란 시 사용하기도 하였다. 1982년 한국전력공사 발족 후 현재는 한국전력 부산울산본부 중부산지사로 사용 중이다.
◯ 면적 : 지하 1층 지상 5층, 건축면적 487 ㎡, 연면적 2,655 ㎡
◯ 지정일 : 2007년 7월 3일 (국가등록문화재)
◯ 소재지 : 부산 서구 까치고개로 252 (토성동 1가)
◯ 건립연도 : 1936년 10월 15일
◯ 소유자 : 한국전력공사
대전전기주식회사 연혁사 沿革史
1937년 / 19.2 × 26.5 × 2.8 ㎝ / 전기박물관
1911년 창립한 대전전기 (주)가 약 26년 가량의 역사를 정리, 편찬한 연혁사로 비약적인 발전상, 전기시설, 남선합동전기주식회사로 통합되는 상황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조선와사전기주식회사 발달사
1938년 / 19 × 26.3 × 4 ㎝ / 전기박물관
1902년 부산전기 (주)로 출발하여 1910년 부산와사 (주)로 통합되었고, 다시 1913년 조선와사 (주)로 개칭한 후 1936년 남선전기 (주)에 통합되기까지의 회사변천사를 정리하였다. 당시 부산과 경상남도를 거점으로 한 조선와사 (주)의 상황과 일반 주민들의 생활상도 함께 볼 수 있다. 와사는 가스를 일컫는 일본식 표현이다.
개성전기연혁사 開城電氣沿革史
1936년 11월 / 15.5 ㎝ × 22.5 ㎝ / 개성전기 (주)
1917년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개성전기회사의 연혁사. 개성전기는 경기도 개성군 송도면 만월동에 발전소를 지어 개성과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산간벽지에 주로 전기를 공급하였다. 조선총독부의 전력통제 계획에 따라 1936년 서선합동전기회사에 흡수, 통합되었다. 이 연혁사는 개성전기주식회사의 태동에서 서선합동전기회사에 통합되기까지 20년의 기업 역사를 정리 기록한 사사 (社史) 자료이다.
주파수 조정용 시계
1937년 / 42.5 × 31 × 154 ㎝ / 영월화력발전소 (전기박물관)
영월화력발전소에서 사용했던 주파수 및 시간 측정용 시계. 정밀하게 제작된 추시계와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로 움직이는 전기시계를 똑같이 작동시켜 상호 편차를 알아내어 발전소에서 출력 (발전량)을 조절하는 기준이 되었다.
한국전력공사 대전보급소
대전 · 청주 · 충주 · 공주 등 충청 일대 전기공급을 도맡은 대전전기주식회사가 1930년대 세운 제3발전소다. 현존하는 대전지역 근대문화재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산업유산으로, 1923년 한반도 최초의 디젤기관을 도입한 제2발전소 (조치원발전소)에 이어 철도와 청주로의 송전을 책임졌다. 두 맞배지붕 건물이 맞닿은 독특한 형태의 대전보급소는 1934년 발전용량을 늘리고자 한 차례 증축하면서 현재와 비슷한 모습이 됐다. 용마루에 솟을지붕을 둬 조형성 뿐 아니라 환기와 채광 등 기능성도 갖췄다. 건물 앞뒤로 있던 굴뚝과 관리실, 장비실 등 부속건물은 철거됐으나, 건물 내부 천장에는 발전설비를 옮길 때 쓴 견고한 철제 빔이 남아 있어 생산시설로서의 면모를 살필 수 있다. 그밖에도 건물 형태와 구조적 특징, 외관 등이 잘 보존돼 역사적 가치가 높고, 붉은 벽돌과 잿빛 벽돌의 배치, 조적 (組積) 방식, 박공 구성, 창호 배열 등 건축적 완성도도 뛰어나다. 대전보급소는 1937년 발전소 통폐합 이후 발전소의 기능을 잃고 2005년까지 한국전력 대전보급소 창고로 쓰이다가, 현재는 전력연구원 연구시설로 사용중이다.
