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원 계획 중인 서울 서대문의 역사]
옛 서울 서대문 모습. 철로 공사 중인 장면을 담은 총독부박물관 소장 유리건판 사진이다. 서대문 ~ 홍릉 전차 구간은 대한제국 시대인 1898년 개통됐다. / 국립중앙박물관
권력자 집 앞이라··· 권력자 시끄럽다고··· 없앴다, 세웠다, 사연 많은 서대문
풍수가가 닫은 서대문
'궁궐 시끄럽다' 고
영조가 또 닫았는데
서울시는 그걸 복원한다
수도 서울에는 서대문구라는 행정구역이 있다. 종로구 서쪽에 있던 4대문 가운데 하나인 서대문에서 온 이름이다. 돈의문이라고도 하는 이 서대문은 식민시대 철거되고 이름만 남아 있다. 서울시가 이 일대 도로를 지하화하고 2035년까지 서대문을 복원하겠다는 계획을 마련했다. (2024년 1월 15일자 조선일보) 자, 복원하겠다는 그 문 역사를 보자.
세웠다 부쉈다 또 세우고
조선 건국 4년 만인 1396년 9월 24일 (이하 음력) 한성 4대문과 4소문이 완성됐다. 서대문도 이날 완공됐다. 이게 ‘첫 번째 서대문’ 돈의문 (敦義門)이다. (1396년 9월 24일 ‘태조실록’) 그런데 1422년 2월 23일 실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서전문 (西箭門)을 막고 돈의문을 설치하였다.’ 원래 있던 서전문이라는 문을 없애고 옛 서대문과 이름이 같은 새 문, 돈의문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태종 이방원 때부터 각종 국책 사업에 끼어든 사람이 있다. 최양선이라는 풍수가다. 최양선은 성종 때까지 길을 낼 때마다 끼어들어서 공사를 중단시키거나 변경하는 데 영향을 미친 사람이다. 세종은 최양선 말에 지금 경부고속도로 입구인 달래내고개를 폐쇄한 적도 있었다.
태종 때인 1413년 어느 여름날 이 풍수가가 태종에게 상소문을 올렸다. “장의동 문과 관광방 동쪽 고갯길은 경복궁의 좌우 팔이다. 길을 열지 말고 지맥을 온전히 보존하시라.” (1413년 6월 19일 ‘태종실록’)
장의동은 지금 종로구 부암동과 서촌 일대다. 관광방 동쪽 고개는 삼청동과 성북동에 이르는 북한산 동쪽 기슭이다. 여기에 한성 북쪽 소문과 대문인 창의문과 숙정문이 설치돼 있었다. 최양선은 이 두 문이 경복궁을 보호하는 지맥을 누르고 있다면서 폐쇄하라고 건의했다.
태종은 경복궁이 위험하다는 풍수가 말에 넘어가 버렸다. 그래서 창의문과 숙정문은 곧바로 닫혀 버리고 말았다. 그때 경복궁과 가까운 사직동 언덕에 있던 서쪽문, 돈의문도 막아 버리고 새로 문을 만들라고 한다. 그 문이 ‘두 번째 서대문’ 서전문이다.
"내 집 앞은 안 되지"
서전문 위치는 불확실하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서대문과는 달랐다. 태종이 돈의문 대신에 새 문을 만들라고 하자 신하들이 새 문 위치 선정 작업 끝에 경복궁에서 떨어져 있는 다른 언덕으로 위치를 정했다.
하필이면 새 위치가 개국공신 이숙번 집과 가까웠다. 이숙번은 이방원 심복이자 권력가였다. 자기 집 앞으로 새 문을 만들겠다고 보고가 올라오자 이숙번은 태종 형 정종이 살던 인덕궁 앞에 터가 있으니 거기에 문을 만들라고 건의했다. 한 마디로 자기 집 앞이 시끄러우니 싫다는 이야기였다. (1413년 6월 19일 ‘태종실록’) 결국 새 문은 정종이 살던 인덕궁 앞에 건축됐다. 이게 앞서 말한 ‘두 번째 서대문’ 서전문이다.
