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드무2 2021. 5. 19.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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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마지막회>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에필로그 - 나라를 사랑하는 방법

글 : 손세일  논설위원

 

   1. “‘대한 일’이라 하거든 ‘내 집안 일’로 알고”
 
 

  그의 묘비명에도 “민족의 말”이라고 언급되어 있는 <나의 소원>의 서두를 김구는 하나님이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세번 되풀이하여 물어도 세번 다 자기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라고 대답할 것이라고 썼다. 그러고는 또 우리나라가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서,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라고 덧붙였다. 그러한 나라란 자립경제와 자주국방을 이룩한 이상적 근대국가형 국가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김구가 <나의 소원>을 쓴 지 6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러한 자주독립국가란 이 지구상에 아마 미국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뜻에서 김구는 영원한 유토피언이었는지 모른다.
 
  이승만은 자기의 일생은 환경보다 더 신념의 지배를 받았다고 술회했다.1) 이러한 김구의 소원이나 이승만의 신념은 한마디로 말하여 나라를 사랑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었다.
 
  1894년에 열아홉 살의 젊은 나이로 해주성을 치는 동학농민군의 선봉에 섰다가 패퇴한 김창수(김구)는 신천군 청계동의 안태훈(安泰勳)의 집에서 피신생활을 하는 동안 화서학파(華西學派) 유학자 고능선(高能善)에게서 유학의 가르침을 받았다. 특히 의리가 어떤 것인가를 강조한 고능선의 가르침은 김구의 일생을 통한 행동윤리가 되었다.
 
  고능선이 김창수에게 나라는 망하는데 최고 학식을 가졌다는 산림학자들도 혀를 차며 한탄만 할 뿐 구국의 경륜이 있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면서 “나라가 망하는 데도 신성하게 망하는 것과 더럽게 망하는 것이 있는데, 우리나라는 더럽게 망하게 되겠네”라고 말했을 때에는 김창수는 놀라고 울면서 “망할 것으로 하여금 망하지 않게 할 방법은 없습니까?”라고 물었다.2) 이렇게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가 된 김구는 “망할 것으로 하여금 망하지 않게 할 방법”을 추구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김구가 고능선을 만나서 위정척사의 가르침을 받은 그해에 이승만은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선교사들로부터 영어와 신학문을 배우고 개화를 주장하는 열혈청년들과 교우했다. 이승만이 개화파로 변신하는 데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사람은 서재필(徐載弼)이었다. 갑신정변의 주동자 중 한 사람이었던 서재필은 개화파 정부의 초청으로 1895년 말에 미국에서 귀국했다. 이승만은 1898년 1월에 《협성회회보》를 창간한 데 이어 그해 4월에는 《매일신문》을 창간했는데, 《매일신문》은 한국 최초의 일간지였다. 올리버(Robert T. Oliver)는 이승만의 《매일신문》 발행에 대하여 “이 작은 신문은 새 한국의 실질적 탄생이었다.… 그것은 곧 이승만의 정치 경력의 참된 시작이었다”라고 썼다.3) 올리버의 이러한 표현은 이승만 자신이 일간지의 발행이 근대적 국민국가의 조건이라고 인식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그것은 민족의 진정한 기원은 출판자본주의의 발흥과 대중적 자국어 신문의 출현부터라는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의 이론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어서 흥미롭다.4)
 
  그런데 《매일신문》의 전신인 《협성회회보》에 열강의 무리한 이권요구 사실을 폭로하여 외교문제로까지 비화한 뒤에 쓴 이승만의 다음과 같은 기명논설은 이 시기 국민들의 국가의식이나 국민의식이 어떠했는가를 톺아보는 단서가 될 만하다.
 
  “그런고로 지금 우리가 내 물건 달라는 친구를 시비함이 아니라 이 백성 중에 몰라서 아는 체 못하는 자와 알고도 모르는 체하는 자의 죄와 책망이 더 큰지라. 우리는 바라건대 우리 동포들은 무슨 일을 물론하고 대한 일이라 하거던 다만 내 나라 일로만 알 것이 아니라 내 집안 일로 아시고 각히 생각하는 대로 서로 모여 쓸데없는 공론과 시비라도 좀 하여보시오.”5)
 
  “대한 일”이라 하거든 “내 나라 일”로만 알 것이 아니라 “내 집안 일”로 알라고 역설한 것은 이때까지도 일반 국민들 사이에 국가나 국민보다는 가문을 더 소중히 생각하는 씨족주의 내지 가족주의 가치관이 훨씬 더 뿌리 깊이 온존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김구가 첫번째 감옥생활을 한 것은 국모(國母·민비)시해에 대한 보복의 의기에서 변장한 일본 상인을 타살한 치하포사건 때문이었다. 감옥 안이 불결한데다가 찌는 듯한 더위로 장티푸스에 걸려 극심한 고통을 겪던 김구가 자살을 기도하여 동료 죄수들이 잠든 틈을 타서 이마 위에 손톱으로 ‘충(忠)’자를 새기고 허리띠로 목을 졸라 잠시 숨을 끊은 사실은 그의 충군애국(忠君愛國)을 보여주는 극단적인 행동이었다.
 
  이러한 위정척사파 김구는 인천감옥에서 감리서 직원들이 권하는 《태서신사(泰西新史)》, 《세계지지(世界地誌)》 등 중국에서 번역 발행된 신서적을 읽고 개화파가 되었다. 김구는 신서적을 읽고 “의리는 유학자들에게 배우고 문화와 제도 일체는 세계 각국에서 채택하여 적용하는 것이 국가의 복리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했다.6) 그런데 그것은 당시의 많은 개화파 지식인들이 주장하던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김구의 세계 인식은 일생을 통하여 계속되었다. 그러한 사정은 국민에 대한 마지막 메시지가 된 <나의 소원>에서 조선시대의 홍문관(弘文館), 사간원(司諫院), 사헌부(司憲府)와 과거제도, 암행어사제도를 보기로 들면서 “역대의 정치제도를 상고하면 반드시 쓸 만한 것도 많으리라고 믿는다”라고 주장한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승만의 표현을 빌리면 “서편 층계에 오르려 하면서 동편 줄을 당기고 놓지 못함과 같은” 일이었다.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그런즉 우리 옛 법에 제일 긴하게 여기던 것도 다 버리고 변하야 새것으로 대신하기를 작정할지니, 이렇듯 작정하고 밤낮으로 변하야 사람과 집안과 나라가 낱낱이 새것이 되어 장차 일이십 년 안에는 전국이 다 영미국같이 되게 우리 손으로 만들기를 일심으로 힘쓸진대 어찌 일본만 못할 것을 염려하리요.”7)
 
  1920년 말에 이승만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서 상해를 방문할 때까지 이승만과 김구가 직접 만난 적은 없다. 《백범일지》에 이승만의 이야기가 처음 보이는 것은 1911년에 김구가 신민회사건과 안명근(安明根)사건으로 15년 형을 받고 서대문감옥에서 두번째 감옥생활을 할 때에 이승만을 그리는 대목이다. 이 글에서도 《태서신사》를 언급한 것이 눈길을 끈다. 김구는 일찍이 이승만이 한성감옥서에서 감옥생활을 할 때에 서적실을 설치했던 일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노역을 쉬는 날 서적고에 쌓인 각종 책자를 각 방에 들여보내 주는데, 그 가운데 이 박사의 손때와 눈물 흔적으로 얼룩진 ‘감옥서’라는 도장이 찍힌 《광학유편(廣學類編)》, 《태서신사》 등의 서적을 보았다. 나는 그러한 책자를 볼 때에 그 내용보다는 배알치 못한 이 박사의 얼굴을 보는 듯 반갑고 무한한 느낌이 있었다.”8)
 
  이승만과 김구는 두 사람 다 기독교 신자였다. 이승만은 1899년에 한성감옥에서 심한 고문을 받고 죽음의 공포를 느끼면서, 김구는 1903년에 약혼녀를 잃은 공허함 속에서 기독교에 입교했다.
 
  한국은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청(淸)과 무역을 하던 의주(義州) 상인들에 의하여 기독교가 전래되고 교회 운영도 한국인 교인 스스로의 힘으로 시작된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선교지역”이었다.9) 기독교에 입교할 무렵의 일을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썼다.
 
  “이 이야기의 가장 고무적인 부분은 예수가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린 데 있다.… 우리 각자는 예수가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고통을 받았다고 믿었고, 예수가 당한 무고와 불의는 너무나 현실적이고 참된 것이어서 우리 각자가 이상스럽게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경험했다. 우리는 기독교의 가르침이 진실이 아닐지라도 너무나 이기적이고 이기주의적이어서 동포들의 복지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했던 우리 겨레의 심정에 변화를 줄 수 있는 유일한 종교라는 것을 굳게 믿었다.”10)
 
  기독교가 우리 겨레의 심정에 변화를 줄 수 있는 유일한 종교라고 믿었다는 말은 이승만의 신앙은 처음부터 사회구원에 있었음을 말해 준다.
 
  김구의 기독교 인식도 마찬가지였다. 김구는 기독교에 입교하는 사람들은 신앙심뿐만 아니라 애국사상도 갖게 되었다고 다음과 같이 썼다.
 
  “평안도는 물론 황해도에도 신교육의 풍조는 예수교로부터 계발되었다.… 예수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중류 이하이나, 실제 학문을 배우지는 못하였지만 선교사의 숙달치 못한 반벙어리 말을 들은 사람은 신앙심 이외에 애국사상도 갖게 되었다. 당시에 애국사상을 지닌 대다수의 사람들이 예수교 신봉자임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11)
 
  기독교는 이른바 ‘자립적 중산층’이 발달한 서북지방을 중심으로 급속히 전파되었다.
 
  이승만은 한국인 가운데 일본 당국이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이 ‘자립적 중산층’인 교회지도자들이라고 설명했다. 그리하여 이들을 탄압하기 위하여 105인사건을 날조했다고 그는 주장했다.
 
  이렇게 하여 기독교는 이승만과 김구의 민족주의의 중요한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2. 한국민족주의의 역동성과 반일감정

 

1941년에 66세가 된 李承晩.


