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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좋은 글 ... 101

[티끌이 티끌에게]

[티끌이 티끌에게] 일러스트 = 이철원 티끌이 티끌에게 ㅡ 작아지기로 작정한 인간을 위하여 내가 티끌 한점인 걸 알게 되면유랑의 리듬이 생깁니다 나 하나로 꽉 찼던 방에 은하가 흐르고아주 많은 다른 것들이 보이게 되죠 드넓은 우주에 한점 티끌인 당신과 내가춤추며 떠돌다 서로를 알아챈 여기,이토록 근사한 사건을 축복합니다 때로 우리라 불러도 좋은 티끌들이서로를 발견하며 첫눈처럼 반짝일 때이번 생이라 불리는 정류장이 화사해집니다. 가끔씩 공중 파도를 일으키는 티끌의 스텝,찰나의 숨결을 불어넣는 다정한 접촉, 영원을 떠올려도 욕되지 않는 역사는티끌임을 아는 티끌들의 유랑뿐입니다 ㅡ 김선우 (1970 ~) 티끌은 티와 먼지를 통틀어서 일컫는 말이니 아주 작은 것을 뜻한다. 그러나 ‘나’..

[도착]

[도착]    일러스트 = 이철원    도착 이름도 무엇도 없는 역에 도착했어되는 일보다 안되는 일 더 많았지만 아무것도 아니면 어때지는 것도 괜찮아지는 법을 알았잖아슬픈 것도 아름다워내던지는 것도 그윽해 하늘이 보내준 순간의 열매들아무렇게나 매달린 이파리들의 자유벌레 먹어땅에 나뒹구는 떫고 이지러진이대로눈물나게 좋아이름도 무엇도 없는 역여기 도착했어 ㅡ 문정희 (1947 ~)    ‘역’ 은 열차가 출발하고 도착하는 곳이지만 이 시에서는 그런 의미 이상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인생의 어떤 단계나 대목, 혹은 막다른 곳을 함께 뜻한다고 보아도 좋겠다. 아니면 지나온 일과 여정을 돌이켜 생각하고 돌아볼 수 있는 어떤 언덕 같은 곳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겠다. 우리는 일이 잘 풀려서, 뜻밖에 행운도 좀 얻어..

[의자]

[의자]    일러스트 = 이철원    의자  갈참나무 허리에연선아 좋아해, 하고 새기는 일이나원고지에 몇 자 적는 일이나본질은 같다 의자 모서리를 움켜쥐고 그때 그 자리에다시 노을이 젖어오고나는 더 우회적으로 이 일을 생각한다 어떤 기적이 있어기대앉은 의자에 새잎이 돋고수맥이 흐르고나는 둥둥 떠서기어이 너에게 갈 수도 있다 ㅡ 박철 (1960 ~)   이렇게 충분히 상상할 수 있겠다. 첫 사랑의 푸르른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한 사람이 있다. 지금 그는 의자를 유심히 바라본다. 의자는 낡은 정물이다. 스스로 움직이지 못한다. 어쩌면 의자는 갈참나무를 켜서 만든 의자일지도 모른다. 갈참나무에는 “연선아 좋아해” 라는 사랑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오늘 해질녘에는 노을이 축축하게 의자에 앉는다. 의자는 수..

[먹기러기]

[먹기러기]   일러스트 = 이철원    먹기러기 달에 눈썹을 달아서 속눈썹을 달아서 가는 기러기떼 먹기러기떼 수묵으로 천리를 깜박인다 오르락내리락 찬 달빛 흘려보내고 흘려보내도 차는 달빛 수묵으로 속눈썹이 젖어서 ㅡ 손택수 (1970 ~)    손택수 시인의 시에는 잔잔한 감응이 있다. ‘연못을 웃긴 일’ 이라는 제목의 시에는 “못물에 꽃을 뿌려 / 보조개를 파다 // 연못이 웃고 / 내가 웃다 // 연못가 바위들도 실실 / 물주름에 웃다” 라고 쓴 시구가 있는데, 이런 대목을 읽노라면 마음이 가만가만히 따라 움직이게 된다. 잔물결이 일어서 퍼져가듯이. 눈썹 모양의 달이 뜬 밤에 시인은 기러기 떼가 날아가는 것을 보았던 모양이다. 눈썹달은 초승달이나 그믐달을 뜻하니 그런 날의 밤하늘은 어둑어둑하고, ..

[종암동]

[종암동]    일러스트 = 양진경    종암동 좀처럼 외출을 하지 않는 아버지가어느 날 내 집 앞에 와 계셨다 현관에 들어선 아버지는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눈물부터 흘렸다 왜 우시냐고 물으니사십 년 전 종암동 개천가에 홀로 살던할아버지 냄새가 풍겨와 반가워서 그런다고 했다 아버지가 아버지, 하고 울었다 ㅡ 박준 (1983 ~)    냄새는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안방이나 이불, 옷장의 옷으로부터 맡게 되는 냄새에는 기억이 배어 있다. 특히 옷은 기억의 실오라기나 기억의 털로 짠 것만 같아서 옷에는 살냄새가 난다. 통 기억이 나지 않다가도 어떤 공간에 들어서거나 사물을 보는 순간 시간의 저 깊은 곳에 먼지를 소복하게 뒤집어쓴 채 있던 기억은 일순에 되살아난다. 마치 소매를 왈칵 잡아당기듯이. 박준 시인은..

