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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25전쟁 60년/임진강을 건너온 적

[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㊷ 후퇴 속에 거둔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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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㊷ 후퇴 속에 거둔 승리

 

 

 

국군 1사단의 고행은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기쁨도 있었다. 내가 사단 병력을 인솔하고 조치원에 도달했을 때다. 기차역에서 반가운 얼굴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임진강 전선에서 헤어져 각자 분산됐던 1사단 병력이었다. 이들은 용케도 기차를 얻어 타고서 사단에 합류하기 위해 조치원에 도착한 것이었다.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뻤다. 사지(死地)에서 겨우 살아 집으로 돌아온 아우들을 맞는 형의 심정이었다.


여교사가 적 위치 귀띔 … 국군 600명이 북한군 3000명 섬멸

 

 

수백 명이었다. 나는 한달음에 그들 앞으로 달려갔다. “너무 기쁘다. 우리 이제 다시 전력을 회복해 다시 한번 적과 싸워보자….” 그렇게 외쳤던 것 같다. 장병들도 오랜만에 사단장과 만나는 게 기뻤던 모양이다. 그들은 우렁찬 함성으로 화답했다.



청주로 향했다. 지연전술을 계속 펴야 했다. 적을 만나면 최소한의 타격으로 최대한의 손실을 입히곤 뒤로 빠지는 ‘히트 앤드 런(hit and run)’이었다. 그러면서 미군과 연합군의 지원군을 기대해야 하는 형국이었다. 청주를 거쳐 증평으로 오니 국군 6사단이 주둔하고 있었다. 춘천에서 역사에 남을 항전을 펼쳐 적을 최대한 저지했던 우수 사단이었다. 사단장 김종오 대령과 정보참모 유양수 소령은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전쟁 전 강원도 탄광회사에서 징발한 트럭이 많아 기동력이 우수했고 전투력도 그에 못지않은 사단이었다. 개인화기와 복장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던 우리 사단 입장에서는 부럽기 짝이 없었다.



춘천에서 음성 쪽으로 이동한 6사단은 당시 또 큰 공을 세웠다. 임부택 중령이 지휘하는 7연대 휘하 2대대(대대장 김종수 소령)가 북한군 1개 연대를 섬멸했다는 것이다. 당시 대대는 약 600명, 연대는 3000명으로 이뤄졌다. 충주시 인근 동락리의 국민학교(초등학교) 여교사가 북한군 주둔 장소를 알려줬기 때문이라고 했다. 북한군 동태를 파악한 7연대 2대대가 적이 방심하는 틈을 타 기습공격을 펼친 것이다. 그에 비해 우리는 간신히 사단의 형태만 유지하고 있었다. 서글픈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도 증평에서는 잠시 즐거웠다. 현지 농협 창고에 쌀이 가득 들어 있었다. 농가에서 소와 돼지를 사서 잡았다. 아마 나물도 어떻게 구해 왔던 모양이다. 오랜만에 마주한 성찬(盛饌)이었다. 포만감에 잠시 고단함을 잊을 수 있었다.

 

 

 

6 · 25전쟁 발발 12일 만에 적의 전투기가 처음 격추됐다. 미군 조사반이 1950년 7월 7일 서울 남쪽에서 격추된 소련제 야크 전투기를 살펴보고 있다. 북한은 소련의 지원을 위장하기 위해 소련군 표식인 ‘흰 테두리가 달린 붉은 별’을 기체에서 지우고 대신 북한군 마크인 ‘푸른 원과 붉은 원 가운데 붉은 별’을 그려 놓았다. [미국 육군부 자료]

 

 

 

부대원들을 점검해 보니 병력은 어느덧 5000명 수준으로 늘어 있었다. 전선에서 밀려 흩어지면서도 끝까지 제 부대를 찾아와 합류한 병사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외세의 침략에 흔들리면서도 이 땅을 지켜 낸 동력은 항전의지를 갖춘 국민에 있다는 점이 새삼 느껴졌다.



우리는 1950년 7월 8일 백마령을 넘어 음성에서 6사단 7연대와 방어 임무를 교대해야 했다. 7연대장인 임부택 중령은 마침 동락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직후라 자신감에 차 있었다. 나는 바로 방어 임무를 맡기에는 우리 사단의 전투력이 떨어진다는 점을 들어 그를 설득했다. 바로 이동하지 말고, 준비가 될 때까지 1사단을 도와달라는 부탁이었다. 어쩌면 애걸이었을지도 모른다.