 

  한국민족주의의 역동성의 정서적 기반은 반일감정이다. 그런데 한말의 계몽운동을 주도했던 개화파 지식인들은 위정척사파 유생들의 의병운동과는 대조적으로 일본에 대하여 호의적이었다. 그것은 개화파 지식인들에게 일본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자본주의적 근대성(capitalist modernity)의 모델국이었기 때문이다.12) 그들은 한국과 중국도 일본을 모델로 자본주의적 근대성을 빨리 체득하여 동양 3국이 함께 새로운 동아시아의 협력 체제를 수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러-일전쟁 때까지도 일본에 대하여 우호적이고 협력적이었다. 그랬다가 을사조약이 강제됨에 따라 일본의 ‘보호국’이 되고, 마침내 한일합병으로 국권을 상실하면서 개화파 지식인들의 일본인식도 급변했다. 이러한 사정은 김구가 “과거 청-일전쟁, 러-일전쟁 때만 해도 한인의 일본에 대한 감정이 극히 우호적이었으나, 그 후에 강 압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나쁜 감정이 점차 격증하였다”13)라고 술회한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술회는 김구 자신의 태도도 그와 같은 것이었음을 시사한다.
 
  이승만이 1899년에 투옥된 것은 일본에 가 있는 박영효(朴泳孝)의 쿠데타 음모에 연루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때에 이승만은 대동합방론(大東合邦論)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어울려 여러 번 비밀회동을 한 일이 있었다. 대동합방론이란 일본의 이른바 대륙낭인 다루이 도키치(樽井藤吉)의 책 이름으로서 일본과 한국이 대등한 입장에서 합방하여 ‘대동국(大東國)’을 구성하고, 이어 중국과 연합하여 서유럽 제국주의에 대항한다는 주장이었다.14) 이승만은 이때의 일을 그의 《자서전초록》에 자신은 그때 너무 어리고 천진난만해서 일본에서 돌아온 친일 망명객들이 돈을 물쓰듯이 쓰면서 미국 영향 아래 있는 한국 지도자들을 자기네 그룹으로 끌어들이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고, 일본인들은 민족주의파 지도자들과 재빨리 친교를 맺었다고 적어놓았다.15)
 
  이승만이 반일주의자가 된 것은 1904년에 도미하여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을 만나고 나서 대학생활을 하는 한편 재미동포사회와 접촉하면서부터였다.
 
  1908년 9월에 샌프란시스코의 《공립신보(共立新報)》의 ‘논설’란에 기고한 이승만의 <일본이 기탄하는 일이 곧 우리의 행복된 일이라>라는 긴 논설은 이 시기에 그가 쓴 대표적인 반일론이었다. 이승만은 이 논설에서 일본을 한국의 ‘원수’라고 규정하고, “조선사람이 다 없어지든지 혹 완전히 성립하게 되든지 좌우간 끝나는 날까지 조-일 양국 간에 결단코 평화가 없으리라”라고 전제하고, “지금 조선사람들이 이 중간에 처하야 바라며 힘쓸 것은 남을 시비하며 남을 해롭게 하는 데 있지 아니하고, 다만 나의 원수가 원할 일은 행치 말며 원수가 싫어할 일은 행할진대 그 원수가 스스로 손해를 받을지니, 이는 소리 없는 총으로 쏘는 것과 같다 할지라”라고 썼다.
 
  그러고는 한국과 일본의 이해(利害)의 상반관계를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로 그 특유의 그럴듯한 수사법을 써서 설명했다.
 
  (1) 조선의 여망은 일본의 은혜에 있지 아니하고 일본의 포악에 있다. 만일 어진 정사와 공평한 법으로 평등히 대접할진대 무식한 백성들이 다시는 나라를 생각하지 않을지 모르므로, 일본의 은혜는 곧 조선사람에게 비상[砒霜: 독약] 같은 것이다.
 
  (2) 조선의 복은 일본이 약한 데 있지 않고 강한 데 있다. 일본이 계속 강성해져서 욕심을 부려야 세계에서 고립되고 조선의 친구가 많이 생길 것이다.
 
  (3) 일본은 조선사람들이 어리석게 소동하는 것을 매우 원한다. 내지로 말하면 의병이다. 그것은 실효도 없고 백성들을 괴롭혀 그들로 하여금 도리어 일본의 보호라도 받아서 편안히 살기를 원하게 만든다.
 
  (4) 일본이 가장 꺼리는 것이 외국에 나오는 조선학생들이다. 미국에 나와 있는 학생들의 임무가 막중하다.
 
  (5) 조선사람들이 동심 합력하여 한 조직사회를 이루어 서로 따르고 서로 보호하게 되는 것을 일본은 가장 두려워하고, 편당을 지어서 서로 다투는 것을 일본은 제일 기뻐한다.
 
  (6) 조선에 기독교가 전파되는 것을 일본은 극히 싫어한다. 기독교는 정치와 도덕과 사회의 개량에 큰 기초가 될 뿐 아니라 각국인들이 조선과 친밀한 유대를 맺게 하기 때문이다.16)
 
  일본통감부는 이승만의 이 논설을 치안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하여 그것이 실린 《공립신보》의 국내 판매와 배포를 금지하고 모두 압수했다.17)
 
  그런데 이 시기의 독립운동의 다른 한 큰 흐름인 의병운동을 이승만이 이처럼 “어리석게 소동하는 것”이라고 간단히 단정한 것이 눈길을 끈다.
 
  이 무렵에는 김구도 의병운동에 대하여 이승만과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서대문감옥에는 의병활동을 하다가 수감된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들을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을 김구는 “차례차례 인사를 하며 물어보니 혹은 강원도 의병의 참모장이니 경기도 의병의 중대장이니 하여 대부분 의병 두령이고 졸병이라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처음에는 극히 존경하는 마음으로 교제를 시작했으나 얼마 되지 않아 마음 씀씀이와 행동거지가 순전한 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참모장이라 하는 사람이 전략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의병을 일으킨 목적이 무엇인지, 국가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많았고, 당시 무기를 가지고 여러 마을을 횡행하면서 만행한 것을 잘한 일처럼 큰소리쳤다”라고 써놓았다.18)
 
  김구의 애국심과 항일정신은 일본의 한국병탄 과정에서 경험한 일본수사관들의 혹독한 고문과 옥중생활에서 연마되었다. 안명근사건에 관련된 혐의로 끌려가 몇 차례 기절을 할 만큼 고문을 당하면서 밤새껏 조사를 받던 때의 이야기를 김구는 다음과 같이 감동적으로 적어놓았다.
 
  “(나를) 세 놈이 마주 들어다가 유치장에 눕힐 때에는 이미 동창이 밝았다. 내가 신문실에 끌려가던 때는 어제 해 진 뒤였다. 처음에 성명부터 신문을 시작하던 놈이 불을 밝히고 밤을 새우는 것과 그놈들이 온 힘을 다해 사무에 충실한 것을 생각할 때에 자괴심을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평소에 무슨 일이든지 성심껏 보거니 하는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나라를 남에게 먹히지 않게 구원하겠다는 내가 남의 나라를 한꺼번에 삼키고 되씹는 저 왜구와 같이 밤을 새워 일한 적이 몇 번이었던가 스스로 물어보니, 온몸이 바늘방석에 누운 듯이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내가 과연 망국노(亡國奴)의 근성이 있지 않은가 하여 부끄러운 눈물이 눈시울에 가득 찼다.”19)
 
  이러한 술회는 김구의 애국심의 극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감옥생활을 시작하면서는 “육체로는 복역을 하나 정신으로는 왜놈을 짐승처럼 여기고, 쾌활한 마음으로 죽는 날까지 낙천생활을 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리고 출옥할 가능성이 보이자, 다시 세상이라는 바다에 던져지면 일본인들의 회유나 협박에 변질될 것을 염려하여 이름 거북 구(龜)자를 아홉 구(九)로 고치고 호를 백범(白凡)으로 고쳤다. 이름을 고친 것은 일본의 호적에서 벗어나겠다는 의지의 표시였고, 호를 ‘백범’이라고 고친 것은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과 범부(凡夫)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자기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생각에서였다.20)
 
  1919년의 3·1운동은 한국역사상 처음으로 지도층과 민중이 합세하여 봉기한 민주주의 혁명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세계적으로 인구에 비하여 가장 많은 비율의 사람들이 봉기에 참여했다는 점에서 제국주의시대의 민족해방운동 가운데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3·1운동이 국내뿐 아니라 해외의 동포사회로까지 확산되고 있던 3월과 4월 사이에 국내외의 19곳에서 임시정부가 선포되었다. 안창호(安昌浩), 여운형(呂運亨) 등은 명의유지의 어려움을 내세워 정부조직보다는 정당조직을 주장했으나 독립을 선포했으므로 당연히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것이 독립운동자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여러 임시정부들은 1919년 10월까지에는 모두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합되었다.
 
  27년 동안의 임시정부 활동 가운데서 가장 획기적인 사건은 이봉창(李奉昌)의 일본 천황에 대한 투탄사건과 윤봉길(尹奉吉)의 홍구공원 폭파사건이었다. 그런데 이 두 사건은 모두 일본 천황과 관계된 사건이라는 점에서 상징성이 크다. 일찍이 인천감옥에서 이마에 ‘충’자를 새기고 기절했을 만큼 근왕사상의 소유자였던 김구는 일본 천황의 권위에 대한 공격이 갖는 의미를 매우 크게 인식했던 것이다.
 
  홍구공원 폭파사건이 있은 뒤에 처음으로 김구와 장개석(蔣介石)의 회담이 이루어졌다. 회담이 있은 이튿날 장개석의 핵심참모인 진과부(陳果夫)가 김구를 초청한 자리에서 “특수공작으로 천황을 죽이면 천황이 또 있고 대장을 죽이면 대장이 또 있지 않소?”라고 말했다고 하는데,21) 그것은 일본인들로부터 ‘현인신(現人神)’으로까지 숭앙되고 있던 천황의 정치적 권위를 과소평가한 말이었다.
 
  이승만의 반일론 가운데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아마도 한일합병이 제2차세계대전의 원인이 되었다고 주장한 부분일 것이다. 이승만은 제국주의 일본은 한국을 병탄함으로써 세계정복을 꿈꿀 수 있게 되었고, 또 그것은 미국정부가 1882년에 조선과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에 규정된 ‘거중조정(good offices)’의 의무를 이해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주장했다.22) 그러므로 미국정부는 1882년의 조약상의 의무에 따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하라고 독립운동기간 내내 이승만은 줄기차게 요구했다.
 
