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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보이스' 기타리스트 김홍탁]

드무2 2024. 4. 19.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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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키보이스' 기타리스트 김홍탁]

 

 

 

록그룹 ‘키보이스’ 를 이끌며 미8군 쇼에서 활약한 가수 김홍탁. / 고운호 기자

 

 

 

"미8군서 합숙하며 음악··· 딴따라 아닌 예술인 대접받아"

 

 

 

"미8군 쇼 서려면 오디션 거쳐야

요즘 경연 프로 뺨칠만큼 치열

노래부터 의상까지 모두 다 챙겨

 

곡 끝나면 미군 모두 일어나 환호

그 자부심에 지금까지 연주 지속"

 

 

 

“스탠딩 오베이션 (standing ovation · 기립 박수). 아직도 잊히지 않는 미8군 쇼의 광경입니다. 곡이 끝나면 손뼉을 치는 문화가 아직 한국에는 없던 시절 미8군 쇼는 우리를 ‘딴따라’ 가 아닌 ‘예술인’ 으로 취급해줬죠. 그 자부심이 우리를 계속 연주하게 만드는 원동력입니다.”

최근 경기도 양평의 라이브 카페 ‘옴니’ 에서 만난 가수 김홍탁 (79)은 대화 도중 자주 간이 산소호흡기를 꺼내 썼다. 몇 년 전 앓은 폐 기흉 후유증 탓이다. 그럼에도 그는 최근 열한 번째 밴드를 조직해 이 카페에서 라이브 활동을 준비 중이다. “신기하게도 기타 연주와 노래를 할 때만 멀쩡히 숨이 쉬어진다” 며 웃었다.

그가 결성한 첫 번째 밴드이자 음악적 뿌리는 1961년 동산고 2학년 시절 미8군 클럽에서 활동한 ‘캑터스 (Cactus · 선인장)’ 였다. 그리고 두 번째 밴드이자, 가수 윤복희의 오빠인 윤항기와 함께 미8군을 중심으로 활약한 5인조 그룹 ‘키보이스’ 가 그의 음악 인생을 바꿔놓았다. 1964년 7월 국내 최초 록 그룹 사운드 음반 ‘그녀 입술은 달콤해’ 를 발표한 것. 같은 해 신중현이 이끌던 밴드 ‘애드포’ 가 국내 최초 창작 록 음악을 선보인 1집 ‘빗속의 여인’ 보다 5개월 빠른 기록이다. 이후 키보이스는 미8군 바깥에서도 ‘해변으로 가요’ ‘바닷가의 추억’ 등 히트곡을 내며 ‘한국의 비틀스’ 란 별칭을 얻었고, 김홍탁은 히식스, 히파이브 활동까지 이끌며 국내 정상급 기타리스트로 성장했다.

 

 

 

‘한국의 비틀스’ 키보이스의 1966년 앨범 재킷

전성기 시절 ‘한국의 비틀스’ 로 불린 그룹 키보이스가 1966년에 낸 ‘화제의 총아 키보이스 힛트 앨범’ 재킷. 아래서부터 멤버 김홍탁(기타), 차도균(베이스), 옥성빈(키보드), 윤항기(드럼), 차중락(보컬). /김홍탁 제공

 

 

 

김홍탁은 “내가 기타를 본격적으로 잡게 된 것도 미8군과 연이 깊다” 고 했다. 인천 내동 출신인 그는 동산중 2학년 때 놀러 간 친구 집 2층 세입자였던 한 미8군 흑인 장교의 기타 소리에 “귀가 번쩍 뜨였다” 고 했다. “흑인들이 자주 치는 ‘부기우기 (boogie woogie)’ 주법이었죠. 어머니가 지인을 통해 어렵게 구해 주신 통기타를 멋대로 뚱땅거리다가 듣도 보도 못한 큰 세상을 만난 거예요. 손사래 치는 미군에게 삼고초려 끝에 1년 6개월가량 기타를 배웠죠.”