[사족]

[사족]     일러스트 = 이진영    사족 입술을 댈 듯 말 듯 서운히 보낸 어깨돌아서고 나서야 없는 너를 만질 때귓전에 연해 밟히는 중저음의 느린 여음끝동을 길게 두다 서운해진 노을처럼말 없는 말 그리며 사족사족 매만지네자판에 자그락대는 자모음을 깨물어보듯 ㅡ 정수자 (1957 ~)    누군가와 헤어진 연후에 쓴 시 같다. 이별한 이가 사모하는 사람이 아닐 수도 있지만, 다정다감한 사람인 듯은 하다. 정이 많은 이였지만 정작 듣고 싶었던 말을 듣지 못하고 떠난 사람이 아닐까 한다. 그 사람을 보내고 나서 시인에게 밀려오는 감정의 파도가 생각했던 것보다 만만찮다. 마음에 모자라게, 아쉬워하게, 섭섭한 느낌이 있게 떠나보낸 게 아닌가 염려하고, 귓전에는 그 사람의 목소리가 사라지지 않고 메아리처럼 ..

[누에]

[누에]    일러스트 = 김성규    누에 세 자매가 손을 잡고 걸어온다 이제 보니 자매가 아니다곱추인 어미를 가운데 두고두 딸은 키가 훌쩍 크다어미는 얼마나 작은지 누에 같다제 몸의 이천 배나 되는 실을 뽑아낸다는 누에,저 등에 짊어진 혹에서비단실 두 가닥 풀려나온 걸까비단실 두 가닥이이제 빈 누에고치를 감싸고 있다 그 비단실에 내 몸도 휘감겨 따라가면서나는 만삭의 배를 가만히 쓸어안는다 ㅡ 나희덕 (1966 ~)    저쪽에서 이쪽으로 세 여성이 나란히 다정하게 걸어온다. 언니와 여동생 사이인 듯 보였으나 가까이 다가왔을 때에 보니 어머니와 두 딸이다. 몸이 불편한 어머니를 가운데에 모시고 걸어오는 두 딸은 어느덧 다 성장했다. 시인은 이 셋 사이가 비단실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누에가 실을 ..

[매우 중요한 참견]

[매우 중요한 참견]    일러스트 = 이진영    매우 중요한 참견 호박 줄기가 길 안쪽으로 성큼성큼 들어와 있다 느릿느릿 길을 밀고 나온 송앵순 할매가호박 줄기 머리를 들어 길 바깥으로 놓아주고는 짱짱한 초가을 별 앞세우고 깐닥깐닥 가던 길 간다 ㅡ 박성우 (1971 ~)    참견한다는 것은 쓸데없이 끼어들어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이다. 자신과 별로 관계가 없는 남의 일에 공연스레 나서서 개입하는 것이다. 호박 줄기가 하필 길의 위로 기어가는 것을 본 할머니는 넝쿨을 들어서 뻗어갈 방향을 돌려놓는다. 참견하는 일이더라도 참 잘한, 요긴한 참견이라고 하겠다. 이 시를 흥미롭게 하는 것은 호박 줄기가 기어가는 기세는 ‘성큼성큼’ 이라고 표현하고, 할머니의 발걸음 속도는 ‘느릿느릿’ 이라고 쓴 대목이 아닐..

[아침]

[아침]    일러스트 = 이철원    아침 네팔의 라이족은 손님이 떠난 후 비질을 하지 않는다흔적을 쓸어낸다 생각해서 손님은 떠나기 전 직접 마당을 쓴다자기가 남긴 흔적 스스로 지우며 폐가 되지 않으려 애쓴다깨끗한 마당처럼만 나를 기억하라고 쓸어도 쓸어도 쓸리지 않는 것들로마당은 더렵혀지고 있었고 어차피 더렵혀지는 평생을 평생쓸다 가는 것이겠지만 무엇보다 듣기 좋은 건아침에 마당 쓰는 소리 언제나 가장 좋은 건자고 일어나 마시는 백차 한잔 산중에 휴대폰도 없이삼동 (三冬)이 하이얗다* *정지용 「인동차」, “산중에 책력도 없이 /삼동이 하이얗다.” 변용. ㅡ 황유원 (1962 ~)    하룻밤을 묵고 나면 그곳엔 머문 흔적이 당연히 남는다. 객실 (客室)에도 마당에도 그리고 나를 손님으로 들인 그 집 ..

[소나기]

[소나기]    일러스트 = 양진경    소나기 노랑멧새들 총알처럼 덤불에 박히고마루 밑 흰둥이는 귀를 바르르, 갑자기 컴퓨터 화면이 시커메졌다 화악, 입안 가득 처오르는화약 같은 생흙 냄새 세상이 아픈 자들, 대속 (大贖)의 맨발들이 지나간다 ㅡ 전동균 (1962 ~)     곧 처서이지만, 중천에 솟은 해는 여전히 화염을 세게 뿜는다. 그나마 소나기가 대지의 더운 기를 조금은 덜어낸다. 여름 소나기는 갑자기 쏟아지다가 뚝 그친다. 우레가 울어 예고를 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대비할 겨를을 주지 않고 내리므로 여기저기 소란이 일어난다. 멧새는 황급히 탄환처럼 전속력으로 날아간다. 털빛이 흰 개도 빗소리에 화들짝 놀라 마루 밑에 들어가 비를 피한다. 세상은 일순에 정전이 된 듯 캄캄해진다. 굵은 빗방울이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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