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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25전쟁 60년/임진강을 건너온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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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㊻ 고등학생 김윤환(전 신한국당 대표) [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㊻ 고등학생 김윤환(전 신한국당 대표) 1950년 8월 1일, 한국에 도착한 월튼 워커 미 8군 사령관은 지연 작전을 펴고 있던 국군과 유엔군을 낙동강 선으로 철수시키기로 결심했다. 미군 정보당국이 7월 초순 이후 전혀 행방을 파악하지 못했던 북한군 6사단의 위치가 비로소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호남으로 우회했다. 모두 2개 사단이 호남을 거쳐 경상도 서부 지역으로 쳐들어 왔다. 북한군 6사단은 거창과 진주를 점령하더니 급기야 마산까지 공격해 왔다. 미 8군이 크게 당황한 이유다. 워커 장군은 경북 상주에 있던 미 25사단을 36시간에 걸친 긴급 철도 수송 작전으로 마산 전선에 투입했다. 적은 남한 청년을 총알받이로, 그래도 총구를 겨눌 수밖에 … 낙동..
[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㊺ 별을 달다 [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㊺ 별을 달다 국군 1사단은 국군 17연대, 미군 24연대와 연합작전(聯合作戰: 두 나라 이상의 군대가 같은 편이 되어 함께 벌이는 작전)을 경북 상주에서 펼쳤다. 갈령을 넘어오는 적 15사단 주력(主力)을 공격해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7월 23일부터 이틀에 걸쳐서였다. 우연히 맞은 기회였지만, 나는 이곳에서 한국군과 미군이 함께 적을 맞아 싸우는 연합작전을 처음으로 수행했다. 국군이 미군의 도움을 받으면 북한군을 제대로 물리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던 기회이기도 했다. 7월 25일 김홍일 1군단장으로부터 새 명령이 내려왔다. 지금의 전선(戰線)을 미 24연대에 맡기고 상주의 상주읍에 다시 모여 조직을 재편한 뒤 상주 함창읍으로 진출하라는 내용..
[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㊹ ‘미국의 힘’ 생각하게 한 지도 [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㊹ ‘미국의 힘’ 생각하게 한 지도 내가 미군을 볼 때마다 악착스럽게 구했던 게 있다. 배를 채워줄 C레이션이 아니었다. 그들이 마구 피워대던 질 좋은 담배 ‘럭키스트라이크’도 아니었다. 무기가 탐이 났지만 그들은 그것을 아무에게나 건네주지 않는다. 장비도 그들이 함부로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적에게 쫓기면서, 때로는 지연전을 펼치는 다급한 과정에서 미군을 만날 때마다 늘 그들에게 구걸하다시피 해서 얻어낸 것은 바로 지도였다. 지도로 하늘을 얻다 … 좌표 이용한 ‘공중지원’ 길 열려 대한민국 전도(全圖)를 보면서 작전을 구상하는 것과 축척 5만 분의 1짜리 정밀 지도를 보고서 작전 계획을 짜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전도로 지형을 읽는 것은 고..
[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㊸ 후퇴 중의 희망, 그러나 떠나는 이들 [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㊸ 후퇴 중의 희망, 그러나 떠나는 이들 호톤 화이트 대령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때 15연대장 최영희 대령이 내게 뛰어와 “저기에 굉장히 큰 대포가 있습니다”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말로만 듣던 미군의 155㎜ 곡사포를 처음 봤다는 것이다. 나도 얼른 뛰어가 봤다. 바퀴를 진창에 빠뜨린 야포가 보였다. 거대한 몸집이었다. 6·25전쟁이 터질 때까지 국군이 보유하고 있던 야포는 105㎜ 곡사포가 전부였다. 사거리와 화력에서 전혀 비교가 되지 않는 155㎜ 포가 눈앞에 있었다.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야포였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전쟁에서 무기체계가 지니는 비중이 가볍지 않음을 새삼 생각하게 됐다. 미군 155mm포, 5만분의..
