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전봉관의 해방 거리를 걷다 27

[1946년 訪蘇 사절단과 소설가 이태준의 비극]

[1946년 訪蘇 사절단과 소설가 이태준의 비극]    일러스트 = 한상엽    소련이 선전하는 것만 보고 예찬 쏟아낸 '소련 사절단'   순수문학 좇던 이태준인민민주주의 공감하며38선 넘어 사절단 참여 돌아와 낸 '소련 기행' 은무비판적이고 낯뜨거워6 · 25 전쟁 후 北서 숙청    “참으로 황홀한 수개월이었다. 인간의 낡고 악한 모든 것은 사라졌고 새 사람들의 새 생활, 새 관습, 새 문화의 새 세계였다. 그리고 소련은 날로 새로운 것에로, 마치 바다로 향해 흐르는 대하 (大河)처럼 끊임없이 나아가고 있었다.” (이태준, ‘소련기행’) 해방 1주년을 닷새 앞둔 1946년 8월 10일, 소련군이 제공한 비행기 2대에 나눠 탄 ‘방소 (訪蘇)사절단’ (이하 사절단) 25명은 수백 인파의 환송을 받으며..

[反 이승만계의 허망한 꿈 서재필 대통령 추대운동]

[反 이승만계의 허망한 꿈 서재필 대통령 추대운동]    일러스트 = 한상엽    이승만 견제하느라 대선판에 휘말린 '미국 시민 필립 제이슨'   갑신정변 실패 후 도미반세기만에 방한한 徐단독정부 반대 전면에 김구 · 김규식 등 협상파北 · 소련에 이용만 당해徐, 국민영웅 李에 백기    1884년, 서재필은 스무 살 약관의 나이에 갑신정변을 주도했다. 혁명이 실패하자, 일본을 거쳐 이듬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필립 제이슨이라는 이름으로 미국 시민권을 얻었고, 도서관 사서로 일하면서 야간 의과대학을 다니고 의사가 되었다. 갑오개혁 이후 사면돼 방한해서는 미국인 신분으로 중추원 고문에 임용돼 독립신문 창간, 독립협회 창립과 운영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해방된 지 2년이 가까워 오던 1947년 7월 ..

[광복 후 첫 하계 올림픽 출전 가는 길은 험난했다]

[광복 후 첫 하계 올림픽 출전 가는 길은 험난했다]    일러스트 = 한상엽    태극기 처음 휘날린 1948년 런던올림픽의 감격   스포츠 행정가였던맥아더 장군의 도움과재미동포들의 헌신 수뇌부 비명횡사에도역도 · 권투 등 출전해동메달 2개 따는 쾌거    한국 선수단이 처음 참가한 하계올림픽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보름 앞두고 개막한 제14회 런던올림픽 (1948년 7월 29일 ~ 8월 14일)이었다. 1940년 제12회 도쿄올림픽, 1944년 제13회 런던올림픽이 제2차 세계대전으로 취소되는 바람에 제14회 런던올림픽은 1936년 제11회 베를린올림픽 이후 12년 만에 열리는 국제 스포츠 제전이었다. 한국 선수단이 런던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1945년 11월 조선체육회가 일본인 주도의 ‘..

[일제 탄압의 상징 좌측통행 1946년 우측통행 실시]

[일제 탄압의 상징 좌측통행 1946년 우측통행 실시]    일러스트 = 한상엽    광복의 기쁨, 되찾은 우측통행의 감격   왼쪽 허리에 칼 차던사무라이들의 불문율식민지 조선에 이식 좌측통행 안 했다고홍수 피난민 들볶기도'버러지' 취급에 울컥    “오는 4월 1일부터 전차, 자동차 같은 승차물은 차도에서는 우측통행이 된다. 러치 군정장관은 12일 기자단 회견 석상에서 이를 언명하였는데, 민주의원에서는 일제시대에 오래전부터 해온 좌측통행을 개정하여 전차, 자동차, 자전거, 마차 등 차도 통행을 우측통행으로 하자는 의견이 있어서 군정청에서 이에 찬성하여 이를 법령으로 반포하게 된 것이다.” (조선일보, 1946. 3. 13) 1946년 4월 1일, 차량의 우측통행이 전격 실시되었다. 이로써 차량의 좌측..

[끝내 무산된 통일정부 노력 이승만 '單政 발언' 의 진실]

[끝내 무산된 통일정부 노력 이승만 '單政 발언' 의 진실]    일러스트 = 한상엽    "한반도의 주인을 일본에서 공산주의자로 교체하게 둘 수 없다"   모스크바발 신탁 결정한반도 공산화 야욕 본 李전국 돌며 반탁 운동 주도 "南만이라도 임시정부 수립北의 소련군 내쫓자"발언이 '단독정부' 로 와전좌익은 "분단 원흉" 매도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에서 공포된 미 ‧ 영 ‧ 소 3국 외상 (外相)의 협정 (모스크바협정)은 “한국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미 ‧ 소 ‧ 영 ‧ 중 4국이 최대 5년간 신탁통치를 실시한다” 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남북한 정당 ‧ 사회단체의 협의에 의해 구성되는 임시정부 수립을 지원하기 위해, 주한 미군‧소련군 사령부로 구성되는 미소공동위원회 (미소공위)를 창..

