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㉞ 끈질긴 저항
6 · 25전쟁은 개전 초기 북한의 일방적인 우세였다. 병력과 무기에서 밀린 국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개전 초 북한군과 힘겹게 일전을 치렀던 국군 장병이 지쳐 휴식을 취하고 있다. 전쟁 당시 촬영한 동영상을 찍은 사진이어서 화면이 흐릿하다. [백선엽 장군 제공]
1950년 6월 25일 적을 맞이한 뒤 첫 밤을 맞았다. 파주 국민학교에 차려진 사단 전진지휘소(CP)에 도착했다. 참모와 부관을 비롯해 사단 직할부대와 보급부대 등이 그곳에 함께 있었다. 시시각각 들어오는 전황(戰況)은 역시 암울했다. 전선 쪽에서는 총성과 포성이 끊이지 않았다. 이날 오후 늦게 증원(增援) 병력이 도착했다. 유해준 대령과 김동빈 중령이 지휘하는 육군사관학교 교도(敎導)대대와 보병학교 교도대대가 열차 편으로 국군 1사단 전선에 왔다. 개성 전면의 12연대가 붕괴된 1사단에 이 병력은 커다란 힘이 됐다.
밀려오는 적 탱크에 TNT 안고 육탄돌격 했지만…
나는 다소 안정을 찾았다. 적의 기세는 대단했지만 전쟁 발발 전 38도 선상에서 여러 차례 국지전을 치른 경험이 있던 1사단 부대원들도 치열한 반격을 가하고 있었다.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것이 직접 맞닥뜨리기 전과 후가 서로 달랐다. 끝까지 싸워 보겠다는 결의가 강해지면 두려움은 점차 엷어져 가는 것이었다. 게다가 25일 철수명령을 받았다면서 떠났던 국군 1사단 미 군사고문단(KMAG)의 로크웰 중령이 “왠지 모르지만 명령이 취소됐다”며 돌아왔다.
그러나 긴장감은 여전했다. 사투를 벌이는 각 연대의 전투상황을 계속 보고받으면서 의자에 꼭 붙어 앉아 있었다. 졸음이 닥치면 의자에서 잠깐 졸다가 깼다. 짧은 밤이 지나고 26일 아침이 밝았다. 전선에서는 계속 전투가 벌어졌다. 파평산 일대에 설정한 주저항선은 그대로 건재했다. 적은 개성과 고랑포 쪽에서 계속 밀려들고 있지만 우리 사단의 완강한 반격에 부딪혀 다소 소강상태를 보이고 있었다. 전선에서는 눈물겨운 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1사단에는 전쟁 전인 49년 개성 송악산을 침공해 온 적을 물리치기 위해 포탄을 끌어안고 적의 토치카를 부순 뒤 장렬하게 산화했던 용사들의 숨결이 살아 있었다. 그 때문인지 주저항선의 우리 부대원들이 적의 탱크를 저지하기 위해 육탄 돌격을 시도했다는 보고가 속속 들어오고 있었다. 적의 탱크가 많았던 장파리 일대에서 각 연대장과 각급 지휘관들이 직접 이끈 거센 반격이었다. 부대원들은 지뢰와 수류탄·TNT 등을 몸에 안고 적의 탱크로 뛰어들었다. 목숨을 내건 비장한 저항이었다.
그 덕분에 전선은 26일 낮에도 잘 유지되고 있었다. 크게 밀리지는 않았다. 대포도 한몫하고 있었다. 노재현 소령이 이끄는 포병대대 역시 15문의 야포를 동원해 적의 전차 이동로에 정확한 포격을 가하고 있었다. 6·25 전에 벌어졌던 국지전에서 닦았던 포격술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기와 장비의 열세는 당해낼 방법이 없었다. 전선이 무너져 가고 있었다. 특히 1사단이 포진한 동쪽의 동두천·포천을 지키던 7사단이 너무 빨리 무너진 것도 우리 측 방어에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하고 말았다. 적의 탱크 10여 대가 문산과 파평산을 잇는 우리의 주저항선을 돌파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저녁 무렵이었다. 탱크가 뚫은 그 저항선을 따라 적의 보병도 함께 밀려오고 있었다.
