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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25전쟁 60년/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31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㉛ 전쟁통의 가족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㉛ 전쟁통의 가족 백선엽 신임 국군 1군단장(오른쪽)이 부산 임시 경무대에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진급 신고를 마친 뒤인 1951년 4월 15일 저녁김활란 공보장관과 신성모 국방장관(왼쪽부터)이 베푼 만찬에 참석했다. [백선엽 장군 제공] 어둠 속을 달려 도착한 곳이 어디였는가에 대한 기억은 지금 내게 없다. 부관이 그 집을 미리 파악해 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부산 시내 어느 한 주택이었다. 전쟁통이라 여러 가족이 그 작은 집에 함께 섞여서 살고 있었다. 지프에서 내려 집 문으로 들어섰다. 부관이 먼저 기별을 했던가 보다. 방 한 칸에 살면서 몸을 추스르고 있던 아내가 기척과 함께 방문을 나왔다. 6월 25일 그 아침 이후, 열 달간 가족의 안부도 몰랐다 내..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㉚ 한국 이해하려 힘쓴 밴플리트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㉚ 한국 이해하려 힘쓴 밴플리트 현대그룹을 창설한 고(故) 정주영 회장이 생전에 내게 들려준 일화다. 그가 감격스러운 첫 방북을 마치고 난 뒤였다. 강원도 통천에 있는 고향을 다녀왔던 정 회장은 헤어졌던 누나와 해후했다. 누나가 그를 만나자 대뜸 “주영아, 우리는 장군님 덕분에 잘 먹고 잘살고 있다”고 하더란다. 그러나 아무도 참견하지 않는 밤이 되자 그 누나가 슬그머니 오더란다. “주영아, 사실은 배고파 죽겠어….” 늘그막에 만난 누이의 처량한 호소에 정 회장의 감회가 어땠을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작전대로였다면, 휴전선은 금강산 이북에 그어졌다 정 회장이 찾았던 고향 통천군에는 고저(庫底)라는 곳이 있다. 그가 자랐던 고향이자, 남북이 분단되면서 역시..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㉙ 낙하산 공격부대 지휘관 리지웨이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㉙ 낙하산 공격부대 지휘관 리지웨이 매슈 리지웨이 미 8군 사령관(오른쪽)이 1951년 2월 국군 1사단을 방문해 백선엽 사단장과 작전을 논의하고 있다. 리지웨이는 51년 서울을 다시 내준 1·4후퇴 뒤 강력한 작전을 구사해 중공군의 공세를 꺾으며 전선을 38선 이북으로 다시 밀어 올렸다. 그는 그해 4월 더글러스 맥아더의 후임으로 유엔군 총사령관이 됐다. [백선엽 장군 제공] 더글러스 맥아더는 대형 항공모함이다. 전체적으로 구사하는 전략·전술의 단위가 커서 그렇게 비유해 볼 수 있다. 그에 비하면 매슈 리지웨이 8군 사령관은 구축함급이다. 맥아더에 비해 여러 가지 면에서 작지만, 그 구축함은 그래도 상당히 정밀한 기능과 박력 있는 화력(火力)을 갖춘 함..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㉘ 천재 전략가의 귀국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㉘ 천재 전략가의 귀국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 유엔군 총사령관 직에서 해임된 뒤 일본 도쿄에서 미국으로 돌아간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1951년 4월 19일 미 의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민주와 자유의 가치를 강조하면서 6·25전쟁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중앙포토]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을 벌이기 전에 적에게 ‘공간’을 내주는 대신 ‘시간’을 벌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공간을 우회해 적의 후방을 사정없이 휘갈겼다. 개전 초기 영등포 전선을 시찰하는 그의 뇌리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상륙작전의 천재’ 맥아더, 원산에서는 결정적 패착 대구 북방에서 포항까지, 왜관에서 함안까지의 사각형 방어선을 설정한 ‘..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㉗ 떠나는 한국전의 별, 맥아더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㉗ 떠나는 한국전의 별, 맥아더 더글러스 맥아더 1880~1964 갑자기 순직한 김백일 장군의 후임으로 내가 국군 1군단장에 임명됐다. 1951년 4월 7일이었다. 그래서 1사단을 떠나게 됐다. 50년 6월 25일 적의 침입을 당한 뒤로 줄곧 지휘했던 부대다. 북진으로 평양에 처음 입성하는 영광을 안겨 줬던 나의 1사단. 6·25 발발 두 달 전인 50년 4월에 사단장으로 부임한 지 1년 만이었다. 개전 당시 사단장 가운데 그때까지 같은 부대를 계속 지휘해 온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삶과 죽음, 처절한 고생과 화려한 영광을 함께했던 국군 1사단이었다. 