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조선일보에 게재되지 못했던' 이희성 전 계엄사령관 인터뷰...

드무2 2021. 12. 25.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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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에 게재되지 못했던' 이희성 전 계엄사령관 인터뷰...

 

 

 

'조선일보에 게재되지 못했던' 이희성 전 계엄사령관 인터뷰...

 

기자명 최보식 편집인  입력 2021.05.18 08:40 수정 2021.08.10 10:32

 

 

전국 계엄 상황이었으니, 내가 전권을 쥐고 통괄

전두환은 새카만 후배… 내게 '형님' 하며 어려워 해

날 뛰어넘어 월권했다?… 내 성격 알면 이런 말 안 나와

전국에서 민란이 일어나면 국가 위기 상황을 군은 걱정

 

1980년 대학교 화장실에는 낙서들이 많았다. 용변을 해결하면서 볼펜·사인펜을 꺼내 몰래 적거나, 이미 휘갈겨놓은 낙서들을 차근차근 읽었던 것이다. 그 시절의 언로(言路)였다. 숱한 낙서들 중에서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것은 ‘전두환’ 이름이었다. 학생들은 전두환(全斗煥)을 한자로 ‘剪頭漢(머리를 자르는 놈)’이라고 적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광주 학살 주범'이다. 하지만 그는 이를 인정한 적이 없었다. 2016년 5월초였다. 광주 출신 목사와 기자 등이 연희동을 방문한 적 있었다. 그 뒤 전두환 전 대통령이 5·18에 대한 유감 표명과 광주 망월동 묘역 참배를 할 것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하지만 연희동 관계자는 이렇게 해명했다.

'광주 방문은 와전된 것이다. 5·18에 본인 책임이 있다는 뜻도 아니다. 당시 희생자가 있었고 대통령이 된 뒤로 충분히 수습을 못 한 데 대해 아쉽다는 표현을 했던 거다. 지금까지 그는 광주의 가해자로 잘못 인식돼왔다. 이는 사실관계에서 명백히 틀린 것이다. 본인이 가장 억울해하는 대목이다.'

반성 없이 억울해하니 전두환 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판단과 해석 문제가 아니라, 사실 관계 문제라면 기자로서 한번 확인해볼 필요성은 느꼈다.

당시 상황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곰곰이 생각하니, 1980년 5월 정국을 관장한 이희성 전 계엄사령관이 떠올랐다. 그가 경기도 과천시 갈현동의 전원주택에 살고 있는 걸 알아냈다.


 

 

첫인상이 단아했다. 응접실에 앉자마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게 무엇이 궁금하오? 하나하나 질문하면 답변 드리지. 늙어서 생각이 잘 날지는 모르겠소.”

이렇게 순순히 응할 줄은 올 때까지만 해도 예상을 못 했다. 나는 머릿속에 담아온 질문을 하나씩 꺼냈다.

―당시 계엄사령관이라면 5·18 상황을 전체적으로 가장 잘 알 수 있는 위치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렇소. 전국 계엄 상황이었으니, 국방장관과 대통령께 주요 사안은 보고했지만 내가 전권(全權)을 쥐고 통괄했다고 할 수 있소.



―1996년 '역사 바로 세우기' 재판에서 5·18과 관련돼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지요?

“그렇소. 계엄사령관이었기에 책임을 진 거요. 5·18을 어떻게 보느냐를 떠나 결과적으로 피해가 크지 않았소. 희생자와 유족이 많이 생기지 않았소. 국가적으로 이를 추스르는 차원에서 이들의 요구와 주장을 감안해야 하는 거요. 내가 높은 자리에 있었기에 그걸 피할 수는 없는 거요. 도의적 책임을 진 거요(8개월 복역 뒤 특별사면).'

―당시 국정 수반인 최규하 대통령도 도의적 책임이 있습니까?

“그건 아니오. 군의 작전 상황이니 계엄사령관과 국방장관에게 있지, 군을 잘 모르는 대통령께서야 책임질 일이 아니오.”


―도의적 책임은 그렇고, 실제적인 책임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5 · 18 당시부터 대학가에서는 '광주 학살 주범'으로 전두환을 특정했습니다.



“그건 군의 작전 지휘 계통을 정말 모르고 하는 소리요.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5·18과는 무관하오. 그는 12·12(1979년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수사를 이유로 정승화 육참총장을 강제 연행한 사건)와는 상관있지만 5·18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소.”



―계엄군 출동과 발포 명령을 그가 배후 조종했다는 게 통설입니다.

