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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25전쟁 60년/임진강을 건너온 적

[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㊻ 고등학생 김윤환(전 신한국당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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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㊻ 고등학생 김윤환(전 신한국당 대표)

 

 

 

1950년 8월 1일, 한국에 도착한 월튼 워커 미 8군 사령관은 지연 작전을 펴고 있던 국군과 유엔군을 낙동강 선으로 철수시키기로 결심했다. 미군 정보당국이 7월 초순 이후 전혀 행방을 파악하지 못했던 북한군 6사단의 위치가 비로소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호남으로 우회했다. 모두 2개 사단이 호남을 거쳐 경상도 서부 지역으로 쳐들어 왔다. 북한군 6사단은 거창과 진주를 점령하더니 급기야 마산까지 공격해 왔다. 미 8군이 크게 당황한 이유다. 워커 장군은 경북 상주에 있던 미 25사단을 36시간에 걸친 긴급 철도 수송 작전으로 마산 전선에 투입했다.



적은 남한 청년을 총알받이로, 그래도 총구를 겨눌 수밖에 …

 

 

 

낙동강 전선의 상황이 급박해지면서 미군의 참전 규모도 날로 커졌다. 1950년 7월 말 부산에 도착한 미 해병대 병력을 환영하기 위해 국군 군악대가 연주를 하고 있다. [미 육군부 자료]

 

 

 

이 바람에 우리 1사단은 상주에서 낙동강을 건너 경북 선산군으로 들어갔다. 7000여 명의 병력으로 낙동강을 따라 41㎞나 되는 넓은 전선을 방어해야 했다. 낙동강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지역이었다. 강 동쪽으로 건너가 오상중학교에 사단 CP를 차렸다.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적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건너오지 못하게 막는 것이 우리 부대의 임무였다.



적은 8월 15일 광복절까지 이른바 ‘해방 전쟁’을 완수한다는 목표 아래 필사적인 공세를 펼쳤다. 야음을 틈타 모래주머니를 강바닥에 깔아 다리를 만들려는 움직임도 보였다. 그들이 앞세운 병력은 소위 ‘의용군(義勇軍)’이었다. 서울 등 남한 지역에서 강제로 징집한 사람들을 총알받이로 내세운 것이다. 그들에게 총구를 들이대고 집중 사격을 할 수밖에 없었으니 그 안타까움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세 배나 많은 병력과 10배의 화력을 앞세운 적의 공세는 강했다. 고전에 고전을 거듭하면서 겨우 낙동강을 지켜내고 있었다. 낮에는 그나마 미군의 공중 폭격 지원으로 버틸 만했다. 그러나 밤에는 뾰족한 대책이 따로 없었다.



전쟁 통에 늘 나를 괴롭혔던 말라리아가 발작했다. 낮에 찾아오는 오한으로 작전을 수행하기 힘들 정도였다. 몸져 드러눕고 말았다. 오상중학교 설립자인 김동석(4대 국회의원) 교장이 사택을 내줬다. 무더운 여름이라서 문을 열어 놓은 상태였다. 마당 한가운데에 있는 펌프 주위로 김 교장의 식구들이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보면서 잠이 들었다.

 

 

 

고 김윤환 의원(1932~2003)

 

 

 

“저…, 죽 좀 드십시오.” 문 밖에 키가 훤칠하고 이목구비가 준수한 고등학생이 서 있었다. 내가 “누구신가?”라고 물었다. “이 집 아들입니다. 어머니가 사단장님께서 편찮으셔서 죽을 가져다 드리라고 했습니다.” 이름을 물었더니 학생은 “김윤환입니다”라고 또렷이 대답했다. 나중에 대통령을 만들어내는 재주가 있다고 해서 ‘킹 메이커’로 이름을 떨쳤던 허주(虛舟) 김윤환이었다. 경북고등학교 2학년인가에 재학 중이라고 했다.



말라리아는 좀체 떠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그 방에 들어가 오들오들 떨었다. 오한이 나서 식욕이 통 없을 때마다 고등학생 김윤환군은 따뜻한 죽을 들고 찾아 왔다. 전선 지휘관을 격려해 주려는 김윤환군 집안 어른들의 배려가 고마웠다. 전쟁 통에 구하기 어려운 조기까지 챙겨줬다. 당시로서는 비싸고 귀한 장조림까지 만들어서 초라한 몰골의 국군 1사단장을 말 없이 격려하는 것이었다.



