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동맹 70년, 번영을 위한 동행

[<12> 한국 밴드의 발상지 '애스컴']

드무2 2024. 3. 23.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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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한국 밴드의 발상지 '애스컴']

 

 

 

미군 클럽서 활동한 신중현과‘제비 시스터즈’

1950 ~ 1960년대 애스컴 시티 등 대형 미군 기지 미8군 쇼에서 활약했던 한국 록의 대부 신중현 (맨 왼쪽)과 당시 그가 이끌었던 록그룹 ‘애드포’ 및 공연 가창을 자주 맡았던 ‘제비 시스터즈’ (맨 앞의 여성 두 명). / 최규성 제공

 

 

 

신중현 록밴드의 시작은 美8군··· 부대 근처 '가수촌' 도

 

 

 

부대서 흘러나와 복제 유통된 '빽판'

가수들에겐 최신 유행 음악의 교재

 

미8군 가수는 사단장 파티에 초대

한국 알리는 민간 외교관 역할도

현미, 레이건 취임식 초청돼 축가

 

"대중음악계서 대접받는 두 훈장은

미8군 쇼 출신과 대학가요제 출신"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최고로 대접받는 두 훈장이 있습니다. ‘미8군쇼 출신’ 과 ‘대학가요제 출신’ 이죠.”

국내 손꼽히는 대중음악 사료 수집가이자 평론가인 최규성 한국대중음악연구소 대표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황폐해진 한국 음악계에 미8군쇼는 제대로 된 무대와 급여, ‘무대에 선 것 자체가 실력 있는 음악가’ 란 인정표를 얻는 영예로운 무대였다” 고 했다.

미8군쇼의 최초 시작점은 명확하지 않다. 최 대표는 “적어도 1940년대 후반부터 우리 음악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고 했다. 1947년 주한미군 기지 내 클럽의 오케스트라 공연 팸플릿을 근거로 들 수 있다. 6 · 25 전쟁 발발 직전 이미 주한 미군을 위한 클럽과 무대 조성이 시작됐다는 증거다. 초창기엔 미국에서 온 위문 공연단의 클래식 무대와 내한 대중 가수 공연이 주로 열렸다. 그러다가 국내 가수들을 모집해 무대에 세우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출연료가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아티스트 수급이 용이했기 때문이다.

주요 미군 기지 영내 클럽을 중심으로 미8군쇼가 성행했다. 사령부 기지가 있던 용산, 군수 기지였던 부평, 규모가 큰 기지인 동두천 · 평택 등의 무대에 국내 최고 음악 인재들이 몰려들었다. 윤복희, 김시스터즈, 펄시스터즈 등 일부 가수는 일본·미국 등 해외 미군 부대 위문 공연에도 동행했다.

미군 부대 중에서도 인천 부평구 산곡동에 7개 보급 부대가 모여 구성했던 ‘애스컴 시티 (ASCOM CITY)’ 는 ‘국내 밴드 음악의 발상지’ 로 꼽힌다. 애스컴은 일제강점기 인천 육군 조병창으로 쓰이다 해방 이후 미군들의 대표 군수 기지가 된 곳이었다. 인천 항구에서 가까운 군수 기지이기에 물류가 활발했다. 인근에는 영내 군악병들이 쓰다 버린 걸 내다파는 악기 상점도 있었다. 최 대표는 “애스컴에는 1948년부터 ‘아나작’ 이란 미8군 클럽이 있었는데 1960년대 영내 클럽만 20 ~ 30개로 규모가 커졌다” 고 했다.

 

 

 

패티김과 걸그룹 ‘이시스터즈’

1950년대 후반 대표 미8군 쇼 용역 업체 ‘화양’ 을 통해 21세부터 미군 클럽 무대에 선 가수 패티김의 당시 공연 모습 (위), NCO 클럽 공연 중 미군과 함께 춤을 춘 걸그룹 이시스터즈 (아래). / 최규성 제공

 

 

 

가수들에겐 풍요로운 환경이었다. 한창 무대가 많을 때는 한명숙 · 현미 · 박재란 등 출연 아티스트들이 거주하는 가수촌이 애스컴 인근에 일시적으로 형성되기도 했다. 드러머 김윤옥이 1950년부터 애스컴을 주무대로 이끈 스윙재즈 밴드 ‘토미스 (Tommy’s) 악단’ 은 시기적으로 가장 앞서 활동한 밴드로 기록된다. 당시 미8군쇼는 지휘자 격 악단장이 이름을 걸고 이끄는 밴드 반주가 있어야만 무대에 설 수 있었다. 길옥윤 · 이봉조 등 당대 유명 작곡가들이 밴드 악단장을 겸했다. 이들이 1950년대 이룬 성장이 결국 1960년대 전자기타를 사용한 록 음악 형태를 처음 선보인 코끼리 브라더스, 국내 최초의 록 음반 활동 기록을 남긴 그룹 키보이스, 신중현이 록그룹 애드포를 통해 이끈 국내 창작 록의 태동으로 이어졌다.