 

 

최규하, 전두환(당시 보안사령관) 前대통령 / 블로그


“법정에서도 '지휘 체계가 이원화됐다'는 말들이 있었소.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나 몰래 따로 보고받고 지시했다는 소리인데, 그건 범죄요. 그러면 내가 그냥 두고 볼 것 같소. 내가 있는데 있을 수 없는 일이오.”



―계엄사령관이 위계상 높지만 당시 모든 힘이 전두환에게 쏠리지 않았습니까?



“전두환은 새카만 후배였고 내게 '형님, 형님' 하며 어려워했소. 나를 뛰어넘어 감히 월권해? 내 성격을 알고 이런 관계만 알아도, 그런 소리가 안 나옵니다. 전두환은 밝은 사람이지, 음습하지 않아요. 몰래 그렇게 하는 스타일이 아니오. 내 단호히 얘기하오. 광주에 관한 한 전두환 책임은 없소.”



―그렇다면 5·18에 전두환을 지목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라고 봅니까?



“광주가 수습되고 3개월 뒤 그가 대통령이 됐기 때문이오. 대통령만 안 됐으면 전두환 이름이 그 뒤로 나오지 않았을 거요.”



―전두환이 아니라면, 누가 5·18에 대해 책임이 있는 겁니까?

“지휘 계통의 최고위에 있는 계엄사령관인 나와 국방장관(주영복)이오. 그래서 법적 책임을 지지 않았소. 그때 전두환에 대해 과대평가하고 있어요. 그는 보안사령관이었고 내 참모에 불과했소. 참모로서 내게 건의할 수는 있었겠지만 작전 지휘 체계에 있지 않았소. 진압 작전에 개입할 수 없었소. 그는 광주에도 내려간 적이 없소.”

 

5.18 민주화 운동 / 블로그

 

―적극적인 스타일인 전두환이라면 광주에서 그런 사태가 벌어졌으니 오히려 한번 내려갈 만하지 않았습니까?

“현지 보안부대를 통해 보고가 올라오니까 그도 광주 상황을 알고 있었소. 내려가 본들 뭘 하겠소. 부대장에게 격려금이나 건네주는 게 고작이잖소. 당시 정호용 특전사령관은 내게 보고하고 광주에 내려간 적 있소. 광주 현지 부대에 배속시킨 공수여단 격려차 간 것이오.”

―전두환이 육사 동기생 정호용을 통해 작전 지시를 했다는 설도 있었습니다.

“재판에서 그런 말이 나왔는데, 정말 군대 체계를 모르고 하는 소리요. 특전사령관도 광주에 파견된 자기 부하들을 지휘할 수가 없소. 작전 책임과 지휘권은 배속된 부대 지휘관에게 있소. 조언은 할 수 있겠지만, 이래라 저래라 작전 지휘를 하는 것은 군법에 어긋나는 거요.”

―'역사 바로 세우기' 재판에서 검찰 측 증인으로 나와 “1980년 5월 21일 '자위권(自衛權) 보유 천명' 담화를 발표할 때 보안사 참모가 초안을 건네줬다”고 진술하지 않았습니까? 이를 전두환의 5 · 18 개입 증거로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내가 검찰 조사를 서너 번 받았어요. 꼭 밤중에 잠 안 재우고 심문을 했어요. 졸려서 정신이 몽롱해질 새벽에 진술서 서명을 받아요. 검찰이 ‘신사’인 줄 알았는데 그런 트릭을 써요. 그래서 보안사 참모인지 계엄사 참모인지 헷갈렸던 거요. 계엄사 참모였다고 하더군요. 설령 보안사 참모라고 해도 그런 건의를 해올 수 있는 거요. 결정은 내가 하는 것이오. 애초에 담화 발표 구상은 나 혼자서 한 거요.”

―왜 그런 구상을 했습니까?

“계엄군이 일방적으로 공격당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오. 다만 담화 내용에 대해 신경을 썼어요. 장차 법적으로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고 봤으니까. 그래서 참모들을 불러 문안을 검토한 뒤 발표했소.”

―장차 법적인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자위권 보유 천명'이 '발포 명령'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걸 그때 예상했다는 건가요?

“재판 과정에서 '사정을 모르는 병사들은 자위권을 발포 명령으로 알았을 것'이라는 말이 나왔소. 그런 해석은 오버요. 공격을 받아 신변의 위협을 느낄 때 개인마다 정당방위 차원의 '자위권'이 있다는 것이오. 피동적인 것이오. 발포 명령과는 다르오. 더욱이 담화문에서 '자위권이 있다'고 한 게 아니라 '자위권이 있음을 경고한다'고 했소. 예방 목적이지, 자위권을 적극적으로 발동하겠다는 뜻이 아니었소.”

