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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 43

[바퀴 (The Wheel)]

[바퀴 (The Wheel)] / 일러스트=김하경 바퀴 (Wheel) 겨울이면 우리는 봄을 찾고 봄이 오면 여름을 애타게 부르며 생울타리가 이곳저곳 둘러쳐질 때면 겨울이 최고라고 선언한다 ; 그다음에는 좋은 것이 없다 왜냐하면 봄이 오지 않았기에ㅡ 우리의 피를 휘저어 놓는 건 무덤에 대한 갈망뿐임을 알지 못한다. ㅡ 예이츠 (1865 ~ 1939) 인생의 바퀴, 자연의 순환을 암시하는 '바퀴'라는 제목이 절묘하다. 봄과 여름 그리고 겨울이라는 단어는 있지만 '가을'은 보이지 않는다.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항상 더 좋은 상태를 바라며 생을 보내다 갑자기 우리는 깨닫는다. 그때 우리가 가진 것이 최고였다는 사실을. 가을이 되어서야 부족해 보였던 봄과 여름이 나름 찬란했음을 아프게 깨달으리. '우리의 피를 ..

[봄에 꽃들은 세 번씩 핀다]

[봄에 꽃들은 세 번씩 핀다] 봄에 꽃들은 세 번씩 핀다 필 때 한 번 흩날릴 때 한 번 떨어져서 한 번 나뭇가지에서 한 번 허공에서 한 번 바닥에서 밑바닥에서도 한 번 더 봄 한 번에 나무들은 세 번씩 꽃 핀다 ㅡ 김경미 (1959 ~) 앙증맞고 순발력이 뛰어난 시. 꽃이 피어났다 흩날리다 떨어지는 찰나를 잡아서 언어의 꽃을 피웟다. 언어를 다루는 오랜 관록에서 우러난 군더더기없이 깔끔한 솜씨가 돋보인다. 피는가 싶었는데 벌써 지려고 시들시들···. 어떤 꽃을 보고 이런 예쁜 시를 썼을까? 목련은 아닌 것 같고 개나리도 진달래도 아니고, 벚꽃이 눈앞에 하늘거린다. 비처럼 허공에 휘날리는 벚꽃이 절정으로 치닫는 요즘 , 슬픔 없이 봄을 음미할 수 있으면 행복한 사람이다. '봄에 꽃들은 세 번씩 핀다'는 ..

[봄 (Spring)]

[봄 (Spring)] / 일러스트=양진경 봄 (Spring) 무슨 목적으로, 4월이여 너는 다시 돌아오는가? 아름다움만으로는 족하지 않다 (···) 크로커스의 뾰족한 끝을 지켜보는 나의 목덜미에 닿는 햇살이 뜨겁다. 흙 냄새가 좋다. 죽음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으랴? 사람의 뇌는 땅 속에서만 구더기에 먹히는 것이 아니다. 인생은 그 자체가 무 (無), 빈 술잔, 주단 깔지 않은 층계. 해마다, 이 언덕 아래로, 4월이 재잘거리며, 꽃 뿌리며 백치처럼 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ㅡ 빈센트 밀레이 (1892 ~ 1950) (최승자 옮김) 나는 햇살만으로 충분한데, 빈센트 밀레이는 욕심이 많네. 꽃 뿌리며 백치처럼 오는 4월. 우리 생애 이처럼 화창한 봄날이 다시 또 올..

[할아버지]

[할아버지]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담뱃대를 물고 들에 나가시니, 궂은 날도 곱게 개이고, 할아버지가 도롱이를 입고 들에 나가시니, 가문 말도 비가 오시네. ㅡ 정지용 (1902 ~ ?) 외래어는 하나도 쓰지 않고, 한자어도 없이 순수한 우리말로만 쓴 아름답고 재미난 동시. '도롱이' 대신 우산을 쓰며 우리가 잃어버린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생각한다. "하늘이 시커머니 어째 비가 올 것 같다"고 말하던, 귀신처럼 정확했던 그분들의 일기예보가 그립다. 일본 도시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정지용은 서구의 모더니즘을 받아들여 참신한 이미지와 정제된 언어가 돋보이는 시를 썼다. 일제강점기에 이토록 향토색이 진한 서정시를 쓴 시인이 가톨릭 신자였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정지용은 6 · 25 전쟁이 터진 뒤 피란하지 못..

[스팸메일]

[스팸메일] 스팸메일 소금에 절여진 혀가 죽음을 핥는다 (···) 통조림에 꾸역꾸역 채워 넣은 분홍빛 주검 (···) 오키나와에 집중된 통조림 스팸 소비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 진절머리 나는 전쟁의 맛 (···) 나도 보낼 테다 스팸메일을 누군지 모르는 사람에게 불쾌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에게 끝내 이름조차 알지 못할 사람에게 바로 스팸메일을 보내버릴 테다 인간의 어떤 본질이 선명하게 어린 메일을 대량으로 받아 보겠지 진절머리 나는 군용식품의 참을 수 없는 질문 같은 메일을 ㅡ 사가와 아키 (1954 ~) (한성례 옮김) 스팸 햄을 먹으며 통조림에 채워 넣은 분홍빛 주검을 떠올리고, 전쟁시의 비상 분쇄육 식품에서 '시대의 식도 (食道)'를 읽는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군이 전해준..