태종은 형 정종 집을 방문할 때면 한성 남쪽 숭례문으로 나와서 성곽을 서쪽으로 빙 돈 뒤 서전문으로 들어가 정종을 만나곤 했다. 경복궁에서 곧바로 인덕궁으로 가면 일찍 죽은 막내아들 성녕대군이 살던 집이 보여서 슬퍼진다고 했다. (1418년 8월 1일 ‘태종실록’)
세 번째 새 문, 돈의문
1420년 그 권세가 이숙번이 권력투쟁 끝에 죽었다. 2년 뒤 세종에 의해 인덕궁 앞에 있던 서전문이 철거되고 언덕 위에 새 문이 건설됐다. (1422년 2월 23일 ‘세종실록’) 이 문이 우리가 알고 있는 돈의문, ‘세 번째 서대문’ 이다. 돈의문은 새로 생긴 문이라고 해서 새 문, 안쪽 동네는 새로 생긴 문 안쪽이라고 해서 ‘새문안’ 이라고 불리게 됐다. 새로 만든 서대문은 상인과 주민과 물건이 한성으로 드나드는 중요한 길목 역할을 하며 역사를 이어갔다.
"궁궐 시끄럽다, 문 닫아라"
300년이 지난 1736년 봄날이었다. 영조에게 보고가 올라왔다. ‘돈의문이 경덕궁에 가까워서 시끄러운 폐단이 많으니 문을 폐쇄하기를 청하나이다.’ (1736년 4월 22일 ‘영조실록’) 경덕궁은 경희궁을 말한다. 경희궁은 1617년 광해군이 만든 궁궐이다. 서대문보다 195년 뒤다.
이 경덕궁에서 서대문까지 거리가 가까워 궁 밖 소음이 궁궐까지 들어온다는 보고였고, 대책이 문 폐쇄 조치였다. 폐쇄 조치를 결제하면서 영조가 명했다. “돈의문 바깥 경기감영 창고에서 궁궐 소요품을 들여올 때만 문을 따주고 바로 자물쇠를 잠가라.”
수도 한성 서쪽 안팎을 연결하는 통로가 하루아침에 폐쇄되고 말았다. 백성 통행과 물건 유통로가 폐쇄된 이유는 오로지 하나, ‘궁궐이 시끄럽기 때문’ 이었다. 서쪽 주민과 성저십리 사람들은 길을 우회해 남쪽 서소문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 한 번 그 문을 열어주는 목적 또한 주민 통행용이 아니라 궁궐 소요품 배달이었다. 백성은 경기감영 지게꾼들 출입 완료를 기다렸다가 문을 이용해야 했다.
7년이 지났다. 1744년 3월 14일 영의정 김재로가 조심스럽게 영조에게 건의했다. ‘전에는 돈의문 여닫는 것이 일정하지 않았고 근년에는 여염 (閭閻)이 깨끗하지 못하고 궁궐에서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부득이 닫아 버렸습니다. 임시로나마 문을 열게 하면 인마 (人馬) 출입이 편리하겠나이다.’ 영조가 말했다. “내일부터 돈의문을 열어라.” (1744년 3월 14일 ‘영조실록’)
이 명령만 보면 영조는 불쌍한 백성을 사랑하는 어질고 착한 성군으로 보인다. 하지만 7년 전 이 문을 막아버린 사람이 바로 이 영조다.
자기 집 교통 소음 싫다고 국가 사업을 거부한 이숙번과 그 이숙번이 죽고 나서야 새로 문을 만든 세종과 자기 궁궐 시끄럽다고 문을 막아버린 영조. 이렇듯 서대문은 이기적 권력과 암울한 백성 그림자가 드리워진 문이다.
1915년 식민시대 전차 복선화 작업으로 철거된 서대문을 2009년 서울시가 복원하겠다고 계획을 내놨다가 여론한테 혼쭐이 나고 철회했다. 14년 뒤인 2023년 4월 서울시는 또 서울을 역사 도시로 만들겠다고 계획을 내놨다. 그리고 지난 1월 15일 그 공사를 2035년까지 완료하겠다고 했다. 서대문터를 지나는 새문안로는 지금 출퇴근 시간은 물론 상시적으로 교통이 정체되는 도로다.
박종인 선임기자
[출처 : 조선일보 2024년 1월 27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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