[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㊷ 후퇴 속에 거둔 승리 [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㊷ 후퇴 속에 거둔 승리 국군 1사단의 고행은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기쁨도 있었다. 내가 사단 병력을 인솔하고 조치원에 도달했을 때다. 기차역에서 반가운 얼굴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임진강 전선에서 헤어져 각자 분산됐던 1사단 병력이었다. 이들은 용케도 기차를 얻어 타고서 사단에 합류하기 위해 조치원에 도착한 것이었다.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뻤다. 사지(死地)에서 겨우 살아 집으로 돌아온 아우들을 맞는 형의 심정이었다. 여교사가 적 위치 귀띔 … 국군 600명이 북한군 3000명 섬멸 수백 명이었다. 나는 한달음에 그들 앞으로 달려갔다. “너무 기쁘다. 우리 이제 다시 전력을 회복해 다시 한번 적과 싸워보자….” 그렇게 외쳤던 것 같다. 장병들도 ..
[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㊶ 북한군 포로가 된 미군 장성 [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㊶ 북한군 포로가 된 미군 장성 윌리엄 딘 소장의 미 24사단이 6·25전쟁 발발 직후 한반도에 급하게 뛰어든 것을 둘러싸고 약간의 논쟁이 있다. ‘대단히 성공적이었다’는 평이 있는가 하면 ‘섣불렀다’는 평가도 있다. 전자는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 후자는 그 후임자인 매슈 리지웨이의 얘기다. ★★ 딘 소장, 적 탱크에 직접 바주카포 쏘며 분전했지만 … 내가 딘 소장을 처음 만난 곳은 비행기에서였다. 나는 1948년 육본 정보국장 시절 업무차 당시 강릉에 있던 국군 8사단을 방문했다. 군 수송기를 타고 강릉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대관령을 넘어설 때 난기류로 비행기가 심하게 흔들렸다. ‘추락하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그때 비행기에 같이 ..
[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㊵ 참전한 미군부대를 만나다 [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㊵ 참전한 미군부대를 만나다 경기도 시흥에서 병력을 수습해 전열을 가다듬고 있던 때에 육본으로부터 명령이 왔다. 경기도 용인의 풍덕천 방향으로 이동하라는 내용이었다. 1950년 7월에 들어서면서 적의 공세가 더 강해지고 있었다. 한강 방어선을 뚫은 적이 수원을 포위 공격하기 위해 서남쪽으로 내려오던 상황이었다. 육본은 내게 풍덕천 방향으로 진출해 적을 막으라고 지시했다. 한강 이남으로 내려온 뒤 처음 받는 명령이었다. “그런 적쯤은 … ” 장담하던 미 선발대, 하루 만에 허겁지겁 … 많이 모였다고는 하지만 당시 1사단 병력은 3000명이 채 안 됐다. 사단이 아니라 연대 규모의 병력이었다. 지금은 골프장 ‘수원CC’가 들어서 있는 풍덕천 골짜기에 병력을 우..
[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㊴ 도시는 병사를 잡아먹는다 [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㊴ 도시는 병사를 잡아먹는다 북한 공군기가 1950년 6월 28일 김포공항에 계류해 있던 미 공군 수송기를 폭격해 화염이 일고 있다. 국군은 한강 남쪽 시흥 지역에서 지연작전을 펼쳤다. [백선엽 장군 제공] ‘도시는 병사를 잡아먹는다’. 전쟁사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 말의 뜻을 쉽게 이해할 것이다. 부대가 도시에 오래 머물면 전투력을 상실하기 십상이라는 뜻이다. 도시는 평안함의 유혹을 풍기는 곳이다. 향락도 그 안에 숨어 있어 장병의 마음을 잡아끈다. 북한군 서울서 사흘 지체 … 김일성 “뼈아픈 패착” 훗날 토로 평안함에 묻혀 안일(安逸)함을 생각하다 보면 병사들은 탈선하기 쉽다. 전선의 살벌함과 피곤함이 싫어지면서 전투력이 크게 깎인다. 6월 28일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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