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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좋은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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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사랑]    일러스트 = 이철원    사랑 더러운 내 발을 당신은꽃잎 받듯 받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흙자국을 남기지만당신 가슴에는 꽃이 피어납니다. 나는 당신을 눈물과 번뇌로 지나가고당신은 나를 사랑으로 건넙니다 당신을 만난 후 나는 어려지는데나를 만난 당신은 자꾸 늙어만 갑니다 ㅡ 이성선 (1941 ~ 2001)    책상에 올려놓고 수시로 들춰 읽는 시집들이 있다. 개중에는 이성선 시인의 시집도 있다. 어젯밤에는 ‘별똥’ 이라는 제목의 시를 읽었다. “별과 별 사이 / 하늘과 땅 사이 / 노오란 장다리꽃 밭 위로 / 밤에 큰 별똥 지나간다. / 소풍 가는 시골 초등학교 아이처럼” 이라고 짧게 쓴 시를 읽고 난 후 밤의 마당을 서성거렸다. 이성선 시인은 산 (山)을 소재로 해서 많은 시를 남겼고 정신..
[눈과 강아지] [눈과 강아지] 일러스트=양진경 눈과 강아지 지그재그로 발자국을 찍으며 강아지 한 마리 눈 위로 겅중겅중 달린다 컹컹컹컹 달린다 한 골목을 지나 또 다른 골목으로 아무것도 씌어지지 않는 골목으로 아무것도 씌어지지 않는 골목으로 강아지는, 강아지는 달리고 또 달린다 이제 강아지의 앞발도 보이지 않는다 ㅡ 최하림 (1939 ~ 2010) 최하림 시인은 ‘이슬방울’ 이라는 제목의 시에서 “이슬 / 방울 / 속의 / 말간 / 세계 / 우산을 / 쓰고 / 들어가 / 봤으면”이라고 짧게 썼는데, 이 시에는 그야말로 ‘말간 세계’ 가 있다. 설레어서 가슴이 콩닥콩닥하는 동심도 들어 있다. 강아지도 흥분되어 심장이 두근두근한다. 강아지가 눈 위에 찍은 발자국을 보아도 그렇다. 펄펄 날리는 눈송이처럼 좌우로 뛴다. ‘겅..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일러스트 = 박상훈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 되므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녘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 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 아닌 시인이라고. ㅡ 김종삼 (1921 ~ 1984) 김종삼 시인이 이 시를 발표한 때는 등단한 지 서른 해 가까이 되었을 때였다. 거의 서른 해 동안 시를 썼지만 시인은 정작 시를 모르고, 시인이 되지 못한다고 말한다. 겸손의 말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지만 시행을 따라가며 읽..
[올드랭사인 (Auld Lang Syne)] [올드랭사인 (Auld Lang Syne)] 일러스트 = 이철원 올드랭사인 (Auld Lang Syne) 오래된 친구들을 잊어야 하나, 다시는 마음에 떠올리지 말아야 하나? 그토록 오래된 친구들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흘러간 옛날을 위하여, 그대여 (···) 우리 다정한 축배를 들자, 흘러간 옛날을 위하여. 그래 너는 너의 술을 사고 나는 내 술을 살 거야! 우리 다정한 축배를 들자, 흘러간 옛날을 위하여. 우리 둘은 언덕을 뛰어다니며, 아름다운 데이지 꽃을 꺾었지 : 우리는 발이 닳도록 돌아다녔지 (···) ㅡ 로버트 번스 (1759 ~ 1796) 로버트 번스가 스코틀랜드의 민요를 채록해 곡을 붙인 ‘올드랭사인’ 은 오늘날 세계인이 애창하는 노래가 되었다. 1896년 배재학당 학생들이 올드랭사인 선..