과묵하고 점잖은 인상을 줬던 이 학생이 어느 날 죽을 가져다 놓은 뒤 먼저 말을 건넸다. “저도 이제 군에 입대해서 싸우고 싶은데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아, 그래? 그럴 작정이면 아예 우리 1사단에 입대하는 게 어떨까.”



“받아주시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김군은 시원하게 대답했다. 나는 바로 사단 참모에게 연락을 해서 그를 입대시켰다. 국군 1사단의 포병대로 그를 보냈다. 그는 나중에 1사단이 낙동강 전선에서 반격에 나서 북진에 북진을 거듭할 때 함께 움직였다. 그도 1사단을 따라 역사적인 ‘평양 첫 입성’의 영광을 함께 누렸다.

 

 

 

 

 

 

35년이 흐른 85년 느닷없이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장군님, 저 기억하시겠습니까. 오상중학교 저희 집에서 뵀었던 김윤환입니다.” 반가운 목소리였다. 그는 당시 문화공보부 차관이었다.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그와 재회했다. 고등학생 때의 인상 그대로였지만 이미 나이가 제법 들어 있었다. 그 뒤에도 가끔 그와 마주칠 기회가 있었다. 그때마다 가족의 안부를 묻고는 했다. 그는 나중에 유명한 정치인이 됐다. 활발하게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정치인이었지만 내게는 늘 점잖고 예의 바른 ‘고등학생 김윤환’으로서의 인상이 더 강했다. 한참 일할 나이였던 2003년 그는 세상을 떴다. 조심스레 죽 쟁반을 든 채 문 앞에 조용히 서 있던 고등학생 김윤환. 그의 타계 소식을 듣고 먼저 떠오른 모습이었다.


백선엽 장군

[출처: 중앙일보] [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㊻ 고등학생 김윤환(전 신한국당 대표)

 

 

 

“열여섯 살에 내 키만 한 ‘아식보총’ 메고 고향 개성 되찾으려 중공군과 싸웠다”

 

 

 

본지에 연재 중인 백선엽 예비역 대장의 회고록 ‘내가 겪은 6·25와 대한민국’을 읽는 독자들의 반응이 줄을 잇고 있다. 전쟁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던 독자들이 자신의 체험을 수기 형식으로 보내오고 있다. 이에 중앙일보는 1월 18일자 지면에서 1950년 10월 24일 운산전투 중 첫 중공군 포로를 잡은 김대일씨의 증언을 소개했다. 그 후속으로 16세의 나이에 ‘개성유격대’에 자원해 중공군의 1951년 공세 중 적 후방 교란 작전에 참가했던 박광현(75)씨의 수기를 싣는다.



[6 · 25를 말한다] 박광현(朴光鉉)씨. 1951년 16세로 ‘개성 유격대’ 자원

 

 

 

16세의 나이에 유격대에 참가해 중공군의 후방을 교란했던 개성 출신의 박광현씨가 당시의 전투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변선구 기자]

 

 

 

나는 아식보총(A式步銃)을 들었다. 총신이 긴 러시아제 소총이다. 그때 내 나이 16세.



1950년 6월 25일 민족적 비극이 시작되면서 내 고향 개성(開城)은 곧바로 북한군의 군화에 짓밟혔다. 그해 말이 되자 이번에는 수많은 중공군이 들이닥쳤다. 51년 3월 초 서울이 중공군 치하에서 벗어났고, 중공군은 북으로 쫓겨갔다. 그러나 4월 22일 다시 중공군이 내려오면서 나는 개성을 떠나야 했다.



어머니가 우시면서 노자를 건넬 때 뭔가 불안했다. 그러나 나는 곧 귀향한다는 믿음으로 문을 나섰다. 먼저 인천으로 갔다가 다시 강화도로 떠났다. 그곳에는 개성을 하루빨리 수복하려는 고향 사람이 많이 모여들었기 때문이었다.



5월 1일 미 8군 직속 국군 5816부대에서 민간인으로 ‘편의대(便衣隊)’를 모집한다고 해서 자원했다. 그렇게 해서 내 손에 쥐여진 것이 아식보총이다. 그 총은 길어서 메고 다닐 때 가끔 땅에 끌렸다. 소총과 함께 방망이 수류탄, 그리고 미군이 준 MK2 세열수류탄을 받았다. 우리 부대원은 모두가 개성 또는 인접 개풍(開豊) 출신이었다. 하루 동안 무기 다루는 법과 유격전 교육을 받았다.

 

 

 

중공군 공세에 맞선 개성유격대가 1951년 5월 22일 후방 교란을 위해 개성에 진입한 경로.