◯ 면적 : 지상 2층, 건축면적 793 ㎡, 연면적 1,546 ㎡
◯ 지정일 : 2004년 9월 4일 (국가등록문화재)
◯ 소재지 : 대전광역시 동구 동대전로22번길 87 (신흥동)
◯ 건립연도 : 1930년대
◯ 소유지 : 한국전력공사
대전전기주식회사 직원 단체 기념사진
1920년대 / 19 × 26 ㎝ / 일본, 대전전기 (주)
대전전기 본사 (대전 본정 2정목 86번지)에서 촬영된 직원 단체 기념사진. 대전전기는 1911년 5월 5일 토착 일인 (日人) 기업의 식민자본으로 설립되었다. 처음 대전 시가지와 인접 지역을 전력공급 구역으로 설립했지만, 구역 확대와 타사 합병을 통해 1930년대 중반 충남, 충북은 물론 강원도 원주, 경기도 이천까지 지점을 둔 전력회사로 성장했다. 조선총독부 전기사업령에 따라 1937년 3월 남선합동전기 (南鮮合同電氣)에 흡수 · 합병되었다.
조선수력전기주식회사 창립 경영허가 신청서
1924년 / 17 ㎝ × 24 ㎝ / 일본, 조선수력전기 (주)
전라북도 섬진강 본류에 댐을 건설하고 전등, 전력공급 사업을 목적으로 설립하는 조선수력전기주식회사의 창립 경영허가 신청서. 28쪽 분량으로 되어 있다.
부산 명승 엽서
1930년대 / 9 ㎝ × 14 ㎝ / 일본, WAKAYAMA (和歌山) 사
부산시와 인근의 명승을 담은 10매용 관광기념 엽서. 엽서에는 경상남도 산업장려관, 범어사 일주문, 부산 대창정거리, 중앙도매시장, 부산세관, 송도해수욕장, 관부연락선, 자성대, 영도다리, 부산부청사 등의 사진을 담고 있다.
경성명소백경 京城名所百景
1930년대 / 9 ㎝ × 14 ㎝ / 일본, WAKAYAMA (和歌山) 사
경성의 100대 명소와 거리 등을 30매의 엽서에 담은 관광기념품.
국권과 전기주권을 빼앗기다
전기를 비롯한 신문물을 받아들이면서 한반도는 빠른 속도로 변화했다. 그러나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국에 통감부를 설치해 대한제국의 각종 근대화 정책과 이권을 가로챘다. 근대화의 핵심인 전력사업도 예외가 아니었다. 식산흥업 殖産興業의 마중물이 되리라 기대한 한성전기회사는 불공정한 독소조항을 빌미로 미국에 이어 일본에 매각됐고, 그 과정에서 우리나라 정부와 국민은 철저히 배제됐다.
1910년 경술국치 庚戌國恥 이후 국권을 강탈한 일본은 조선총독부를 세워 자국민의 이익을 확장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했다. 일본인 소유의 배전사업체 설립을 허가하고, 나중에는 네 권역으로 강제 통폐합해 전력사업을 완전히 통제했다. 또 전쟁에 필요한 중화학공업과 군수산업을 육성하고자 수력발전소를 세우는 등 한반도를 전쟁의 병참기지 兵站基地로 삼았다. 이로써 전기는 근대화의 희망이 아닌 식민지 수탈과 침략전쟁의 수단이 되어버렸다.