  이승만과 상해임시정부는 항일독립투쟁의 방법을 두고 갈등을 빚었다. 이승만은 미국정부와 미국인들을 상대로 하는 외교선전활동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상해임시정부는 당장 대일무력투쟁을 전개할 것을 주장했다. 상해임시정부는 1920년을 “독립전쟁의 해”로 선포하고, 압록강대안에 광복군사령부를 설치할 계획을 추진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와 관련하여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와 이승만이 주고받은 편지는 두 방법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사실은 그다지 크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눈길을 끈다. 이동휘는 1919년 11월29일에 임시정부의 당면문제 세 가지를 묻는 편지를 이승만에게 보냈는데, 그 가운데 ‘대정방침’에 대하여 “각하는 우리 독립이 국제연맹에 대한 요구에 있다 하시나이까, 아니면 최후 철혈주의로 해결되리라 하시나이까”하고 묻고, “나는 아직도 세상이 야심판이요 더군다나 왜노(倭奴)의 독종이 그리 고맙게 양심대로 우리 독립을 순하게 승인하리라 믿지 아니하므로 언제든지 우리는 최후 일인이 다 죽기까지 견확(堅確·견고하고 확실함)한 마음으로 나가야 독립의 날이 있을까 하나이다”라고 덧붙였다. 그러고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에 대한 시기, 위치, 준비는 어떻게 해야 할지 지시해 달라고 썼다.23)
 
  이승만은 1920년 1월에 다음과 같은 답장을 썼다. “우리는 당초에 강화회의나 국제연맹에 희망을 건 바는 없었소이다. 지금도 국제연맹을 은근히 반대하야 미국 상원 의원들을 상대로 운동하는 바이나, 외교상응 행사에 대하여는 유감이 없기를 도모하오이다. 우리의 만세 독립을 어찌 불로이득(不勞而得)하리요. 조만간 우리가 최후수단을 사용한 뒤에야 국토를 회복할 수 있고 회복하더라도 완전한 기초가 설지라. 이에는 형과 내가 이견이 도무지 없소이다.
 
  그러나 최후 운동에는 준비가 없고는 될 수 없나니, 형과 유동열(柳東說) 및 제우가 원동에서 이를 준비하시고 저는 이곳에서 미국 인심을 고동하려 함이 미국인들로 하여금 우리를 위하여 힘을 쓰기를 바람이 아니오, 다만 미국인의 배일상태가 수시로 증가한 즉 그 배일열이 극도에 달하면 우리는 금전도 얻을 수 있고 그 밖의 긴용물도 얻을 수 있는지라. 이를 얻으면 내세외기(內勢外機)를 응하여 착수하게 될지니 저는 이러한 의견으로 있소이다. 차제에 우리가 위험사를 행함은 대사에 무익이고 여전히 시위운동으로 계속하면 각국 신문계에서 방사원(妨事員: 기자)을 파송하야 실정을 광포하겠소이다. 근일에도 한명은 상해로부터 경성에 갔고 또 한명은 이곳에서 떠났소이다.…”24)
 
  결국 국토 회복은 최후 결전에 의해서만 가능하고, 그동안은 미국인을 상대로 선전활동으로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20년 12월에 상해에 간 이승만은 1921년 2월에 미국의 제도를 본떠서 임시의정원에 <대통령 교서>를 보냈는데 그는 이 교서에서 민병제(民兵制)를 실시할 것을 제안했다. 이때에 이승만이 제안한 민병제란 “우리의 성공이 결국은 무력에 있고 무력의 승리는 준비에 있는지라. 우리나라의 지금의 형편으로는 대략 민병제를 채용함이 가할지니, 국내 국외의 일반 인민이 각기 소재지에서 직업에 종사하는 여가에 병사를 연습하며 무기도 가급적 각자 구득하였다가 시기를 승하야 정식 선전(宣戰)으로 일제히 결전할지며…”라는 것이었다. 25)
 
  고대하던 태평양전쟁이 가까웠음을 느낀 이승만은 1939년 말에 하와이를 떠나 워싱턴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1941년 봄까지 거의 1년반 동안 군국주의 일본을 비판하는 《일본내막기: 오늘의 도전(Japan Inside Out: The Challenge of Today)》을 집필하는 데 전념했다. 이때부터 1945년 10월에 어렵사리 귀국할 때까지 이승만은 워싱턴에서 활동했다.
 
  1882년의 조미수호통상조약 문제는 《일본내막기》에서 자세히 논급되었다. 이승만은 1910년에 일본이 한국을 병탄하기까지의 경위를 설명하면서 “이 국제적인 강도행위는 필요할 때에는 한국을 돕겠다고 엄숙하게 약속한 세계 문명 국가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승인 아래 일본에 의해서 자행되었다”라고 말하고, 미국은 1882년에 체결한 조미수호조약에 따른 ‘거중조정’을 한국을 위해서가 아니라 1905년에 “부정하고 강압적으로”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드는 일본을 위해서 행사했다고 미국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했다.26) 노벨문학상 수상자 펄벅(Pearl Buck) 여사는 이 책을 “무서운 책”이라고 격찬했고, 이승만은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 내외와 국무장관 코델 헐(Cordell Hull), 육군부 장관 스팀슨(Henry L. Stimson), 국무부 극동국의 특별 정치고문 혼백(Stanly K. Hornbeck) 등에게 이 책을 증정했다.
 
  그러나 《일본내막기》는 “나는 이 책을 세상에 내어놓는 동기가 전쟁을 위해서가 아니라 평화를 위한 것임을 먼저 밝힌다”라는 첫 문장에서 보듯이 전쟁을 부추기기 위해서 쓴 책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미국인들에게 일본 군국주의의 실상과 야망을 인식시키고 그럼으로써 미국으로 하여금 일본을 미리 견제하여 전쟁을 방지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집필한 것이었다. 그러나 1941년 12월7일에 일본의 기습적인 진주만 공격으로 마침내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이 책은 이승만으로 하여금 ‘예언자’라는 평을 듣게 했다.
 
  이승만은 1942년 11월 말에 미국에 머물고 있던 호세택(胡世澤, Victor Hoo)으로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당면 목표와 궁극적인 목적을 알려달라는 편지를 스태거스(John W. Staggers) 변호사를 통하여 받았다. 호세택은 다음 달에 중국 외교부의 상무차장으로 발령받았는데, 이승만은 12월5일에 호세택에게 보낸 편지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당면 목표는 (1) 광복군의 적절한 무장 (2) 극동지역에 있는 한국인 인적 자원의 동원을 통한 광복군 증강 (3) 한국 내외의 첩보망 조직을 통한 사보타주와 파괴활동이라고 썼다. 그리고 궁극적인 목적은 일본 군국주의 체제의 완전한 해체이며, 그 뒤에는 다음과 같은 조치들이 뒤따라야 한다고 기술했다. 그것은 (1) 현재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추방 (2) 일본에서 노역에 동원되고 있는 한국인들의 송환 (3) 일본인들이 약탈해 간 서적, 문서, 예술품의 반환 (4) 일본인들의 어업, 운항(항해 및 항공), 상업의 제한 (5) 대마도(對馬島)의 반환 (6) 지난 37년 동안의 약탈과 앞으로 있을 군사행동으로 발생할 파괴에 대한 배상의 여섯 가지였다.27) 이 요구사항들은 정부수립 이후에 국교 정상화를 위한 한일회담 때에 대부분 한국정부가 요구한 기본 항목에 포함되었는데, 특히 대마도의 영유권 문제는 귀국한 뒤에도 연합국의 대일평화조약 체결에 앞서 공식으로 여러 차례 주장했다.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12년 동안 한국과 일본은 국교를 정상화하지 못했다. 그 기간에 이승만이 일본에 대하여 취한 조치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6·25전쟁 중인 1952년 1월18일에 전격적으로 선포한 ‘인접 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 선언’이었다. “평화선” 또는 “이승만 라인”이라고 일컬어진 이 선언은 샌프란시스코 대일평화조약에 따라 철폐될 운명에 놓인 “맥아더 라인(MacArthur line)”을 한국정부가 당분간 존속시킬 것을 요구한 데 대해 일본과 미국이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취해진 대응조치였다. 맥아더 라인이란 연합국의 일본점령시대에 맥아더사령부가 설정한 일본어선의 조업구역을 획정한 선이었다. 독도는 맥아더 라인 밖에 있었다.28) 이승만의 해양주권선언은 1945년 9월28일에 트루먼 대통령이 선포한 대륙붕과 수산자원보호 수역에 관한 선언을 본뜬 것으로서, 한반도 근해의 어업자원 보호가 직접적인 목표였다. 이 선언에 대해 국제적인 비난 여론이 일자 이승만은 2월2일에 부연성명을 발표하고 “획정선을 설치하는 주목적이 양국 간의 평화유지에 있는 만치 일본은 응당히 제의에 동의할 줄 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과거 40년간 한국해역에서의 어업은 일본이 전적으로 독점적 우세로 지배하여 왔기 때문에 한국의 어업자들은 크게 실의하여 왔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과거의 나쁜 감정을 다 씻어버리고 일본과 공존하기를 원하는 바이다. 그러나 한일 간의 상호 이익되는 관계를 가지려는 우리의 여러 가지 진정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 욕심을 버리지 못한 일인들은 맥아더선을 넘어오기가 무수하였으며, 더욱이나 다수 일본 어선은 우리의 연안까지 침입하여 와가지고 우리의 해중자원을 불법으로 빼앗아가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그냥 참을 수 없으며 그들을 이제 막지 않는다면 양국 간의 충돌은 불가피하게 되지 않을까 염려된다. 두 인방 간의 불행한 사건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양국이 합의하는 공평히 그어진 획정선이 극히 필요하였던 것이다. 맥아더선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일인들이 현 사태를 충분히 이해하고 우리와 우호적인 협의를 가지기를 바란다.…”29)
 
  당시 일본 어선은 총 톤수가 200만여톤이었던 반면 한국은 10만톤 정도로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장비와 기술이 앞선 일본 어선들은 맥아더 라인을 침범하여 한국 쪽에 나포된 일본 어선 수가 1947년에 9척, 48년에 18척, 49년에 10척, 50년에 9척, 그리고 51년에는 37척에 이르렀다.30)
 
  이승만이 평화선을 선포할 즈음에는 도쿄에서 재일한인의 법적 지위와 처우 문제를 의제로 한 한일회담이 열리고 있었는데, 이승만은 회담의 부수석대표로 예비회담에 참가하고 있는 하와이 주재 총영사 김용식(金溶植)을 임시수도 부산으로 불러 회담 진행상황을 물었다. 이승만이 김용식에게 “그래 일인들에게 맥아더 라인에 대해 무어라 말하겠어?”하고 따져 묻자 김용식은 “어족보호의 국제 선례를 들어 양국 사이의 맥아더 라인 같은 장치가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내가 그렇게 설명했는데 못 알아들어? 일인에게 분명히 이렇게 말하게. Whether you like it or not, we will maintain it(당신들이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간에 우리는 그것[맥아더 라인 같은 것]을 유지하겠다)라고 말하게”하고 말했다.
 
  이러한 이야기는 이승만의 일본 인식이 얼마나 단호했는가를 잘 말해 준다. 이러한 협상은 이승만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때에 이승만은 일흔일곱 살이었다.
 
