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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25 전쟁 60년 41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71) See you in Seoul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71) See you in Seoul 12연대장 김점곤 대령과 함께 서쪽으로 계속 향했다. 도로변의 풍경은 같았다. 여기저기에 적군의 시체와 무기 등이 널려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치열한 공격을 펼치던 적군의 그림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북한군은 붕괴된 것이다. 패주한 적들의 일부가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을 것으로 짐작은 됐지만 차량 등이 이동할 수 있는 주요 도로변에서는 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서울에서 보자 “도주하는 김책 잡아라” 155㎜ 포가 조치원 향해 불을 뿜다 우리 일행은 오전 11시쯤엔가 어느덧 다부동의 북쪽, 상주로부터 대구로 이어지는 도로와 안성에서 대구를 잇는 길이 만나는 교차 지점에 도착했다. 1사단 15연대 최영희 대령도 그곳에 ..

[6 · 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64) 틈새를 노린 북한군의 공격

[6 · 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64) 틈새를 노린 북한군의 공격 1950년 9월 초 낙동강 전투에서 붙잡힌 북한군 포로가 미군의 지프 위에 앉아 후송을 기다리고 있다. 북한군 포로의 목에 ‘전쟁 포로’라는 표식이 걸려 있다. 북한군의 공세는 이해 8월 말에 접어들면서 국군과 유엔군의 방어에 막혀 크게 꺾이기 시작했다.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천평동 계곡은 적군의 거듭된 공세에도 끄떡없었다. 적의 공세는 발악적이었다. 그러나 늦여름의 무더위에 지나지 않았다. 새벽에는 이미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는 여름 끝의 그런 더위 말이다. 1950년 8월 18일부터 적의 13사단이 가세해 다부동 전선을 뚫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미군의 거센 화력과 고지에서 혈전을 펼쳤던 국군의 저항으로 더 이상 남하하지 ..

[6 · 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62)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6 · 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62)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미 육군 제3사단 15연대 C중대 1소대장인 랠프 반스 중위(왼쪽에 서 있는 사람)가 1951년 3월 23일 의정부 근처에서 중공군 진지를 향해 수류탄을 던지고 있다. 보병 기본 무기인 수류탄은 근접전에서 효과가 커 6·25전쟁 내내 다량으로 사용됐다.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저 멀리 다부동이 보였다. 민가라고 해봐야 30호 남짓이나 될까 말까 한 한적한 시골 동네였다. 마을 입구를 향해 내가 탄 지프는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차가 조그만 길로 난 다부동 입구에 들어설 때였다. ‘핑-’ 하면서 날카로운 금속이 스쳐 지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권총 빼들고 적 향해 뛰었더니 … “으윽….” 운전병이 갑자기 오..

[6 · 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60) ‘볼링장’의 전투

[6 · 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60) ‘볼링장’의 전투 6 · 25전쟁에 참전한 미군들이 공격해 오는 적을 향해 방어 태세를 취하고 있다. 트럭 등 장비를 세워 둔 채 참호 속에 들어간 미군들이 다가오는 적을 향해 총 끝을 겨누고 있다. 어느 때 어느 전선이었는지, 시간과 장소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사진이다.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김일성은 손에 쥐고 있던 마지막 카드를 던졌다. 원산에 있던 T-34 전차 40대를 급히 옮겨 다부동 전선에 투입하고, 후방의 잔여 병력을 모두 그러모아 낙동강 전선으로 내보냈다. 북한군이 국군과 미군의 방어선을 돌파한다면 김일성의 도박은 승리로 끝을 맺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마지막 노림수가 벽에 막힌다면 그는 패배의 쓴잔을 삼켜야 할 상황이었다. 산 위의 고..

[6 · 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59) 학도병의 수첩

[6 · 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59) 학도병의 수첩 학도병의 편지- 이우근(李佑根) 열 번 뺏고 뺏긴 328고지 … 학도병 희생으로 태극기 꽂다 어머니가 내내 아들의 안전을 빌고 빌었던 정화수라도 떠온 것일까. 전쟁이 불붙은 일선으로 떠나는 아들에게 물 한 모금이라도 더 먹이려는 어머니, 바가지를 받아 든 아들의 표정이 간절하고 애처롭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 전선으로 향하는 대구역 앞 신병 대열에서 찍은 사진이다. [연합뉴스]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10여 명은 될 것입니다. 적은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어제 내복을 빨아 입었습니다. 물내나는 청결한 내복을 입으면서 저는 왜 수의(壽衣)..

