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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섭의 그레이트 게임과 한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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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중일전쟁 전후의 대한민국임시정부] [ 중일전쟁 전후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중일전쟁 중이던 1937년 상하이 전투에서 방독면을 쓴 일본군. 상하이 전투는 1937년 8월부터 3개월간 벌어졌다. 상하이를 점령한 일본군은 곧이어 중화민국 정부 수도 난징에서 대학살을 자행했다. 장제스 정부는 충칭으로 이동해 지구전을 벌였고, 중일전쟁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계속됐다. / 위키피디아 중일전쟁의 지옥불··· 장제스는 광복군을 中 참모총장에게 예속시켰다 만주사변 주도했던 日 군인조차 중일전쟁 반대했지만 자멸적 도발 장제스 정부는 충칭으로 옮기고 日을 내륙으로 끌어들이며 지구전 김구의 臨政도 충칭으로 옮겼고 장제스는 도와주는 조건으로 한국 광복군을 간섭 · 통제했다 독자적 기반 구축 나선 臨政은 이승만과 소통, 美의 지원 모색 日이 ..
[<16> 러시아 내전과 대한 독립 운동의 분열] [ 러시아 내전과 대한 독립 운동의 분열] 1920년 여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우리츠키 광장에서 열린 제2차 코민테른 대회 축하 행사. 낫과 망치로 대표되는 공산주의 붉은 깃발이 사방에 펄럭이는 가운데 태극기 (점선 안)가 보인다. 2차 코민테른 대회에는 공산주의자 박진순이 참석했다. 러시아 내전은 결국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대한민국 이념 분열의 씨앗이 됐다. 러시아 화가인 보리스 쿠스토디예프의 작품. / 국립러시아미술관 김구와 충돌 후 이동휘 러시아로··· 한국 이념 분열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임정 국무총리에 취임한 이동휘 "독립운동 대신 공산혁명하자" 며 김구를 회유했으나 거부당해 김구가 레닌의 독립지원금 횡령한 이동휘 휘하 김립을 '처형' 하자 李는 내전 중인 러시아로 떠나 자유시로 간 한인 독립..
[<17> 1931년 만주사변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 1931년 만주사변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만주국은 일제가 세운 괴뢰 국가였다. 하지만 본질을 숨기기 위해 ‘오족협화(五族協和·다섯 민족의 협력과 화해)’를 내세웠다. 왼쪽 깃발은 1911년 신해혁명군 깃발, 중앙의 오색기는 장쉐량 군대 깃발, 오른쪽은 장제스군의 청천백일기다. 아래에는 ‘공화만세’라고 적혀 있다. / 위키피디아 '동양의 화약고' 된 만주··· 臨政이 상해로 간 건 '신의 한 수' 였다 신해혁명 후 만주, 중국 파벌들과 소련 · 日 뒤엉키며 무주공산 상태 위안스카이를 계승한 장쭤린 장제스에 밀려 만주 가다 日에 피살 관동군은 그의 아들 군대 공격하며 15년 전쟁의 지옥문을 열기도 韓中 좌익협력 아닌 우익협력 활발 이봉창 · 윤봉길 의거에 쓰인 폭탄 장제스 북벌에 참가한 인물이 제공 러시..
[<15> 제1차 세계대전과 대한독립운동] [ 제1차 세계대전과 대한독립운동] 1914년 '칭다오 전투'를 묘사한 그림.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은 영국군, 프랑스군과 함께 칭다오를 차지하고 있던 독일군, 오스트리아ㅡ헝가리군을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쌍방 약 1000명이 전사했다. 전투 결과 일본군, 영국군, 프랑스 해군이 승전의 축배를 들었다. 중화민국은 칭다오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다. / 게티이미지코리아 제국들의 해체··· 최초의 '세계전쟁'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태어났다 中 칭다오, 獨 먼저 차지했지만 日 대규모 침공 승리의 축배 1차 대전 끝난 뒤 독일 제국 해체 민족자결주의 물결··· 臨政도 탄생 하지만 열강들은 日 전승국 인정 파리평화회의서 韓 찬밥신세로 임정 탄생 이듬해 신년축하회 안창호 "이천만 다 군인되어야···" 그해 10..