  이승만은 일인들이 약탈해 간 문화재의 반환문제 등을 설명하면서, “우리가 이렇게 말하면 일인들은 이런 대답을 할 걸세.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돼”라며 교섭방법에 대해서까지 자세히 지시했다.31)


 
  3. 건국이데올로기로서의 반공주의
 

1945년 12월1일에 서울운동장에서 거행된 임시정부 환국봉영회에 참석한 李承晩과 金九.

 

 

  1917년 10월의 볼셰비키혁명을 통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한 나라의 정권을 장악한 공산주의는 1920년대의 세계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의 가장 강렬한 복음이 되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독립운동자들 사이에서 공산주의는 마치 19세기 말에 기독교가 전파되듯이 들판의 불길처럼 전파되었다. 상해임시정부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러한 상황 속에서 공산주의와 가장 치열하게 대결한 독립운동가가 이승만과 김구였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상해임시정부가 미국식 민주주의 신봉자인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고 볼셰비키의 지원을 받는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하는 연립정부로 출발했다는 사실이 한국 독립운동의 이데올로기에 따른 파쟁성을 예고했다. 파리강화회의와 국제연맹을 통하여 한국의 독립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지자 한국 독립운동자들은 볼셰비키정부의 지원을 얻는 방안을 진지하게 검토했다. 임시정부는 포타포프(Alexsei Potapov)라는 러시아 장성과 협의한 끝에 1920년 1월22일의 국무회의에서 안창호계의 안공근(安恭根)과 이동휘계의 한형권(韓馨權), 그리고 여운형 세 사람을 볼셰비키정부의 지원을 교섭하기 위하여 모스크바에 파견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이동휘는 4월 중순에 한형권 한 사람만 몰래 모스크바로 보냈다. 그리고 6월에 러시아 공산당에서 파견된 보이틴스키(Gregorii N. Voitinski)와 함께 상해에 한국공산당(한인공산당, 고려공산당, 대한공산당 등으로 불렸음)을 조직했다(《月刊朝鮮》2005년 2월호, <金九의 공산주의의 거부> 참조). 그리고 7월에는 시베리아의 이르쿠츠크에서 또 하나의 한인공산당이 조직되었다. 흔히 전자를 상해파 고려공산당, 후자를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으로 불렀다. 북경대학 문학부장 진독수(陳獨秀) 등 중국지식인들로 중국공산당이 조직되는 것은 그로부터 1년 뒤인 1921년 7월의 일이다.
 
  이때의 일로 흔히 거론되는 에피소드가 있다. 그것은 이동휘와 경무국장 김구 사이에 있었던 다음과 같은 논쟁이다. 어느 날 이동휘는 김구에게 공원 산보나 같이 하자고 불러, 김구에게 “나를 좀 도와주시오”하고 말했다. 김구는 이동휘가 자기에게 무슨 유감이 있어서 하는 말로 들려서 “제가 경무국장으로서 총리를 경호하는 터에, 직책상 무슨 잘못된 일이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이동휘는 손을 저으면서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다음과 같이 김구를 설득했다.
 
  “대저 혁명이란 유혈사업으로서 어느 민족에게나 대사인데, 현재 우리의 독립운동은 민주주의혁명에 불과하오. 따라서 이대로 독립을 한 후 또다시 공산혁명을 하게 되니, 두번 유혈은 우리 민족에게도 큰 불행이오. 그러니 적은이(‘아우님’이라는 뜻)도 나와 같이 공산혁명을 하는 것이 어떠하오?”
 
  그래서 김구가 “우리가 공산혁명을 하는데 제3국제당(코민테른)의 지휘명령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할 수 있습니까?”하고 묻자, 이동휘는 고개를 저으면서 “불가능하오”라고 대답했고, 이에 대해 김구는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말했다는 것이다.
 
  “우리 독립운동이 우리 한민족의 독자성을 떠나서 어느 제3자의 지도명령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자존성을 상실한 의존성운동입니다. 선생께서 우리 임시정부 헌장에 위배되는 말을 하심은 크게 옳지 못하니, 저는 선생의 지도를 따를 수 없으며 선생의 자중을 권고합니다.”32)
 
  요컨대 김구는 이동휘의 주장이 민족의 자주성에 위배되는 것이어서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이 무렵 이동휘는 또 이승만에 대해서는 “아직 사회주의의 소양이 없어서 식견이 미국의 정치제도를 넘지 못하여 진정한 평등과 자유의 원리를 깨우치지 못한 듯하다”고 사람들에게 말했다고 한다.33)
 
  1920년 6월 초에 모스크바에 도착한 한형권은 임시정부의 전권대사 자격으로 볼셰비키정부와 교섭을 벌여 40만 루블(20만 달러)을 지원받았고, 그 가운데서 30만 루블이 1920년 말부터 1921년 3월 사이에 상해로 반입되었다. 그것은 상해의 독립운동자들 사회에서는 엄청난 자금이었다. 이때는 이승만이 상해에 머물고 있을 때였는데, 자금이 도착하자 이동휘는 국무총리직을 사임하고 임시정부를 떠났다. 그리고 그 자금은 임시정부에 전달되지 않고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자금으로 사용되었다.34)
 
  처음 임시정부가 한형권을 모스크바에 파견한 사실은 미국에 있는 이승만에게는 보고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승만은 별도로 이희경(李喜儆)을 임시정부의 특사로 모스크바에 파견할 계획을 세웠으나 실현되지는 않았다. 그랬다가 이승만이 상해에 와 있던 1921년 5월16일의 국무회의에서 모스크바에 다시 가 있는 한형권을 즉시 소환하기로 결의하고 이희경을 임시정부의 대소전권대표로 임명하여 안공근과 함께 모스크바로 보냈다. 그러나 이희경의 차관교섭은 실패했다. 반대로 한형권은 20만 달러의 2차 지원금을 받아서 상해로 왔다. 그 자금은 1923년 1월부터 다섯 달 동안이나 상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의 경비로 사용되었는데, 회의는 안창호를 중심으로 임시정부를 개혁할 것을 주장하는 이른바 개조파와 새로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을 주장하는 공산주의자들 중심의 이른바 창조파로 맞서 분열되고 말았다. 이승만이나 김구는 이 국민대표회의에 반대였다. 김구는 이때의 국민대표회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간단명료하게 기술해 놓았다.
 
  “상해에서 개최한 국민대표회의는 ‘잡종회’라고 부를 만한 모임이었다. 이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 조선, 중국, 러시아 등 각처에서 한인단체 대표로 200여명이 각양각색의 명칭으로 모여들었다. 그중 이르쿠츠크파 공산당과 상해파 공산당이 서로 경쟁적으로 민족주의자 대표들을 분열시켜, 이르쿠츠크파는 임시정부 창조를, 상해파는 개조를 각각 주장하였다. 이른바 창조파는 현 임시정부를 취소하고 새로 정부를 조직하자는 것이고, 개조파는 현 정부를 개조하자는 것이었다. 결국 하나로 의견을 통일시키지 못하여 회의가 분열되었다. 창조파에서는 ‘한국정부’를 조직하고 그 정부의 외무총장인 김규식이 이른바 ‘한국정부’를 이끌고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가서 출품하였지만, 러시아가 허용하지 않아 계획이 무산되었다.
 
  국민대표회의에서 양파 공산당이 서로 투쟁하니 순진한 독립운동자들까지도 양파 공산당으로 나누어져 혹은 창조, 혹은 개조를 주장하여 전체가 요란하게 되었다. 이런 까닭에 내가 내무총장의 직권으로 국민대표회의의 해산령을 발표하니 비로소 시국이 안정되었다.”35)
 
  이렇게 하여 결국 모스크바 자금은 한국 독립운동을 발전시키기보다는 오히려 분열을 촉진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36) 이때부터 임시정부는 민족주의자들만의 독립운동기관이 되었다.
 
  이승만은 일생 동안 말과 글로 독립운동을 했고, 1920년대에는 자신이 발행하는 《태평양잡지》를 통하여 공산주의를 이론적으로 비판하는 글을 여러 편 썼는데, 그 가운데서 현재 세 편이 전해지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태평양잡지》 1923년 3월호에 발표한 <공산당의 당 부당>이라는 글이다(《月刊朝鮮》2001년 8월호, <韓人基督學院 학생들의 고국 방문> 참조).
 
  《태평양잡지》의 1924년 7월호에 발표된 <사회 공산주의에 대해야>라는 글은 공산주의 사상의 풍미에 대해 유연성 있는 입장을 취하면서도 “우리 민족의 생존책”을 우선적으로 강조하고 있어서 눈길을 끈다. 이 글에서 이승만은 사회, 공산 등 사회주의 사상이 우리 민족 사이에서 문제가 된다는 말들을 들을 때에 한편으로 기뻐하고 또 한편으로 염려했다면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이 주의가 세계인민들을 경제적으로 자유시키자 하는 개진주의(改進主義)니 이것이 장차 실시될는지는 관찰하는 자들의 의견이 다소간 부동하려니와, 지금 세상에 소위 개명한 나라라고는 이 주의가 아니 전파된 곳이 없으니, 우리도 세인의 풍조를 따라 남과 같이 전진하는 것을 내가 기뻐함이요, 일변으로는 우리 사람들이 이런 새 주의를 들을 적에 우리의 오늘 경우가 다른 것은 미처 생각지 못하고 다만 남이 좋아하니 우리도 좋아하자 하고 덮어놓고 따라나가다가 영향을 받을까 염려함이라. 물론 우리 내외지의 모든 인도자들이 응당 앞을 보아 지혜롭게 인도할 줄을 믿는 바이지마는 그중에 몇 사람이라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일시 풍조에 파동이 되면 그 손해가 장차 전체에 미칠까 하는 근심이 없지 아니함이라.…”
 
  이렇게 전제한 다음 이승만은 우리 민족은 다른 민족들과 처지가 달라서 이런 사상을 수용하는 데에는 큰 위험이 따른다고 경고했다.
 
  “다른 민족들로 말하면 다 저희 생존방책을 먼저 차려놓아 저희 살길을 완전히 본 후에 다른 주의를 여러 가지로 연구하야 어찌하면 더 잘살 수 있을까 하고 각 방면으로 시험하다가 다행히 잘되면 좋고 설혹 잘못되어도 크게 위태할 것은 없지마는 우리 처지는 이와 달라서 생존여부를 미판(未判)하고 앉은 중에 다른 주의를 주장하는 것이 심히 위태한 일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전력하여 해결해야 할 문제는 “우리 민족의 생존책”이며 무엇이든 그 주의를 방해하는 것은 곧 “민족적 자살”이라고 단정했다.

 

 

1947년 5월1일에 경교장에서 방문객을 맞아 담소하는 金九.