빼앗긴 한성전기회사
한성전기의 사업은 설계부터 공사, 운영까지 콜브란 측에 일괄 수주하는 방식으로 운영됐고 대한제국은 이에 크게 기댔다. 콜브란은 이를 악용해 한성전기가 계약대금을 제때 내지 못하는 일이 생길 때마다 한성전기 운영권, 황실자금관리, 은행설립권 등 자신의 영향력과 이권을 확대해 나갔다. 그의 무분별한 야욕을 견제한 황실 세력과 갈등을 겪자 콜브란은 미국 공사를 동원해 부채 상환을 압박했다. 대한제국은 콜브란 측의 과도한 채무액 산정에 맞섰고 사태는 채무분규로 격화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한국 정부는 미국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수 없이 콜브란 측이 요구한 채무액의 절반을 지급하는 등 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불공정 계약이 빌미가 되어 한성전기는 끝내 한미합자의 미국법인 한미전기회사 韓美電氣會社로 전환되었으며 대한제국은 전력사업의 주도권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러일전쟁 승리 이후 일본은 한반도 지배력을 높이고 미국을 견제하려 1909년 일한와사주식회사 日韓瓦斯株式會社를 통해 한미전기를 인수했다. 이 과정에서 한미전기의 지분 절반을 가진 고종은 철저히 무시당했고, 한국 최초의 전력회사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한성전기회사 직원들 앞줄 왼쪽이 이채연 오른쪽이 보스트위크, 1899년 (왼쪽)
한성전기회사 사옥 전경, 1899년 (오른쪽)
일한와사주식회사
1908년 9월 일본 도쿄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10월 5일 정식 설립된 가스회사로, 회사명의 와사 瓦斯는 가스 gas를 일본식으로 음역한 말이다. 한국에는 이미 전력사업을 독점하는 전기사업체 한미전기가 있었기 때문에, 일제는 가스를 취급하는 회사를 세워 한미전기와 경쟁했다. 가스는 조명과 취사, 난방에 두루 쓰였으므로 전기와 견주기에 적합한 수단이었다.
일한와사는 용산에 영업소와 가스 제조소 건설부지 1만 4,000평을 확보해 본격 사업에 들어갔다. 1908년 11월 3일 진고개 등 일본인 거주지에 처음으로 점등했는데, 이는 우리나라 최초로 가스연료를 사용한 것이었다. 이 회사는 1909년 6월에 한미전기를 매수하고 일한와사전기주식회사가 되었다가, 다시 1915년 경성전기주식회사 京城電氣株式會社로 이름을 바꿨다. 일제는 이를 한반도의 전력산업을 장악하는 토대로 삼았다.
일한와사주식회사, 1908년
한미전기회사 설립계획서
1904년 2월 19일 / 20.2 ㎝ × 30.5 ㎝ / 전기박물관 (복제)
1904년 2월 19일 고종의 대리인 자격으로 육군총장 이학균과 콜브란 · 보스트윅이 맺은 한미전기회사 설립계약서다. 대한제국은 콜브란 측을 한성전기의 특허권과 재산의 소유자이며, 신설법인 한미전기의 운영권자라고 인정했다. 또 새롭게 일화 40만 엔을 현금 출자하고 나머지 35만 엔을 약속어음으로 발행하기로 했다. 이 계약은 콜브란 측에서 돈 한 푼 들이지않고 한미전기를 장악하도록 꾸민 지극히 불공정한 계약이었다.
한미전기회사 설립 계약서의 일부분
1904년 2월 19일 / 18.5 × 27.5 ㎝ / 전기박물관 (복제)
1904년 2월 19일 고종황제의 대리인 육군참장 이학균 (李學均)과 콜브란, 보스트위크 사이에 조인된 한미전기회사 설립 계약서의 한 부분. 문서 끝 부분에 고종의 재가를 받은 뒤에 찍은 계 (啓) 자 (字) 인 (印)이 보인다. 계약이 체결됨에 따라 콜브란, 보스트위크는 1904년 7월 18일 미국 코네티컷 주 (州) 세이부르크 시 (市)에서 자본금 100만 달러의 유한회사로 한미전기회사를 설립하였다.
한미전기회사 연종서 年終書
1908년 / 20.2 ㎝ × 30.5 ㎝ / 전기박물관
한미전기회사의 1년 결산서. 한미전기회사 사장인 미국인 콜브란이 매년 회사 경영과 재무에 대한 내용을 결산서로 작성해 고종황제에게 보고한 자료이다. 이 연종서는 우리나라 전통 부기 (簿記) 결산 방식을 따랐다.