[ <14> 신해혁명과 대한독립운동] [ 신해혁명과 대한독립운동] 1912년 2월 15일 명나라 태조 홍무제의 묘를 참배하는 중화민국 초대 임시대총통 쑨원 (가운데). 한족과 비한족을 아우르는 오족공화론을 주장하며 다른 민족들이 독립국가를 세워 분리하는 것을 막고자 했다. 그와 후계자 장제스 역시 고려와 대만을 회복해 중화를 공고히 하려는 등 한족 중심적 혁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 위키피디아 독립운동에 희망 준 신해혁명··· 하지만 중화민국은 우리 臨政 승인 안했다 안창호가 주도한 美 한인기관지 1000년에 한 번 얻기 어려운 독립 기회라며 신해혁명 지원 호소 신규식은 재산 정리, 압록강 건너 하지만 신해혁명은 한족 중심 혁명 지도부 쑨원 · 장제스 등은 우리까지 '중화' 로 포섭하려 해 1895년 청일전쟁에서의 참패로 청 황실의 권위는..
[<13> 러일전쟁과 대한제국] [ 러일전쟁과 대한제국] 러시아의 동맹국이었던 프랑스에서 1904년 4월 3일 발행된 신문 '르프티파리지앵 (Le Petit Parisien)' 특집판의 그림. 러일전쟁을 풍자한 이 그림은 '백 (白)과 황 (黃)'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링 안의 큰 남자는 러시아, 작은 남자는 일본을 상징한다. 링 바닥에는 동아시아 지도가 그려져 있다. 링 밖에서는 미국 등 열강들이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 담장 밖에는 객석으로 들어오지 못한 청나라가 있다. 당시 독일 등 유럽 국가들은 러시아가 유럽보다 아시아로 팽창해 나가는 걸 바랐다. / 게티이미지코리아 대한해협서 발트함대를 궤멸시킨 日··· 한반도서 러시아 氣를 꺾었다 1892년 佛과 동맹, 獨 견제한 뒤 러시아, 한반도 · 만주로 팽창 박차 일본선 시베리아 철도 ..
[<12> 청일전쟁과 대한제국] [ 청일전쟁과 대한제국] 일본 화가가 그린 풍도해전도. 일본군에 의해 포격을 당하고 있는 청나라 함선을 그렸다. 풍도해전은 1894년 7월 25일 현재 경기 안산시 풍도 앞바다에서 일본군 함대가 청나라 함대를 공격한 것이다. / 영국박물관 청일전쟁 이후 대한제국 독립··· 하지만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과거 청나라에 의탁했던 고종 청일전쟁 이후엔 러시아에 의존 아관파천 후 돌아와 재한제국 선포 독립은 가야할 길, 영광이었지만 스스로 힘 아닌 일본의 승전과 국제 간섭 결과였다는 점에서 수치 '조선 = 小중화' 꿈 이루는 듯했으나 권력 독점한 황제, 끝내 독립 못지켜 1894년 조선에서 시작된 청일전쟁은 유교 성리학적 관념에 기초한 천하 질서에 조포 (弔砲)를 쏘았다. 그 충격은 인도인들까지 동원한 영국군이 청..
[<11> 독일 제2제국과 조선, 대한제국] [ 독일 제2제국과 조선, 대한제국] 1871년 1월 18일 프랑스 베르사유궁전에서 프랑스ㅡ프로이센 전쟁 승리 후 독일 제2제국을 선포하는 빌헬름 1세와 비스마르크 총리대신. 안톤 폰 베르너 1885년 작. 묄렌도르프가 고종에게 조선과 러시아가 밀착하는 정책을 건의한 것은 비스마르크가 추진하고 있던 독 · 러 동맹정책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 위키피디아 獨 묄렌도르프 , '조선' 에서 중용되고 '대한' 에서 버림받다 淸 이홍장이 추천··· 영향력 막강 러시아 끌어들여 조선 중립화 모색 당시 독일 비스마르크가 추진하던 독 · 러 동맹 정책과 맥을 같이해 빌헬름 2세 후 독 · 러 관계 악화되고 러 · 佛 동맹 맺는 국제 정세 속에서 묄렌도르프는 기피 인물로 찍혀 1897년 대한제국 선포한 고종도 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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