애스컴에서 새어나가 불법 복제되며 유통된 ‘빽판’ 은 한국 대중음악에 자양분을 제공했다. 최 대표는 “이 빽판이 당시 정식 수입 통로가 없던 해외 음악을 공부할 유일한 길이었다” 고 했다. 용산 · 부평 · 동두천 등 큰 미군 기지 근처에 여전히 중고 LP숍이 많은 이유다. 최 대표는 “당시 국내 빽판을 살펴보면 놀랄 정도로 미국 음악 유행 흐름과 시차가 적고, 풍성한 기록량을 자랑한다” 며 “엘비스 프레슬리의 희귀 녹음본 중 하나는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에만 유일하게 빽판으로 남아 있을 정도” 라고 했다. 세계 록 유행을 이끈 ‘비틀스’ 와 한국 최초 록 음반을 낸 ‘키보이스’ 등장 시기가 거의 비슷한 것도 미8군을 통해 해외 음악이 빠르게 유입된 덕분이었다.

미8군쇼는 한국을 미국에 알리는 통로이기도 했다. 한국 주둔을 마치고 귀국하는 미군 병사들은 ‘아리랑 악보’ 가 적힌 스카프를 귀국 기념 선물로 사가기도 했다. 미8군 가수들은 민간 외교관이기도 했다. 주한 미군 부대 내 사단장 이 · 취임식 파티가 열리면 미8군 가수들이 공연을 담당했다. 1981년 가수 현미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취임식에 초청돼 축가를 부른 까닭도 미8군쇼에 선 경력으로 한국의 ‘외교적 얼굴’ 이었기 때문이다. 최 대표는 “미8군쇼에 대한 연구와 기록이 많이 이뤄지지 않고, 관련자들이 계속 세상을 떠나는 게 안타깝다” 며 “미8군쇼는 한국 대중음악의 뿌리이자 ‘한류’ 의 원형인 만큼 상세한 연구가 필요하다” 고 말했다.

 

 

윤수정 기자

 

 

 

주한 미군 사령관의 눈 · 귀로 44년··· 카투사 출신 76세 공보관 31일 퇴임

 

 

 

한미 동맹의 산 증인 김영규씨

'北 판문점 도끼 만행' 기록 남겨

 

 

 

역대 최장 44년 복무를 마치고 은퇴를 앞둔 한미동맹의 상징 카투사 출신 주한미군 김영규 공보관이 2023년 10월 11일 오전 서울 용산의 옛 미 8군 사령부 앞에서 소감을 말하고 있다. / 오종찬 기자

 

 

 

1976년 8월 18일 북한군의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 터져 주한미군 병력이 판문점에 투입될 때 이들과 함께한 한국인이 있었다. 당시 미 2사단 기관지 소속 카투사였던 김영규 (76) 주한미군 공보관이다. 그는 미 2사단 대원들이 북한군과 대치하며 판문점의 미루나무를 잘라 제거하는 ‘폴 버니언 작전’ 을 지켜보며 기록으로 남겼다. 제대하고 1980년 정식으로 주한미군 공보관이 된 그는 이후 44년간 미군과 한국 사회를 잇는 ‘다리’ 역할을 했다. 한미 동맹의 산증인인 그는 오는 31일 은퇴한다. 그를 지난 11일 미 용산 기지에서 만났다.

 

ㅡ최장수 · 최고령 공보관이다.

“주한미군뿐 아니라 한미연합사 · 유엔사도 담당했다. 44년간 세 조직의 변화에 함께했다는 데 자부심이 크다. 유엔사의 역할이 커져 최근 유엔사 전담 한국 공보관이 따로 생겼다. 격세지감이다.”

 

ㅡ무슨 역할을 했나.

“한국 공보관은 주한미군 사령관의 ‘눈’ 과 ‘귀’ 역할을 한다. 국내 주요 뉴스를 정리해 영문으로 보고서를 만들어 사령관과 참모들에게 전달한다. 판문점을 지금까지 1000번 넘게 출입했는데 1989년 임수경 밀입북 사건 등 유엔사와 관련된 남북 업무도 했다.”

 

ㅡ2017년 북한군 오청성씨의 귀순 사건도 있었다.

