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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복거일의 이승만 오디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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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⑩ 강한 국군의 탄생] [⑩ 강한 국군의 탄생] 동부전선 시찰 중 지프에 올라 즉석연설 1951년 동부전선을 시찰하는 도중 지프에 올라 즉석연설을 하며 장병들을 격려하는 이승만 대통령. 해방 직후부터 군대 양성을 강조한 이승만은 1951년 미군 지휘부에 한국군의 전력 증강을 요청했지만 미군 지휘부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국군 6사단이 1951년 5월 용문산 전투에서 대승한 뒤 미군 지휘부의 생각이 달라졌고, 이후 국군의 규모와 전력이 늘어났다. /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 (기파랑) 용문산 대승으로··· 이승만의'강한 국군' 꿈이 실현됐다 美 지휘부, 남한 국방력 강화 외면 경비대라 부르며 무기 지원 거부 전쟁 초반 중공군에 잇달아 패배 1951년 5월 북한강 건너온 중공군 6사단이 용문산서 막아내고 반격 1..
[⑧ 6 · 25 전쟁과 초기 대응] [⑧ 6 · 25 전쟁과 초기 대응] 맥아더에게 훈장 수여하는 이승만 6 · 25 전쟁 당시인 1950년 9월 29일 중앙청에서 열린 서울 환도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뒤 약 2주일 지난 9월 28일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에 점령당했던 서울을 탈환했다. / 조선일보DB "전투기 보내달라" 6월 26일 새벽 3시, 잠든 맥아더를 깨웠다 6월 25일 오전 10시 첫 보고받아 주미대사 불러 무기 · 탄약 요청 軍에 지시해 한강 방어선 구축 부관이 맥아더 전화 안바꿔주자 "미국인도 한명씩 죽을것" 엄포 그날 오전 전투기 지원 끌어내 열세에도 항복 대신 저항 선택 외국 도움 불확실한 상황서 결단 軍 역량 집중 위해 ..
[⑰ <끝> 이승만이 남긴 교훈들] [⑰ 이승만이 남긴 교훈들] 뉴욕서 '영웅 행진' 카퍼레이드 미국을 공식 방문한 이승만이 1954년 8월 2일 뉴욕시가 마련한 '영웅 행진' 카퍼레이드에서 뉴욕시민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맨 앞 차량 일어선 사람이 이승만이다. 한국 근현대사의 중요한 현장마다 함께했던 이승만은 전체주의의 위협을 경계하며 자유민주주의가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힘썼다. /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 (기파랑) 대세 거슬러 지킨 자유민주주의··· 이승만 삶을 배워야할 이유다 러 공산주의 본질 깨닫고 경계 안으로는 압제 밖으론 팽창 반복 현재 우크라 침공으로 이어져 미, 평양 입성후 미군정 고집 북한의 압제적 체제 무너져도 美 · 中 등 강대국들 개입 우려 대만 · 휴전선은 처음부터 연결 중공군, 北 구원하러 6 · 2..
[⑮ 이승만의 허물] [⑮ 이승만의 허물] 멱살 잡힌 국회 부의장 1954년 11월 29일 최순주 국회부의장이 제2차 개헌안 가결을 선언하자 이철승 의원이 최 부의장 멱살을 잡고 항의하는 모습. /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 (기파랑) 문제는 사사오입보다 '종신 대통령' 길을 연 개헌 이었다 대통령 임기 중임 제한한 규정 "개헌 공포한 대통령은 예외" 개헌안에 부칙 달아 편법 우회 이기붕, 1956년 부통령 선거 지자 1960년 조직적 부정 선거 획책 4월 19일 서울서 대규모 시위 경찰 발포로 학생 100여명 숨져 이승만, 일주일 뒤 하야 선언 1954년 11월 27일 국회는 제2차 헌법 개정안을 표결에 부쳤다. 개표해 보니, 찬성 135표, 반대 60표, 기권 7표였다. 개헌안은 재적 의원의 3분의 2 이상이 찬..
