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교동유적]
수원 교동유적
구 · 부국원 · 발굴 · 이야기
2024. 03. 05. (화) ~ 06. 30. (일)
수원 구 부국원 2층
수원 구 부국원 |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향교로 130 (교동)
관람시간 : 9시 30분 ~ 18시
매주 월요일 · 공휴일 휴관
문의 : 031ㅡ228ㅡ2478 수원시 문화예술과
수원 교동유적
구 부국원 발굴이야기
수원 교동유적은 2020년 11월부터 2021년 2월까지 시굴 · 발굴 조사된 유적으로 땅속에 있던 일제강점기 부국원의 원형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입니다.
수원 교동유적이 확인되기 전까지 부국원 전체 모습은 당시 발간된 부국원 월보, 신문기사 그리고 수원의 모습을 담은 서적과 기증자료 등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2020년 조사된 수원 교동유적의 발굴 유물은 기존의 자료들을 뒷받침하며 부국원이 당대 모습을 직접 확인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번 전시는 수원 교동유적에서 발견된 유물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수원 교동유적 : 부국원 발굴이야기' 전시를 통해 그동안 땅속에 묻혀 있던 일제강점기 부국원의 모습과 성격에 대해 새롭게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1914 ~ 1945년
종묘 · 종자 판매 일본회사 부국원
일본은 '수탈을 위한 증산' 정책을 위해 1906년 수원에 권업모범장을 설립하여 품종 개량과 일본식 농법을 이식했다. '이하라 고로베 伊原五郞兵衛' 외 7명은 자본금 15만 원으로 1915년 「주식회사 부국원」을 설립하고 권업모범장에서 종묘 · 종자를 공급받아 판매했다. 1915년 이후부터 수원역 앞 (매산로 42)에서 영업을 시작했고, 1923년 현재 위치 (수원읍 궁정 93번지)에 건물을 신축하여 옮겼다. 경성 (서울) 명동과 일본 나고야에 지점을, 일본 나가노현에 출장소를 설치했고, 조선과 일본에 농장들을 경영했다. 부국원은 전국적인 판매망을 갖추고 독점적으로 수익을 올리는 농업침탈회사였다.
부국원 100년
1915 부국원 설립
1915 (추정) 수원역 앞에서 영업 시작
1923 현재 위치 본점 신축
1924 (추정) 일본 나가노현 출장소 설치
1928 경성 (서울) 명동지점 설치
1930년대 수탈자본으로 호황을 누리는 부국원
1940년대 ~ 1945 일본 침략전쟁의 물자 동원 참여
1952 ~ 1956 수원 법원 및 검찰 청사
1957 ~ 1963 수원 교육청
부국원 조감도 「부국원 월보」 | 1937
수원 100년
1905 경부선 수원역 개시
1906 권업모범장 개장
1914 수원군 수원면 개편
1919 수원 3 · 1운동 전개
1920 독립운동 단체 구국민단 결성
1923 수원면 사무소 신축
1928 수원역사 신축
1931 수원군 수원읍 개편
1930, 1937 수여선, 수인선 개통
1932 조선 종묘회사 '만종원' 설립
1945. 8. 15. 해방
1949 수원시 승격
1950 ~ 1953 한국전쟁
1956 수원시청사 (교동) 준공
1945 ~ 2010년대
법원, 병원 등 다양한 업무 공간으로 변화
1945년 해방 이후 일본인 소유였던 부국원은 1949년 대한민국정부에 귀속되었다. 1952 ~ 1956년 '수원법원 및 검찰청사', 1957 ~ 1963년 '수원 교육청' 이 들어서 관공서로 이용되었다. 1960년대 중반 ~ 1980년대에는 '민주공화당 경기도당 당사' 로 사용되며 정치의 중심지로 변했다. 1984년 부국원이 개인 소유로 바뀌고 '박내과 의원' 건물로 오랫동안 사랑받았다. 2010년부터 인쇄소 '한솔문화사' 가 마지막으로 사용했다. 격변의 수원 현대사 시기에 부국원은 다양한 업무공간으로 변화했다.
