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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좋은 글 ... 94

[매우 중요한 참견]

[매우 중요한 참견]    일러스트 = 이진영    매우 중요한 참견 호박 줄기가 길 안쪽으로 성큼성큼 들어와 있다 느릿느릿 길을 밀고 나온 송앵순 할매가호박 줄기 머리를 들어 길 바깥으로 놓아주고는 짱짱한 초가을 별 앞세우고 깐닥깐닥 가던 길 간다 ㅡ 박성우 (1971 ~)    참견한다는 것은 쓸데없이 끼어들어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이다. 자신과 별로 관계가 없는 남의 일에 공연스레 나서서 개입하는 것이다. 호박 줄기가 하필 길의 위로 기어가는 것을 본 할머니는 넝쿨을 들어서 뻗어갈 방향을 돌려놓는다. 참견하는 일이더라도 참 잘한, 요긴한 참견이라고 하겠다. 이 시를 흥미롭게 하는 것은 호박 줄기가 기어가는 기세는 ‘성큼성큼’ 이라고 표현하고, 할머니의 발걸음 속도는 ‘느릿느릿’ 이라고 쓴 대목이 아닐..

[아침]

[아침]    일러스트 = 이철원    아침 네팔의 라이족은 손님이 떠난 후 비질을 하지 않는다흔적을 쓸어낸다 생각해서 손님은 떠나기 전 직접 마당을 쓴다자기가 남긴 흔적 스스로 지우며 폐가 되지 않으려 애쓴다깨끗한 마당처럼만 나를 기억하라고 쓸어도 쓸어도 쓸리지 않는 것들로마당은 더렵혀지고 있었고 어차피 더렵혀지는 평생을 평생쓸다 가는 것이겠지만 무엇보다 듣기 좋은 건아침에 마당 쓰는 소리 언제나 가장 좋은 건자고 일어나 마시는 백차 한잔 산중에 휴대폰도 없이삼동 (三冬)이 하이얗다* *정지용 「인동차」, “산중에 책력도 없이 /삼동이 하이얗다.” 변용. ㅡ 황유원 (1962 ~)    하룻밤을 묵고 나면 그곳엔 머문 흔적이 당연히 남는다. 객실 (客室)에도 마당에도 그리고 나를 손님으로 들인 그 집 ..

[소나기]

[소나기]    일러스트 = 양진경    소나기 노랑멧새들 총알처럼 덤불에 박히고마루 밑 흰둥이는 귀를 바르르, 갑자기 컴퓨터 화면이 시커메졌다 화악, 입안 가득 처오르는화약 같은 생흙 냄새 세상이 아픈 자들, 대속 (大贖)의 맨발들이 지나간다 ㅡ 전동균 (1962 ~)     곧 처서이지만, 중천에 솟은 해는 여전히 화염을 세게 뿜는다. 그나마 소나기가 대지의 더운 기를 조금은 덜어낸다. 여름 소나기는 갑자기 쏟아지다가 뚝 그친다. 우레가 울어 예고를 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대비할 겨를을 주지 않고 내리므로 여기저기 소란이 일어난다. 멧새는 황급히 탄환처럼 전속력으로 날아간다. 털빛이 흰 개도 빗소리에 화들짝 놀라 마루 밑에 들어가 비를 피한다. 세상은 일순에 정전이 된 듯 캄캄해진다. 굵은 빗방울이 후..

[풀잎 하나]

[풀잎 하나]    일러스트 = 이철원    풀잎 하나 깊은 산골짜기 밀림에 깃들면찰나와 영원이 하나같다지나간 시간도 다가오는 시간도함께 어우러져 있는 것만 같다울창한 나무 그늘에서 흔들리는나는 조그만 풀잎 하나꿈꾸다 꿈속에 든 풀잎 하나 ㅡ 이태수 (1947 ~)    심곡심산 (深谷深山)의 산림 (山林)을 더러 만나게 되지만 대개는 능선과 높은 산봉우리와 깊은 계곡을 눈으로 살피게 된다. 그런데 시인은 큰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산에 들어가서 작은 풀잎에 눈이 간다. 나무가 드리운 그늘 속에서 가만가만히 흔들리는 풀잎에 관심을 둔다. 산림은 하나의 생명 세계로서 순간과 영원,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한데 조화돼 한 덩어리를 이루면서 섞여 있는 곳인데, 시인은 거기서 하나의 개체로서의 풀잎을 주목한다..

[모래는 뭐래?]

[모래는 뭐래?]    일러스트 = 양진경    모래는 뭐래? 모래는 어쩌다 얼굴을 잃었을까?모래는 무얼 포기하고 모래가 되었을까?모래는 몇천번의 실패로 모래를 완성했을까?모래도 그러느라 색과 맛을 다 잊었을까?모래는 산 걸까 죽은 걸까?모래는 공간일까 시간일까?그니까 모래는 뭘까? 쏟아지는 물음에 뿔뿔이 흩어지며 모래는 어디서 추락했을까?모래는 무엇에 부서져 저리 닮았을까?모래는 말보다 별보다 많을까?모래도 제각각의 이름이 필요하지 않을까?모래는 어떻게 투명한 유리가 될까?모래는 우주의 인질일까?설마 모래가 너일까? 허구한 날의 주인공들처럼 ㅡ 정끝별 (1964 ~)    여기 모래가 있다. 산기슭에 혹은 여름 해변의 모래사장에. 비탈을 굴러 내리며 비탈의 맨 아랫부분에 쓰러져 쌓인 모래가 있고, 여름..