 

  이승만은 또 인터내셔널리즘이 내셔널리즘보다 높은 가치라는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하여 그것은 공산주의 국가, 곧 소비에트 러시아의 국가이익의 확장을 위한 구호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세계적 주의가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보다 크고 높다 하나 세계주의를 위하야 국가와 민족을 희생한 자 어디 있느뇨. 실상은 저희 이익과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야 빈 명사를 이용하는 것뿐이라, 우리는 헛되이 속지 말 것이다. 하물며 세계적 주의가 전파되는 곳마다 민족주의와 충돌이 생기나니, 만일 우리가 지금에 이런 주의로 우리끼리 충돌을 내고 보면 우리 생존책에 대하야는 그 많은 손해가 있을 터이니 더욱 정신 차릴 일이다.”
 
  이승만은 그러나 민족생존책이 급하다고 하여 모든 세계 사상을 다 배격하자는 것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우리는 민족생존책이 급하니 다른 주의는 다 거절하자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라. 다만 우리의 먼저 작정할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서, 그 문제 해결에 도울 것이 있는 줄을 믿는 사람은 아무리 과격선전을 할지라도 우리 국민단합에 조금도 손해가 없을지라.…”
 
  말하자면 독립운동에 도움이 되는 방법의 하나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설명은 아마도 이 시기의 상해의 독립운동자 사회나 국내 상황을 고려해서 한 말이었을 것이다.
 
  또 《태평양잡지》 1925년 7월호에 실린 <공산주의>라는 논설은 공산주의의 기본이론과 선전 내용을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비판한 글이었다.
 
  “공산주의가 지금 세계에 퍼져서 도처에 큰 문제가 되나니 우리 한국에도 한 문제가 되는 것이 또한 괴이치 않은 일이라. 우리 민족이 이에 대하야 어떠한 태도를 가지는 것이 옳을는지 깊이 연구하여 볼 일이로다.”
 
  이렇게 전제한 다음 이 논설을 공산주의의 “가장 중요한 관계점”으로 여섯 가지를 들어 비판했다.
 
  첫째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가 세상에 큰 복리를 끼칠 것이므로 사람마다 이 주의를 가지는 것이 옳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실상은 이것이 복이 될는지 해가 될는지 확실히 판단이 못 된 터이니, 다른 나라들은 이것저것을 시험하다가 아니 되면 다른 것을 할 수도 있지마는 우리 처지로는 한번 이것을 시험하다가 실패하면 다시 다른 것을 시험할 여력이 없을지라. 그러므로 우리의 급히 할 것을 먼저 힘쓰며 남들이 다 시험을 치러서 완성한 후에 채용하는 것이 우리의 지혜로운 계획이며…”
 
  둘째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가 세계평화와 만민이 형제 되는 복락을 주장한다는 주장에 대하여.
 
  “이 주의가 넓고 커서 나라마다 사람마다 준행하는 것이 인류 행복을 증진하는 것이 될 터이나, 남들은 다 민족의 생존을 완전히 보전하고 앉아서 더 잘살아 보려고 하는 것이지마는 우리는 민족이 장구히 있을까 없을까를 판단치 못하고 앉아서 정신없이 남을 따라 헛되이 애쓰다가 부지 중 우리 민족만 영영 살 수 없게 되고 보면 우리는 세계 복락을 위하야 우리만 희생하고 말 것뿐이라. 종교적 사상으로는 매우 고상하다 할 터이지마는 인류의 보통 관념으로는 가장 어리석은 물건을 이룰 따름이며…”
 
  공산주의가 종교적 사상으로는 매우 고상하다고 할 만하다는 설명은 종교는 아편이라는 레닌의 말을 연상시키는 탁견이었다.
 
  셋째로, 국가주의라는 것이 인민의 행복에 장애가 되며 세계전쟁을 유발시키는 데 비하여 공산사회는 국가를 없이하고 모든 민족이 구별 없이 살게 하자 하는 것이라는 주장에 대하여.
 
  “그 뜻이 또한 인도와 정의에 가까워서 세상 형편을 모르고 이 말만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을 기울이게 할 듯하나, 만일 이 주의를 주창하는 나라 사람들이 먼저 세계부강한 나라들로 하여금 각각 그 정부를 없이하며 강토를 열어 놓아 피차 구별이 없이 모든 인종이 같이 복리를 나누어 누리게 할진대 우리도 그 뒤를 따라서 국가를 희생하고 들어가려니와, 만일 그렇지 못하야 나라마다 군함 대포와 잠수정 비행대를 확장하며 잔약한 나라들만 권하야 국가주의를 버리라 할진대 우리는 언제까지든지 나라를 먼저 회복해 놓은 후에야 세계주의를 비로소 생각할 것이며…”
 
  넷째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가 인민의 평등 자유권을 증진하여 유식 무식과 유산 무산과 자본가와 노동자 등의 구별을 다 타파하고 모든 민중으로 하여금 공화사회에서 능히 얻지 못하는 행복을 누리게 하는 것이라는 주장에 대하여.
 
  “이것도 참 주의로 보면 공화민주주의보다 더욱 균일한 자유를 도모함이라 하겠으나, 다른 나라들은 다 저희 민족과 국가의 자유를 회복하야 다른 나라나 다른 민족의 속박을 면하고 앉았은즉 그 나라 안의 백성끼리 서로 압박하고 서로 구별하는 폐단을 없이하기 위하야 유식계급, 유산계급, 자본계급을 타파하고 무산, 무식, 노동 등 사회와 동등권을 누리게 하자 함이니 실로 민족 중 저희끼리 자유권을 다투는 것이거니와, 우리로 말하면 타국과 타족의 속박을 먼저 면하야 우리가 남과 같이 살게 만들어놓은 후에 우리끼리 어떻게 마련하야 인민의 평등을 보호하자 하는 것이 가한지라. 만일 그렇지 못하야 우리끼리 개인 권리를 다투느라고 서로 분별 분쟁하다가 국가자유를 영영 잃고 앉으면 남의 노예 된 백성이 저희끼리 평등권을 가진다 한들 무엇이 상쾌하리오. 그러므로 다 합동하야 우리의 공동자유를 먼저 회복한 후에 공산 사회 등 주의를 모본함이 늦지 아니하며…”
 
  다섯째로, 우리의 적국 곧 일본이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몹시 두려워하므로 우리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본떠서 저들을 어렵게 하는 것이 한 계획이라는 주장에 대하여.
 
  “그 또한 우리가 옳게 생각하는 바이라. 그러나 내 원수가 이것을 싫어하는 고로 내가 나의 이해를 불계하고 행하는 것이 옳다 함은 심히 위태한 생각이라. 내 원수의 집에 가서 내 목을 매어 죽으면 그 해가 내 원수에게보다 내게 더 큰지라. 내 몸을 없이하야 원수를 놀래는 것이 어찌 원수 갚는 일이라 하리오. 그런즉 우리는 덮어놓고 일본이 싫어하는 고로 우리가 원한다 하느니보다 우리가 그 주의를 소상히 알아보아 우리 형편에 복이 될까 아니 될까 하는 것만 연구하야 정할 것이오, 덮어놓고 원수가 미워서 이것을 행한다 함은 극히 위태한 생각이라.”
 
  논설은 여섯째로, 광복운동이 우리의 “생명운동”이라고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우리가 독립을 회복하면 우리 민족도 살 수 있고 독립을 회복지 못하면 우리가 다 생존을 유지치 못할 것뿐이니, 독립을 위하야 무엇이든지 행하자는 정신으로 주장을 삼을진대 우리는 세상 모든 주의에 찬성치 못할 일이 없으되, 급기 독립은 어찌되었든지 다른 주의가 더 높고 더 넓으니 그것을 취하자 하는 데는 우리가 결코 찬성할 수 없을지라. 우리 애독 제군은 이 정신을 크게 선전하야 국민의 정신이 일치하게 하는 것이 동지들의 직책이라.”
 
  이승만은 결론으로 민심합일이 독립의 첫걸음이라고 강조하고, 각자 처한 위치에서 형편에 맞는 행동으로 독립운동을 진행해 나가면 공산주의 등 모든 새 사상이 조금도 문제될 것이 없다 하고 끝맺었다.
 
  공산주의에 관한 이승만의 이러한 일련의 논설은 공산주의에 경도된 주장 일색이던 상황에서 공산주의를 이론적으로 비판한 우리나라 최초의 논설들이라는 점에서 특기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처럼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이론으로 내셔널리즘을 강조하는 것은 김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김구는 상해의 한인 공산주의자들이 모스크바 자금을 가지고 일본 공산주의자들과 어울리는 것을 가리켜 “친일파의 소행”이라고 비난하고, “정탐이라도 단군손(檀君孫)이니 동족이요 일본인은 모두 우리의 적일 뿐이다”라고 했다고 하는데,37) 김구의 이러한 주장은 그의 반일감정이 얼마나 철저한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여 눈길을 끈다. 또한 1932년에 윤봉길의 홍구공원 폭파사건 이후 피신생활을 할 때에 한 농촌에서 중국 농기구의 개량된 것을 보고 느낀 소감을 김구는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우리 민족의 비운은 사대사상의 산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실질적인 국리민복을 도외시하고, 주희(朱熹)학설 같은 것은 원래 주희 이상으로 강고한 이론을 주창하여, 사색 당파가 생겨 수백 년 동안 다투기만 하다 민족적 원기는 다 소진하고, 발단된 것은 오직 의뢰성뿐이니 망하지 않고 어찌하리오.
 
  슬프도다. 오늘도 청년들은 늙은이들을 노후(老朽)니 봉건잔재니 하며 비판하는데, 긍정할 점이 없지 않지만 그들 또한 문제가 적지 않다. 사회주의자들은 ‘혁명은 유혈사업이니 한번은 가능하거니와 민족운동 성공 후에 또다시 사회운동을 하는 것은 절대 반대’라고 강경하게 주장하였다. 그런데 러시아 국부 레닌이 ‘식민지 민족은 민족운동을 먼저 하고 사회운동은 후에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말을 하자 그들은 조금도 주저 없이 민족운동을 한다고 떠들지 않는가.
 