서울 남대문로 한국전력공사 사옥 (구 경성전기 (주) 사옥)
1920년대 말 경성전기주식회사 사옥으로 서울 도심부에 세워진 본격적인 사무실 건물이다. 해방 후 2개 층이 증축되어 현재 '한국전력공사 사옥' 으로 사용되고 있다. 최초의 내화 · 내진 설계와 엘리베이터 설비, 유리블록 등이 건축 재료로 사용되었다. 일제 강점기 경성전기 경성지점으로 출발하여 1928년 경성전기 사옥을 짓고 쭉 경성전기 본점으로 사용되었다. 광복 후 1961년 전력 3사 (경성전기, 남선전기, 조선전업) 통합 때 한국전력주식회사 본사로 사용되다가, 본사가 서울 삼성동으로 확장 · 이전하면서 1991년부터 서울지역본부 (2018년 12월 28일 '서울본부' 로 명칭 변경) 사옥으로 쓰고 있다. 이 건물은 2002년 2월 20일 대한민국 등록문화재 제1호로 지정 등록되었는데, 종로 북촌 화동의 경기고등학교 건물 (제2호)과 치열한 경합 끝에 이뤄진 결론이었다. 건물의 공적이 의미와 장소의 특수성, 미래를 위한 보존가치를 높이 평가받아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제도가 시행된 이후 첫 결과물의 상징을 지닌다.
◯ 면적 : 지하 1층 지상 5층, 연면적 5,957.1 ㎡ (3 필지)
◯ 지정일 : 2002년 2월 28일 (국가등록문화재)
◯ 소재지 : 서울 중구 남대문로 92, 외 3 필지 (남대문로 2가)
◯ 건립연도 : 1928년 2월 28일
◯ 소유자 : 한국전력공사
일한와사전기 (주) 엽서
1909년 / 9 ㎝ × 14 ㎝ / 일본, 일한와사전기 (주)
1908년 9월 30일 한국에서의 전력산업을 장악할 목적으로 시부사와 에이이치 (澁澤榮一)가 중심이 되어 도쿄에서 설립한 전기 · 전차 · 가스를 공급하는 회사. 일한와사전기회사는 일제가 러일전쟁 승리 후 조선에서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해 1908년 일본인을 앞세워 설립한 '일한와사 (주)' 를 기축 (機軸)으로, 콜브란과 보스트위크의 '한미전기회사' 를 헐값에 인수하였다. 일한와사전기 (주)는 1915년 9월 경성전기 (주)로 회사명을 변경하였다.
경전의 사업과 전차안내 엽서
1929년 / 9 ㎝ × 14 ㎝ / 일본, 경성전기 (주)
1929년 9월 12일 ~ 10월 31일까지 경복궁에서 열린 조선박람회에 경성전기가 전기관을 설치 · 운영하며, 방문객에게 기념품으로 나눠 준 홍보 엽서. 경성전기회사의 1928년 사업현황이 게재된 사진엽서와 경성 시내 전차 노선이 그려진 그림엽서가 한 세트로 구성되어 있다. 엽서에는 박람회 주관 부서인 경성협찬회 소인 (消印)이 찍혀 있다.
당인리발전소
숱한 전기업체 중에 서울의 전력사업권을 장악한 회사는 단연 경성전기였다. 경성전기는 조선총독부의 절대적인 지원 아래 경남을 비롯해 경기, 강원 등 중부권의 군소 배전회사를 흡수 · 합병하면서 조선 최대 규모의 전기회사로 성장했다. 경성전기는 기존의 낡은 용산 발전소로는 날로 증가하는 전력수요를 따라잡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냉각수 확보와 연료 공급이 쉬운 마포 당인리에 석탄발전소를 건설했다.
1930년 문을 연 당인리 발전소는 1만 kW급 터빈 발전기를 설치한 당대 최대용량의 발전소였다. 1935년에는 1만 2,500 kW 규모의 2호기를 설치해 발전용량을 한층 더했고, 경성의 전력공급을 담당하는 중심발전소로 자리잡았다.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경인지구를 병참기지로 삼으면서 평양과 서울을 잇는 154 kW 송전선을 지어 장진강 수력발전소의 전력 7만 5,000 kW를 끄러 왔다. 이후 당인리발전소는 예비발전소로 전환되고 용산발전소는 폐지됐다.