임 중령은 그런 나의 궁색한 부탁을 흔쾌히 들어줬다. 7연대는 1사단과 함께 방어전에 임했다. 7연대 포병이 사단 정면을 엄호해 줌으로써 북한군의 강력한 공세를 저지할 수 있었다. 나는 지금도 임 중령에게 고마운 마음을 숨길 수 없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는 이 일로 김종오 6사단장에게 혼이 났다. 김 사단장은 “왜 이동하라는 나의 명령을 어기고 맘대로 작전을 펴느냐”면서 호통을 쳤다고 한다.



이어 후퇴명령이 떨어졌다. 음성을 떠난 1사단은 거센 빗줄기를 뚫으면서 괴산을 거쳐 속리산 동남쪽 기슭인 경북 상주군 화령장에 도착했다. 17연대가 먼저 와 있었다. 전쟁 초기 옹진반도를 수비했던 육본 직할 부대였다. 미 25사단 24연대도 합류했다. 부대를 이끄는 호톤 화이트 대령과는 구면이었다. 내가 전쟁 전 정보국장 재직 시절에 그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해방 후 점령군으로 왔던 미 24군단의 정보참모를 맡고 있었다. 그와 나는 당시 “우리는 서로 성(姓)이 같다”면서 어울리곤 했던 사이였다. 화이트는 하얀색, 한자로 백(白)이었기 때문이다.



미군이라도 전쟁 통에 만난 지인(知人)이었다.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는 당시 이미 50을 넘긴 나이였다. 그 휘하의 연대 병력 대부분은 흑인이었다. 말하자면 흑인으로 구성된 연대였다. 그는 “전쟁은 젊은 사람들이 해야 해. 나는 나이가 많아 고지에 오르는 게 힘들어”라며 푸념을 했다. 산악지형이 많아 이를 오르내리는 데 숨이 벅차다는 불평이었다.


백선엽 장군

[출처: 중앙일보] [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㊷ 후퇴 속에 거둔 승리

 

 

 

[전쟁사 돋보기] 국군 6사단

 

 

 

 

 

6·25전쟁 전인 1949년 충북 청주에서 원주로 이동해 중부지역 요충인 춘천 정면을 담당했던 사단이다. 방어를 맡은 지역의 전면은 모두 84㎞에 이르렀다. 원주에 사단 사령부를 설치했으며 당시 사단장은 김종오 대령이었다. 7연대(연대장 임부택 중령)가 화천, 2연대(연대장 함병선 대령)가 인제 전면을 담당하면서 전선을 지켰다. 19연대(연대장 민병권 중령)는 사단 예비로서 원주의 사단사령부와 함께 있었다.


동락리 전투 대승으로 모든 장병 일계급 특진

 

 

6사단은 전쟁 발발 직후 소양강과 말고개 등 험준한 천연 지형을 이용해 북한군의 남침을 성공적으로 저지했다. 당시 북한군은 2사단과 12사단, 106 전차연대를 앞세우고 이 지역으로 내려왔으나 국군 6사단의 완강한 저항에 부닥쳐 닷새 동안 발목이 잡혔다. 이 때문에 적의 남하가 전 전선에서 지체됐으며, 김홍일 소장이 이끄는 시흥지구 전투사령부는 국군 재편성을 통해 저지선을 확보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당시 북한의 남침에 효과적으로 대비하지 못했던 대한민국 국군 가운데 유일하게 전선을 사수해 적의 남침을 저지한 사단이다. 6사단은 그 뒤 동락리에서 1개 대대 병력으로 적 1개 연대를 섬멸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동락리(또는 무극리) 전투’로 불린다. 이 전투에서 적 2100여 명을 사살했다. 이로써 국군 역사상 최초로 전 부대 장병이 일계급 특진하는 기록을 세웠다.



또 단양과 화령장, 영덕 등지로 옮겨다니면서 성공적인 지연전을 펼쳤다. 낙동강 전선에서 반격을 시작한 뒤 압록강변 초산까지 북진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백선엽 장군 보좌관 이왕우 육군중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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