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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좋은 글 ... 98

[먹기러기]

[먹기러기]   일러스트 = 이철원    먹기러기 달에 눈썹을 달아서 속눈썹을 달아서 가는 기러기떼 먹기러기떼 수묵으로 천리를 깜박인다 오르락내리락 찬 달빛 흘려보내고 흘려보내도 차는 달빛 수묵으로 속눈썹이 젖어서 ㅡ 손택수 (1970 ~)    손택수 시인의 시에는 잔잔한 감응이 있다. ‘연못을 웃긴 일’ 이라는 제목의 시에는 “못물에 꽃을 뿌려 / 보조개를 파다 // 연못이 웃고 / 내가 웃다 // 연못가 바위들도 실실 / 물주름에 웃다” 라고 쓴 시구가 있는데, 이런 대목을 읽노라면 마음이 가만가만히 따라 움직이게 된다. 잔물결이 일어서 퍼져가듯이. 눈썹 모양의 달이 뜬 밤에 시인은 기러기 떼가 날아가는 것을 보았던 모양이다. 눈썹달은 초승달이나 그믐달을 뜻하니 그런 날의 밤하늘은 어둑어둑하고, ..

[종암동]

[종암동]    일러스트 = 양진경    종암동 좀처럼 외출을 하지 않는 아버지가어느 날 내 집 앞에 와 계셨다 현관에 들어선 아버지는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눈물부터 흘렸다 왜 우시냐고 물으니사십 년 전 종암동 개천가에 홀로 살던할아버지 냄새가 풍겨와 반가워서 그런다고 했다 아버지가 아버지, 하고 울었다 ㅡ 박준 (1983 ~)    냄새는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안방이나 이불, 옷장의 옷으로부터 맡게 되는 냄새에는 기억이 배어 있다. 특히 옷은 기억의 실오라기나 기억의 털로 짠 것만 같아서 옷에는 살냄새가 난다. 통 기억이 나지 않다가도 어떤 공간에 들어서거나 사물을 보는 순간 시간의 저 깊은 곳에 먼지를 소복하게 뒤집어쓴 채 있던 기억은 일순에 되살아난다. 마치 소매를 왈칵 잡아당기듯이. 박준 시인은..

[사족]

[사족]     일러스트 = 이진영    사족 입술을 댈 듯 말 듯 서운히 보낸 어깨돌아서고 나서야 없는 너를 만질 때귓전에 연해 밟히는 중저음의 느린 여음끝동을 길게 두다 서운해진 노을처럼말 없는 말 그리며 사족사족 매만지네자판에 자그락대는 자모음을 깨물어보듯 ㅡ 정수자 (1957 ~)    누군가와 헤어진 연후에 쓴 시 같다. 이별한 이가 사모하는 사람이 아닐 수도 있지만, 다정다감한 사람인 듯은 하다. 정이 많은 이였지만 정작 듣고 싶었던 말을 듣지 못하고 떠난 사람이 아닐까 한다. 그 사람을 보내고 나서 시인에게 밀려오는 감정의 파도가 생각했던 것보다 만만찮다. 마음에 모자라게, 아쉬워하게, 섭섭한 느낌이 있게 떠나보낸 게 아닌가 염려하고, 귓전에는 그 사람의 목소리가 사라지지 않고 메아리처럼 ..

[누에]

[누에]    일러스트 = 김성규    누에 세 자매가 손을 잡고 걸어온다 이제 보니 자매가 아니다곱추인 어미를 가운데 두고두 딸은 키가 훌쩍 크다어미는 얼마나 작은지 누에 같다제 몸의 이천 배나 되는 실을 뽑아낸다는 누에,저 등에 짊어진 혹에서비단실 두 가닥 풀려나온 걸까비단실 두 가닥이이제 빈 누에고치를 감싸고 있다 그 비단실에 내 몸도 휘감겨 따라가면서나는 만삭의 배를 가만히 쓸어안는다 ㅡ 나희덕 (1966 ~)    저쪽에서 이쪽으로 세 여성이 나란히 다정하게 걸어온다. 언니와 여동생 사이인 듯 보였으나 가까이 다가왔을 때에 보니 어머니와 두 딸이다. 몸이 불편한 어머니를 가운데에 모시고 걸어오는 두 딸은 어느덧 다 성장했다. 시인은 이 셋 사이가 비단실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누에가 실을 ..

[매우 중요한 참견]

[매우 중요한 참견]    일러스트 = 이진영    매우 중요한 참견 호박 줄기가 길 안쪽으로 성큼성큼 들어와 있다 느릿느릿 길을 밀고 나온 송앵순 할매가호박 줄기 머리를 들어 길 바깥으로 놓아주고는 짱짱한 초가을 별 앞세우고 깐닥깐닥 가던 길 간다 ㅡ 박성우 (1971 ~)    참견한다는 것은 쓸데없이 끼어들어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이다. 자신과 별로 관계가 없는 남의 일에 공연스레 나서서 개입하는 것이다. 호박 줄기가 하필 길의 위로 기어가는 것을 본 할머니는 넝쿨을 들어서 뻗어갈 방향을 돌려놓는다. 참견하는 일이더라도 참 잘한, 요긴한 참견이라고 하겠다. 이 시를 흥미롭게 하는 것은 호박 줄기가 기어가는 기세는 ‘성큼성큼’ 이라고 표현하고, 할머니의 발걸음 속도는 ‘느릿느릿’ 이라고 쓴 대목이 아닐..