[ ⑯ 우남의 후계자] [ ⑯ 우남의 후계자] 이승만 서거 후 프란체스카 여사 만난 박정희 이승만 서거 후 한국으로 돌아온 프란체스카 여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 박정희의 경제정책인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은 이승만이 추진한 '경제개발 3개년 계획' 에 바탕을 두었다. 그런 측면에서 이승만의 실질적 후계자는 박정희였다. /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 (기파랑) 독립운동 세대서 경제 발전 세대로··· 이승만 후계자는 박정희였다 김구는 국내 정치 뿌리 얕았고 정적 암살 혐의로 입지 축소돼 미군정이 택한 김규식은 내리막 명망 높던 송진우 · 장덕수도 희생 장면 정권은 혼란 속에 내부 분열 박정희, 시장경제 중요성 깨닫고 이승만 성취 토대로 '한강의 기적' 경제 · 안보 밑거름 된 한일 수교 이승만이 ..
[⑬ 1954년 한미상호방위조약] [⑬ 1954년 한미상호방위조약] 포사격 훈련 보는 이승만 · 아이젠하워 · 백선엽 1952년 12월 4일 경기 광릉 수도사단에서 아이젠하워 (앞줄 왼쪽에서 둘째) 당시 미 대통령 당선자가 망원경으로 기갑부대의 기동, 포 사격 훈련을 참관하는 모습. 앞줄 왼쪽은 이승만 대통령이고, 오른쪽 끝에는 백선엽 육군참모총장이 서 있다. 1953년 7월 12일 미국과의 합의를 통해 한국은 휴전에 반대하지만 방해하지 않기로 했고, 미국은 휴전이 성립된 뒤 빠른 시일 안에 한국과 상호 방위 조약을 맺기로 약속했다. / 조선일보 DB '조국 수호' 밀서 들고 美 찾은 지 50년만에··· 한미방위조약 맺었다 이승만 끌어내리려 했던 美 李가 반공포로들 전격 석방하자 美, 비밀리에 李 내치려 했지만 한국민 반발 우려해 대화 ..
[⑫ 6 · 25 반공 포로 석방] [⑫ 6 · 25 반공 포로 석방] 풀려난 반공 포로들, 이승만 초상화 들고 행진 석방된 반공 포로들이 태극기와 이승만의 초상화를 들고 행진하고 있다. 이승만은 6 · 25전쟁 휴전 협상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1953년 6월 18일 반공 포로 2만7000여 명을 석방했다. 반공 포로들이 고국에서 추방되거나 북한으로 끌려갈 위험에서 구한 것이었다. /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 (기파랑) 美 반대에도 반공포로 석방··· 납북될뻔한 남한 청년 2만명 구했다 휴전 회담 쟁점이었던 '포로 송환' 北에 갈제징집 당한 남한 장정들 수용소서 친공포로들 박해 시달려 매일 인민재판 받고 처형까지··· 유엔군은 회담 의식해 대응 안해 美 주도 휴전 반대하며 '석방 작전' 수용소 철조망 끊고 포로들 구출 美 등 전세..
[⑪ 이승만은 왜 반대했나] [⑪ 이승만은 왜 반대했나] 아이젠하워 만나 태극기 선물 6 · 25 전쟁 중이던 1952년 12월 2일 한국을 방문한 미국 대통령 당선인 아이젠하워가 미군 부대 시찰 도중 이승만에게 태극기를 선물받고 있다. 아이젠하워는 1952년 11월 실시된 미국 대선에서 휴전을 공약했다. 1951년 7월 휴전협상이 시작된 이후 이승만이 지속적으로 휴전에 반대하자 미국은 이승만의 대통령 재선을 막는 방식으로 축출하려고 했다. /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 (기파랑) "적이 다시 힘 키울 기회를 줄 순 없소" 이승만은 휴전을 반대했다 미국의 휴전 협상에 적극 비판 "언젠가 중국이 다시 침입한다면 누가 함께 싸워준다는 보방 없다" 국군 내부선 모반 움직임 참모총장 이종찬 등 日軍 출신들 미국에 은밀히 군사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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