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㊶ 북한군 포로가 된 미군 장성
윌리엄 딘 소장의 미 24사단이 6·25전쟁 발발 직후 한반도에 급하게 뛰어든 것을 둘러싸고 약간의 논쟁이 있다. ‘대단히 성공적이었다’는 평이 있는가 하면 ‘섣불렀다’는 평가도 있다. 전자는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 후자는 그 후임자인 매슈 리지웨이의 얘기다.
★★ 딘 소장, 적 탱크에 직접 바주카포 쏘며 분전했지만 …
내가 딘 소장을 처음 만난 곳은 비행기에서였다. 나는 1948년 육본 정보국장 시절 업무차 당시 강릉에 있던 국군 8사단을 방문했다. 군 수송기를 타고 강릉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대관령을 넘어설 때 난기류로 비행기가 심하게 흔들렸다. ‘추락하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그때 비행기에 같이 타고 있던 사람이 딘 소장이다. 그는 당시 미 군정장관 자격으로 강릉을 시찰하러 가던 길이었다. 동승했던 사람들이 모두 불안감에 떨고 있는데 오직 그만이 태연했다. 아무런 흔들림이 없었다. 아주 담대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는 맥아더 사령관 밑에서 24사단을 지휘하며 일본에 주둔하다가 6·25에 뛰어들었다. 일본은 주둔군에는 ‘천국’이었다. 전쟁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 훈련도 제대로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부대에 맥아더 사령관은 “당장 한국으로 가라”고 명령했다.
미 24사단의 스미스 선발 부대는 비행기 편으로 50년 6월 30일 부산 수영비행장에 도착했다. 후속 부대는 그보다 늦게 도착했다. 평택과 오산, 다시 금강 주변에 방어선을 설정한 24사단이 공을 들여 지키고자 했던 곳은 대전이었다. 금강 방어선이 무너진 다음 24사단은 대전을 3일 동안 지켰다. 나중에 열차 편으로 후퇴하려고 했으나 대전 외곽의 터널이 적에게 점령당해 수포로 돌아갔다.
이승만 대통령(왼쪽)이 6 · 25전쟁 중 미군 장성으로는 유일하게 북한군에 잡힌 뒤 3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다 돌아온 윌리엄 딘 소장(가운데)에게 1953년 9월 4일 무공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오른쪽은 당시 일본 도쿄에 주둔했던 미 극동군사령부 마크 클라크 대장이다. [백선엽 장군 제공]
대전 시내에서 딘 소장은 힘겹게 싸웠다. 별 둘을 단 딘 소장이 대전 로터리에서 3.5인치 바주카포를 적 탱크에 직접 발사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적은 너무 많았다. 24사단은 당시 ‘경(輕)보병’급의 사단 편제였다. 한국으로 떠나라는 맥아더 사령관의 명령을 신속히 이행하느라 무기를 제대로 챙겨 오지 못했던 것이다.
그 뒤의 결과는 잘 알려진 대로다. 딘 소장은 미군 장성으로는 유일하게 6·25전쟁에서 북한군의 포로가 됐다. 그는 대전 전투에서 밀린 뒤 금산으로 가다가 실종됐다. 평소 습관대로 부관도 없이 혼자 다니다가 길을 잃었다. 산속에서 헤매다가 금산의 어느 마을에서 주민의 신고로 북한군에 붙잡혔다.
전술적으로 보자면 미 24사단의 6·25전쟁 참전은 실패다. 상당 기간 훈련도 제대로 받지 않은 군대를 전선에 파견한 것은 어느 모로 보나 패착이다. 실제 선발로 도착한 스미스 대대는 제대로 전투를 해 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적에게 밀렸다. 딘 소장이 포로가 된 점도 미군에는 매우 뼈아픈 손실이다.