  정주(程朱·정자와 주자)의 방귀를 ‘향기롭다’고 하던 자들을 비웃던 그 입과 혀로 레닌의 방귀는 ‘달다’하니, 청년들이여, 정신을 좀 차릴지어다.”38)
 
  이승만의 반공주의는 자신이 직접 소련 정부와 교섭했던 경험을 통하여 더욱 확고해진 것 같다. 이승만은 1922년에 이희경의 차관교섭이 실패한 데 이어, 1933년 7월에는 자기 자신이 국제연맹회의가 열리는 제네바에 갔던 길에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소련 당국자들과 일본의 만주침략에 대한 미, 소, 중, 한 4개국의 공동대응 방안을 논의하고, 시베리아로 가서 한인지도자들을 만나보려고 했던 것이다. 처음에 이승만에게 입국 비자를 발부했던 소련정부는 이승만이 모스크바에 도착하자 입국 비자 발부가 착오였다면서 입국을 거부했다. 이승만은 소련정부의 그러한 조치가 일본의 압력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39)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은 소련의 한반도 정책에 깊은 불신감을 가지고 미국정부에 경고를 되풀이했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승만은 1945년 10월16일에 귀국했는데, 귀국 직후의 이승만과 공산당의 관계는 한동안 혼란스러웠다. 미군진주 직전에 공산당의 주동으로 급조된 ‘조선인민공화국’은 이승만을 주석으로 발표해 놓고 있었다. 이승만이 귀국하자 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는 “조선인민공화국 주석 이승만 박사는 드디어 귀국하였다.… 전국은 환호로 넘치고 있다. 우리 해방운동에 있어 이 박사의 위공은 다시 말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40)라는 담화를 발표하고, 이승만 환영대회까지 준비했다. 그러나 이미 미군정부에 의하여 그 존재가 부인된 인민공화국의 주석 자리를 이승만이 수락할 턱이 없었다. 11월9일에 인민공화국의 주석 취임을 거부하는 방송연설을 한 이승만은 11월21일에는 <공산당에 대한 나의 관념>이라는 제목으로 방송연설을 하면서 “나는 자초로 공산당에 대해야 호감을 가진 사람이다. 그 주의에 대하여도 찬성하므로 일후에 우리나라의 경제대책을 세울 적에 공산주의를 채용할 점이 많이 있다”고 말하고, 과거의 한인공산당에 대하여 둘로 나누어 설명했다. 하나는 경제 방면에서 공산주의가 근로대중에게 복리를 줄 것이니 이것을 채용하자는 목적으로 주장하는 이들이고 다른 하나는 경제 정책의 이해는 어찌되었든 공산정부를 수립하기만을 위하여 무책임하게 각 방면으로 선동하여 분쟁을 일으킴으로써 국사에 손해를 끼치는 이들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인민공화국을 만든 그룹도 전자에 속하는 것처럼 설명했다. 그는 “시베리아 눈바람에 갖은 풍상을 겪으며 고국을 위하여 혈전 고투하던 동포들과 악독한 왜적의 압박하에서 지하공작으로 백전불굴하고 배일 항전하던 공산당원들을 나는 공산당원으로 보지 않고 훌륭한 애국자로 인정한다. 왜적이 항복한 뒤에 각국의 승인을 얻기 위하야 인민공화국을 세운 것이 사욕이나 불의의 생각이 아닌 줄로 믿는다”라고 했다. 그런데 후자의 사람들은 일본인의 자금을 얻어 각 지방에서 소요를 일으킨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 사람들이 일인의 재정을 얻어가지고 모든 활동으로 각 지방에서 소요를 일으키며 외국인을 배척하는 선전과 임시정부를 반대하는
  운동으로 인심을 이산시켜서 미군정부가 한국을 해방시키지 못하고 속히 밀려나가기를 모략하는 것이니, 이는 일인의 모략에 빠지는 것이다”하고 단언했다.41)
 
  이 방송연설은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회의가 열리고 있을 때에 한 것인데, 그것은 자신의 주동으로 결성된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서 공산당이 탈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배려에서 나온 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독촉중협의 중앙집행위원 선정 문제로 조선공산당이 독촉중협을 탈퇴하여 협조가 불가능한 것이 확실해지자 이승만은 12월19일에 “한국은 지금 우리 형편으로 공산당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세계 각국에 대해야 선언한다”하고 공산당과 결별하는 폭탄선언을 했다. 이승만은 이 방송연설에서 먼저 폴란드를 비롯한 2차대전 뒤에 해방된 동유럽제국의 상황과 중국의 상황을 보기로 들어 “공산당 극렬분자들”이 어떻게 “제 나라를 파괴시키고 타국의 권리 범위 내에 두어서 독립권을 영영 말살시키기로 위주하는지”를 자세히 설명했다.
 
  이승만은 공산당이 소련을 가리켜 “프롤레타리아의 조국”이라고 찬양하는 것을 두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 분자들이 러시아를 저희 조국이라고 부른다니, 과연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요구하는 바는 이 사람들이 한국에서 떠나서 저희 조국에 들어가서 저희 나라를 충성스럽게 섬기라고 하고 싶다. 우리는 우리나라를 찾아서 잘하나 못하나 우리의 원하는 대로 만들어 가지고 살려는 것을 이 사람들이 한국사람의 형용을 쓰고 와서 우리 것을 빼앗아다가 저희 조국에 붙이려는 것은 우리가 결코 허락지 않는 것이니, 우리 삼천만 남녀가 다 목숨을 내놓고 싸울 결심이다.…”42)
 
  이승만의 이 연설에 대하여 박헌영은 12월23일에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대표명의로 긴 반박문을 발표했다.43) 이때부터 이승만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이승만의 이러한 반공주의는 좌우합작을 추진하는 하지(John R. Hodge) 사령관과 미군정기간 내내 반목하는 원인이 되었다. 하지는 이승만의 초청으로 내한한 올리버를 불러 “우리는 당신이 이 박사를 통제하는 데 몇 가지 실험을 해주기 바랍니다. 만일 당신이 하지 않는다면 이 박사의 정치생명은 끝나고 우리가 소련과 함께 통일시키기 위해 어떤 합의에 도달하더라도 그는 이미 쓸모가 없어집니다. 이 박사는 내가 한국에서 유일하다고만 할 수 있을 만큼 훌륭한 정치가입니다. 그러나 그가 공산주의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지 않는다면 한국정부에서 어떤 자리도 갖지 못할 것입니다”하고 경고했다.44)
 
  그리하여 하지는 한때 이승만을 국외로 추방할 계획까지 세웠는데, 이인(李仁)과 장석윤(張錫潤)이 들어 무마시켰다고 한다.45)
 
  이승만의 반공주의는 다른 많은 독립운동가들과는 달리 공산주의는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는 신념에 따른 것이었다.
 
  이승만의 이러한 신념은 6·25전쟁 중에서도 변함이 없었다. 1951년 5월에 농림부 장관에 임명된 임문환(任文桓)은 조선총독부의 고등관이었다. 임문환에게 임명장을 수여하면서 이승만은 “최초의 친일파 국무위원으로서 시험대에 올렸으니까 잘 하시오”하고 말했다. 취임 인사를 하러 국회에 갔다가 친일파라고 하여 인사를 거부당하고 온 임문환을 불러 이승만은 말했다.
 
  “지금 내가 일본과 아라사(러시아) 일을 걱정하는 것은 나라의 장래를 생각해서요. 그러나 아라사는 공산당이기 때문에 언젠가 민주주의에 질 것이오. 그때까지 조심하고 있으면 돼. 일본은 달라요. 미국에 밀착하여 민주주의와 함께 번영해 나갈 거요… (그러나) 이토록 좁은 땅에 저토록 많은 사람이 살면서 앞으로 오래 행복하게 살아갈 턱이 없어요. 언젠가는 상업이다 뭐다 해서 가장 가까운 우리나라로 밀려올 거요. 그때야말로 일본을 잘 아는 당신들 친일파가 나라를 지켜야 되오.”46)
 
  이 이야기는 이승만의 공산주의 필패의 신념뿐만 아니라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왜 친일파 테크노크라트들을 등용하는지를 설명하는 말이기도 하여 꼼꼼히 톺아볼 가치가 있다.
 
  이렇게 하여 반공주의는 대한민국의 건국이데올로기가 되고,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보루’가 되었다.
 
  김구는 <나의 소원>에서 소련식 공산주의를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모든 계급 독재 중에도 가장 무서운 것은 철학을 기초로 한 계급독재다.… 수백 년 동안 이조 조선에 행하여 온 계급 독재는 유교, 그중에도 주자학파의 철학을 기초로 한 것이어서, 다만 정치에 있어서만 독재가 아니라 사상, 학문, 사회생활, 가정생활, 개인생활까지도 규정하는 독재였다. 이 독재정치 밑에서 우리 민족의 문화는 소멸되고 원기는 마멸된 것이다. 주자학 이외의 학문은 발달하지 못하니 이 영향은 예술, 경제, 산업에까지 미치었다. 우리나라가 망하고 민력이 쇠잔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 실로 여기 있었다. 왜 그런고 하면 국민의 머릿속에 아무리 좋은 사상과 경륜이 생기더라도 그가 집권 계급의 사람이 아닌 이상, 또 그것이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범주 밖에 나지 않는 이상 세상에 발표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싹이 트려다가 눌려 죽은 새 사상, 싹도 트지 못하고 밟혀버린 경륜이 얼마나 많았을까. 언론의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통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오직 언론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만 진보가 있는 것이다.
 
  시방 공산당이 주장하는 소련식 민주주의란 것은 이러한 독재정치 중에도 가장 철저한 것이어서 독재정치의 모든 특징을 극단으로 발휘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학설을 최후의 것으로 믿어, 공산당과 소련의 법률과 군대와 경찰의 힘을 한데 모아서 마르크스의 학설에 일점일획이라도 반대는 고사하고 비판만 하는 것도 엄금하여 이에 위반하는 자는 죽음의 숙청으로써 대하여, 이는 옛날에 조선의 사문난적에 대한 것 이상이다. 만일 이러한 정치가 세계에 퍼진다면 전 인류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 하나로 통일될 법도 하거니와, 설사 그렇게 통일이 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불행히 잘못된 이론일진대, 그런 큰 인류의 불행이 없을 것이다.…”47)
 
  이승만과 김구는 성장환경과 학력과 독립운동을 한 장소와 방법에 많은 차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같은 시대의 지식인층이나 정치인들이 지닌 일반적인 사상경향과는 대조적으로, 철저한 반공산주의자들이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4. 아시아 최초의 기독교국가 비전

 

1965년 7월27일의 李承晩 장례 행렬. 장례식은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그러나 항일의식이나 반공주의 그 자체가 이승만과 김구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가치와 목표일 수는 없었다. 그것은 근대적 국민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이 추구하는 이상과 가치를 저촉되거나 위협하는 것에 대한 대결의 논리와 방법이었을 뿐이다. 이승만의 경우 그의 평생의 이상은 아시아에서 처음 되는 기독교국가 건설이었다. 《일본내막기》에서 먼저 강조한 것도 일본인들의 반기독교적인 사고방식, 곧 일본 군국주의의 정신적 기반인 신토[神道]에 대한 분석과 비판이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앞에서 본 대로 20대 후반에 5년7개월 동안 한성감옥서에서 감옥생활을 하는 동안 기독교인이 되었고, 감옥 안에서 전도활동과 콜레라 환자 치다꺼리 등 봉사활동을 하면서 그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국가는 기독교국가라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기독교의 본질은 사회구원이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그는 개인구원의 주장에 대해서는 “충군애국이 무엇인지, 세상을 건지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다만 제 몸 하나와 제 영혼 하나의 구원 얻는 것만 제일이라 할진대 이는 결단코 하나님의 참 이치와 예수의 근본 뜻을 알지 못한다 이를지라”라고 반대했다.48)
 
  흥미 있는 것은 이승만이 성경 구절 가운데 가장 감동되는 것이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원이 쓸데없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쓸데 있느니라”라고 한 구절(《마태복음》9:12, 《마가복음》2:17, 《누가복음》5:31)이라고 한 것이다. 그것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서 음식을 먹고 있는 예수를 보고 비난하는 바리세파 사람들을 비유적으로 나무란 예수의 말이다.
 
