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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좋은 글 .../최영미의 어떤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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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랭사인 (Auld Lang Syne)] [올드랭사인 (Auld Lang Syne)] 일러스트 = 이철원 올드랭사인 (Auld Lang Syne) 오래된 친구들을 잊어야 하나, 다시는 마음에 떠올리지 말아야 하나? 그토록 오래된 친구들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흘러간 옛날을 위하여, 그대여 (···) 우리 다정한 축배를 들자, 흘러간 옛날을 위하여. 그래 너는 너의 술을 사고 나는 내 술을 살 거야! 우리 다정한 축배를 들자, 흘러간 옛날을 위하여. 우리 둘은 언덕을 뛰어다니며, 아름다운 데이지 꽃을 꺾었지 : 우리는 발이 닳도록 돌아다녔지 (···) ㅡ 로버트 번스 (1759 ~ 1796) 로버트 번스가 스코틀랜드의 민요를 채록해 곡을 붙인 ‘올드랭사인’ 은 오늘날 세계인이 애창하는 노래가 되었다. 1896년 배재학당 학생들이 올드랭사인 선..
[감사] [감사] 일러스트 = 양진경 감사 저 푸른 하늘과 태양을 볼 수 있고 대기를 마시며 내가 자유롭게 산보를 할 수 있는 한 나는 충분히 행복하다 이것만으로 나는 신에게 감사할 수 있다 ㅡ 노천명 (1912 ~ 1957) 그렇지 그렇고 말고. 내 발로 걸을 수 있고, 저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가. 내 경험에 비추어보면, 나이가 들수록 포기가 빨라지고 욕망도 흐지부지, 내가 뭘 원했는지도 잊고 살며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알게 된다. 불행하지 않으면 행복한 것이다. 젊어서는 노천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최근에 그의 시선집을 읽고 그 투명한 언어에 실린 쓸쓸한 마음의 풍경에 측은지심을 느끼며 그에게 빠져들었다. 근대 최초의 여성 문인인 김명순도 그렇고 노천명도 그렇고, 앞서간 여성들..
[인연] [인연] 일러스트 = 이철원 인연 맨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모르는 사이였지 그 순간을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려 하마터면 그냥 지나칠 뻔한 그 순간 나는 키가 작아 앞줄에 앉고 너는 키다리. 맨 뒷줄이 네 자리 아, 우리가 어떻게 단짝이 됐을까! 키다리 친구들과 둘러서서 바람이 가만가만 만지는 포플러나무 가지처럼 두리번거리다 나를 보고 너는 싱긋 웃으며 손짓한다 너를 보면 내 코는 절로 벌름벌름 내 입은 벙글벙글. ㅡ 황인숙 (1958 ~) 마지막 두 행이 멋지다. “내 코는 절로 벌름벌름 / 내 입은 벙글벙글” 이라는 표현이 재미있어, 빙그레 웃음이 나온다. 진짜 친구를 보면 말보다 먼저 몸이 반응한다. 친한 사람들은 멀리서도 서로 알아볼 수 있다. 중학교 동창, 오랜 벗들을 만날 때 나는 제일 편하다..
[살얼음이 반짝인다 ㅡ 첫 추위] [살얼음이 반짝인다 ㅡ 첫 추위] 살얼음이 반짝인다 ㅡ 첫 추위 가장 낮은 자리에선 살얼음이 반짝인다 빈 논바닥에 마른 냇가에 개밥 그릇 아래 개 발자국 아래 왕관보다도 시보다도 살얼음이 반짝인다 ㅡ 장석남 (1935 ~) 첫추위는 벌써 왔는데 살얼음을 보지는 못했다. ‘논바닥’ ‘냇가’ 라는 단어가 정겹다. ‘논바닥’ 은커녕 ‘논’ 도 본 지 오래되었다. 기차를 타고 푸른 물결처럼 출렁이는 논을 휙휙 지나치기는 했다. 아파트에 살면서 논도 밭도 냇가도 구경 못 하니 계절 변화는 달력을 넘기거나 ‘오늘의 날씨’ 를 검색해야 실감 난다. 5행의 “개밥 그릇” 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개를 무서워하는 나는 개밥 그릇만 봐도 무서워 멀리 도망갔다. 개를 키우는 친구 집에 갈 때는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개 붙잡..