건설 중인 당인리발전소, 1930년
당인리발전소, 근대산업문화유산으로 탈바꿈하다
산업이 발달하고 거주인구가 늘어난 1990년 말부터 당인리발전소 (현 서울복합화력발전소)는 전력소비량을 따라가지 못했다. 더구나 낡은 시설이 안전과 환경문제를 일으켜 지역주민과 마찰을 빚는 일이 잦았다. 이에 2012년 마포구와 문화체육관광부, 한국중부발전주식회사는 업무협약을 맺고 당인리발전소 지하화를 선언, 2019년 800MW 수준의 대용량 지하발전소를 완공했다. 이는 대규모 발전소를 지하화한 세계 최초의 사례다. 또 액화천연가스 (LNG)를 연료로 한 복합화력발전소 두 기를 설치해 황산화물질과 먼지를 배출하지 않는 친환경 발전소로 탈바꿈했다.
2021년 4월에는 지상공원인 마포새빛문화숲을 조성하고, 문화공간 등 편의시설을 제공하여 지역사회에 이바지하는 도심형 발전소로 거듭났다. 당인리발전소는 영국의 테이트 모던 Tate Modern처럼 근대산업문화유산을 문화 · 예술이 꽃피는 명소이자 지역사회와 어우러지는 시설로 바꾼 선구적인 사례다.
당인리발전소 전경, 1960년대 (위)
당인리발전소 중앙제어실, 1960년대 (아래)
당인리발전소 건설 전 부지 전경 1929년 7월 4일
멀리서 본 당인리발전소 건설 모습 1930년 2월 3일
당인리 화력발전소 내 한국중부발전, 2022년 출처 : 마포구청
공원화된 당인리 화력발전소, 2022년 출처 : 마포구청
석탄 발송 안내장
1936년 11월 8일 / 9 ㎝ × 14 ㎝ / 일본, 남만주철도 (주)
남만주철도주식회사가 무순탄광에서 채취한 유연탄을 경성전기 당인리 발전소로 납품한 석탄 발송 안내장. 안내장엔 납품하는 석탄의 질과 양, 화차번호 등이 기록되어 있고, 당인리 발전소 연료검수원이 검수하였다는 고무인이 찍혀 있다. 당인리 발전소는 우리나라 탄광에서 채굴한 석탄보다 값이 싼 만주 무순탄광 (露天鑛 : 지표면을 들어내고 석탄을 퍼 담아 채취하는 탄광)의 유연탄을 연료로 사용하였나는 것을 알 수 있는 귀한 자료이다.
무순탄광 撫順炭鑛 엽서
1930년대 / 9 ㎝ × 14 ㎝ / 일본, 남만주철도 (주)
당인리발전소의 주 연료 공급원인 무순지역 노천탄광이 담겨있는 1930년대 엽서. 무순탄광은 아시아에서 가장 큰 노천탄광으로 그 채굴 역사는 청나라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청의 건륭제 (乾隆帝) 때 석탄 채굴을 금했는데, 이 일대가 청조 조상의 황릉과 인접해 있었기 때문이다. 청일전쟁 후 일본은 이곳을 점거하여 40년 동안 2억 톤 이상의 석탄을 채굴했다. 지금은 무순탄광박물관이 들어서고, 푸순 (무순) 시 관광명소로 눈길을 끈다.
무순탄광 撫順炭鑛 리플릿
1930년대 / 37.5 ㎝ × 54 ㎝ / 일본, 남만주철도 (주0
남만주철도주식회사가 무순탄광의 연혁과 설비현황, 사업내용 등을 홍보하기 위해 제작한 리플릿. 뒷면에 탄광 부근 지형도와 지층 단면도, 탄광 경사면 채굴법 등이 그려져 있다.
당인리화력발전소 건설 앨범
1929년 ~ 1930년 / 36 ㎝ × 27 ㎝ / 일제강점기, 무라카미 덴코 촬영
1930년 11월 준공된 당인리화력발전소 건설 앨범. 발전소는 1929년 당시 경성전기주식회사 (京城電氣株式會社)에서 건설한 1호기 (10MW급 석탄화력)가 1930년 11월 준공되어 전력을 생산하였는데, 당인리 고을 이름을 적용하여 '당인리 화력발전소 (唐人里火力發電所)' 라고 하였다.
