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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관의 해방 거리를 걷다 33

[좌우합작위가 드러낸 극심한 이념 갈등]

[좌우합작위가 드러낸 극심한 이념 갈등] 일러스트 = 한상엽 美군정이 만든 입법의원, '신탁통치 반대 결의안' 부터 통과시켰다 미국, 소련과 합의에 미련이승만 · 김구 배제하려온건중도파 김규식 육성 미군정이 합작위 지원입법의원 선거 치렀지만우파 대승에 美 체면 구겨 1946년 3월 덕수궁에서 미소공동위원회 (미소공위)가 시작되자, 미군정의 자제 요청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남한 전역을 순회하며 ‘반공 연설’ 을 이어갔다. “공산주의는 무서운 전염병인 콜레라와 같다. 공산주의와는 타협도 협력도 불가능하다. 한국을 구원할 유일한 길은 신탁통치와 공산주의를 철저하게 거부하는 길뿐이다.” 그 시기 한국을 방문한 이승만의 오랜 동지 로버트 올리버 교수에게 하지 중장은 “이승만은 과대망상증으로 거의..

[장덕수 암살 사건 재판 증인으로 소환된 백범]

[장덕수 암살 사건 재판 증인으로 소환된 백범] 일러스트 = 한상엽 증인석의 김구가 다리를 꼬았다··· "난 왜놈 외엔 죽이라 하지 않았소" 한민당 정치부장 장덕수5 · 10 총선거 앞두고 피살피의자는 모두 '김구 사단' 피고 10명에게 절 받은 金"경찰이 고문해 모략한 것"단독선거 거부, 38선 넘어 1947년 12월 2일 저녁, 한국민주당 (한민당) 정치부장 장덕수는 동대문구 제기동 자택에서 한민당 동지들과 함께 만찬을 나누며 유엔 결의에 따라 곧 치러질 총선거 대책을 논의했다. 그때 경찰 제복을 입고, 어깨에 카빈소총을 멘 청년 한 명과 검정 외투를 입은 청년 한 명이 찾아왔다. 현관으로 나간 장덕수는 경찰 제복을 입은 청년의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장덕수는 황해도 재령 출신으..

[전국을 피로 물들인 1946년 대구 10월 사건]

[전국을 피로 물들인 1946년 대구 10월 사건] 일러스트 = 한상엽 정책 헛발질이 낳은 기아 사태··· 성난 민심은 잔인하게 폭주했다 미곡 자유화에 쌀값 폭등'좌익의 성지' 대구에선콜레라 · 홍수까지 겹쳐 의대생들, 시신 앞세워"피끓는 지성인 일어나라"경찰 고문해 죽이고 약탈 미군 24군단 ‘군인들’ 이 주도한 미군정은 정무와 행정에서 여러모로 미숙했다. 대표적인 정책 실패가 미곡 정책이었다. 출범 직후인 1945년 10월 미군정은 ‘미곡의 자유시장’ (일반고시 제1호)을 공포해 1943년 이후 총독부가 시행해 온 미곡의 공출‧배급제를 전면 폐지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당연하고 상식적인 정책이었지만, 그 결과는 참담했다. 귀환 동포의 증대에 따른 수요가 격증한 데다 투기꾼의 매점..

[1948년 5 · 14 단전 사태와 전력 자립을 위한 사투]

[1948년 5 · 14 단전 사태와 전력 자립을 위한 사투] 일러스트 = 한상엽 北이 남측 전기 끊자··· 급파된 美 발전선이 암흑천지를 밝혔다 일제가 남긴 전력 인프라北 쏠려 南 얻어쓰던 처지툭하면 전기로 협박 · 교란 南 단독선거에 송전 중단美 발전선, 부산 · 인천항서6 · 25까지 버티며 맹활약 태평양전쟁 막바지 식민지 조선의 생필품 공급은 매우 열악했다. 식량이 부족해 미곡의 공출‧배급제가 실시되었고, 석유가 부족해 대체재인 송근유 (松根油) 제조를 위해 소나무 뿌리 채취에 열을 올렸다. 의복, 신발 등 기본적인 소비재 공급도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딱 하나, ‘전기’ 만큼은 차고 넘쳤다. 1930년까지만 해도 조선의 발전력은 5만여kW에 불과했고, 전등이 보급된 지역은 1..

[경성대학 등 통합하자 좌익 소요 '국대안 파동']

[경성대학 등 통합하자 좌익 소요 '국대안 파동'] 일러스트 = 한상엽 '대학 자치' 주장한 서울대 교수들, 월북해 김일성대 창설 해방 후 미군정 당국이국립 서울대 설립안 발표朝共 계열 교수들 반발 동맹휴학을 부추겼지만김일성대에서는 한번도자치를 요구하지 않았다 1924년 일본의 여섯 번째 제국대학으로 설립된 경성제국대학은 매년 50명 내외 한국인의 입학을 허용했다. 1945년 폐교될 때까지 한국인 졸업생은 다 합쳐도 800여 명에 불과했다. 역대 재직 교수 275명 중 조선인은 고작 4명이었고, 그나마도 폐교를 1년 앞두고 임용된 의학, 이공학 전공자였다. 해방과 함께 조선 유일의 대학이던 경성제대는 기능이 마비되었다. 일본인 교수와 학생은 서둘러 귀국길에 올랐고, 얼마 안 되는 한국..

