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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기념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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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협 농업박물관] 02 [농협 농업박물관] 02 초기 농경의 시작 신석기시대 우리나라의 신석기시대는 기원전 8,000년경부터 시작되었다. 신석기시대부터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지으면서 식량을 직접 생산하였으며 물과 먹을 것이 풍부한 바닷가나 강가에 움집을 짓고 공동체 생활을 하였다. 기원전 4,000년 무렵에는 평양 남경, 황해도 지탑리 등 중서부 지방을 중심으로 조, 수수와 같은 잡곡의 재배가 시작되었다. 돌괭이나 돌보습 등 간석기로 만든 농기구로 땅을 일구고 씨를 뿌려 원시적인 밭농사를 지었다. 당시에는 산이나 들에 불을 지른 뒤 땅을 개갠하는 화전 火田 위주의 농사였다. 여전히 사냥과 채집이 생계를 위한 주된 활동이었으나 자연환경 변화에 적응하며 이전의 생활방식에서 직접 생산을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초기 농경의 의..
[농협 농업박물관] 01 [농협 농업박물관] 01 관람안내 관람시간 화 ~ 일요일 (하절기) 3월 ~ 10월 : 09 : 30 ~ 18 : 00 (동절기) 11월 ~ 2월 : 09 : 30 ~ 17 : 30 입장마감시간 17 :00 휴관일 매주 월요일, 법정 공휴일, 설 · 추석 연휴, 근로자의 날 관람료 무료 교통안내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5번 출구 버 스 농협중앙회, 서대문역사거리, 적십자병원 정류소 주 차 인근 유료 공영주차장 이용 문의 TEL 02ㅡ2080ㅡ5727 ~ 8 서울시 중구 새문안로 16 농협 농업박물관 www.agrimuseum.or.kr 작가명 : 송은영 (宋恩英) 작품명 : 농도불이 (農都不二) ㅡ 비전 제작년도 : 2005. 5. 연자방아 硏子磨 소나 말을 이용하여 곡식의 껍질을 벗기거나 가루를 내는 ..
[화교역사관] 01 [화교역사관] 01 니하오 ! 나의 살던 고향은 화교가 한국에 처음 들어온 것은 1882년으로, 임오군란 때 한국에 파견된 군대를 따라 40여 명의 상인이 입국하였는데 이들이 한국화교의 시초이다. 그해 '상민수륙무역장정 (商民水陸貿易章程)' 을 체결하고 1884년 인천, 1887년 부산, 1889년 원산에 화상조계지 (華商租界地)가 설치됨에 따라 당시 화교 수는 인천에만 1,000명을 넘었다. 세계 어느 곳이든 화교들이 살고 있는 마을 앞에는 패루를 세웠다. 이것은 마을의 영역을 표시하기도 했지만, 마을 외부로부터 나쁜 것을 막아주는 벽사의 의미를 지녔다. 인천 차이나타운에도 중국 산동성에서 기와와 재료를 가져와 지었던 인천역 앞 제1패루 외에도 한중문화관 앞에 제2패루 (인화문), 자유공원으로 올라가는..
[한중문화관] 07 [한중문화관] 07 차이나타운 中華街 이국적 정취가 숨쉬는 화교의 본거지 인천 차이나타운은 1884년 4월 청국의 치외법권 지역으로 체결된 후로 화교들이 몰려와 생성되었습니다. 북성동, 선린동 일대의 5천 평에 청국의 영사와 학교가 설치되고, 중국의 산동반도와 정기적으로 배가 운영되면서 화교의 숫자는 더욱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화교들은 중국에서 가지고 온 식료잡화, 소금,곡물을 팔고 우리나라의 사금 등을 중국으로 보내어 상권을 장악하고 세력을 넓혀 나갔습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청관의 상권이 마비되면서 화교들은 대만, 미국, 동남아시아로 떠나고, 일부는 요리집과 잡화상들을 운영하거나, 일부는 부두근로자로 전락하기도 했답니다. 1948년 한국정부가 수립되면서 각종 제도적 제한, 차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ㅡ 역사관] 23 [대한민국역사박물관 ㅡ 역사관] 23 기업과 노동자의 해외진출 정부는 경제개발계획 목표성장률 달성을 위한 재원 확보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 계획을 달성하려면 국내 재원 뿐만 아니라 해외 재원도 필요했다. 정부는 외화 마련을 위해 수출공업을 육성하였고 기업과 노동자의 해외진출도 추진했다. 기업과 노동자들은 탄광, 바다, 밀림, 사막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세계 곳곳으로 진출했다. 한국의 기업과 노동자는 우수한 기술력과 근면성실함으로 세계 각국에서 인정받았다. 당시 그들이 국내로 송금한 외화는 국민소득 향상과 경제성장에 기여했다. 세계로 뻗는 한국의 기술 | 한국정책방송원 | 6분 36초 https://www.ehistory.go.kr/page/view/movie.jsp?srcgbn=KV&mediaid=108..