부국원 100년
1960년대 중반 ~ 1980년대 민주공화당 경기도당 당사
1984 ~ 2010 (추정) 박내과 의원
2006 수원시 향토유적 제19호 지정
2010 ~ 2014 (추정) 한솔문화사
수원 100년
1964 팔달문 보물 제402호 지정
1967 경기동청 수원 이전
1969 경부고속도로 개통
1971 수원시민회관 준공
1974 수원화성 복원 시작
서울 ~ 수원 전철 개통
1979 수원지방법원 및 수원지방검찰청 개청
1987 수원시청사 (인계동) 이전
1996 화성행궁 복원 시작
1997 수원화성 세계문화유산 등재
2002 인구 100만 돌파, 수원월드컵 개최
2007 화성성곽의궤 세계기록유산 등재
경기도청
현 수원시청사 | 1987
2010년대 ~ 현재
철거 위기에서 복원을 거쳐 시민들의 품으로
2006년 12월 부국원은 수원시 향토유적 제19호로 지정되었다. 2014년 소유자가 변경되고 개발 사업으로 철거 위기에 놓이게 되었지만 수원시와 시민들의 노력으로 수원시가 부국원을 매입하여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2016년부터 3여년 동안 복원공사를 거치며 1923년 설립 당시 원형을 살리면서 1970년대 이후 변형된 모습까지 함께 복원하였다. 2017년 10월 23일 국가등록문화재 제698호로 등록되어 역사성과 건축성을 인정받았다. 2018년 11월 29일 근대문화공간으로 개관하며 시민들을 위한 열린공간으로 사용 중이다.
부국원 100년
2015 철거 위기, 수원시 매입
2016 ~ 2018 복원공사
2017. 10. 23. 국가 등록문화재 제698호 지정
2018. 11. 29. 근대문화공간 수원 구 부곡원 개관
수원 100년
2013 생태교통 수원
2013 수원 화성 방문의 해
시간 속 부국원과 부속시설
행방 이후 부국원 본사 건물은 수원법원 · 검찰 청사, 수원시 교육지원청, 박내과 의원, 한솔문화사 등으로 이용되며 수원 현대사를 함께 하였고 2006년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수원시 향토유적으로 지정, 2017년에는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하지만 부국원 부속시설이 있던 본관 주변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양한 상가와 건물들이 들어서며 관련 시설 흔적이 사라져 갔다.
이후 일제강점기 부국원의 부속시설은 당시 발견된 책, 신문, 『부국원 월보』에 삽입된 사진과 삽화 등의 기록을 통해 연구되었고 2020년 부속시설 부지에 대한 발굴조사가 진행되면 온실, 육묘유구, 창고 등 관련 시설과 유물이 확인되었다.
특히 1937년 발간된 『부국원 월보』에 실린 조감도에는 부속시설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어 유적에서 발견된 자료와의 비교를 통해 시설의 정확한 성격에 대하여 추론할 수 있었다.
1936 『관광의 고도』 지도 내 부국원 (수원박물관 소장)
Tip !
유적
옛사람들이 남긴 흔적 중 형태가 크고 움직일 수 없는 흔적을 말한다.
고분, 조개무지, 성곽 등 다양한 형태의 유적이 있다.
유구
옛사람들이 땅위에 남긴 움직일 수 없는 흔적을 말한다.
유적 안의 집자리, 우물, 성곽 시설, 저장소 등이 있다.
유물
옛사람들이 필요에 의해 의도적으로 만든 물건을 말한다.
무기 장신구, 옷, 도자기 등이 있다.
25호 육묘유구 (育苗遺構)
길이 537㎝, 너비 112㎝의 가늘고 긴 직사각형 모양을 가진 육묘유구로 바닥에서는 다양한 크기의 화분이 3 ~ 5줄로 열을 맞춰 발굴되었다.
발견된 화분들은 북서쪽으로 크기가 큰 화분이, 남동쪽으로는 중간 혹은 작은 크기의 화분들이 확인됨에 따라 내부 공간을 나누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구 부국원 발굴이야기
수원 교동유적은 수원시 팔달구 교동 92ㅡ2번지에 위치한 유적으로 해당 지역 일원의 주상복합빌딩 개발이 추진되며 조사를 진행하였다. 개발 전 전문가들은 교동 92ㅡ2번지 일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근거로 발굴조사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① 조사 대상 부지 인근에 현존하는 '수원구 부국원' 건물
② 기록에 남겨져 있는 부속시설의 위치
③ 인근 상가에 지하시설이 부재
위와 같은 근거로 해당 부지 내 일제강점기 부국원의 부속시설 흔적이 땅속에 남아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하여 2020년 12월 ~ 2021년 2월까지 조사를 진행하였다.
