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복거일의 이승만 오디세이

[⑬ 1954년 한미상호방위조약]

드무2 2024. 2. 2.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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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⑬ 1954년 한미상호방위조약]

 

 

 

포사격 훈련 보는 이승만 · 아이젠하워 · 백선엽

1952년 12월 4일 경기 광릉 수도사단에서 아이젠하워 (앞줄 왼쪽에서 둘째) 당시 미 대통령 당선자가 망원경으로 기갑부대의 기동, 포 사격 훈련을 참관하는 모습. 앞줄 왼쪽은 이승만 대통령이고, 오른쪽 끝에는 백선엽 육군참모총장이 서 있다. 1953년 7월 12일 미국과의 합의를 통해 한국은 휴전에 반대하지만 방해하지 않기로 했고, 미국은 휴전이 성립된 뒤 빠른 시일 안에 한국과 상호 방위 조약을 맺기로 약속했다. / 조선일보 DB

 

 

'조국 수호' 밀서 들고 美 찾은 지 50년만에··· 한미방위조약 맺었다

 

 

 

이승만 끌어내리려 했던 美

李가 반공포로들 전격 석방하자

美, 비밀리에 李 내치려 했지만

한국민 반발 우려해 대화 선회

 

'밀당' 끝에 미군주둔 약속 받아내

한국은 휴전회담 방해하지 않고

美는 휴전 이후 조약 맺기로 약속

1954년 1월 13일 상호조약 발효

 

 

 

이승만 대통령이 휴전에 반대하고 한국군 단독으로 북진하겠다고 선언한 뒤로, 미국은 그를 제거하는 계획을 다듬었다. 마침내 1953년 5월 24일 UN군 최고사령관 마크 클라크 장군은 ‘에버레디 작전 (Operation Ever-ready)’ 을 확정했다. 이 대통령을 임시 수도 부산에서 다른 곳으로 유인한 다음, 미군이 부산에 진입해서 이 대통령에 충성하는 사람들을 체포하고 한국군 참모총장이 정부를 통제하도록 한다는 내용이었다.

5월 29일에 열린 국무부와 합동참모본부의 합동 회의에서 ‘에버레디 작전’의 실행이 논의되었다. 육군 참모총장 로턴 콜린스 대장은 이승만의 제거를 강력히 추천했다. 그는 이승만의 상호방위조약 요구를 들어주는 것보다는 그를 보호 감금 (protective custody) 아래 두는 것이 낫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한 뒤에, 주한 미군을 철수한다는 얘기였다.

국무부 동아시아 담당 차관보 월터 로버트슨이 이의를 제기했다. “우리가 무슨 권위로 한국 정부를 접수합니까? 우리가 실은 우리 자신을 침략자의 위치에 놓는 것 아닙니까?”

해군 작전차장 도널드 던컨 제독은 콜린스와 생각이 달랐다. 만일 이승만이 미국과 뜻을 함께하지 않으면, 아군은 재앙적 상황을 맞을 수 있으니, 상호방위조약을 허락하는 편이 낫지 않느냐는 얘기였다. 이어 그는 미군을 한국에서 철수하는 것은 군사적 문제만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했다. 세 해 동안 한반도에서 싸운 터에 갑자기 남한을 포기하는 것은 심각한 정치적 함의들을 품었다는 얘기였다.

이처럼 미국 정부의 한국전쟁 담당자들은 이승만의 거세고 끈질긴 휴전 반대 정책에 대해 어정쩡한 태도를 지녔다. 어떤 대응책도 신통치 않았고 아군의 분열과 군사적 패배의 위험을 안았다.

 

 

반공포로 석방에 난감해진 美

1953년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이 반공포로들을 석방하자, 휴전 회담이 마비되었다. 마지막 쟁점인 포로 교환 문제에 거의 합의한 터였는데, 제3국으로 송환될 북한군 반공포로들이 수용소들에서 풀려나 남한 사회로 숨어버린 것이었다.

판문점에선 미군 대표들의 체면이 많이 깎였다. 보다 중요하게, 공산군에 억류된 미군 포로들을 돌려받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커졌다. 워싱턴에선 한국전쟁의 조속한 종료를 공약으로 내걸었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

이 대통령의 일방적 조치에 미국으로선 대응할 길이 마땅치 않았다. 먼저 떠오르는 방안은 이 대통령의 조치를 비난하고 한국전쟁에서 발을 빼는 길이었다. 이 경우, 한국군은 탄약 부족으로 며칠 못 가서 공산군에 패배할 터였다. 한국군이 전선의 3분의 2를 맡은 상황에선, 전세가 단숨에 적군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미군이 한반도에서 안전하게 철수하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실은 기세가 오른 공산주의 세력이 남한만을 차지하고 멈추리라 기대할 수도 없었다. 남한의 공산화가 미칠 영향은 온 세계에 걸쳐 가늠하기 힘들 만큼 크고 오래갈 터였다.