그러나 전략적인 측면에서는 다르다. 금강과 대전에서 24사단이 수행한 전투로 인해 적은 일정 기간 남하할 수 없었다. 그리고 미군이 6·25전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는 점을 북한과 소련에 분명히 알렸다. 그들은 이 때문에 향후 공격 진로 등을 새로 조정하는 등 얼마간 혼란에 빠졌다. 미군의 참전으로 대한민국도 크게 고무됐다.
맥아더는 24사단 일부 병력의 희생을 감수했던 인물이다. 그에 비해 전술적인 가치를 따지는 리지웨이 장군의 눈에는 24사단의 노고가 그저 덧없는 희생으로만 비쳤을 수 있다. 이 점에서 맥아더와 리지웨이는 분명히 다르다. 맥아더는 공산국가와의 전쟁을 미국인의 희생보다 더 큰 차원에서 다룬 인물이고, 리지웨이는 미국 군대의 손실에 눈길을 더 둔 사람이다.
딘 소장은 압록강 근처 만포진 포로수용소에서 3년을 보냈다. 나는 두 번째로 참모총장을 할 때인 58년 방미 길에 그를 다시 만났다. 전 단락에서 이미 소개한 대로다. 수용소에서 누군가 그를 찾아와 “남쪽의 백선엽을 아느냐”고 묻기에 “잘 안다”고 하자 모포와 음식을 남몰래 더 갖다 줬다는 그 얘기다. 그에게 친절을 베푼 이는 안흥만이라는 사람으로, 내가 부산에서 5연대장을 맡고 있을 때 데리고 있던 부하였다. 나중에 포로로 잡혔다가 인민군 장교가 됐던 인물이다.
샌프란시스코 육군장교회관에서 함께 점심을 하던 딘 소장은 한국에서 생활하던 때를 회상하면서 “백 장군, 요즘 내가 말이지요… 김치를 잘 담근답니다. 한국에서 생활하다가 김치 맛에 빠졌는가 봅니다” 하고 웃으면서 말한 기억이 난다. 그는 한국을 사랑했다. 김치까지 담가 먹었으니 요샛말로 하면 ‘한국 음식 매니어’였던 셈이다. 용감했던 딘 소장은 81년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백선엽 장군
[출처: 중앙일보] [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㊶ 북한군 포로가 된 미군 장성
[전쟁사 돋보기] 바주카포
6·25전쟁에 동원된 획기적인 무기 가운데 하나가 미군의 바주카포다. 미 24사단이 한반도에 처음 투입될 때 함께 들어왔다. 바주카포는 구경 3.5인치(88.9㎜)의 대전차 로켓포다. 공식 명칭는 M20A1이다. 로켓포탄을 발사할 때 나오는 후폭풍이 로켓포의 뒤로 빠져나가면서 그 반동력으로 포탄이 날아가는 원리다.
북한군 T-34 탱크 장갑 뚫는 파괴력
전쟁 발발 당시 한국군이 보유한 대전차 무기는 2.36인치 로켓포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이는 북한군이 공격 전면에 배치했던 T-34 전차를 파괴할 수 없었다. 2.36인치 로켓포의 관통력이 12.5㎝에 불과해 T-34의 전면 장갑(두께 24㎝ 수준)을 뚫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군이 바주카포를 들고 오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바주카포가 발사하는 대전차포탄 M28은 27.9㎝의 강철판을 뚫을 수 있었다. 이 로켓포탄에 T-34 전차가 맞으면 장갑이 파괴되면서 승무원이 치명상을 입는다. 한국군과 미군은 바주카포를 사용하면서 북한의 전차에 대해 자신감을 얻게 됐다.
바주카포는 제2차 세계대전 때인 1942년 개발됐다. 2.36인치 로켓포를 대체하기 위해서였다. 바주카포는 6·25 종전 뒤에도 베트남전을 비롯한 여러 전쟁에서 사용됐다. 일부 국가에선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성능·제원=길이 152.4㎝, 구경 88.9㎜(3.5인치), 무게 6.5㎏, 최대사거리 913.5m
김민석 군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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