[지극한 즐거움을 읊어 성중에게 보이다]

[지극한 즐거움을 읊어 성중에게 보이다] 지극한 즐거움을 읊어 성중에게 보이다 뜰의 꽃 흐드러져도 보고 싶지 않고 음악 소리 쟁쟁 울려도 아무 관심 없네 좋은 술과 예쁜 자태에도 흥미 없으니 참으로 맛있는 것은 책 속에 있다네 ㅡ유희춘 (1513 ~ 1577) (강혜선 옮김) 차운하다 (次韻) 봄바람 아름다운 경치는 예부터 보던 것이요 달 아래 거문고 타는 것도 한 가지 한가로움이지요. 술 또한 근심을 잊게 하여 마음을 호탕하게 하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유독 책에만 빠져 있나요? ㅡ송덕봉 (1521 ~ 1578) (강혜선 옮김) (원시 번역시와 다르게 행을 배열함) '성중 (成仲)'은 이 시를 지은 선조 시대 문인인 유희춘의 부인 송덕봉의 다른 이름이다. 인생의 지극한 즐거움은 책에 있다고 자랑하는 남편의..

[구름과 목화]

[구름과 목화] / 일러스트=양진경 구름과 목화 몽실몽실 피어나는 구름을 보고 할머니는 "저것이 모두 다 목화였으면" 포실포실 일어나는 구름을 보고 아기는 "저것이 모두 다 솜사탕이었으면" 할머니와 아기가 양지에 앉아 구름 보고 서로 각각 생각합니다. ㅡ권태응 (1918 ~ 1951) 한 폭의 수채화처럼 담백하고 고운 동시. 할머니와 아기가 양지에 앉아 흰 구름을 바라보는 풍경을 상상만 해도 머리가 깨끗해진다. 3행이 1연을 이루며 각 연의 1행과 2행의 글자 수가 같고 서로 대구를 이루는, 단순하면서도 정교하게 짜인 구성. 구름을 바라보는 할머니와 아기를 보고 시인은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고, 그래서 이렇게 입체적이며 철학적인 시가 나왔다. 어느 날 어느 때 똑같은 사물을 보고 우리는 각자의 처지와 욕..

[해넘이의 마지막 인사]

[해넘이의 마지막 인사] 해넘이의 마지막 인사 거룩한 태양이 녹아들고 있었다. 하얀 바다 속으로 뜨겁게ㅡ 바닷가에 수도사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금발의 젊은이와 백발의 늙은이가. 늙은이는 생각하고 있었다. 언젠가 나도 쉬게 되리라. 이렇게 편안히ㅡ 젊은이도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죽을 때도 영광의 광채가 내리기를. ㅡ 릴케 (1875 ~ 1926) (송영택 옮김) 릴케가 이런 시도 썼구나. 연약하고 낭만적인 감수성의 시인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릴케의 시 세계는 바다처럼 넓고 깊다. 해가 넘어가는 황혼 무렵, 바닷가에 앉은 두 수도사를 (아마도 뒤에서) 바라보며 이런 거룩하고 심오한 생각을 하다니. 4행에 나오는 '금발의 젊은이'가 재미있다. 우리나라 시인이라면 '흑발의 젊은이'라고 했을 텐데, 유럽에서는..

[봄은 고양이로다]

[봄은 고양이로다] 봄은 고양이로다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香氣 (향기)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生氣 (생기)가 뛰놀아라. ㅡ 이장희 (1900 ~ 1929) 봄의 향기를 고양이를 통해 생생하게 보여준 시, 1920년대에도 이장희처럼 이미지로만 시를 쓴 시인이 있었다. 이 시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단어는 '호동그란'이다. 호기심 많고 동그란 고양이의 눈이 금방 떠오르지 않나. 100여 년 전 이토록감각적이고 현대적인 시를 쓴 시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이장희의 출생 연도 '1900년' 옆에 붙은 '고종 37'을 보니 그가 ..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 일러스트 = 양진경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 김영랑 (1903 ~ 1950) (현대 표준어에 맞춰 수정함) 봄이 저만치 와 있다. 우리말로 쓰인 봄 노래 중에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처럼 보드라운 시가 또 있을까. '북에는 소월, 남에는 영랑'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김영랑은 순수한 우리말을 살려 시를 짓는 데 뛰어난 시인이었다. '살포시' '보드레한'을 음미하노라면 마음이 밝아진다. 두 연의 1행과 2행이 '같이'로 끝나고 4행과 8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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