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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25전쟁 60년/임진강을 건너온 적

[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㊸ 후퇴 중의 희망, 그러나 떠나는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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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㊸ 후퇴 중의 희망, 그러나 떠나는 이들

 

 

 

호톤 화이트 대령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때 15연대장 최영희 대령이 내게 뛰어와 “저기에 굉장히 큰 대포가 있습니다”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말로만 듣던 미군의 155㎜ 곡사포를 처음 봤다는 것이다. 나도 얼른 뛰어가 봤다. 바퀴를 진창에 빠뜨린 야포가 보였다. 거대한 몸집이었다. 6·25전쟁이 터질 때까지 국군이 보유하고 있던 야포는 105㎜ 곡사포가 전부였다. 사거리와 화력에서 전혀 비교가 되지 않는 155㎜ 포가 눈앞에 있었다.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야포였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전쟁에서 무기체계가 지니는 비중이 가볍지 않음을 새삼 생각하게 됐다.



미군 155mm포, 5만분의1 지도 … 이제야 ‘현대전’이 시작됐다

 

 

 

미군들이 155㎜ 곡사포로 천안 쪽을 향해 포격하고 있다. 남하하는 북한군을 맞은 미 24사단은 1950년 7월 8일께 금강을 방어선으로 설정한 뒤 반격에 나섰다. [백선엽 장군 제공]

 

 

 

나는 다시 화이트 대령을 찾아갔다. 그에게 “혹시 당신들이 가진 지도를 좀 줄 수 있느냐. 지금 지도를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다. 화이트 대령은 “지도는 충분하다. 필요하면 주겠다”고 대답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지도는 축적이 5만분의 1이었다. 일제시대 일본이 한국의 모든 지형을 실측해 만든 한국판 5만분의 1 지도. 그곳에는 실개천과 작은 구릉은 물론 대형 지도에는 전혀 나오지도 않는 작은 샛길까지 그려져 있었다. 임진강에서 후퇴한 이래로 국민학교(초등학교) 교실의 벽에 걸린 ‘대한민국 전도’를 앞에 두고 작전을 짰던 국군에게는 다른 어느 것보다도 절실했던 게 이런 지도였다.



우선 화이트 대령에게 5만분의 1 지도를 하나 얻었다. 그리고 작전계획을 짤 때 필요한 투명지와 빨강·파랑 등 색이 다양한 유성펜을 얻었다. 화이트 대령은 “양이 충분하니 투명지와 유성펜을 많이 가져가라”고 선심을 썼다. 지도를 이리저리 살펴보면서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지도는 1사단이 주둔하고 있던 화령장 지역 인근의 지형을 상세히 그린 것이었다. 5만분의 1 축적이기 때문에 양이 간단치 않았다. 대한민국 전도를 보면서 작전 계획을 짰던 경험이 참 우스워 보였다. 한마디로 ‘눈이 확 뜨이는’ 심정이었다.



155㎜ 곡사포와 5만분의 1 지도는 내게 뭔가를 암시하는 것 같았다. 좀 더 현대화된 작전을 구상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일제시대에 일본이 한국을 실측해 만든 5만분의 1 지도는 있었다. 그러나 광복 뒤 일선의 모든 국군 부대에 전달되지는 못했다. 소총과 대포를 사용했지만 한국군은 ‘현대전’과는 거리가 멀었던 셈이다.



그 직전 화령장 남쪽 미원이라는 곳에 사단 전방지휘소를 차렸을 때였다. 갑자기 11연대장 최경록 대령과 작전참모 김덕준 소령이 “떠나야겠다”고 했다. 전쟁 전 예편했던 김석원 준장이 7월 초 수도사단장에 복귀하자 예전에 그를 모셨던 두 사람이 떠나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당시는 전쟁 중이라 인사계통의 명령이 들쭉날쭉했다. 자신의 친소(親疏) 관계에 따라 서로 끌고 밀어주던 시절이었다. 어떤 사람의 자리를 먼저 옮긴 뒤 부대장이 육본에 연락해 “내가 필요해서 그 사람을 끌어왔다”고 하면 양해가 되던 시절이었다. 그들은 당시로서는 나보다 훨씬 명망이 높았던 김석원 장군을 찾아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임진강에서 밀려 300㎞를 행군하면서 무기와 병력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한 내 책임이었다. 그래도 쇠약해진 사단과 사단장을 버리고 떠나는 부하들이 얄미웠다. 그 섭섭함을 달랠 길이 없었다. 보름달처럼 훤하고 커다란 달이 떠있던 밤이었다. 그 달을 바라보면서 내가 ‘유랑극단’의 업주처럼 사단 병력을 끌고 내려왔던 지난 한 달간의 고생이 떠올랐다. ‘이 사람 저 사람 죄다 유력한 쪽으로 떠나는 것 아닌가’하는 걱정에다 이미 떠난 부하들에 대한 노여움이 솟구쳤다. ‘내가 별 볼일 없으니 그런 것이겠지’하면서 달래려고 해 봤지만 마음이 잘 가라앉지 않았다. 그때 작전참모 문형태 중령(훗날 합참의장을 지냄)이 눈앞에 나타났다. “자네도 가는 건가.” 내가 퉁명스럽게 말을 건넸다.



“각하, 아닙니다. 좋으시다면 그냥 남겠습니다.”



“…자네도 김석원 장군을 모셨지 않았는가.”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습니다. 미군이 참전하는 마당인데, 이제는 각하처럼 젊은 분이 활약할 때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부하를 떠나 보내고 경북 상주의 화령장에 도착한 그날 밤. 나는 155㎜ 대포와 5만분의 1 지도, 그리고 문 중령의 말을 마음속에 새기며 잠을 재촉했다. 부하 둘이 떠나가면서 내게 남긴 서글픔, 그것은 그렇게 잊어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백선엽 장군



[출처: 중앙일보] [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㊸ 후퇴 중의 희망, 그러나 떠나는 이들

 

 

 

 

 

 

☞◆105㎜와 155㎜ 곡사포=6·25 전쟁 때 미군 야전포병은 구경 105㎜에 사거리가 11.2㎞인 M2A1(또는 M101A1) 곡사포를 애용했다. 구경 155㎜에 사거리가 14.6㎞인 M114 곡사포도 함께 운용했다. 당시 미군은 사단당 105㎜ 곡사포 54문과 155㎜ 곡사포 12문을 배치하는 게 원칙이었다. 6·25 초기 미 육군 사단에는 M2A1이, 국군 사단에는 구형인 구경 105㎜에 사거리가 6.5㎞인 M3 곡사포가 배치돼 있었다.



M2A1 야포는 가볍고 조작이 편리하며 이동이 쉽고 사격 준비 시간이 짧았다. 사거리가 북한군의 소련제 122㎜ 곡사포와 비슷했으며, 76㎜ 곡사포(9㎞)보다 길었다.



미 육군은 상황에 따라 105㎜ M2A1과 155㎜ M114를 조합해 운용했다. 먼저 155㎜포로 적 야포를 타격해 제거한 뒤 105㎜ 포로 추가 공격을 하는 방식이었다.



국군은 6·25전쟁 중 M2A1 곡사포를 인수했다. 70년대 초반 박정희 대통령 지시로 역설계 방식으로 국내 개발돼 육군에 전면 배치됐다. 현재는 미군과 한국군 모두 사용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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