[남해 가는 길]

[남해 가는 길]    일러스트 = 양진경    남해 가는 길ㅡ 유배시첩 (流配詩帖) 1 물살 센 노량 해협이 발목을 붙잡는다.선천 (宣川)서 돌아온 지 오늘로 몇 날인가.윤삼월 젖은 흙길을수레로 천 리 뱃길 시오 리나루는 아직 닿지 않고석양에 비친 일몰이 눈부신데망운산 기슭 아래 눈발만 차갑구나.내 이제 바다 건너 한 잎꽃 같은 저 섬으로 가고 나면따뜻하리라 돌아올 흙이나 뼈땅에서 나온 모든 숨쉬는 것들 모아화전 (花田)을 만들고 밤에는어머님을 위해 구운몽 (九雲夢)을 엮으며꿈결에 듣던 남해 바다삿갓처럼 엎드린 앵강에 묻혀다시는 살아서 돌아가지 않으리. ㅡ 고두현 (1963 ~)    고두현 시인은 경남 남해에서 출생했다. 이 시는 시인이 1993년에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작품인데, 남해 노도 (櫓島..

[호수]

[호수]    일러스트 = 김하경   호수 네가 온다는 날마음이 편치 않다 아무래도 네가 얼른와줘야겠다 바람도 없는데호수가 일렁이는 건바로 그 때문이다. ㅡ 나태주 (1945 ~)     짧지만 여운이 길다. 누군가를 생각하는 마음이, 그리움이 크고 넓기 때문일 것이다. 그이가 온다는 기별을 받은 후로 시인의 마음은 가만한 상태로 있지 못한다. 애가 탄다. 조마조마하고, 마음을 졸인다. 시간을 끌지 않고, 지체 없이 왔으면 하고 바란다. 시인은 이 마음의 상태를 호수에 견준다. 바람이 한 점 없는데도 호수의 수면에 잔물결이 일어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은 그리움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태주 시인의 시편은 우리 마음에 잠자고 있는, 사모하는 마음을 깨운다. 시인은 시 ‘그 집 1′ 에서 “그 집에는 그리움이 ..

[둥둥 걷어붙이고]

[둥둥 걷어붙이고]     일러스트 = 이철원    둥둥 걷어붙이고 둥둥 걷어붙이고아부지 논 가운데로 비료를 뿌리며 들어가시네물 댄 논에 어룽거리는찔레꽃 무더기 속으로아부지 솨아 솨르르 비료를 흩으며 들어가시네소금쟁이 앞서가며 둥그러미를 그리는고드래미논 가운데로 아부지찔레꽃잎 뜬 논 가운데한가마니 쏟아진 별거기서 자꾸 충그리고 해찰하지 말고땅개비 개구리 고만 잡고어여 둥둥 걷어붙이고들어오라고 아부지 부르시네 ㅡ 송진권 (1970 ~)    송진권 시인은 충북 옥천 사람이다. 이 시에도 옥천 사람의 성품과 말씨가 잘 배어 있다. ‘둥둥’ 이라는 시어에는 바짓가랑이의 끝부분을 듬성하게 말아 올린 모양이 눈에 선하게 보인다. 일을 빨리 해치우려고 서두르는 의욕도 느껴진다. 농사를 짓는 아버지는 무논에 들어가서..

[청송]

[청송]    일러스트 = 김성규   청송 병든 어머니 집에 두고 청송 갔다점곡, 옥산, 길안 사과밭들 지나 청송 갔다끝없이 떨어져 내리는 사과알들을놓치기만 하며 푸르른 청송 갔다주산지를 오래 걸으며 청송 갔다한밤중 동해를 향해 폭우 속,굽이굽이 태백산맥 넘어 청송 갔다청송 지나 계속 눈 비비며 청송 갔다 ㅡ 이영광 (1965 ~)    이영광 시인은 최근에 펴낸 시집의 ‘시인의 말’ 에서 “나는 내가 조금씩 사라져간다고 느끼지만 이 봄에도 어느 바람결에나 다시 살아나는 것들이 많다” 고 썼다. 조금씩 사라져가는 것은 현재 시간일 테고, 다시 살아나는 것은 옛 시간일 테다. 그러므로 고성 (古城)과도 같은 옛 시간 속에 있는 옛사람 생각이 난다는 뜻일 것이다. 비록 그리워해도 옛사람은 옛 시간 속에 살 ..

[연애의 법칙]

[연애의 법칙]    일러스트 = 이철원    연애의 법칙 너는 나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어제 백리향의 작은 잎들을 문지르던 손가락으로나는 너의 잠을 지킨다부드러운 모래로 갓 지어진 우리의 무덤을낯선 동물이 파헤치지 못하도록.해변의 따스한 자갈, 해초들입 벌린 조가비의 분홍빛 혀 속에 깊숙이 집어넣었던하얀 발가락으로우리는 세계의 배꼽 위를 걷는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포옹한다수요일의 텅 빈 체육관, 홀로, 되돌아오는 샌드백을 껴안고노오란 땀을 흘리며 주저앉는 권투 선수처럼 ㅡ 진은영 (1970 ~)    향기가 백 리를 간다는 백리향 잎을 만지던 손가락으로 연인의 목덜미를 가볍게 쓰다듬어 만지는, 이 시의 도입부는 감미롭고 아름답다. 그 향기는 어제, 오늘, 그리고 미래의 빛나는 시간에 은은하게 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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