[6 · 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58) 피로 물든 유학산

[6 · 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58) 피로 물든 유학산 동양에서 학(鶴)은 고고(孤高)함의 상징이다. 옛 문인들은 늘 학을 벗 삼으려 노력했고, 그를 통해 세속의 번잡함에서 벗어나려는 의지를 다졌다. 그런 학이 노닐었다는 산이 대구 북방에 동서로 뻗어 있는 해발 839m의 유학산(遊鶴山)이다. 그러나 1950년 8월의 유학산은 학이 날아다니는 그런 멋진 곳이 아니었다. 동족끼리 맞붙어 처절하게 피를 흘리면서 죽고 죽이는 살육의 현장이었다. 소대장들은 신병 명단을 화랑 담뱃갑에 썼다 격전 뒤면 피와 땀에 절어 알아볼 수 없는 이름들 … 젊은 그들은 그렇게, 무명의 용사로 사라져 갔다 동서로 4㎞를 뻗은 유학산은 서남쪽으로 칠곡군 석적면, 서북쪽으로는 구미시 구평동과 경계를 이룬다. 쉽게 말하자..

[6 · 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57) 미군 최고 수뇌부의 방문

[6 · 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57) 미군 최고 수뇌부의 방문 중국어로 말을 걸어온 미군은 폴 프리먼 대령이었다. 차분하면서도 심지가 굳어 보이는, 첫 인상이 참 좋은 인물이었다. 그는 미 2사단 23연대를 이끌고 있었다. 그의 중국어는 유창했다. 중국어를 할 줄 아느냐는 그의 질문에 나도 중국말로 “중국어를 할 줄 안다”고 대답했다. 그는 “그렇다면 중국어로 이야기해 보자”고 말했다. 조금 우습다는 생각에 “그냥 영어로 얘기하자”고 했더니 그는 환하게 웃으면서 “영어를 할 수 있다고 왜 말하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그는 1931년부터 4년 동안 베이징(北京)에서 유학을 했다. 그때 익힌 중국어 솜씨였다. 발음이나 표현력이 아주 뛰어났다. 프리먼은 한국군에 영어가 보급되지 않아 내심 의사소통..

[6 · 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56) 대구에 떨어진 포탄

[6 · 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56) 대구에 떨어진 포탄 다부동 전투가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을 때인 1950년 8월 중순, 대구 동북방의 가산산성으로 들어온 북한군이 대구에 포격을 했다. 민심이 흔들리자 신성모 당시 국방부 장관(오른쪽)이 대구 시내에서 마이크를 잡고 “대구를 사수하자”는 연설을 하고 있다. 당시 내무부 장관이던 조병옥 박사도 시내를 다니며 대구 사수를 역설했다. [중앙포토] 내 목숨과 국군 1사단 지휘부를 노린 적군의 야습이 있기 전날인 1950년 8월 18일 새벽에 북한군은 가산산성에 들어왔다. 우리는 포 사격으로 적의 발을 묶은 다음에 증원군을 받아 산성으로 올려 보내 적을 쫓아낼 작정이었다. 유언비어는 후방을 교란한다 … 포탄 7발에 대구는 ‘패닉’ 북한군은 가산산..

[6 · 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54) 미군 증원 그리고 연합작전

[6 · 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54) 미군 증원 그리고 연합작전 역사소설을 보면 적의 공세에 갇힌 군대가 가장 기뻐하는 순간은 구원병을 맞이할 때다. 수성(守城)이나 농성(籠城)을 하면서 존망의 위기에 놓였던 군대가 자신을 도우러 오는 군대를 맞을 때의 마음 든든함이란 게 과연 어떨까. 하수구에 지휘본부 … 마이켈리스에게 ‘싸움의 기술’ 배우다 사진 보도로 유명한 라이프지에 얼굴을 올린 이 사람이 미 27연대장 존 마이켈리스 대령이다. 1950년 8월 국군 1사단과 함께 다부동 전선에서 북한군의 강력한 공세를 막아냈다. 그의 뒤로 보이는 곳이 계곡물을 흘려 보내는 수로에 만든 당시 27연대의 ‘하수구 CP’다. 미군의 거대한 융단폭격에도 불구하고 적은 집요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폭격 다음..

[6 · 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53) 처참한 살육의 현장

[6 · 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53) 처참한 살육의 현장 적은 쉴 틈 없이 공격해 왔다. 북한군은 애초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1950년 8월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한다는 목표를 세웠으나 국군과 미군의 강력한 방어막에 막혀 달성이 불가능해졌다. 그러자 8월 15일까지 대구만이라도 점령하기로 목표를 수정한 뒤 거세게 밀어붙였다. 21㎞ 전선 모든 곳에 아군과 적군이 뒤엉켰다 격전 때마다 부대원 30~40%가 사라졌다 낙동강 전선을 지키기 위해 벌인 다부동 전투는 격전(激戰)과 혈전(血戰)의 연속이었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국군 유해 수습에서도 다부동 일대의 야산과 들판에서 나오는 것이 가장 많다. 신생(新生) 대한민국의 숨통을 지켜내기 위해 국군과 미군, 탄약과 식량을 날랐던 노무원들이 이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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