[해방 조선을 멈춰세운 1946년 콜레라 팬데믹]

[해방 조선을 멈춰세운 1946년 콜레라 팬데믹]    일러스트 = 한상엽    남북 분단에 '호열자' 까지 덮쳤다··· 봉쇄된 눈물의 38선   전후 인도 · 中 거쳐온'호랑이가 물어뜯는 병'수액 부족해 1만명 죽어 콜레라 방역 내세워38선 월경 전면 금지좌익 소요에 혼란 가중    미군정이 공포한 ‘군정법령 제1호’ (1945. 9. 24)는 ‘위생국 설치에 관한 건’, 총독부 경무국 위생과를 폐지하고 ‘위생국’ 을 설치한다는 것이었다. ‘법령 제2호’ 인 ‘패전국 정부의 재산권 행사 금지’ 보다 하루 앞선 조치였다. 이를 통해 미군정은 주민의 생명과 건강에 직결되는 위생과 방역이 군정의 최우선 과제임을 천명했다. 비슷한 시기, 인도에서 시작된 콜레라는 중국 남부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콜레라는 근육 ..

[1946년 訪蘇 사절단과 소설가 이태준의 비극]

[1946년 訪蘇 사절단과 소설가 이태준의 비극]    일러스트 = 한상엽    소련이 선전하는 것만 보고 예찬 쏟아낸 '소련 사절단'   순수문학 좇던 이태준인민민주주의 공감하며38선 넘어 사절단 참여 돌아와 낸 '소련 기행' 은무비판적이고 낯뜨거워6 · 25 전쟁 후 北서 숙청    “참으로 황홀한 수개월이었다. 인간의 낡고 악한 모든 것은 사라졌고 새 사람들의 새 생활, 새 관습, 새 문화의 새 세계였다. 그리고 소련은 날로 새로운 것에로, 마치 바다로 향해 흐르는 대하 (大河)처럼 끊임없이 나아가고 있었다.” (이태준, ‘소련기행’) 해방 1주년을 닷새 앞둔 1946년 8월 10일, 소련군이 제공한 비행기 2대에 나눠 탄 ‘방소 (訪蘇)사절단’ (이하 사절단) 25명은 수백 인파의 환송을 받으며..

[反 이승만계의 허망한 꿈 서재필 대통령 추대운동]

[反 이승만계의 허망한 꿈 서재필 대통령 추대운동]    일러스트 = 한상엽    이승만 견제하느라 대선판에 휘말린 '미국 시민 필립 제이슨'   갑신정변 실패 후 도미반세기만에 방한한 徐단독정부 반대 전면에 김구 · 김규식 등 협상파北 · 소련에 이용만 당해徐, 국민영웅 李에 백기    1884년, 서재필은 스무 살 약관의 나이에 갑신정변을 주도했다. 혁명이 실패하자, 일본을 거쳐 이듬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필립 제이슨이라는 이름으로 미국 시민권을 얻었고, 도서관 사서로 일하면서 야간 의과대학을 다니고 의사가 되었다. 갑오개혁 이후 사면돼 방한해서는 미국인 신분으로 중추원 고문에 임용돼 독립신문 창간, 독립협회 창립과 운영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해방된 지 2년이 가까워 오던 1947년 7월 ..

[광복 후 첫 하계 올림픽 출전 가는 길은 험난했다]

[광복 후 첫 하계 올림픽 출전 가는 길은 험난했다]    일러스트 = 한상엽    태극기 처음 휘날린 1948년 런던올림픽의 감격   스포츠 행정가였던맥아더 장군의 도움과재미동포들의 헌신 수뇌부 비명횡사에도역도 · 권투 등 출전해동메달 2개 따는 쾌거    한국 선수단이 처음 참가한 하계올림픽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보름 앞두고 개막한 제14회 런던올림픽 (1948년 7월 29일 ~ 8월 14일)이었다. 1940년 제12회 도쿄올림픽, 1944년 제13회 런던올림픽이 제2차 세계대전으로 취소되는 바람에 제14회 런던올림픽은 1936년 제11회 베를린올림픽 이후 12년 만에 열리는 국제 스포츠 제전이었다. 한국 선수단이 런던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1945년 11월 조선체육회가 일본인 주도의 ‘..

[일제 탄압의 상징 좌측통행 1946년 우측통행 실시]

[일제 탄압의 상징 좌측통행 1946년 우측통행 실시]    일러스트 = 한상엽    광복의 기쁨, 되찾은 우측통행의 감격   왼쪽 허리에 칼 차던사무라이들의 불문율식민지 조선에 이식 좌측통행 안 했다고홍수 피난민 들볶기도'버러지' 취급에 울컥    “오는 4월 1일부터 전차, 자동차 같은 승차물은 차도에서는 우측통행이 된다. 러치 군정장관은 12일 기자단 회견 석상에서 이를 언명하였는데, 민주의원에서는 일제시대에 오래전부터 해온 좌측통행을 개정하여 전차, 자동차, 자전거, 마차 등 차도 통행을 우측통행으로 하자는 의견이 있어서 군정청에서 이에 찬성하여 이를 법령으로 반포하게 된 것이다.” (조선일보, 1946. 3. 13) 1946년 4월 1일, 차량의 우측통행이 전격 실시되었다. 이로써 차량의 좌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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