보다 온건한 방안은 ‘에버레디 작전’의 실행이었다. 그러나 이 방안도 보기보다 위험하고 후유증이 크리라는 것이 드러났다. 궁극적 문제는 이 대통령이 워낙 뛰어난 지도자였고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다는 사실이었다. 누구도 그를 대신할 수 없었다. 이 대통령이 미군에 의해 구금되었다는 것이 알려지면, 한국군 장병들의 태도는 부정적일 터였다. 일반 국민들의 분노와 저항이 폭발적이리라는 것은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었다. 자칫하면, 한국군과 미군이 충돌할 수도 있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위험하고 후유증이 큰 군부 정변보다는 이승만과의 협상으로 기울었다. 게다가 매카시 상원의원의 활약으로 미국에선 공산주의 세력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만일 아이젠하워가 공산주의 세력에 유화적 정책을 편다는 인식이 퍼지면, 그가 입을 정치적 타격은 작지 않을 터였다.

마침 신임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는 반공주의자여서, 이승만에게 호의적이었다. 덜레스의 건의를 받아들여,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에게 미국에 와서 협의하라고 초청했다. 이승만은 어려운 시기에 한국을 떠나기 어렵다고 밝히고 덜레스의 한국 방문을 제안했다. 미국은 덜레스 대신 실무자인 로버트슨을 보냈다.

로버트슨은 1953년 6월 25일 서울에 닿았다. 미국이 조지 마셜 원수를 대통령 특사로 중국에 보내 ‘국공내전’ 의 휴전을 시도했을 때, 로버트슨은 그를 보좌했었다. 그는 중화민국이 공산당 반군에 패배해서 중국 대륙이 공산화된 일에선 미국의 책임이 크다고 보았다. 중화민국이 대만으로 옮겨간 뒤엔, 대만의 방위를 위해 진력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협상

공산주의의 위협에 관한 견해가 같았고 상대의 어려운 입장을 이해했으므로, 이 대통령과 로버트슨은 우호적 분위기 속에서 협상했다. 마침내 7월 12일 양측은 합의에 이르렀으니, 한국은 휴전에 반대하지만 방해하지 않기로 약속했고 미국은 휴전이 성립된 뒤 빠른 시일 안에 한국과 상호방위조약을 맺기로 약속했다.

 

 

 

상호방위조약 서명하는 한미

1953년 10월 1일 미국 워싱턴에서 덜레스 미 국무장관과 변영태(오른쪽) 외무장관이 한미상호방위조약 문서에 정식으로 서명하고 있다. / 조선일보 DB

 

 

 

이런 합의에 따라, 한국군은 휴전 협정 조인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래서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인민국 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 군사 정전에 관한 협정’ 이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에 판문점에서 조인되었다. 그리고 12시간 뒤에 700리 휴전선에서 총성이 멎었다.

비참한 전쟁이 멈췄지만, 이 대통령은 마음이 편할 수 없었다. 그날 발표된 성명에서 그의 비통한 마음이 읽힌다.

“공산 압제하에서 계속 고생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우리 북한 동포여, 희망을 버리지 마십시오. 우리는 여러분을 잊지 않을 것이며 모른 체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한국 민족의 기본 목표 즉 북쪽 우리의 강토와 동포를 다시 찾고 구해내자는 목표는 계속 남아 있으며 결국 성취되고야 말 것입니다. 유엔은 이 목표를 위하여 협조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8월 4일엔 덜레스 국무장관이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위해 서울을 찾았다. 양측의 입장이 상당히 달라서, 합의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마침내 8월 8일 변영태 외무장관과 덜레스 장관이 조약을 가조인했다. 이어 10월 1일에 워싱턴에서 정식으로 조인되었고 1954년 1월 13일에 발효되었다. 조약의 핵심은 미군을 한반도에 주둔시킨다는 조항이었다. 이 조항에 따라 미군은 지금까지 70년 동안 한국에 주둔하면서 한국을 지켰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이 대통령에겐 개인적으로도 뜻깊은 일이었다. 1904년 겨울에 민영환과 한규설 두 우국 대신으로부터 조국을 지킬 방도를 마련하라는 임무를 받고 제물포에서 기선에 오른 지 반세기 -ㅡ 그는 조국을 지킬 미국과의 조약을 마련하여 그 임무를 완수했다.

 

 

 

복거일 소설가

 

 

 

매카시, 北이 한국 침공하자 "공산주의에 맞서야"··· 미국의 참전 이끌어내

 

 

 

美에 공산주의 위험성 일깨우고

이승만 우호 여론 조성하려 노력

 

 

 

매카시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첩자들이 끼친 엄청난 해악을 사람들이 깨닫도록 했다. 그의 활약 덕분에 미국은 처음으로 안보 체제를 갖추었다.