당대 음악인들에게 미8군 쇼는 비약적으로 실력을 키울 기회였다. 더블A · A · B · C · D 순의 철저한 등급제를 거쳐야 무대에 설 수 있었고, 1년에 두 번씩 새 등급을 받는 심사가 계속됐다. 데뷔 후 한 번도 더블A를 놓치지 않은 키보이스도 “오디션 직전 3개월 동안은 미군 기지 인근에서 합숙 연습하며 음악 혼을 불태웠고, 속해 있던 미8군 공급 대행 업체에서 영어 발음 교정까지 받았다” 고 했다. “당시엔 작곡, 편곡, 연주, 노래, 의상 다 전부 손수 준비했으니. 멤버들끼린 ‘요즘 오디션 경연 프로는 그때에 비하면 싱겁다’ 고 종종 농담했죠.”

혹독한 경쟁을 거친 키보이스의 미8군 등장은 “혁명에 가깝다” 는 평을 받았다. 기존 미8군 쇼단은 최소 12 ~ 16인조 악단에 여성 무용수와 여성 가수를 선호했다. 하지만 키보이스는 남성 밴드 다섯 명에 여성 코러스 한 명만 올라갔는데도 “우리가 무대에 서는 날이면 미군 클럽마다 관객이 꽉꽉 들어찼다” 고 했다. “하루에 ‘투 쇼 (show)’ 를 뛰는 거의 유일한 밴드였죠. 예컨대 인천 미군 기지 영내 클럽을 하루에 두 곳 도는 거예요. ‘비틀스’ 와 같은 밴드 음악이 세계적 인기를 끈 시대 흐름을 잘 탄 거지요.”

 

 

 

사진 / 8일 오후, 경기도 양평군 옴니카페에서 미8군 무대에서 키보이스, 히식스 멤버로 활동했던 1세대 밴드 기타리스트 김홍탁씨가 본지와 인터뷰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3. 9. 8. / 고운호 기자

 

 

 

악보도 없던 열악한 환경에서 곡을 만들 원천은 오로지 미8군 클럽에서 흘러나온 주크박스, 혹은 ‘빽판 (불법 LP 복제판)’ 을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듣고 또 듣는 것” 뿐이었다. 당시 미8군 출신이 많이 낸 ‘번안곡’ 들은 “수천 번 모방으로 쌓여 결국 우리 가수들의 창작 홀로서기를 도왔다” 고 했다. “키보이스 보컬 차중락의 히트곡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 도 엘비스 프레슬리 곡을 한국 정서에 맞게 고치느라 고생했고, (윤)항기와 저의 작 · 편곡 공부에 큰 도움이 됐죠.”

김홍탁은 특히 최근 후배들과 함께 ‘K팝 뮤지션 명예의 전당’ 을 추진하면서 “미8군 무대가 당시 막 태동하던 한국 대중음악계가 걸음마를 빨리 떼도록 도와줬다는 생각이 더 확실해졌다” 고 했다. “지금은 묻힌 기록이 됐지만, 당시 여성으론 드물게 ‘록 음악의 선구자’ 소리를 들으며 미군들을 미치게 만든 ‘미스 케이’ 처럼 다양한 장르를 시도한 미8군 인기 가수가 많았어요. 식사로 치면 대중음악의 밑반찬을 다채롭게 만든 겁니다. 그들의 공이 분명 지금 한류의 밑바탕이 된 거겠지요.”

 

 

윤수정 기자

 

 

 

'뜨거운 안녕' 쟈니 리 "전쟁 고아였던 소년 미군이 선뜻 거둬줘"

 

 

 

가수 쟈니 리가 14일 오후 서울 종로구 라이브카페 '프레스리' 에서 직접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하고 있다. / 남강호 기자

 

 

 

쟈니 리 (85 · 본명 이영길)는 요즘도 서울 라이브 바에서  노래한다. 1966년 ‘뜨거운 안녕’, ‘내일은 해가 뜬다’ 같은 히트곡을 발표한 지 60년이지났지만, 여전한 가수의 풍모였다.

그는 6 · 25 때 미군 부대서 자라며 음악을 배웠다. 만주에서 태어나 평남 진남포 외가에서 지내다 열세 살 때 전쟁을 맞았다. “너라도 남쪽으로 가라” 는 외할머니 말씀에 부산으로 가는 이후 고아원 ‘해피 마운틴’ 등에서 지냈다.