[눈보라] [눈보라] 일러스트 = 박상훈 눈보라 들판에서 눈보라를 만나 눈보라를 보내네 시외버스 가듯 가는 눈보라 한편의 이야기 같은 눈보라 이 넓이여, 펼친 넓이여 누군가의 가슴속 같은 넓이여 헝클어진 사람이 가네 그보다 더 고독한 사람이 가네 그보다 더 기다리는 사람이 가네 눈사람이 가네 눈보라 뒤에 눈보라가 가네 ㅡ 문태준 (1970 ~) ‘눈보라’ 로 이런 시도 쓸 수 있구나. 강한 바람에 눈이 날려 시야가 흐려지고 심할 때는 몇 미터 앞도 보이지 않는다. 따뜻한 실내에 앉아, 카페의 유리창 밖에 흩날리는 눈을 바라보는 것은 기분 좋은 낭만이지만, 세찬 눈보라 치는 바깥을 걸어가는 일은 피하고 싶다. 어릴 적에는 눈보라가 두렵다기보다 신기했지만, 지금은 눈보라에 내 몸이 젖는 게 싫어 우산을 펼쳐든다. 그 ..
[거울 속을 들여다보네] [거울 속을 들여다보네] 일러스트 = 김성규 거울 속을 들여다보네 거울 속을 들여다보네. 황폐해지는 내 피부를 보네. 그리고 이렇게 말하네. "하나님께서 차라리 내 심장을 저렇게 수척하게, 사그라지게 하셨더러면!" 그러면 차라리 점점 싸늘해지는 심장이 나를 괴롭힐 리 없으니, 나는 평온하게 영원한 안식을 외로이 기다릴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세월' 은 나를 슬프게 하려고, 어떤 부분은 빼앗아 가고, 어떤 부분은 남겨 두네. 그리고 한낮의 두근거림으로 이 저녁의 허약한 뼈대를 흔드네. ㅡ 토머스 하디 (Thomas Hardy) (윤명옥 옮김) 소설 ‘테스’로 유명한 토머스 하디는 시도 곧잘 썼다. 특히 연애시를 잘 썼다. ‘거울 속을 들여다보네’ 는 하디가 나이가 들어 어떤 여인에게서 느낀 연애 감정을 에..
[감] [감] 일러스트 = 박상훈 감 이 맑은 가을 햇살 속에선 누구도 어쩔 수 없다 그냥 나이 먹고 철이 들 수밖에는 젊은 날 떫고 비리던 피도 저 붉은 단감으로 익을 수밖에는 ㅡ 허영자 (許英子 · 1938 ~) 가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학창 시절에 이웃집 담벼락 위로 뻗은 감나무에 매달린 감을 보며 가을을 느끼곤 했는데, 요즘 도시인들은 감나무를 보기 힘들다. 어디 하나 뺄 곳 없이 순도 높은 시어들로 완성된 시. “떫고 비리던” 이라니. 얼마나 생생한 표현인가. 덜 익은 감의 떫은맛에 “비리던” 이 들어가 청춘의 아픔과 서투른 우여곡절이 연상되었다. 더 이상 떫고 비리지도 않은 ‘내 피’ 가 갑자기 약동하면서 빈속에 소주 한 병을 들이부은 듯 가슴이 쓰렸다. 허영자 선생님은 현존하는 한국 시인 중에서 ..
[성성만 (聲聲慢),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성성만 (聲聲慢),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일러스트 = 양진경 성성만 (聲聲慢),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쓸쓸하고 쓸쓸할 뿐이라 처량하고 암담하고 걱정스럽구나. 잠깐 따뜻하다 금방 추워지곤 하는 계절 편안한 마음으로 쉴 수가 없네 (···) 온 땅에 노란 국화 쌓였는데 지독하게 말랐으니 이젠 누가 따 준단 말인가 창가를 지키고 서서 어두워지는 하늘 어떻게 홀로 마주할까 게다가 오동잎에 내리는 가랑비 황혼이 되어도 방울방울 그치지 않네. 이 광경을 어찌 시름 수 (愁) 한 자로 마무리하랴 ㅡ 이청조 (李淸照 · 1084 ~ 1155) (류인 옮김) 중국 최고의 여성 시인이라는 이청조가 쓴 송사 (宋词 : 송나라의 문학 양식). 제목 앞에 붙은 ‘성성만 (聲聲慢)’ 은 곡조 이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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