[아침]

[아침]    일러스트 = 이철원    아침 네팔의 라이족은 손님이 떠난 후 비질을 하지 않는다흔적을 쓸어낸다 생각해서 손님은 떠나기 전 직접 마당을 쓴다자기가 남긴 흔적 스스로 지우며 폐가 되지 않으려 애쓴다깨끗한 마당처럼만 나를 기억하라고 쓸어도 쓸어도 쓸리지 않는 것들로마당은 더렵혀지고 있었고 어차피 더렵혀지는 평생을 평생쓸다 가는 것이겠지만 무엇보다 듣기 좋은 건아침에 마당 쓰는 소리 언제나 가장 좋은 건자고 일어나 마시는 백차 한잔 산중에 휴대폰도 없이삼동 (三冬)이 하이얗다* *정지용 「인동차」, “산중에 책력도 없이 /삼동이 하이얗다.” 변용. ㅡ 황유원 (1962 ~)    하룻밤을 묵고 나면 그곳엔 머문 흔적이 당연히 남는다. 객실 (客室)에도 마당에도 그리고 나를 손님으로 들인 그 집 ..

[소나기]

[소나기]    일러스트 = 양진경    소나기 노랑멧새들 총알처럼 덤불에 박히고마루 밑 흰둥이는 귀를 바르르, 갑자기 컴퓨터 화면이 시커메졌다 화악, 입안 가득 처오르는화약 같은 생흙 냄새 세상이 아픈 자들, 대속 (大贖)의 맨발들이 지나간다 ㅡ 전동균 (1962 ~)     곧 처서이지만, 중천에 솟은 해는 여전히 화염을 세게 뿜는다. 그나마 소나기가 대지의 더운 기를 조금은 덜어낸다. 여름 소나기는 갑자기 쏟아지다가 뚝 그친다. 우레가 울어 예고를 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대비할 겨를을 주지 않고 내리므로 여기저기 소란이 일어난다. 멧새는 황급히 탄환처럼 전속력으로 날아간다. 털빛이 흰 개도 빗소리에 화들짝 놀라 마루 밑에 들어가 비를 피한다. 세상은 일순에 정전이 된 듯 캄캄해진다. 굵은 빗방울이 후..

[풀잎 하나]

[풀잎 하나]    일러스트 = 이철원    풀잎 하나 깊은 산골짜기 밀림에 깃들면찰나와 영원이 하나같다지나간 시간도 다가오는 시간도함께 어우러져 있는 것만 같다울창한 나무 그늘에서 흔들리는나는 조그만 풀잎 하나꿈꾸다 꿈속에 든 풀잎 하나 ㅡ 이태수 (1947 ~)    심곡심산 (深谷深山)의 산림 (山林)을 더러 만나게 되지만 대개는 능선과 높은 산봉우리와 깊은 계곡을 눈으로 살피게 된다. 그런데 시인은 큰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산에 들어가서 작은 풀잎에 눈이 간다. 나무가 드리운 그늘 속에서 가만가만히 흔들리는 풀잎에 관심을 둔다. 산림은 하나의 생명 세계로서 순간과 영원,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한데 조화돼 한 덩어리를 이루면서 섞여 있는 곳인데, 시인은 거기서 하나의 개체로서의 풀잎을 주목한다..

[모래는 뭐래?]

[모래는 뭐래?]    일러스트 = 양진경    모래는 뭐래? 모래는 어쩌다 얼굴을 잃었을까?모래는 무얼 포기하고 모래가 되었을까?모래는 몇천번의 실패로 모래를 완성했을까?모래도 그러느라 색과 맛을 다 잊었을까?모래는 산 걸까 죽은 걸까?모래는 공간일까 시간일까?그니까 모래는 뭘까? 쏟아지는 물음에 뿔뿔이 흩어지며 모래는 어디서 추락했을까?모래는 무엇에 부서져 저리 닮았을까?모래는 말보다 별보다 많을까?모래도 제각각의 이름이 필요하지 않을까?모래는 어떻게 투명한 유리가 될까?모래는 우주의 인질일까?설마 모래가 너일까? 허구한 날의 주인공들처럼 ㅡ 정끝별 (1964 ~)    여기 모래가 있다. 산기슭에 혹은 여름 해변의 모래사장에. 비탈을 굴러 내리며 비탈의 맨 아랫부분에 쓰러져 쌓인 모래가 있고, 여름..

[남해 가는 길]

[남해 가는 길]    일러스트 = 양진경    남해 가는 길ㅡ 유배시첩 (流配詩帖) 1 물살 센 노량 해협이 발목을 붙잡는다.선천 (宣川)서 돌아온 지 오늘로 몇 날인가.윤삼월 젖은 흙길을수레로 천 리 뱃길 시오 리나루는 아직 닿지 않고석양에 비친 일몰이 눈부신데망운산 기슭 아래 눈발만 차갑구나.내 이제 바다 건너 한 잎꽃 같은 저 섬으로 가고 나면따뜻하리라 돌아올 흙이나 뼈땅에서 나온 모든 숨쉬는 것들 모아화전 (花田)을 만들고 밤에는어머님을 위해 구운몽 (九雲夢)을 엮으며꿈결에 듣던 남해 바다삿갓처럼 엎드린 앵강에 묻혀다시는 살아서 돌아가지 않으리. ㅡ 고두현 (1963 ~)    고두현 시인은 경남 남해에서 출생했다. 이 시는 시인이 1993년에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작품인데, 남해 노도 (櫓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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