포화가 치솟고 총탄이 빗발처럼 쏟아지는 전장에서 운명을 걸고 함께 싸웠던 전우들과 헤어지는 감회는 착잡..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㉖ 38선 북방 방어 거점을 확보하라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㉖ 38선 북방 방어 거점을 확보하라 1951년 3월 말 이제 38선을 넘어야 할 때다. 그러나 미국 워싱턴의 정가에 형성된 기류는 분명히 우리와는 달랐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뭔가 멈칫하는 분위기였다. 그들은 북진해서 적을 섬멸하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유엔군총사령관은 그대로 북진을 밀어붙이고자 했지만 워싱턴과 다른 연합국은 38선으로 전선을 고착화하는 데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51년 3월, 38선 재돌파 앞두고 워싱턴은 멈칫했다 1951년 3월 27일 38선으로 전선이 일단 굳어지는 시점에 매슈 리지웨이 미 8군 사령관이 여주에서 소집한 회의에 참석했던 한·미 야전지휘관들이 함께 사진을 찍었다. 왼쪽부터 앨런 미 8군 참..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㉕ 퇴로 막아 적을 분산시켜라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㉕ 퇴로 막아 적을 분산시켜라 미 187공수전투단이 1951년 3월 23일 문산 지역에 낙하하고 있다. 적의 퇴로를 끊는다는 차원에서 벌인 이 공수 작전은 보병인 국군 1사단이 서울에서 밀고 올라가는 지상 작전과 연계해 벌어졌다. 아군은 이 작전으로 임진강 북방까지 전선을 밀어 올렸다. [백선엽 장군 제공] 1951년 3월 23일 경기도 문산에 투하된 미 187공수전투단의 단장은 프랭크 보웬 준장이었고, 부단장은 윌리엄 웨스트모얼랜드(훗날 베트남전 초대 미군 총사령관) 대령이었다. 투하에 앞서 미 1군단 부군단장 페러 준장은 급기야 내게 “한국군이 미 공수부대와의 링크업(link-up: 연계) 작전을 제대로 해낼 수 있겠느냐”고 묻기도 했다. 나는 “평안..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㉔ 맥아더의 통 큰 선물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㉔ 맥아더의 통 큰 선물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이 1951년 3월 중순에 국군 1사단 사령부로 찾아 왔다. 지프에 앉은 맥아더 사령관(왼쪽)이 당시 1사단장이던 백선엽 장군과 악수를 하며 대화하고 있다. 그는 당시 71세의 고령이어서 웬만하면 차에서 내리기 싫어했다. [백선엽 장군 제공] 국군 1사단이 서울을 재탈환한 뒤 사흘이 지난 1951년 3월 18일, 만리동 고개의 한 초등학교(당시엔 국민학교)에 차린 사단 사령부로 큰 손님이 찾아 왔다.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이었다. 전쟁 기간 중 나는 그를 여러 차례 만났다. 한마디로 거물이다. 구사하는 전략의 단위가 평범한 장군의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수퍼 히어로’다. 그 점은 나중에 서술..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㉓ 수도 재탈환, 중공군 역습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㉓ 수도 재탈환, 중공군 역습 여기저기서 ‘펑-’ ‘펑-’ 폭발음이 들렸다. 곳곳에 매설했던 지뢰가 폭발하는 소리였다. 눈에 들어오는 전신주는 모두 쓰러져 있었다. 전깃줄은 바닥에 헝클어져 있었다. 전차(電車) 철로도 엉망이었다. 1951년 3월 중순 다시 찾은 서울의 모습이었다. “서울 세 번은 못 내줘” 중앙청서 마포까지 대포 400문 배치 태극기를 들고 나와 우리를 환영해주는 사람들이 몇몇 보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힘에 겨워 보였다. 중공군 점령하의 서울에 남아 있던 사람은 20만 명 정도였다. 대개는 굶주림과 병고에 시달렸던 것으로 안다. 조금 과장을 하자면 서울에 있던 사람들은 거지의 행색과 다름없었다. 개전 이후 수도 서울은 이렇게 병들고 지쳐..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㉒ 서울 탈환 작전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㉒ 서울 탈환 작전 저기 멀리 한강이 보였다. 경기도 시흥의 국군 1사단 사령부를 떠나 북상하면서 점차 내 앞으로 다가온 파란 물결이 바로 한강이었다. 이제 저곳을 넘으면 대한민국의 심장인 서울이다. 전쟁 기간 동안 그곳을 두 차례 적의 수중에 내줬다. 개전 초기의 북한군과 1951년 1·4 후퇴를 있게 했던 중공군에게 한 번씩 점령됐다. “서울로 진격” 한강 도하 상륙정 오르니 뜨거운 눈물이 … 국군과 미군·연합군의 공세는 더 강해졌다. 전선(戰線)을 38도선까지 밀고 올라가는 작전이 시작됐다. 이번 작전명은 ‘톱(Ripper)’이었다. 과감한 톱질이 필요하다는 뜻이었을까. 어쨌든 일차적으로 서울을 탈환하고 북상하는 게 일이었다. 한강 남안에 진출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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