[문자와 문명의 위대한 여정] 13 [문자와 문명의 위대한 여정] 13 세상을 바꾼 기술, 인쇄술 처음 만들어진 문자는 일부 계층의 전유물이었다. 이들은 정치와 종교와 지식을 독점하고, 사람들을 지배하는 수단으로 문자를 활용하였다. 그러나 도시와 상업이 발달하고 새로운 시민 계층이 성장하면서 일반 사람들도 문자가 필요해졌다. 능러난 문자 수요는 다양한 독서층을 형성하며 그대로 인쇄술의 발전을 이끌었다. 인쇄술은 문자를 종이 등에 담아서 다량으로 복제하는 기술이다. 인쇄술을 통해 다수의 사람이 손쉽게 문자를 접할 수 있었다. 소수의 사람만 누리던 지식이 일반인에게도 전수되었고, 지식은 광범위하게 퍼져나갈 수 있었다. 인쇄술은 중세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근대 사회로 나아가는 촉매가 되었다. 반면 우리나라는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 인쇄술을 발명하여..
[문자와 문명의 위대한 여정] 12 [문자와 문명의 위대한 여정] 12 막고굴 육자진언비 탁본 복제품 文字必須改革, 要走世界文字共同的拼音方向. 문자는 반드시 개혁해야 하며, 세계 문자와 함께 병음 (拼音)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마오쩌둥 (毛澤東) 한자간화방안 한어병음방안 고에쓰 우타이본, 도조사 룩 번 띠엔 팜 반 루언 기증 복제품 한자 간화 방안 중국은 문자 개혁의 일환으로 한자의 형태를 간소화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1956년에 '한자간화방안 (漢字簡化方案)'이 시행되면서 예술 분야와 같이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고 번체자 (繁體字) 사용이 금지되었다. '한자간화방안'이 시행된 후에 표의문자인 한자의 본질적인 속성과 아름다움이 훼손되었다는 부정 평가와 함께 문자 사용이 쉬워져서 문맹 퇴치를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긍정 평가가 공존하였다...
[문자와 문명의 위대한 여정] 11 [문자와 문명의 위대한 여정] 11 조전비 탁본 조전비는 조전 (曹全)의 업적을 칭송하는 내용의 비이다. 조전은 돈황의 명문가 출신으로, 한나라 합양 (郃陽)의 현령 (縣令) 벼슬을 지냈다. 그래서 본래 명칭은 '한합양령조전비 (漢郃陽令曹全碑)' 라고도 한다. 명나라 (明, 1368 ~ 1644) 때 섬서성 (陝西省) 합양현 (郃陽縣, 오늘날 허양현 (合陽縣))에서 출토되었고, 현재 서안 비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조전비는 한나라 비석 중 보존 상태가 제일 완벽하다. 비문의 자간과 행간이 균형감있게 배치되고 글꼴이 수려하여 역대 서예가들이 예기비와 함께 대표적인 예서 (隸書) 글씨본으로 삼는다. 청나라의 만경 (萬經)은 조전비에 대해서, "수려한 아름다움과 날아오를 듯한 생동ㄱ감이 있어 속박되지 않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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