  이승만은 1904년에 도미하여 유학생활을 할 때부터 한국이 하루속히 기독교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린스턴대학 대학원 재학시절인 1908년 4월에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되는 《대도(大道)》지에 기고한 글에서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교화상으로 말한진대 우리나라 사람들이 부지런히 기도하며 일한 공로로 오천 년 고국에 처음 되는 영광빛이 세상에 드러나는지라. 이십오 년 전에 선교사가 처음으로 처사국(處士國·곧 조선)에 이를 때에 모든 반대와 핍박과 구축하는 중에서 예수교 설립되기를 누가 뜻하였으리오마는 오늘날 이십만 조선 예수교인이 부지런히 일하며 금년 일 년 내에 백만 명 신교인이 생기기를 기도하매 미국 각 교회에서 말하기를 오는 십오 년 안으로 한 예수교나라가 되기를 기약하겠다 하는지라. 세계의 예수교회 사기 중 처음 되는 일인 고로 미국 각처 큰 교회에서는 조선문제를 공부 아니하는 곳이 드물며 선교사업을 연설하는 자 조선교인들을 칭찬 않는 자 없어서 모든 예수교 숭봉하는 나라들이 마땅히 조선교회를 본받을 바이라 하나니, 이렇듯 영광스러운 일은 우리 조선인민이 일체로 하나님께 감사할 바이로다.
 
  일본이 삼십 년 내에 신 개명한 나라가 되었다고 세상에 자랑하며 여순구의 굳은 포대를 십 년 내에 두번 타파하였다고 사람마다 칭찬하니, 이것이 곧 저 사람들의 부지런히 일한 공효라 과연 장하다 하겠으나, 삼십 년 내에 우리의 완고 처사국을 변하야 문명예수교국을 만들진대 어찌 더욱 장하지 아니하며, 지난 이십여년 동안에 사람의 마음속에 형적없이 세운 포대 이십여만 자리를 타파함은 어찌 여순구 점령하는 힘보다 용이한 일이라 하리오.…”49)
 
  프린스턴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하여 서울 YMCA의 한국인 총무로 활동하던 이승만은 105인사건이 나자 다시 도미하여 1913년 2월에 일생의 독립운동의 ‘기지’가 된 하와이에 정착했다. 그는 하와이에 가자마자 105인사건을 다룬 《한국교회핍박》을 집필했는데, 이 책에서 이승만은 한국에 기독교가 급속히 흥왕하는 사실을 소개하면서 그것은 하나님이 한국 백성으로 하여금 동양에 첫 기독교국가를 건설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기술했다. 일본이 한국교회를 핍박하는 것이 바로 그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한일합병 이후 3·1운동까지의 한국인을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 부류로 나누어 설명했다. 첫째로, 우선 무식하고 양순하여 관인을 범같이 두려워하는 나머지 비록 속마음으로는 나라 생각이 가득할지라도 감히 표명하지 못하는 다수의 백성들, 둘째로 이완용, 송병준 등과 일진회원들처럼 드러내 놓고 일본의 충성스러운 노예 노릇을 하는 패들, 셋째로 주색잡기에 빠져 세월을 보내는 부패한 대관들과 상류층 사람들, 넷째는 아주 드러내 놓고 항일운동을 하는 사람들로서 이들은 국민들로부터 은근히 앙망과 추종을 받고 있으나 그 수효가 많지 않을 뿐 아니라 대부분 외국에 나가 있거나 옥중에 있거나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일본당국은 이들 네 부류의 사람들은 별로 두려워하지 않고,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다섯째 부류인 각 지방의 기독교회 지도자들이라고 강조했다. 이 다섯째 부류의 사람들을 이승만은 아주 실감나게 묘사했다.
 
  “수효도 많고 또한 다 자기 지방에서는 다소간 명망이 있는 자들이니, 가장 긴요한 부분이라. 어찌 보면 일본 주권을 복종하는 듯도 하고, 어찌 보면 피위피 아위아(彼爲彼我爲我·너는 너 나는 나)로 여기는 듯도 하야 남과 잘 섞이지도 아니하며, 혹 일본 주권자들이 청하야 벼슬을 하라 하면 공손히 사양하고 물러가 교회 속에 몸이 묻혀 혹 교육이나 전도에 종사하는데, 혹 일인들이 월급을 얼마씩 주며 비밀히 정탐을 하여 달라 하여도 듣지 아니하고, 혹 주색잡기로 유혹시켜도 빠지지 아니하며, 청년과 유년들을 대하야 모르핀과 권연초(담배)를 가까이하는 폐단을 말하는지라.…”50)
 
  이들이 앞에서 본 애국계몽운동의 중심세력인 ‘자립적 중산층’들이었다.
 
  이승만은 하와이동포사회를 한국을 동양에서 처음 되는 기독교국가로 건설하는 ‘기지’로 만드는 데 혼신의 노력을 경주했다. 그는 “하와이 팔도(八島)”가 ‘도’자의 글자는 다르지만 “조선팔도(朝鮮八道)”의 ‘팔도’와 발음이 같으므로 “우리의 남조선이라 이를 만하다”고 말하고, “하나님이 10년 전에 이리로 한인을 인도하신 것이 무심한 일이 아니 되기를 기약하겠도다”하고 재치 있는 수사법으로 하와이 동포들의 소명의식을 일깨우기도 했다(《月刊朝鮮》2004년 3월호, <李承晩 교장 한국 최초의 男女共學 실시> 참조).
 
  이승만은 자기가 발행하는 《태평양잡지》를 통해서도 동양 최초의 기독교국가 건설론을 폈다. 1914년 2월호에 실린 <한일교회합동문제>라는 글에서 이승만은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기에 여러 가지로 다 성취하여 여의하였으되 한가지 여의치 못한 것은 종교상의 문제”라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대개 예수교는 세상 사람들의 심령을 기르는 양식이라. 이 양식을 많이 저축하는 나라는 그 전정이 한량없이 장원하며 모든 물질적 진화가 일로조차 일어났는데,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등 모든 나라의 왕고 역사와 현시 형편을 보면 가히 깨달을지라. 성경에 말씀한 바와 같이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했으니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고 다른 것을 구하는 자는 모든 것을 다 얻을 수 있을지라. 심령의 양식을 구하는 자는 참 복이 있는 자요 심령의 양식을 먼저 구하는 나라는 참 복이 있는 나라로다.
 
  자초로 일본은 물질상 진화를 구하는 동안에 조선은 심령적 양식을 먼저 구해 서양문명 부강의 요소 되는 예수교를 받은 고로 지금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조선은 동양의 처음 생기는 예수교나라가 되리라 하며…”51)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승만은 국내외에서 선포된 여러 임시정부에서 정부 수반으로 추대되었다. 4월 초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수립된 최초의 임시정부로 알려진 노령정부에 대한 뉴스가 미국에 전해지자 AP통신 기자가 이승만을 찾아와서 인터뷰를 했는데, 이 자리에서 이승만은 “이번 독립운동지도자들의 주의는 한국으로 동양의 처음 되는 예수교국을 건설하겠노라”라는 것이라고 언명했다.52)
 
  이승만은 1915년에 한인여학원을 설립했다가 1918년에 남녀공학의 한인기독학원으로 개편하는 것과 동시에 한인기독교회를 설립했는데, 이 두 기관은 이승만이 한국을 기독교국가로 만들기 위한 준비의 ‘기지’이자 하와이 동포사회를 통괄하는 자신의 정치적 거점이 되었다.
 
  이승만의 이러한 기독교국가 건설 이념은 독립운동기간 내내 적십자운동 등 인도주의와 비폭력주의를 강조하는 기본 정신이 되었다.
 
  김구와 김규식 등 임시정부요인들이 귀국하고 닷새 뒤인 1945년 11월28일에 조선기독교 남부대회 주최로 정동감리교회에서 임시정부영수 환영대회가 열렸을 때에 김구와 김규식과 이승만은 답사를 통해 모두 기독교 정신이 건국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구는 “경찰서 열 곳을 세우기보다 교회 하나를 세우자”고 말하고 “강한 나라를 세우려면 성서 위에 세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김규식도 불가침의 강국을 세우려면 “그리스도라는 반석 위에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승만은 “이제 우리는 신국가 건설을 할 터인데, 기초 없는 집을 세우지 말자. 곧 만세반석 되시는 그리스도 위에 이 나라를 세우자”라고 역설했다.53)
 
  올리버에 따르면 이승만은 세속적이기도 하고 신비적이기도 했다. 이승만이 일생을 바친 문제는 정치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사람들에 의하여 제기되고 설득을 통하여 공동 행동을 취할 수 있는 해결 방안을 도출해야 할 문제들이었다. 그런데 그의 돈독한 종교적 신념은 다른 사람들과의 타협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이승만과 프란체스카는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서로 성경구절을 소리 내어 읽어주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이승만은 《마태복음》을 좋아했다. 그 가운데서도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복음》10:34),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마태복음》10:39)를 좋아했다. 그리하여 그의 명상은 절반이 기도였다고 한다.54)
 