“음모론을 막기 위해 그가 차를 몰고 판문점까지 접근하는 것부터 북한군이 그를 향해 총을 쏘며 추격하는 광경까지 다 CCTV 영상을 공개했다. 발표할 때 한국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영상이 워낙 생생하다 보니 의문 가질 게 거의 없었던 것이다. 우리 군이 포복해서 오씨를 끌어 구하는 영상까지 공개해 오해와 거짓말이 퍼지는 것을 막았다. 잘한 공보 활동으로 평가받았다.”

 

 

 

역대 최장 44년 복무를 마치고 은퇴를 앞둔 한미동맹의 상징 카투사 출신 주한미군 김영규 공보관이 2023년 10월 11일 오전 서울 용산 미8군 기지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오종찬 기자

 

 

 

그는 은퇴 후에도 한미 동맹의 발전을 위한 일을 할 계획이라고 한다. “무엇을 할지는 아직 엠바고 (보도유예) 상태입니다. 하지만 기대는 해주십시오. 아직 일할 열정이 있습니다.” 한미연합사는 오는 20일 경기도 평택 캠프 험프리스에서 열리는 한미 동맹 70주년 기념 음악회에서 그에게 감사패를 전달할 예정이다.

 

 

유용원 군사전문기자, 노석조 기자

 

 

 

SM · JYP 같은

대형 연예 기획사

1950년대 있었다

 

 

 

'미8군 쇼' 준비, 500명 거느려

 

 

 

1950년대 후반 대표 미8군 쇼 용역 업체 '화양' 을 통해 21세부터 미군 클럽 무대에 선 가수 패티김의 당시 공연 모습. / 최규성 제공

 

 

 

미8군쇼가 인기를 끌면서 1950년대 말부터 미군쇼에 송출할 연예인을 키우는 용역 업체가 생겼다. 요즘으로 보면 대형 연예기획사다. 미8군 출신 음악 동인인 예우회 (회장 장미화) 자료에 따르면, 1957년쯤 당시 상공부 (현 산업통상자원부)에서 등록허가제를 실시하면서 체계적으로 연예인과 쇼단 운영을 관리하는 업체들이 등장했다. 상공부가 지정한 ‘용역불 (用役弗 · 주한 미군 또는 그 밖의 유엔군에 노무 또는 서비스를 제공한 대가로 얻은 달러) 수입업자’ 로 허가받으려면 미8군 쇼 연예인으로 이름을 올린 단원으로 구성된 쇼단 다섯 개 이상을 보유해야 했다.

화양흥업은 미8군 베니김쇼로 인기 끈 트럼펫 연주자 베니김 (김영순)이 세운 대표적 용역 업체였다. 500여 명의 가수와 연주자를 보유할 만큼 규모와 명성을 자랑했다. 특히 당시 많은 인기를 누린 기타리스트 신중현이 소속된 곳이었다. 신중현은 화양에서 1962년 국내 최초의 4인조 그룹 ‘클럽데이트’ 를 결성해 국내 밴드음악 역사를 새로 썼다. 화양은 신중현이 이끄는 팀 ‘클럽데이트’ 를 위해 패키지 쇼 (무용, 코미디, 마술 등 각종 단원이 참여하는 공연)를 구성했고, 그 공연은 전국 미8군 무대를 사로잡았다. 신중현은 과거 인터뷰에서 “연주를 하면서 마술 흉내 코미디도 잘하는 편이었는데, AFKN (주한미군방송)을 통해 최신 음악은 물론 마술에 대한 아이디어도 얻었다” 고 밝혔다.

이후 화양의 라이벌 격인 유니버설이 세워졌고, 삼진, 공영, 대영 등이 잇따라 설립됐다. 각 쇼단은 대략 3 ~ 6개월에 한 번씩 미국에서 직접 파견 온 음악 전문가들을 대동해 오디션을 치렀다. 작곡가 김희갑이 악단장이었던 에이원 (A1) 쇼를 통해 가수 윤항기 · 윤복희 · 김성옥 · 송영란 등이 배출됐다. 작곡가 이봉조가 이끈 헐리우드 쇼에선 가수 현미와 남석훈 등이 활동했다.

미8군 쇼는 1960년대 중반 베트남전쟁으로 주한미군 규모가 급격히 축소되면서 점차 사라졌다. 하지만 각종 오디션과 다양한 쇼를 통해 탄탄한 실력을 갖춘 음악인들은 1960 ~ 70년대 일반 무대로 적극 진출해 우리 가요계의 주류가 됐다.

 

최보윤 기자

 

 

[출처 : 조선일보 2023년 10월 18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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