수력발전의 시대가 열리다
1910년대 한 차례 벌인 수력조사에서 조선총독부는 한반도의 수력자원 가능성을 낮게 보았다. 한반도 사정에 맞지 않는 기준을 적용한 탓이었다. 이 땅에 수력발전을 추진한 주체는 오히려 일본의 민간자본이었다. 한반도 북부 지형은 대규모 수력발전에 적합했고, 민간 주도로 댐 축조와 유역변경식 발전을 혼합한 대대적인 수력발전 시대가 열렸다.
한국최초의 수력발전소는 1905년 동양금광회사가 평안북도 청천강 지류인 구룡강 댐에 세운 운산수력으로, 동양 최대 금광인 운산금광의 채굴에 활용할 전기를 공급했다. 1925년 북한강 상류 화천강 化川江 중대리에 조선 최초의 유역변경식발전소 流域變更式發電所를 건설한 금강산 전기철도 (주)는 금강산 철도 운영과 기차선로 · 경성 일대 전력공급을 겸해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함경도에서는 일본질소비료주식회사 日本窒素肥料株式會社의 주도로 1929년 13만 kW급의 부전강수력발전소가 건설됐다.
금강산전철 (주)의 중대리발전소, 1930년대
장진강수력발전소, 1938년
전시체제를 위한 전력통제
1932년 조선전기사업령으로 시작한 배전사업체 통폐합은 1942년까지 10년에 걸쳐 진행됐다. 기존 54개에 달하는 전국의전기업체는 5년에 걸쳐 4대 권역으로 묶였다. 북선합동전기는 함경도를, 서선합동전기는 평안도 · 황해도 · 경기도 일부를, 경성전기는 서울과 경기도 · 강원도 일부 등 중부권을, 남선합동전기는 경상도 · 전라도 · 충청도 · 제주도와 강원도 일부 등 남부권을 맡아 전기를 공급했다. 일제가 1941년 일으킨 태평양 전쟁은 1943년에 이르자 일본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조선총독부는 군수공업과 직결된 전력을 통제하고자 1943년 4월 조선전력관리령 朝鮮電力管理令을 시행했다. 이에 같은 해 8월 발전 및 송존사업을 통합한 특수회사로 조선전업주식회사 朝鮮電業株式會社가 설립됐다. 그 결과 식민지 조선의 전력사업은 앞서 정리된 4개의 배전회사와 1개의 발 · 송전회사로 정비되었다. 이후로 합병통합에 의한 신설 이외에는 배전회사의 신규 허가나 설립은 없었다. 이는 전력의 생산과 공급은 물론 소비까지 통제하려는 목적으로, 전기를 군수공업에 우선 공급하되 일반용보다 저렴한 가격을 매겨 전쟁 상황에서 전기에 대한 강력한 국가관리체계를 구축하려는 조치였다.
조선전업 (주) 사옥, 1943년 (위)
경성전기 (주), 1915년 (아래)
운산수력의 동력을 이용해 채광한 운산금광 1905년
중계선륜기 中繼線輪器
1938년 / 75 × 58 × 75 ㎝ / 왕십리변전소
일제강점기에서 1960년대까지 전력선을 이용하여 본사와 사업소 간 통신을 주고 받을 때 음성신호 이외의 신호가 겹쳐지지 않도록 분리시켜 주는 여과장치. 전력선에 돌아다니는 통신신호가 다른 전력선으로 넘어가면 안되기 때문에, 중간에서 신호를 차단해야 하기에 병렬필터를 설치한다.
전력량계 電力量計 100 ~ 115 V 5 (15) A 60 Hz
1960년대 / 11 ㎝ × 11 ㎝ × 14 ㎝ / 스위스 (SWITZERLAND)
일정기간 동안 사용한 전력의 총량을 측정 · 기록하는 계기. 보통 적산전력량계라고 불리며, 전기를 사용하면 알루미늄 회전판이 사용하는 전력량에 비례하여 돌아가면서 숫자판에 사용한 전력량이 kWh (킬로와트시) 단위로 나타난다. 1 kWh = 1,000 Wh이다.