[감사] [감사] 일러스트 = 양진경 감사 저 푸른 하늘과 태양을 볼 수 있고 대기를 마시며 내가 자유롭게 산보를 할 수 있는 한 나는 충분히 행복하다 이것만으로 나는 신에게 감사할 수 있다 ㅡ 노천명 (1912 ~ 1957) 그렇지 그렇고 말고. 내 발로 걸을 수 있고, 저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가. 내 경험에 비추어보면, 나이가 들수록 포기가 빨라지고 욕망도 흐지부지, 내가 뭘 원했는지도 잊고 살며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알게 된다. 불행하지 않으면 행복한 것이다. 젊어서는 노천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최근에 그의 시선집을 읽고 그 투명한 언어에 실린 쓸쓸한 마음의 풍경에 측은지심을 느끼며 그에게 빠져들었다. 근대 최초의 여성 문인인 김명순도 그렇고 노천명도 그렇고, 앞서간 여성들..
[인연] [인연] 일러스트 = 이철원 인연 맨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모르는 사이였지 그 순간을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려 하마터면 그냥 지나칠 뻔한 그 순간 나는 키가 작아 앞줄에 앉고 너는 키다리. 맨 뒷줄이 네 자리 아, 우리가 어떻게 단짝이 됐을까! 키다리 친구들과 둘러서서 바람이 가만가만 만지는 포플러나무 가지처럼 두리번거리다 나를 보고 너는 싱긋 웃으며 손짓한다 너를 보면 내 코는 절로 벌름벌름 내 입은 벙글벙글. ㅡ 황인숙 (1958 ~) 마지막 두 행이 멋지다. “내 코는 절로 벌름벌름 / 내 입은 벙글벙글” 이라는 표현이 재미있어, 빙그레 웃음이 나온다. 진짜 친구를 보면 말보다 먼저 몸이 반응한다. 친한 사람들은 멀리서도 서로 알아볼 수 있다. 중학교 동창, 오랜 벗들을 만날 때 나는 제일 편하다..
[살얼음이 반짝인다 ㅡ 첫 추위] [살얼음이 반짝인다 ㅡ 첫 추위] 살얼음이 반짝인다 ㅡ 첫 추위 가장 낮은 자리에선 살얼음이 반짝인다 빈 논바닥에 마른 냇가에 개밥 그릇 아래 개 발자국 아래 왕관보다도 시보다도 살얼음이 반짝인다 ㅡ 장석남 (1935 ~) 첫추위는 벌써 왔는데 살얼음을 보지는 못했다. ‘논바닥’ ‘냇가’ 라는 단어가 정겹다. ‘논바닥’ 은커녕 ‘논’ 도 본 지 오래되었다. 기차를 타고 푸른 물결처럼 출렁이는 논을 휙휙 지나치기는 했다. 아파트에 살면서 논도 밭도 냇가도 구경 못 하니 계절 변화는 달력을 넘기거나 ‘오늘의 날씨’ 를 검색해야 실감 난다. 5행의 “개밥 그릇” 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개를 무서워하는 나는 개밥 그릇만 봐도 무서워 멀리 도망갔다. 개를 키우는 친구 집에 갈 때는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개 붙잡..
[눈보라] [눈보라] 일러스트 = 박상훈 눈보라 들판에서 눈보라를 만나 눈보라를 보내네 시외버스 가듯 가는 눈보라 한편의 이야기 같은 눈보라 이 넓이여, 펼친 넓이여 누군가의 가슴속 같은 넓이여 헝클어진 사람이 가네 그보다 더 고독한 사람이 가네 그보다 더 기다리는 사람이 가네 눈사람이 가네 눈보라 뒤에 눈보라가 가네 ㅡ 문태준 (1970 ~) ‘눈보라’ 로 이런 시도 쓸 수 있구나. 강한 바람에 눈이 날려 시야가 흐려지고 심할 때는 몇 미터 앞도 보이지 않는다. 따뜻한 실내에 앉아, 카페의 유리창 밖에 흩날리는 눈을 바라보는 것은 기분 좋은 낭만이지만, 세찬 눈보라 치는 바깥을 걸어가는 일은 피하고 싶다. 어릴 적에는 눈보라가 두렵다기보다 신기했지만, 지금은 눈보라에 내 몸이 젖는 게 싫어 우산을 펼쳐든다. 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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