조사결과 온실 2동, 창고 1동, 육묘유구 26기, 배수기 1기, 소성유구 (불의 흔적이 있는 유구) 1기 등과 토기 및 도기류 55점, 금속류 2점 등 일제강점기 부국원의 종자 · 종묘 재배 흔적 및 관련 부속시설이 확인됨에 따라 부국원의 원형 및 역사적 가치를 밝히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시굴조사]
기간 : 2020. 11. 4. ~ 2020. 11. 11.
조사기관 : 서울문화유산연구원
[발굴조사]
기간 : 2020. 12. 21. ~ 2021. 2. 2.
조사기관 : 중앙문화재연구원
매장문화재 조사방법
문화재 조사 방법은 지표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가 있으며 각 조사는 다음과 같은 목적으로 진행된다.
지표조사
문헌자료와 답사를 통해 해당 지역내 매장문화재가 있는지 확인하는 조사.
시굴조사
문화재가 있다고 판단되는 지역을 부분적으로 발굴하여 유적의 여부, 범위, 성격에 대하여 파악하는 조사.
정식 발굴 조사에 앞서는 예비조사 개념.
발굴조사
확인된 유적 범위를 전체적으로 정밀하게 조사하는 단계.
유적의 성격과 시대 등을 파악하기 위해 체계적으로 고고학 자료를 수집.
육묘장 (育苗場)
육묘는 모종을 싹 틔워 모내기 전까지 묘를 키워내는 농법으로 많은 농가에서 보편적으로 이용되었다. 『부국원 월보』에 실린 본사 전경 조감도에는 온실 사이에 육묘했던 장소로 추정되는 공간이 그려져 있는데, 발굴조사 결과 실제 교동유적에서 다수의 육묘유구가 확인되었다.
유적에서 확인된 육묘유구는 총 26기로 방형과 장방형 두 가지 형태이다. 장방형의 유구 중 25호, 26호 육묘유구는 화분이 열을 맞추어 발견되어 모종이나 묘목을 키우던 화분으로 보인다. 이외의 유구에서는 화분이 발견되지 않아 육묘장 내에서도 운영 형태나 방법이 다른 것으로 추정된다.
육묘유구에서 재배한 작물은 토양시료 분석 결과 보리, 조, 땅콩, 포도, 복숭아, 고구마, 무, 가지, 양배추, 수박, 참외 등 밭 경작지에서 재배되는 작물인 것으로 보인다.
온실 (溫室)
온실은 난방시설을 갖추고 시설 내에서 채소, 과수, 화훼 등의 모종을 집약적으로 생산할 수 있게 하는 대표적인 시설이다.
좁은 공간에 보온, 환기, 관수 등의 시설을 통해 계절과는 관계없이 다양한 작물을 재배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부국원에서는 유리온실을 운영했다. 이는 월보에 담긴 온실 사진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실제 교동유적의 온실 유구 조사 과정에서도 유리 조각이 확인되었다. 온실에서 생산된 모종은 자료를 통해 일부 추정이 가능하다. 1936년 발간된 『부국원 월보』에는 '3호 온실에서, 다양한 원예화를 양성 및 발아 시험 중' 이라는 설명과 함께 온실 내부 사진이 있으며, 교동유적 온실유구에서도 조선(국)화동(호)회(연)(증) 朝鮮(菊)花同(好)會(捐)(贈) 도장이 찍힌 화분이 확인되어 다양한 원예작물을 재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수원 교동유적에서는 온실유구가 2동 확인되었으며 내부에서 화분 및 관련 흔적이 발견되었다.
1호 온실 (溫室)
수원 교동유적에서 온실의 내부 구조는 비교적 형태를 추측할 수 있는 1호 온실을 통해 가능하다. 온실 바닥은 자갈돌 등 잡석을 채워 기초를 다진 후 그 상부에 콘크리트로 벽을 만들었으며, 격벽 [칸막이벽]을 추가로 덧대어 내부 공간을 약 10칸으로 나누었다.