“겨울에 고아원을 뛰쳐나와 부산역에 가니 미군들이 있었어요. 그때 제 손을 끌고 간 분이 양아버지예요. 이후 ‘하야리아 (부산의 캠프 하이얼리어) 부대’ 에 들어가 생활했지요.” 그는 “양아버지는 군수 물자를 총괄하는 책임자였고, 덴마크계로 '라스무센' 이라는 이름만 기억난다” 고 했다.

 

 

 

/ 남강호 기자

 

 

 

취미로 피아노를 친 양아버지는 저녁이면 부대 장교 클럽에서 연주했다. “그때마다 ‘쟈니, 컴 히어’ 하고 저를 불러요. 그러면 장교들 앞에서 ‘러브 이즈 어 매니 스플렌더드 싱’, ‘플라이 투 더 문’ 같은 노래를 불렀죠. 쟈니라는 이름도 양아버지가 지어주신 거예요.” 이후 그는 서울로 올라왔다. 양아버지는 그가 열일곱 살쯤 됐을 때 이미 세상을 떠났다.

영화 ‘청춘대학’ (1966) 출연을 계기로 신세기레코드 전속 가수로 발탁됐다. “길옥윤 선생이 ‘내일은 해가 뜬다’, 서영은 (코미디언 서영춘의 형) 선생이 ‘뜨거운 안녕’ 을 주셨죠.” ‘내일은 해가 뜬다’ 는 박정희 정부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금지곡으로 지정됐다가 훗날 ‘사노라면’ 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유명해졌다.

클럽 무대에서 활동했던 그는 식도암으로 고생하다 겨우 회복했다. 항암 치료와 수술을 받은 지 20년쯤 지난 지금도 가끔 방송해 출연해 가창력을 과시한다. 그는 “노래할 수 있어 행복하다” 고 했다.

 

채민기 기자

 

 

 

미8군 쇼는 '달러박스'··· 연간 120만달러 벌어들여

 

 

 

당시 월남에 수출한 금액과 맞먹어

 

 

 

미8군 가수 출신들을 만나면 공통적으로 언급되는 ‘자부심’ 이 있다. 바로 “6 · 25전쟁 직후 한국이 어렵던 시절 우리가 외화를 모으는 '달러박스' 역할을 도왔다” 는 것. 이는 실제 수치로도 확인된다.

미8군 영내 클럽의 숫자와 쇼 규모가 가장 컸던 시기는 1960년대. 본지 1962년 10월 10일 자 기사에 따르면, 당시 전국에 미8군 클럽이 약 150개 있었고, 연예인 약 1000명이 월간 400회에 달하는 쇼를 펼쳤다. 이를 통해 벌어들인 달러가 연간 120만달러 (현재 한화 약 15억8760만원)에 달했다. 같은 해 우리가 월남으로 수출해 벌어들인 외화, 약 120만9000불과 맞먹는 수준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총 무역 수출 실적이 10여 국 대상 5400만달러 수준이었음을 감안하면 결코 적지 않은 수치다. 미8군 쇼에 서는 연예인과 대행 업체를 묶어 부르는 당대 별칭이 ‘맘모스 연예 지대’ 였던 이유이다.

미8군쇼에서 벌어들이는 달러가 모두 가수들 주머니로 들어간 것은 아니다. 지금의 연예 기획사 역할을 한 미8군 대행 업체 몫이 20%에 달했고, 나머지 금액에서 세금도 공제해야 했다. 이후 연예인에게 돌아가는 수입은 연평균 1인당 1000불가량 (약 132만3000원)이었다고 한다. 등급에 따른 월급 차이도 컸다. AA급이 245달러 (약 32만4000원), A급이 225달러, B급이 205달러, C급이 95달러을 벌어들였다. 이마저도 미8군 가수와 쇼가 인기를 끌며 대행 기관이 생기고 나서야 달러 월급 지급 형태로 바뀐 것이었다. 이전에는 위스키 한 상자나 두 상자씩 물물 계약으로 출연하던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윤수정 기자

 

[출처 : 조선일보 2023년 11월 4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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