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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25전쟁 60년/임진강을 건너온 적

[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㊹ ‘미국의 힘’ 생각하게 한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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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㊹ ‘미국의 힘’ 생각하게 한 지도

 

 

 

내가 미군을 볼 때마다 악착스럽게 구했던 게 있다. 배를 채워줄 C레이션이 아니었다. 그들이 마구 피워대던 질 좋은 담배 ‘럭키스트라이크’도 아니었다. 무기가 탐이 났지만 그들은 그것을 아무에게나 건네주지 않는다. 장비도 그들이 함부로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적에게 쫓기면서, 때로는 지연전을 펼치는 다급한 과정에서 미군을 만날 때마다 늘 그들에게 구걸하다시피 해서 얻어낸 것은 바로 지도였다.


지도로 하늘을 얻다 … 좌표 이용한 ‘공중지원’ 길 열려

 

 

대한민국 전도(全圖)를 보면서 작전을 구상하는 것과 축척 5만 분의 1짜리 정밀 지도를 보고서 작전 계획을 짜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전도로 지형을 읽는 것은 고산자(古山子) 김정호 선생이 만든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보면서 전쟁을 치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를테면, 조선시대의 장수들이 수행했던 전쟁의 시야(視野)와 같은 것이다.



대한민국이 출범할 때 우리 군도 5만 분의 1 지도에 착안했다. 일본이 한반도를 강점해 통치하던 일제시대에 그 지도는 이미 만들어졌다. 일본은 한반도와 중국 동북 지역을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정밀한 지형을 읽을 수 있는 5만 분의 1 지도를 만든 것이다.



어느 때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일본은 삼각측량법(三角測量法)을 사용해 한반도 지형을 세밀하게 측정했다. 그런 뒤에 만든 게 한반도 5만 분의 1 지도다. 지형에 대한 측량을 주도한 곳은 식민지 침탈에 앞장섰던 동양척식주식회사(東拓)였다. 그러나 그 원판은 일본의 참모본부 안에 있던 육지 측량본부가 보유하고 있었다.



일본이 패망한 뒤에 점령군으로 일본에 진주한 미군의 도쿄 유엔군총사령부(GHQ)는 지도 원판을 확보한 뒤 한국 정부에 이를 알려줬다. 한국 정부는 당시 원판을 인쇄해 지도를 확보했다. 그러나 웬일인지 그 지도를 가장 필요로 하는 군대에는 보급하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정보국장으로 재직하던 1948년에 윤치영 내무장관을 찾아간 일이 있다. 내무부가 그 지도를 보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윤 장관을 만나자마자 “장관님, 군대에 그 지도가 꼭 필요합니다. 지도를 인쇄해 군대에 보급해야 합니다. 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윤 장관은 내 요청을 거절했다. 그는 “그 지도는 내무부 토목과에서 관리하고 있으니, 국방부는 일절 간여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윤 장관을 다시 찾아갔다. 지도를 내달라고 또다시 요청했다. 군대에서 상세한 지도가 왜 필요한지에 대한 역설도 덧붙였다.



그제야 윤 장관은 “꼭 필요하다고 하니, 가져가서 인쇄를 하시게” 하면서 내줬다. 나는 이 지도를 육군 공병감실에 가져다준 뒤 인쇄를 하도록 했다. 그 뒤에 육본을 통해 각 주요 부대에 이 지도가 전달됐다.



6·25전쟁 초기에 일선의 각 주요 사단은 이 지도를 보면서 작전을 수행했다. ‘대동여지도’급의 전도를 보고 수행하던 것과는 다르게 세밀한 전술을 발휘할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것도 구형이었던 셈이다. 미군의 지도와 비교해보면 그렇다는 얘기다.

 

 

 

1950년 8월 국군 1사단장이던 백선엽 장군(왼쪽)이 신성모 국방부 장관에게 지도를 가리키며 전황을 설명하고 있다. [백선엽 장군 제공]

 

 

 

일본 지도는 컬러가 아닌 흑백이었다. 컬러로 인쇄된 미군의 지도에 비해 입체감에서 훨씬 뒤떨어짐은 물론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군의 지도에는 좌표(座標)가 세밀하게 그려져 있었다는 점이다. 일본이 그린 지도에는 그런 세밀한 좌표가 없었다. 좌표는 나에게 획기적인 것으로 보였다.



주먹구구식으로 작전지역을 설명하던 방식을 탈피할 수 있었다. 좌표에 그려진 부호로 서로 약속 장소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포탄이 떨어지는 탄착(彈着) 지점을 세밀하게 그어진 좌표로 이야기하는 것과, 지명을 말한 뒤 “그곳으로부터 어디쯤에 쏴달라”고 하는 것은 포격(砲擊)에서는 천양지차(天壤之差)인 셈이었다.



더구나 미국은 측량의 나라다. 백인들이 동부에서 광활한 서부를 개척해갈 때 끊임없이 땅을 측량한 경험이 쌓여 있던 나라다. 그들이 만든 지도는 세밀하면서 매우 정확했다.



이런 지도 없이 전쟁을 일정기간 수행했던 게 오히려 신기한 일이다. 국내전이었기에 망정이지, 낯설고 물선 다른 나라에서 벌어진 전쟁이었다면 국군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부대원 대부분이 태어나고 잘 알고 있던 땅, 그 생김새를 잘 알고 있었기에 국군은 버틴 것이다. 쌀이 있는 곳도 잘 알고 있었고, 어디든지 가면 있었던 된장독, 알고 캐먹으면 맛있게 끼니를 때울 수 있는 나물의 소재지를 잘 알았기 때문에 국군은 이 전쟁을 그나마 겪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미군의 5만 분의 1 지도. 이는 새로운 전쟁을 예고하는 틀이었다. 미군의 지도로 가능해진 것은 공중 지원과 새로운 차원의 포격이다. 북한군도 소련의 지원을 받아 손에 쥔 정밀지도를 갖고 있었지만 미군 지도의 정밀성에는 뒤졌다. 나는 미군의 지도를 보며 많은 것을 생각했다. 재래식 전투는 이제 끝이다. 막강한 물량과 첨단의 시야를 지닌 미군의 힘을 이용하지 못하면 이 전쟁에서 결코 승리를 바랄 수 없었던 것이다.


백선엽 장군

 


[출처: 중앙일보] [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㊹ ‘미국의 힘’ 생각하게 한 지도

 

 

 

[전쟁사 돋보기] 군사지도

 

 

 

 

 

 

군대가 작전계획을 짜고 수행할 때 사단 차원에서는 보통 축척 5만 분의 1 지도를 사용한다. 그보다 규모가 작은 전투에서는 2만5000분의 1 지도를 쓴다. 전투 지형을 세세하게 살피면서 공중 폭격과 지상 포격(砲擊)을 동원하는 데 보다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전반적인 전황을 살필 때는 10만 분의 1 지도를 이용한다. 그래도 군사 작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은 5만 분의 1 지도다. 요즘은 디지털 지도도 동원한다. 컴퓨터로 읽는 입체적인 지도다. 미국에서 한반도 지형을 디지털화한 것을 국군이 지원받아 사용하고 있다. 좌표와 지형이 즉각적으로 연결돼 효율이 매우 높다. 지형과 지물에 대한 입체적인 이미지도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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