전력량계 電力量計 교류단상 2선식, 100 V 5 A 60 Hz
1940년대 / 12 ㎝ × 10.5 ㎝ × 14.5 ㎝ / 일본, 富士電氣製造 (주)
일정 기간 동안 사용한 전력의 총량을 측정 · 기록하는 계기. 이 전력량계는 기업이나 주택의 전기 소비량을 측정하는 장치로 사용되었다. 전기 에너지의 양은 전력이라 하고 전력을 소비한 양은 단위시간 당 소비한 전력으로 측정한다. 측정 단위는 통상 전기 요금을 청구할 때 사용하는 단위를 적용하는데 kWh (킬로와트시)의 단위로 표시된다.
전주표찰 電柱標札 (안동선 1419, 영주 82, 법송 35)
1934 ~ 1938년 / 7 × 21.5 × 0.1 ㎝ / 일본
배전용 전주에 붙여 해당 전주의 번호를 표기하기 위한 표지판. 맨위엔 전기회사를 나타내는 심벌 마크가 있고, 그 아래는 지역명과 전주 번호, 그리고 왼쪽에 제작시기를 나타내는 일본식 연호 (年號)가 있다. 소화 9년 ~ 13년은 서기 1934년 ~ 1938년에 해당한다.
표지판 標識板 (순천 송전선로 제1호)
1937년 1월 / 36 × 26 × 0.2 ㎝ / 보성흥업 (주)
해당 위치에 송전선로가 있음을 알리기 위해 세워둔 표지판. 전라남도 순천지역의 송전선로에 사용되었던 것이다.
조선총독부 관보 朝鮮總督府官報
1910 ~ 1945년 / 19.5 ㎝ × 28 ㎝ / 일제강점기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총독부가 매일 발행한 기관지. 일제강점기의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전반에 대한 모든 공적 기록을 포함하고 있으며 총 1만여 호, 13만여 쪽에 달한다. 일요일, 경축일, 연말 연시를 제외하고 1945년 8월 16일까지 매일 발행되었고, 호외도 발행되었다. 지면에 인쇄된 호수는 연호가 바뀔 때마다 제1호로 정정되었다. 제1호는 조선총독부가 설치된 1910년 8월 29일에 발행되었다.
기타공비 其他工費 대금지불승인서, 영수증
1935년 11월 21일 / 10 ㎝ × 12.5 ㎝ / 일본, 경성전기 (주)
1930년대 서울 종로구 가회동 11ㅡ61호와 63호의 전기 배전 증설공사에 쓰인 공사비 청구서. 대금지불 승인서와 이를 수금하고 발급한 영수증이다.
부전강 赴戰江 제1수력발전소 엽서
1929년 10월 / 9 ㎝ × 14 ㎝ / 일본, 조선질소비료 (주)
함경남도 신흥군에 있는 유역변경 계단식 수력발전소 조선질소비료 (주)가 비료생산에 필요한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부전강에 세운 한반도 최초의 유역 변경식 발전소이다. 해발고도 1,200 m에 길이 500 m, 높이 81.8 m의 부전호 (면적 약 24.3 ㎢, 저수량 6억 3,940만 ㎥)를 건설하여 담수하였는데, 이 물을 개마고원과 함흥평야를 경계한 백암산 밑으로 27.5 ㎞의 터널을 뚫고, 물길을 바꾸어 동해 성천강으로 낙하시켜 발전하였다.
파워 퓨즈
1930년대 / 65 × 5 × 4 ㎝ / 전기박물관
고압과 특고압 선로에 사용하는 퓨즈. 전력용 차단기의 하나로, 절연통에 퓨즈를 수납하여 그 주위에 특수 소호재 (消弧材)를 충진한 것이다.
유입 변압기 (주상 변압기)
1933년 / 48 × 35 × 56 ㎝ / 전기박물관
철심 (鐵心)과 권선 (卷線)을 탱크 내에 넣어 변압기 기름으로 깨끗하게 하여 냉각하는 변압기. 변전소에서 보내온 고전압을 공장용 또는 가정용의 저전압으로 바꾸어 송전하는 일을 한다. 전봇대 또는 그와 유사한 구조물에 설치할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애관 (碍管)
1930년대 / 56.5 × 10 × 10 ㎝ / 전기박물관
벽을 뚫고 그 사이로 전선이 지나가게 할 때에 절연 (絶緣)하기 위하여 끼우는, 사기 (砂器, 세라믹)로 만든 관이다. 1930년대 당시 절연체로 사기 제품이 많이 사용되었다.