이외에도 격벽에 장방형의 구조물이 확인되었는데, 바닥에 목탄과 조개탄이 확인되어 동절기 혹은 야간에 온실 내부의 온도를 조절하기 위한 화로의 기능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朝鮮 (菊) 花同 (好) 會 (捐) (贈) 조선 (국) 화동 (호) 회 (연) (증) 도장 화분
일제강점기 | 복원크기 33, 밑지름 21.3 | 수원 교동유적
교동 유적 1호 온실에서 발견된 화분이다. 하단에 '조선국화동호회연증 朝鮮(菊)花同(好)會(捐)(贈)' 라는 도장이 찍혀 있어 국화와 관련된 화분임을 추정할 수 있다.
수원박물관
1호 온실 시멘트 기둥 (위) / 온실유구 바닥 자갈다짐 (아래)
1호 온실 출토 조개탄 (위) / 1호 온실 화로 (아래)
'부국원 영업안내' 책자
1915년 | 22.3 × 15.8㎝ | 수원박물관 | 영인본
1915년 부국원에서 판매하는 종자, 묘목, 비료 품목을 소개하는 '영업안내' 책자다. 표지에는 농장 주인 '기타자와 쇼하치로 北澤小八郞' 이름과 부국원 '계좌 (京城 253)' 가 적혀 있고, 내지에는 벼, 콩 등의 종자에 대한 설명이 있다. 기타자와는 1906년부터 현재 화성시 (수원군 북부면)에서 채종원 (종자생산농장)을 경영했고, 그 사업을 이하라 고로베 등이 계승하여 1914년 「부국원」을 설립했다. 1915년 이후 수원역 앞에서 종자를 판매하던 시기에 발행한 것으로 보인다.
부국원 월보
1933년 | 26.0 × 18.8㎝
부국원에서 발행한 통신판매잡지 『부국원 월보』 제26권 제1호다. 부국원에서 취급한 종자 · 종묘, 원예, 농기구 비료를 판매하기 위해 발행했다. 채소, 과일 등의 사진 · 그림, 원산지, 가격, 설명이 실려 있다. '부국 富國' 명칭의 종자, 조선어 · 일본어 혼재가 특징적이다. 1950년대 『월보』는 1년에 50만부가 발행되었고, 조선, 일본, 만주까지 배포되었다. 부국원은 『월보』를 이용해 통신으로 주문을 받고 우편으로 상품을 인도하는 판매망을 전국적으로 구축했다.
부국원 화재보험증권
1937년 | 23.3 × 30.2㎝ | 기증유물
부국화재해상보험주식회사와 부국원 간의 화재보험 계약 성립을 증명하는 보험증권이다. 증권번호, 계약자 성명 (부국원 사장 마루야마 타케마 丸山竹丸), 보험금액, 보험료, 보험기간, 주소, 건물구조 등의 본문 내용과 계약 약관이 기재되어 있다. 부국화재해상보험주식회사는 1897년 일본 동경에 설립되었고 경성에 지점을 두었다. 화재보험, 해상 및 운송보험을 취급했고 자본금 이백만 원 규모였다.
부국원 농산물 검수서
1942년 | 25.2 × 36.2㎝ | 기증유물
1942년 7월 25일 함경북도농회가 부국원 앞으로 보낸 거래 종자 검수 문서다. 함경북도농회가 부국원에서 구입하고 받은 무종자의 수량을 검사한 결과가 적혀 있다. 신청한 무의 수량은 2,250인데 입고 수량이 2,160으로 수량 90이 부족하다는 내용이다. 함경도, 평안도, 전라도 지역 농회가 발행한 검수서가 총 9점이 있다. 이를 통해 부국원이 전국적으로 농산물을 거대한 큰 회사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해방 이후 일본인 귀속재산 부국원 처리에 관한 신문기사
『공업신문』 | 1946. 9. 7. | 한국연구원 | 영인본
위 기사는 경기도재산관리처에서 일본인 소유재산의 관리인을 모집하는 내용으로 부국원도 포함되어 있다. 해방 이후부터 1950년까지 부국원의 관리주체와 사용 용도는 불명확하다. 대한민국정부 수립 후 귀속재산법 (1949년)에 따라 국유 · 공유재산 외에 재산은 매각될 때까지 정부가 관리한다는 규정이 정해졌으며, 이때 부국원도 국가재산으로 귀속된 것으로 보인다.
