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 미술가]
▲ 작품1 - 이중섭, ‘황소’, 1953 ~ 1954, 개인 소장. / 소마미술관
'황소' <이중섭 作>로 인내와 끈기, '산' <김환기 作>으로 쪽빛 고향 표현했죠
인생살이를 산에 빗대 그려낸 유영국
묵묵히 자리 지키는 이웃 그린 이응노
엄혹한 시대서 느낀 고민 · 절규 담아
훌륭한 미술 작품을 그려 이름을 남긴 우리나라 미술가 중에는 평온하지 못한 시기를 살며 가난하고 굴곡진 삶을 이겨내야 했던 분이 많습니다. 특히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세대가 그랬지요. 그들은 한창때 나이에 6 · 25전쟁이 터져 고향을 떠나야 했고, 피란 통에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야 했습니다. 휴전 이후에는 민주주의가 정착하기 이전의 심각한 사회 혼란까지 겪어야 했죠.
외국으로 유학을 떠난 미술가들은 요즘과는 사뭇 다른 쓸쓸한 경험을 했어요.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우리나라 음악이나 드라마, 영화가 많이 알려져 있고, 외국인도 한국인에게 비교적 호감을 갖고 다가와 국적을 떠나 서로 친하게 지낼 수 있어요. 하지만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한국은 그저 몹시 가난한 분단국가일 뿐이었습니다.
서울 송파구 소마미술관에서 27일까지 열리는 '다시 보다, 한국근현대미술전' 에 걸린 작품에는 힘겨운 시대를 견뎌낸 20세기 한국 근현대 미술가들의 사연이 녹아 있습니다. 그들은 미술가가 되겠다는 결심으로 어떤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꾸준히 실력을 키웠어요. 하지만 정작 마음 둘 곳은 없어, 고향의 산천과 두고 온 친지를 사무치게 그리워하며 오직 작업에만 몰두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의도했건 아니건 그 시절 작품에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가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엄혹한 시대를 살며 느낀 고민과 절규도 드러나죠. 작품마다 그 대상은 다르지만,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를 찾아볼 수도 있습니다. 작품으로 살펴보기로 해요.
이중섭의 '황소' 와 김환기의 '산'
첫 번째 소재는 황소예요. 화가 이중섭 (1916 ~ 1956)은 어린 시절부터 소를 관찰하며, 소는 군말 없이 우직하게 인내와 끈기로 힘든 일을 견뎌내는 동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는 소의 우직함을 닮고 싶어 했어요. 강한 의지나 희망이 필요할 때마다 소를 그리며 마음을 다잡았죠. 〈작품1〉을 보세요. 붉은 바탕에 황소의 머리 부분을 마치 초상화처럼 크게 확대해 그렸습니다. 크게 치뜬 눈망울은 순한 모습이지만, 울부짖는 듯 입을 크게 벌리고 있어요. 말 없는 동물이지만 애절하게 절규하는 듯한 감정이 전해져 옵니다. 황소를 닮은 이중섭은 이런 말을 남겼어요. "나의 예술은 진실의 힘이 비바람을 이긴 기록이다."
▲ 작품2 - 김환기, ‘산’, 1955, 개인 소장. / 소마미술관
〈작품2〉는 한국을 떠나 프랑스 파리와 미국 뉴욕에서 오래 지냈지만, 한시도 고향의 하늘을 잊은 적 없던 화가 김환기 (1913 ~ 1974)가 그린 '산' 입니다. 언젠가 조병화 시인이 김환기에게 "왜 그렇게 목이 기냐" 고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고 해요. "난 섬사람입니다. 육지가 항상 그리워 목을 길게 뺐더니 그만 목이 길어지고 말았죠." 성장기에 늘 가슴에 품고 있던 육지에 대한 향수 (鄕愁)는 훗날 그의 그림에서 우리나라 자연에 대한 애착으로 드러납니다. '산' 은 고국의 산천을 은은한 쪽빛으로 표현한 그림입니다. 한편으로는 삼각형과 원의 추상적인 구성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산과 둥근 달의 형태를 묘사했지요.
▲ 작품3 - 유영국, ‘산’, 1966, 삼성미술관 리움. / 소마미술관
유영국의 '산' 과 이응노의 '군상'
〈작품3〉은 유영국 화가가 그린 '산' 입니다. 화면 가운데 삼각형 산이 놓이고 노랑 · 파랑 · 녹색의 절묘한 색채 조합이 산뜻하게 조화를 이룹니다. 한국 사람들은 평생 산을 보면서 살아갑니다. 전 국토가 산줄기를 끼고 있고 사방으로 산이 마치 병풍처럼 우리를 감싸고 있지요. 사람들 사는 곳은 유행에 따라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으로 가득하지만, 저 멀리 산은 언제 바라보아도 항상 거기에 서 있어요. 유영국 (1916 ~ 2002)은 변치 않는 산의 모습과 동시에 산이 보여주는 다채로움을 동시에 화폭에 담고 싶었어요.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이다. 산을 그리다 보면 그 속에 굽이굽이 길이 있고, 그것이 인생인 것 같다. 내 그림의 산속에는 여러 모양의 인생이 숨어 있다." 그는 이렇듯 산을 인생에 빗대기도 했습니다.
▲ 작품4 - 이응노, ‘군상’, 1986, 이응노미술관. / 소마미술관
〈작품4〉는 동물이나 자연이 아닌 사람이 그림 소재로 등장합니다. 커다란 흰 바탕 화폭이 다른 아무것도 없이 오직 사람들로만 채워져 있어요. 이응노 (1904 ~ 1989)가 그린 군중의 모습입니다. 먹으로 까맣게 그려진 사람들은 무언가를 향해 우르르 모여드는 새까만 개미 떼처럼 보이기도 해요. 얼굴을 점으로 찍어 표현했기 때문에 표정은 알 수 없지만, 인물들은 마치 춤을 추듯 제각각 다른 동작을 하고 있어요. 같은 시대를 살아가며 저마다 자기 자리에서 쉬지 않고 묵묵히 각자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우리 이웃들입니다. 어쩌면 대한민국을 실제로 지탱하며 움직여 나가는 힘의 근원은 바로 이들이 아닐까요.
이응노 역시 어떤 장애물에도 작업을 멈추지 않았어요. 심지어 그는 1960년대 말 간첩 활동에 연루됐다는 누명을 쓰고 옥살이도 했습니다. 하지만 험난한 시대가 준 불운에도 그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수감 중에도 그는 천, 은박지, 밥알과 신문지 등을 반죽해 예술적 실험을 멈추지 않았고, 자신만의 독특한 양식과 기법을 개발할 수 있었답니다.
이주은 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기획 · 구성 = 김윤주 기자 (yunj@chosun.com)
[출처 : 조선일보 신문은 선생님 2023년 8월 17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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