  1948년에 수립된 대한민국은 물론 헌법에 정교분리를 규정한 근대적 국민국가로서 기독교가 국교는 아니다. 이승만도 유교와 기독교의 융화를 강조했고, 불교 쪽에 대해서는 “교회에 가면 어쩐지 남의 집에 간 것 같고 절간에 들어서면 제집에 온 것 같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55) 그러나 1948년에 수립된 대한민국이 비록 이승만이 꿈꾼 기독교국가는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여러 가지 국가 의전이나 제도, 기독교 활동에 대한 지원, 기독교인들의 중용 등의 결과로 오늘날 기독교는 어떤 종교보다도 한국민족주의의 활력 있는 중심 세력의 하나가 되었다. 물론 건국 이후의 기독교의 활동성과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기독교국가의 정치체제는 개인의 자유와 평등의 보장을 기본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이며 경제체제는 자본주의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승만은 그러한 기독교국가의 이상적인 본보기는 미국이라고 인식했다. 그는 일찍이 옥중에서 쓴 《독립정신》에서 미국을 가리켜 “이런 나라는 참 즐겁고 편안하야 곧 인간의 극락국이라 할지라”라고 썼다.56)
 
  이승만은 《제국신문》의 논설과 《독립정신》에서 미국식 민주주의에 대하여 여러 차례 설명했는데, 이를 테면 링컨 대통령이 게티즈버그 연설에서 말한 유명한 민주주의 정의, 곧 흔히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인민의” 정치라고 번역되는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을 자기 나름대로 그럴듯하게 의역하고 있어서 흥미롭다. 처음 《제국신문》 논설에서는 “그 정부에 세 가지 본의가 있나니, 일은 백성이 세운 정부요, 이는 백성을 위하야 세운 정부요, 삼은 백성이 행하는 정부라”라고 번역했다가,57) 《독립정신》에서는 “일은 백성이 하는 것이요, 이는 백성으로 된 것이요, 삼은 백성을 위하야 세운 것이라”라고 손질했다.58)
 
  1948년에 제헌국회에서 헌법을 제정할 때에 대통령중심제를 주장하는 이승만과 내각책임제를 주장하는 한민당 등 다른 정파는 새 정부의 권력구조, 곧 정부 형태를 가지고 심한 갈등을 빚었는데, 이승만의 내각책임제 반대 이유는 그것이 일본이나 영국처럼 왕제도를 버리기 어려운 나라들이 채택하고 있는 제도이고 진정한 민주주의 제도는 미국식의 대통령중심제라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망명지 하와이에서 “호랑이도 죽을 때에는 제 굴을 찾는다는데…”하며 조국을 그리다가 1965년 7월19일에 90년의 긴 생애를 마쳤다. 주검으로 돌아온 그는 국립묘지 안 그가 생존 시에 스스로 잡아둔 양지바른 언덕에 묻혔다.
 
  죽음이 가까웠음을 느끼면서 그가 한 기도는 “이제 저의 천명이 다하여감에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셨던 사명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바라옵건대 우리 민족의 앞날에 주님의 은총과 축복이 함께하시옵소서.… 우리 민족이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라는 것이었다고 한다.59)
 
  김구는 <나의 소원>에서 “나의 정치이념은 한마디로 표시하면 자유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라야 한다”고 전제하고 결론으로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그렇다고 나는 미국의 민주주의 제도를 그대로 직역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소련의 독재적인 민주주의에 대하여 미국의 언론자유적인 민주주의를 비교하여서 그 가치를 판단하였을 뿐이다. 둘 중에서 하나를 택한다면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기초로 한 자를 취한다는 말이다. 나는 미국의 민주주의 정치제도가 반드시 최후적인 완성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아니한다. 인생의 어느 부분이나 다 그러함과 같이 정치 형태에 있어서도 무한한 창조적 진화가 있을 것이다.…”60)
 
  미국식 정치제도의 우월성을 인정하면서도 그러나 그것이 최후적인 완성된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 것이 여운을 남긴다.
 
  미국식 민주주의에 대한 이승만과 김구의 이러한 인식의 차이는 오늘날 한국민족주의의 최대의 과제인 통일의 방법을 모색하는 데 중요한 시사를 준다. 그것은 통일문제의 핵심은 민족문제가 아니라 체제문제라는 사실이다. 세계사에서도 매우 드물게 한 민족, 곧 한 정치제(body politic)로서 장기간 한반도에서 공동생활을 해온 우리 민족은 1948년에 체제가 다른 두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분단되었을 뿐이다.
 
  통일문제에 대한 역사의 교훈은 다름 아닌 소비에트 러시아의 마지막 대통령 고르바초프(Mikhail S. Gorbachev)에 의하여 표명된 적이 있다. 1991년 11월에 모스크바를 방문한 현대그룹의 정주영(鄭周永)과 이명박(李明博)에게 고르바초프가 물었다.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될 당시에는 북한이 공업이 더 발달하고 국민소득도 높았습니다. 남한은 겨우 농업에 의존하는 수준이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거꾸로 북한이 남한보다 가난합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어리둥절해 하는 두 사람에게 고르바초프는 이렇게 말했다.
 
  “북한은 공산주의를 채택했고, 남한은 자본주의를 선택했기 때문입니다.”61)
 
  그런 뜻에서 이승만과 김구의 전기는 그들이 사망함으로써 끝난 것이 아니다.⊙

 



  1) Robert T. Oliver, Syngman Rhee and American Involvement in Korea, 1942~1960, Panmun Book Company LTD, 1978, p.390. 2) 도진순 주해,《백범일지》, 돌베개, 1997, pp.65~66. 3) Robert T. Oliver, Syngman Rhee—The Man Behind The Myth, Dodd Mead and Company, 1960, p.20. 4) Benedict Anderson, Imagined Communities: Reflections on the Origin and Spread of Nationalism, Verso, 1991, pp.37~46.
 
  5) 《협성회회보》1898년 3월19일자(제12호), <논설>. 6) 《백범일지》, p.115. 7) 리승만,《독립정신》, 대동신서판, 1910, p.263. 8) 《백범일지》, p.254. 9) 장규식,《일제하 기독교민족주의 연구》, 혜안, 2001, p.37. 10) 이정식 지음, 권기봉 옮김,《이승만의 청년시절》, 동아일보사, 2002, p.101.
 
  11) 《백범일지》, pp.185~186. 12) Andre Shmid, Korea between Empires 1895-1919, Columbia University Press, 2002, pp.1~22. 13) 《백범일지》, p.207. 14) 韓相一,《日本帝國主義의 한 硏究》, 까치, 1980, pp.26~33. 15) “Autobiography of Dr. Syngman Rhee”(unpublished), in George A. Fitch Papers, Yenching Institute, Harvard University, p.10.
 
  16) 《共立新報》1908년 9월2일자, <論說: 일본이 기탄하는 일이 우리의 행복될 일이라>. 17) 《統監府文書(8)》, 國史編纂委員會, 1999, pp.251~252. 18) 《백범일지》, pp.241~242. 19) 《백범일지》, p.221. 20) 《백범일지》, pp.237~238, p.267.
 
  21) 《백범일지》, p.356. 22) Syngman Rhee, Japan Inside Out; The Challenge of Today, Freming H. Revell Company, pp.24~25. 23) <李東輝가 李承晩에게 보낸 1919년 11월29일자 편지>, 尹炳奭 編,《省齋李東輝全書(上)》,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9, pp.44~45. 24) <李承晩이 李東輝에게 보낸 1920년 1월28일자 편지>,《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十六) 簡札1》, 延世大學校現代韓國學硏究所, 1989, pp.164~165. 25) 《獨立新聞》1921년 3월5일자, <大統領의 敎書>.
 
  26) Syngman Rhee, op. cit., pp.24~25 ; Robert T. Oliver, Syngman Rhee, 1960, pp.186~187. 27)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5) 臨政篇Ⅹ》, 國史編纂委員會, 1994, pp.248~249 ; Robert T. Oliver, Syngman Rhee, 1960, pp.186~187. 28) 정병준,《독도 1947》,돌베개, 2010, 참조.
 
  29) 李承晩, <隣接海洋主權宣言에 對하여 敷衍> (1952.2.8),《大統領李承晩博士淡話集(第一輯)》, 公報處, 1953, p.150. 30) 이한우,《우남이승만, 대한민국을 세우다》, 해냄, 2008, pp.466~467. 31) 金溶植,《새벽의 약속》, 김영사, 1993, p.95.
 
  32) 《백범일지》, p.310. 33) <張鵬이 李承晩에게 보낸 1920년 8월21일자 편지>,《雩南李承晩文書(18) 東文篇 簡札1》, pp.69~70. 34) 고정휴, <상해임시정부의 초기 재정운용과 차관교섭—임시대통령 이승만의 역할을 중심으로>,《韓國史學報》(제29호), 2007, pp.222~226. 35) 《백범일지》, pp.312~313. 36) 고정휴, 앞의 글, p.237.
 
  37) 金綴洙,《遲耘 金綴洙》, 정신문화연구원, 1999, p.9, pp.395~396. 38) 《백범일지》, pp.352~353. 39) Syngman Rhee, Log Book of S. R., 1933년 7월19일조. 40) 《每日新報》1945년 10월18일자, <李博士歸國歡迎>.
 
  41) 《自由新聞》1945년 11월23일자, <骨肉相爭을 避하라> ;《서울신문》1945년 11월23일자, <過激한 思想은 有害>.42) 《서울신문》1945년 12월21일자, <共産黨에 대한 立場>. 43) 《朝鮮人民報》1945년 12월24일, <파시스트 李博士에 反省要求>. 44) Robert T. Oliver, The Way It Was—All The Way: A Documentary Accounting(unpublished), p.47. 45) 李仁,《半世紀의 證言》, 明知大學校出版部, 1974, pp.168~173. 46) 任文桓,《日本帝國と大韓民國に任えた官僚の回想》, 草思社, 2011, pp.374~376.
 
  47) 《백범일지》, pp.427~428. 48) 리승만, <대한교우들의 힘쓸 일>, 《신학월보》 1904년 8월호, p.226.
 
  49) 리승만, <부지런한 결과>,《大道》, 1908년 4월호, 제2권 5호, pp.141~142. 50) 리승만,《한국교회의핍박》, 新韓國報社, 1913, pp.59~60. 51) 리승만, <한인교회 합동문제>,《태평양잡지》, 1914년 2월호, 제1권 6호, p.81.
 
  52) 《新韓民報》1919년 4월8일자, <우리나라를 예수교국으로 만들어>. 53) 김흥수, <기독교인 정치가로서의 이승만>, 유영익 편,《이승만 대통령 재평가》, 연세대학교출판부, 2006, pp.408~409. 54) Robert T. Oliver, Syngman Rhee and American Involvement in Korea, p.390. 55) 權五琦, <李靑潭 인터뷰>,《新東亞》1967년 2월호. 56) 《독립정신》 p.71. 57) 《제국신문》1902년 10월31일자, <논설: 미국인민의 권리론 련속(二)>. 58) 《독립정신》, p.63.
 
  59) 李仁秀 證言. 60) 《백범일지》, pp.426~430. 61) 이명박,《신화는 없다》, 김영사, pp.312~313.

 

<출처 : 월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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