[고향 北에 남았다 비극 맞은 '모던보이' 백석과 고당 조만식]

[고향 北에 남았다 비극 맞은 '모던보이' 백석과 고당 조만식]    일러스트 = 한상엽    당대의 미남 시인을 불귀의 땅으로 내친 '붉은 편지'   조선일보 사장 지내고건국 나선 독립운동가 曺반공 · 반탁 죄로 총살돼 모더니즘 詩 명성 白사상 · 계급 문학 거부해양 치는 노동교화형 굴욕    “가난한 내가 /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 눈은 푹푹 날리고 /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 나타샤와 나는 /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 산골로 가자 출출히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1938) 백석은 조선일보 기자로 임용된 1934년 이후 토속적 ..

['응향' 필화 사건 유탄 맞은 화가 이중섭의 곤궁한 말년]

['응향' 필화 사건 유탄 맞은 화가 이중섭의 곤궁한 말년]    일러스트 = 한상엽    공산당식 예술의 정치화··· 그림밖에 모르던 이중섭은 질식했다   北 원산 동맹의 광복 시집이념 없는 애상詩 비판모멸 못 견딘 예술인 월남 '응향' 표지 · 삽화 그린 李표현의 자유 억압에 절망가족과 헤어져 쓸쓸한 삶    이중섭 하면 떠오르는 ‘은지화 (銀紙畵)’ 는 6 ‧ 25전쟁 이후 그의 피란 생활이 얼마나 고달프고 궁핍했는지 알려준다. 도화지를 살 돈이 없었던 피란 시절 이중섭은 담뱃갑 속 알루미늄 소재 은색 포장지를 송곳이나 못으로 긁어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지낼 수밖에 없었던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그림으로 달랬다. 이렇듯 ‘국민 화가’ 라는 수식어만큼이나 ‘가난한 화가’ 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

[美 군정기 한미 친선모임 '낙랑클럽' 의 역사적 공헌]

[美 군정기 한미 친선모임 '낙랑클럽' 의 역사적 공헌]    일러스트 = 한상엽    "말 안 통해 한미 외교 멈춰" 미군 지프차로 '부인 통역관' 모셔갔다   불안정한 정부 수립기고급 인재 모은 모윤숙"세계 평화 번영에 기여" 격조 높은 사교 파티로주한 외국인에 한국 홍보국군 위문과 예술 후원도    UN한국임시위원단 단장은 인도인 정치가 메논이었다. 1948년 1월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만 해도 그는 남한의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에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만난 모윤숙과 이승만의 거듭된 설득으로, 한 달 후 UN소총회에서 남한의 단독선거안이 통과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낙랑클럽은 바로 이 모윤숙과 메논의 만남과 우정을 이어준 단체였다. 그 과정을 연구한 서울대 최종고 교수는 낙..

[대한민국 민주주의 첫발 1948년 5 · 10 총선거]

[대한민국 민주주의 첫발 1948년 5 · 10 총선거]    일러스트 = 한상엽    좌익의 패악에도, 국민은 민주정부 수립에 표를 던졌다   적화통일 집착 남로당투표소 수백 곳 습격공무원 · 후보자 살해 불붙고 다리 끊겨도아침부터 줄 선 국민들투표율 95.5% 기록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국은 1947년 9월 한국 문제를 UN에 이관했다. UN 총회는 ‘UN 감시하에 남 · 북한 총선거’ 실시를 결의했고 1948년 1월 호주, 캐나다, 중국 등 8국 대표로 구성된 UN한국임시위원단 (이하 UN위원단)이 서울에 도착했다. 소련군 사령관은 UN위원단의 방북을 거부했고, UN 소총회는 ‘가능한 지역’ 에서라도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5 · 10 총선거는 국민이 직접 대표를 뽑아 헌법 제..

[한강의 기적 마중물 된 일본인 귀속 재산]

[한강의 기적 마중물 된 일본인 귀속 재산]    일러스트 = 한상엽    패전 후 일본인 71만명, 단돈 1,000엔씩 들고 조선을 떠났다   美, 日 사유재산까지 몰수韓 예산 8배 넘는 규모이승만 정부가 민간 불하 35년 수탈한 富로 이룬日기업 수천개 우리 품에토종 대기업들 쑥쑥 컸다    “1945년 8월 9일 이후 일본 정부, 공공기관, 단체, 회사, 개인 등이 소유한 일체의 재산은 1945년 9월 25일부로 미군정청이 접수하고 그 소유권을 행사한다.” (미군정 법령 제33호, 제2조. 1945. 12. 6.) 해방 당시 한국은 ‘세계 최빈국’ 과는 거리가 멀었다. 자본 축적 면에서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2위에 해당하는 상대적으로 산업화된 지역이었다. 1930년대 이후 공업화 정책에 따라, ..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