사단 좌측을 맡고 있던 11연대 일부는 퇴로를 차단당했고, 파평산 진지 쪽의 13연대도 적군 전차부대의 돌파를 허용하면서 밀리기 시작했다. 이제 마지막 저항선으로의 후퇴만 남았다. 나는 예하 부대에 철수명령을 내렸다. 철수 시점은 적 탱크의 움직임이 둔해지는 오후 9시쯤을 택했다. 그러나 혼란에 빠진 각 전선의 부대에 철수명령이 제대로 전달될 것인지 불안했다. 작전 참모를 비롯한 사령부 요원들은 연대 작전 참모를 무전으로 부르거나 때로는 직접 부대를 찾아가 내 명령을 하달하느라 부산했다. 후퇴도 잘해야 한다. 중화기와 중장비를 잃지 말고 부대의 건제(建制)를 잘 유지해야 한다. 걱정이 끊이지 않았다.
밤중에 2개 대대의 증원 병력이 더 도착했다. 전남에 주둔해 있던 5사단 예하 15연대 1개 대대와 20연대 1개 대대가 열차 편으로 용산을 거쳐 올라왔다. 보병학교에서 교육 중이던 15연대장 최영희 대령도 이들과 함께 왔다. 후송된 12연대장 전성호 대령의 후임으로 내가 요청한 육본 정보국 차장 김점곤 중령이 도착해 개성에서 철수한 잔여 병력을 수습해 재편을 서두르고 있었다.
컴컴해진 어둠을 헤집고 봉일천 국민학교에 급히 만든 CP에 들어섰다. 발이 아팠다. 25일 아침 정신없이 집을 뛰어나올 때 신고 있었던 반장화의 뒤축이 떨어져 나가 있었다. 못이 튀어나와 내 발 뒤꿈치를 파들어 간 것이다. 장화 속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어디로 더 밀릴 것인가, 지금의 병력과 탄약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사실 참담한 상황이었다. 거기서 오는 고통이 장화의 못에 찔린 뒤꿈치의 아픔을 잊게 하고 있었다.
백선엽 장군
[출처: 중앙일보] [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㉞ 끈질긴 저항
[전쟁사 돋보기] 미 군사고문단
미 합동군지원단 마크.
해방 뒤 남한에서 3년간 군정을 실시했던 미군이 철수에 앞서 국군의 성장을 돕기 위해 만들었다. 영문 약자인 KMAG(US Military Advisory Group to the Republic of Korea)로 널리 알려졌다. 미국은 1888년 고종의 요청으로 윌리엄 맥앤타이어 다이 준장이 군사고문으로 조선에 처음 초빙된 것을 그 유래로 삼고 있다. 1948년 8월 100명 수준으로 창설했으며, 미군 철수 뒤인 49년 6월 500명 수준으로 커졌다. 기본 임무는 군사적인 조언을 하고, 군사 원조를 원활하게 집행하는 일이었다. 아울러 국군에 대한 체계적인 훈련을 돕고, 각종 군사학교 신설과 한국 장교의 미국 유학 지원도 맡았다.
국군 훈련·지원 위해 창설 … 625 땐 대대급까지 배치
KMAG는 6·25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50년 6월 1일까지 한국군의 대대급 부대까지 훈련을 마치기로 계획했으나 공비 토벌 등으로 2∼3개 연대만 훈련하는 데 그쳤다.
전쟁 중이던 52년엔 국군 병력이 늘면서 KMAG 요원도 2000명 규모로 늘었다. 이들은 군단·사단은 물론 대대급까지 배치돼 작전과 전술을 지원했다. 6·25전쟁 이후 지금까지 한국군과 미군의 각종 군사협력을 지원하고 있다. 명칭은 미 합동군지원단(JUSMAG-K)으로 바꿨다. 현재 미국대사관 소속이며, 사무실은 용산 미군기지에 있다.
김민석 군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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