밀볼 (석탄 분쇄용 철구슬)
일제강점기 / 지름 3.5 ~ 6 ㎝ / 영월화력발전소
영월화력발전소에서 무연탄을 발전용으로 가공하기 위해 석탄 분쇄용으로 기계장치에 넣는 철구슬. 잦은 사용으로 마모되어 크기가 모두 제각각이다.
다르마 스위치
일제강점기 / 24 × 14.5 × 10.5 ㎝ / 전기박물관
배선의 점검이나 수리 등을 위해 회로를 정전시킬 때 사용하는 스위치. 전압 3,500 V 30 A 용이다.
압록강수풍수력발전소
1920년대부터 1930년대에 걸친 두 번의 추가 조사 끝에 조선총독부는 한반도의 수력발전 가능성을 새롭게 발견했고, 앞선 수렷발전 사례에서 영감을 얻어 민간의 투자 동기를 활용한 새로운 전력체제 구축을 꾀했다. 그 결과 1929년부터 1945년까지 압록강, 부전강, 장진강 등에 수력발전소 21 기를 지어 약 160만 kW의 발전력을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그 중 1943년 가동한 압록강수풍발전소는 댐 높이 106 m, 길이 899.5 m, 용적 323만 ㎥의 중력식 콘크리트 댐으로, 60만 kW라는 엄청난 발전용량을 자랑했다. 건설 당시 아시아 최대 규모였으며, 미국 후버댐과 윌슨댐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거대한 댐이었다. 일본이 중국 침략의 발판으로 만든 괴뢰국가 만주국과 공동으로 건설했기 때문에 일제는 이를 선만일여 鮮滿一如의 상징으로 선전했다. 일제 패망과 광복 이후에는 북한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현재도 북한의 주요 전력공급원으로 가동 중이다.
총독부는 집중적인 수력발전소 개발을 바탕으로 한반도 북부를 일제의 중화학공업 · 군수산업 육성과 전시체제 개편의 전력 戰力으로 삼았다. 이렇듯 일제 말기 세운 발전소는 영월화력발전소를 제외하고 모두 수력발전소였고, 이는 수주화종 水主火從 발전시대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
35 ㎜ 필름영사기
영사기 (映寫機, Movie projector)는 영화 필름 따위를 확대하여 프로젝션 스크린에 비추는 기계를 말한다. 영상, 특히 영화를 재생하여 그 상을 확대시켜 스크린 등에 보여주는 장치인데, 대체로 영사기를 따로 둔 영사실 (映寫室, Projecting Room)에서 영화를 상영하였다.
최초의 영사기는 1879년 영국의 사진사 에드워드 마이브리지 (Eadweard Muybridge, 1830 ~ 1904)가 제작한 주프락 시스코프 (Zoopraxi scope)로 알려져 있다. 경마광으로 알려진 그는 말이 달리는 모습 (The Horse in Motion)을 사진으로 찍어 일련의 연결된 필름을 연속적으로 영사해 재현시킨 방법을 사용하였다. 즉, 회전하는 유리 디스크 위의 인화된 사진을 스크린 위에 빠른 속도로 연속해서 투영함으로써 움직이는 그림의 착시현상을 이끌어낸 것이다. 이것은 근대영화의 탄생에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
이곳에 전시된 35 ㎜ 대형 필름 영사기는 지금은 디지털 영상에 밀려 추억으로 남아 있지만, 1970년대 한국전력의 농어촌전화사업 (農漁村電化事業) 추진 때 전력산업 홍보 및 농어촌 계몽운동의 한 방편으로사용된 기기이다.
제품설명
◯ 제작사 : Hiroka Kogyo (sho) Co, Ltd. (하라오카 공업)
◯ 제작연도 : 1969년
◯ 모델명 : Fuji Central Fㅡ112
◯ 제춤 구성 : 전동기, 릴 (필름 공급), 광원 (카본 아크 방식), 광학계, 음향장치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