그 과정에서 그는 한국에 결정적 도움을 주었다. 이전에 살핀 것처럼, 매카시는 1950년 2월의 휠링 연설로 ‘애치슨선’ 을 무력화하고 북한군의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에 미국이 참전하도록 만들었다. 1953년 여름엔 공산주의 세력의 위험을 미국 시민들이 깨닫도록 해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휴전 회담에서 공산군에 유화적 정책을 펼 정치적 공간을 줄였다.

 

 

 

매카시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 그는 한국을 실질적으로 도우려 애썼다. 그가 큰 관심을 보인 문제는 ‘미국의소리 (VOA)’ 방송이 공산주의 세력에 대해선 호의적이면서도 자유 세계를 힘겹게 지키는 대한민국에 대해선 늘 비판적이었다는 사실이었다.

1952년 여름 직선제 개헌과 관련된 ‘국제공산당 사건’ 이 일어났을 때, VOA는 그 사건에 관한 KBS의 발표를 뒤집는 내용을 방송했다. 이 일로 공보처는 VOA의 방송을 보름 동안 중단시켰다. 매카시는 VOA의 정책이사 에드윈 크레츠먼을 청문회에 불러서 상황을 확인했다. 그리고 크레츠먼에게 물었다, “당신들은 이런 방송들에서 이승만에 관한 호의적 논평들을 내보낸 적이 있습니까?” 크레츠먼은 대답했다.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미국 언론이나 유럽 언론에서 ‘이승만에 관한 호의적 논평’ 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대화는 매카시의 공정성에 대한 예민한 감각과 공산주의자들의 교활한 행태에 대한 통찰을 잘 보여준다. 어떤 사람이나 나라에 대해서 결점들만을 얘기하고 장점들을 언급하지 않으면, 설령 그 얘기들이 사실일지라도, 그것은 편향적이 된다. 우세한 무력으로 침공한 공산군과 힘들게 싸우는 나라에 대해선 편향적으로 보도하고 침공한 북한이나 중공에 대해선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으면, 편향성은 더욱 커진다. 매카시는 “호의적 논평을 내보낸 적이 있습니까?” 라는 가벼운 질문 하나로 공산주의자들이 들끓는 미국 공보기관의 문제점을 또렷이 부각시킨 것이었다.

매카시의 차석 보좌관 로버트 케네디는 능력이 뛰어났고 매카시에게 끝까지 충성하면서 그를 도왔다. 중서부의 가난한 농장에서 태어난 매카시는 동부의 명문 케네디 가문과 아일랜드계 천주교도라는 공통점 덕분에 가까웠고 대통령이 될 존과 로버트의 아버지인 조셉 케네디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로버트 케네디는 미국 의회가 중공 정권과의 교역을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부는 그런 금지를 제대로 시행하지 않아서 전쟁 물자들이 중공 정권으로 많이 들어간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러나 담당 관리는 그 법이 동맹국 정부의 행위들에만 적용되고 개인들의 행위들엔 적용되지 않으므로 미국 정부로선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설명했다. 케네디는 중국과의 교역에 이용되는 선박들이 주로 그리스 선적이라는 것을 확인하자, 선주들을 만나서 금지된 품목들을 중국으로 수송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매카시는 상원에서 조지 마셜 원수가 소비에트 러시아를 위해 일해왔다고 비난했다. 마셜은 2차 대전에서 육군 참모총장으로 전쟁을 실질적으로 지휘했었다. 그리고 아이젠하워는 마셜의 지휘를 받아 연합군의 작전을 주도했었다. 따라서 매카시의 마셜에 대한 공격은 실질적으로는 아이젠하워에 대한 공격이었다.

아이젠하워는 인기가 높은 매카시가 자신에게 위협이 되리라고 판단해 그를 꺾으려 했다. 같은 공화당 출신 대통령이 박해하니, 매카시로선 도와줄 세력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어이없는 이유로 상원의 견책을 받았다. 울분과 실의로 건강을 잃은 그는 1957년에 죽었다. 그가 죽자, 그의 적들이 그의 악마화에 나섰다. 그리고 그 공작을 주도한 러시아 비밀경찰 NKVD가 만든 “매카시즘 (McCarthyism)’ 이란 말이 뿌리를 내렸다.

매카시의 비극적 운명에 대해, 소비에트 러시아 첩자들의 실태를 가장 잘 알았을 연방수사국 (FBI) 국장 에드거 후버는 간명하게 설명했다, “당신이 어떤 종류든지 나라를 전복하려는 사람들 (subversives)을 공격하면, 당신은 나올 수 있는 가장 극단적으로 악랄한 비난의 희생자가 되게 마련이다.”

 

 

[출처 : 조선일보 2023년 11월 8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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