―자위권을 천명한 담화 발표 뒤 계엄군에게 실탄이 지급됐습니까?

“실탄 지급은 일선 부대 지휘관 차원에서 이뤄지는 거지, 계엄사령관이 이래라저래라 할 사안이 아니오.”

관련 재판 기록을 보면 '자위권 담화'가 있기 전에 실탄 발사가 이미 있었다. 5월 19일 시위대에게 포위된 계엄군 장교가 위협사격을 한 게 첫 발포였다. 20일 밤 광주역에서는 실탄 사격으로 4명이 숨졌고, 21일 담화 발표가 있기 전에도 총격전이 벌어졌다.

―누가 발포 명령을 한 겁니까?

“1996년 재판 당시 광주 현지까지 내려가 조사를 벌였으나 발포 명령을 내린 지휘관이 없었어요.”

―총 맞은 시민들이 있는데 발포 명령자가 없다는 게 과연 말이 됩니까?

“전투라는 게 우발적이고 부화뇌동해서 일어날 수도 있소. 겁에 질려 있는 사병들이 막 쏘고, 어디서 날아온 총알에 누가 맞았는지도 가릴 수 없었소. 한밤중에 아군끼리 교전도 있었소. 다만 5월 27일 전남도청 재진입 작전은 적극적이었소. 도청 지하실에 TNT와 수류탄 등 무기가 있었고 무장한 주동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오. 당시 북에서 이를 이용 안 할 리가 있었겠소.”

―당시 담화문에 '상당수의 다른 지역 불순 인물 및 고정간첩들이 사태를 극한적인 상태로 유도하기 위해 광주에 잠입해…'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근거가 있는 겁니까?

“첩보는 있었지만 확증을 잡지 못했소. 확증이 없는데 어떻게 얘기하겠소. 다만 무기고를 털고 시위대를 조직적으로 이끄는 등 민간인이 할 수 없는 행동이 있었소.”

―광주가 수습된 뒤 왜 조사를 하지 않았습니까?

“그때는 뒷수습과 민심 위무(慰撫)가 시급해 그런 조사에 착수할 수 없었소.”

―공수부대를 투입해 초기에 과잉 진압을 함으로써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주장이 있었는데요?

“당시 공수부대는 소요 진압 임무가 있었소. 5월 18일 아침 휴교령이 내려져 있는데 학생들이 들어가겠다며 전남대 정문에서 군인들과 충돌한 게 발단이었소. 학생들은 가방에 넣어온 돌을 던졌고 군인들이 무방비로 맞은 거요. 그 뒤 시내에서 학생들이 집결하자 군인들이 뒤쫓아가며 진압봉으로 두들겨 팼소. 이를 본 시민들은 공수부대원들이 무자비하다고 흥분한 거요. 어떤 세력이 '경상도 공수부대가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러 왔다'며 악성 루머를 퍼뜨렸소.”

―광주가 수습된 뒤인 6월 초 정부 합동조사단이 현장 조사를 마치고 '초기 진압 작전의 과오 책임을 물어 당시 현장 지휘관을 군법회의에 회부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올린 게 맞습니까?

“그건 맞소. 하지만 내가 반대했소. 현장 지휘관은 잘못한 것이 없는데…. 결과적으로 많은 피해자가 생겼으나 그건 앞서 말한 대로 불가피한 상황도 없지 않았소. 나는 지금도 작전 실패는 아니라고 봐요.”

―숱한 사상자를 낳은 국가적 비극을 초래했는데?

“한 사건을 이쪽 · 저쪽, 위 · 아래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오. 광주 사태가 불처럼 타 지역으로 번져 전국에서 민란이 일어나면 나라가 어떻게 될까, 그때 우리 군에서는 그런 국가 위기 상황을 걱정했고, 절실했습니다.”

―1996년 '역사 바로 세우기' 재판에서 그 나름대로 진실 규명이 이뤄졌다고 봅니까?

“내 입장에서 보면 허무하게 진행됐소. 공판 과정에서 내게는 질문이 거의 없었소. 오직 전두환에게만 하고. 당시 정국을 총괄한 계엄사령관에게는 별로 질문할 것이 없었던 모양이오.”

이 인터뷰는 조선일보에 게재되지 못했다. 호남 민심에 대한 판단이 있었던 것 같다. 그 뒤 국가조사기관이나 법원에서 그의 증언을 청취하려고 했으나 그가 아예 응하지 않은 걸로 들었다. 그는 이제 97세다.

출처 : 최보식 의 언론(https://www.bosik.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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