'수원 법원 및 검창청 시기' 부국원
1956년 | 수원박물관 | 영인본
부국원은 1952년부터 1956년까지 수원 법원 및 검찰청 청사로 사용되었다. 법원장 신조형, 판사 송영국 등 법원 직원들의 모습과 담당 업무가 기재되어 있어 당시 부국원을 사용했던 사람들의 자취를 살펴볼 수 있다. 좌측 하단 사진에서는 부국원 부속 건물의 원형과 건물 좌측면의 굴뚝을 확인할 수 있으며, 우측 하단 사진에서는 1950년대 부국원 내부를 볼 수 있는 희귀한 자료다.
'민주공화당 경기도당 청사 시기' 부국원
1970년대 (추정) | 안익승 (좌), 이병희 유족 (우) 기증 | 수원시정연구원 | 영인본
부국원은 196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까지 민주공화당 경기도 제4지구당 청사로 사용되었다. 민주공화당은 1963년 5 · 16 군사정변 주체세력이 조직했다. 공화당의 공천으로 수원에서 출마한 이병희 (1926 ~ 1997)는 제6대 ~ 제10대 (1963. 12. ~ 1980. 10.) 5선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수원에 경기도청 이전과 삼성전자 유치, 화성복원사업을 추진했다. 좌측은 이병희의 제10대 국회의원 당선기념 촬영 사진으로추정되며, 앞줄 가운데가 이병희다. 우측은 고 박정희 대통령 국상 사진이며, 1970년대 부국원의 외관 모습을 컬러로 볼 수 있다. 정치적 중심지였던 부국원의 시대적 상황을 보여 준다.
1970년대 부국원 내부 모습 (2층, 3층)
1970년대 (추정) | 이병희 유족 기증 | 수원시정연구원 | 영인본
1970년대 구조 변형 후 부국원 내부 모습을 살펴 볼 수 있다. 벽돌로 쌓은 구조 벽체에 철근콘크리트로 내부 보강을 하고 3층으로 증축했다. 위 사진은 3층 내부로, 일본식 기와와 목조 지붕을 콘크리트 경사면 지붕으로 바꾸고 좌 · 우 벽체를 세워 공간을 확장했다. 아래 사진은 2층 내부로, 변형된 창문과 벽체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한편 '이후락 규탄 궐기대회' 현수막, '대통령 (박정희)' 사진, 민주공화당' 로고 등은 민주공화당 청사로 사용하던 부국원의 상황을 반영한다.
전시를 마무리하며
'수원 교동유적 : 부국원 발굴이야기' 는 발굴조사로 확인된 조사 성과를 기반으로 일제강점기 부국원 富國園의 모습을 보여드리고자 하였습니다.
1906년 일제가 수원에 농업연구기관인 권업모범장 勸業模範場을 설립하며 일본식 농업과 개량 품종 보금을 추진하였고, 이 과정에서 사업 혜택을 받고자 하는 일본농업회사들과 농장들이 세워졌습니다. 부국원은 1915년 설립되어 종자 · 종묘를 판매하였고 시간이 지나며 비료, 묘포, 농기구, 양잠도구, 농산물 등 다양한 품목을 전국에 판매하며 성장하였습니다.
또한 『부국원 월보』, 『조선신문』 등 당시 발간된 자료에는 경성 명동과 일본 나고야현 日本 名古屋県에 지점을, 일본 나가노현 日本 長野県에 출장소를 운영했다는 기록이 있어 당대 매우 번영했던 모습을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수원 교동유적에서는 국가등록문화유산 수원 구 부국원 건물과 함께 기록으로 알려진 부국원의 성격과 위세를 뒷받침하는 자료가 확인되었습니다. 유적은 발굴조사 이후 개발이 진행되면 현재는 모습을 확인할 수 없지만 수원 구 부국원의 전시를 통해 역사성과 의의를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앞으로도 근대문화공간 수원 구 부국원에서는 다양한 주제로 수원과 부국원의 모습을 전시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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