 

 

 

입대 뒤 첫 출전(出戰)을 위해 우리는 강화도 동북쪽인 월곶에 모였다. 이어서 개풍군으로 침투한다는 지시를 받았다. 개성 쪽 흥교면의 조랑촌에 먼저 상륙했다. 그곳에 야영하면서 보초를 서다가 저 멀리 담뱃불이 다가오는 것을 봤다. 계속 그를 주시하던 나는 긴장감을 이기지 못해 그만 사격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반딧불이였다. 적지(敵地)에서 실수로 총성을 내 아군의 위치를 노출시킨 끔찍한 실수였다. 곧바로 중공군이 공격을 가해 왔다. 나는 이를 피해 바다에 떠 있는 배 위로 돌아가다가 마침 불어나고 있던 바닷물에 휩쓸려 떠내려 갔으나 요행으로 살아났다. 교전 중에 옆의 동료가 죽어 넘어지는 것도 목격했다. 숨진 그를 끝까지 끌고 내려와 큰 실수 뒤 처음 상사와 부대원들로부터 격려를 받기도 했다.



꽹과리를 치고 피리를 불며 다가오는 중공군의 대부대와 맞붙었을 때 마음껏 사격을 했다. 그러나 아식보총은 단발식이었다. 총신이 과열되면서 총탄이 잘나가지 않았다. 총신에서는 기름이 지글지글 끓고 있었다. 계속된 사격으로 총이 뜨거워진 것이다. 나는 누군가 알려준 대로 급히 총신에 소변을 보았다.



5월 22일 드디어 우리는 고향인 개성에 들어섰다. 오후 4시쯤이었다. 꿈에도 그리던 집이 저 멀리 보였다. 대문을 열고 문을 들어서니 어머니는 눈물부터 흘리셨다. 어깨가 구부정하셨던 아버지는 애써 놀라지 않은 척 하시면서 반갑게 격려해 주셨다.



한창 딸기 철이었다. 전쟁 중에 어디서 장만하셨는지 딸기를 가지고 오셨다. 귀하던 설탕까지 얹어서 주셨다. 유격대 활동 등을 말씀드렸더니 아버지는 흡족해하시고, 어머니는 옆에서 그저 눈물만 흘리셨다.



한 시간 정도 앉았다가 집을 떠났다. 그것이 부모님과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집 대문 안쪽에 서 계셨던 부모님. 내가 본 아버님과 어머님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중공군의 공세에 부닥치면서 우리는 5월 23일 고향 개성의 모습을 멀리 바라보면서 후퇴했다. 그리고 강화로 밀려 내려온 뒤 그리운 고향 땅을 다시는 밟을 수 없었다. 아버님은 53년 돌아가시고, 어머님은 89년에 세상을 떠나셨다. 캐나다에 살고 있는 친지를 통해 부모님의 소식을 들었다. 어머님은 나중에 고향을 떠나게 되셨단다. 개성은 대한민국과 인접해 있어 ‘성분’ 좋은 사람만 살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향을 떠나시면서 어머니는 “막내 광현이가 올 텐데, 집을 어떻게 비우느냐…”고 절규하셨다고 한다.



◆개성유격대=전사(戰史)에 기록된 공식 명칭은 ‘강화유격대’다. 6·25 전쟁이 터진 뒤 국군의 주력은 내륙 지역에서 적에 맞섰으나 민간인들로 급히 구성한 유격대는 동·서해안 주변 지역에서 활동했다. 군 편제에 정식으로 포함되지 않은 부대였으나 곳곳에서 활동하며 적의 후방을 교란했다.



강화유격대도 그중 하나로 전체 규모는 300명 정도였다. 중공군이 1951년 4월 이후 춘계 공세를 강화할 때 이 유격대는 강화도에서 개성과 개풍을 오가며 후방 부대를 공격함으로써 서울 인근 송추까지 접근한 중공군 전선부대의 힘을 약화하는 데 공헌했다.



박광현씨가 속했던 유격대는 당시 180명의 병력으로 개성과 개풍에 진입해 중공군과 전투를 벌이다가 38명만 살아 돌아오고 나머지는 전사 또는 행방불명이 됐다.



정식 군대가 아니라서 무기와 장비가 열악했다. 무기 부족에다가 충분한 훈련을 받지 못한 부대여서 희생이 유난히 컸다. 현재 강화도에 유격대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모신나강(일명 아식보총)=1881년 러시아 개발, 구경 7.62㎜, 길이 131.8㎝, 유효사거리 548.64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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