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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25전쟁 60년/임진강을 건너온 적

[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㊺ 별을 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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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㊺ 별을 달다

 

 

 

국군 1사단은 국군 17연대, 미군 24연대와 연합작전(聯合作戰: 두 나라 이상의 군대가 같은 편이 되어 함께 벌이는 작전)을 경북 상주에서 펼쳤다. 갈령을 넘어오는 적 15사단 주력(主力)을 공격해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7월 23일부터 이틀에 걸쳐서였다. 우연히 맞은 기회였지만, 나는 이곳에서 한국군과 미군이 함께 적을 맞아 싸우는 연합작전을 처음으로 수행했다. 국군이 미군의 도움을 받으면 북한군을 제대로 물리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던 기회이기도 했다. 7월 25일 김홍일 1군단장으로부터 새 명령이 내려왔다. 지금의 전선(戰線)을 미 24연대에 맡기고 상주의 상주읍에 다시 모여 조직을 재편한 뒤 상주 함창읍으로 진출하라는 내용이었다. 25일 미 24연대를 기다리는데 제때 나타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예정보다 출발이 하루 늦었다. 김 군단장으로부터 호통이 떨어졌다. “왜 이리 늦느냐”는 것이었다. 행군 속도를 빨리 하는 수밖에 없었다.


임진강, 한강 이어 세 번째 강 … 낙동강에선 더 밀릴 수 없다

 

 

26일 낮 상주읍에 도착했다. 박기병 대령이 이끄는 20연대와 청년방위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을 사단에 흡수하니 병력은 7000명 이상으로 갑자기 불어났다. 개인화기가 없었던 병사들에게도 M1과 카빈 소총이 지급됐다. 아직은 개전 초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보병사단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 셈이다.



지난 한 달 동안 300㎞의 길을 행군하며 유랑하다시피 떠돌았던 우리 사단이 이제는 제자리를 찾고 있었다. 좋은 일도 생겼다. 27일 상주 우체국에 마련된 사단지휘소에 예고도 없이 신성모 국방장관과 정일권 참모총장이 찾아왔다. 나는 우선 보고부터 했다. “이제 전력을 어느 정도 갖춰 싸움에 본격적으로 나설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러나 신성모 장관은 먼저 악수를 청하더니 “그동안 전쟁을 잘 치렀다. 앞으로 더 잘해야 한다. 지금부터 장군 진급식을 한다”고 사무실에 있던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그는 참모들을 기립시킨 뒤 내 오른쪽으로 가더니 어깨에 별을 달아줬다. 왼쪽으로는 정일권 총장이 다가서더니 역시 내 어깨에 별을 올려줬다. 대령으로서 사단을 지휘하다 이제 별을 달고 부대 지휘에 나서게 된 것이다.

 

 

 

1950년 7월 말 미군은 낙동강 교두보를 지키기 위해 미 8군 월튼 워커 중장의 지휘 아래 전선에 대거 투입되기 시작했다. 부산에 상륙해 기차 편으로 전선으로 향하던 미군 장병이 열차가 잠시 멈춘 동안 휴식을 취하고 있다. [미 육군부 자료]

 

 

좋은 일은 더 있었다. 국군 포병 1개 대대(17대대 대대장 박영식 소령)도 넘겨받았다. 우리가 쫓겨 내려오는 동안 후방에서 훈련을 시켜 육성한 포병부대를 1사단에 보내준 것이다. 포병대는 105㎜ 신형 대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더 반가운 것은 개전 초기 임진강 북쪽의 개성을 지켰던 12연대 병력 800여 명이 길고 긴 고생 끝에 제 사단을 찾아온 일이다.



이들은 개성에서 적에게 밀린 뒤 서해 연안을 따라 어선 등을 이용해 남하한 뒤 군산을 거쳐 1사단이 있다는 상주를 찾아온 것이다. 조치원 기차역에서 열차를 타고 남하한 부하들을 만났을 때 느꼈던 감격이 다시 살아났다. 나는 지금도 개전 초기 임진강에서 후퇴한 뒤 상주에 오기까지 이 한 달이 넘는 동안의 경험을 가장 고통스럽게 기억한다. 필설(筆說)로 그 고통을 다 적을 수 없을 정도다. 비록 상주에서 내가 장군으로 진급했지만 나는 그 한 달 동안 국지적인 지연전을 펼친 전과밖에는 없었다. 그 나머지는 생존의 투쟁이었다. 개인화기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병사들과 대포도 없는 상황에서 적과 마주치면 최대한 궁리를 거듭해 소규모의 공격으로 타격한 뒤 빠져나오는 전법만 구사했다. 나머지는 활로를 찾아 계속 남하하면서 그나마 나를 찾아온 부대원들을 관리하는 게 가장 큰일이었다.



병사들은 굶주림과 피곤함에 지쳐 있었다. 때가 되면 산속이나 길가에서 아무렇게나 쓰러져 잠을 청했다. 한여름의 잦은 빗발은 오히려 달가웠다. 모기를 비롯한 곤충에 쏘이는 일도 그저 견디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좌절감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왔다. 이 길고 긴 행군을 마치고 우리는 적과 다시 마주쳐 싸워 이길 수 있을 것인가. 끝없는 불안감에 시달리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무기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군대에 그 불안감은 좌절감으로 발전하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이제 한 달 동안의 유랑을 마쳤다. 국군과 급히 한국에 온 미군의 분전으로 후방은 무기와 병력을 순조롭게 조달하는 여유를 갖췄다. 1사단도 흩어졌다 찾아온 투혼의 부대원, 후방의 지원으로 면모를 일신했다. 이제 길고 긴 행군에서 마주쳤던 고난과 극복의 과정은 적을 향한 투지로 불붙을 차례였다.



우리는 낙동강을 넘고 있었다. 임진강을 내주고 넘어야 했던 한강, 그에 이어 세 번째의 강을 넘었다. 한반도를 흐르는 큰 강을 세 번째 넘었지만 이 강의 이남으로 적의 진입을 허용한다면 대한민국의 숨은 멎을 것이다. 낙동강에서 우리는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강에는 역사의 선율(旋律)이 흐른다. 내가 50년 8월 1일 넘었던 낙동강에는 아주 비장한 선율이 흐르고 있었다.


백선엽 장군



[출처: 중앙일보] [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㊺ 별을 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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