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소의 옛 터, 양성관 가옥]
후소의 옛 터,
양성관 가옥
2024 열린문화공간
후소 後素 테마전시
2024. 3. 26. 화 ~ 12. 31. 화
열린문화공간 후소 전시실
열린문화공간 後素
관람시간 09 : 00 ~ 18 : 00 (입장마감 17 : 00)
휴 관 일 매주 월요일, 법정 공휴일
관 람 료 무료
주 소 수원시 팔달구 행궁로 26번길 11ㅡ5
| 공간안내
행궁동에 위치하는 열린문화공간 후소 後素는
시민들과 함께하는 문화공간입니다.
1층 전시실에서는 후소의 건립 취지에 부합하는 테마전시가 준비되어 잇으며
교육실에서는 전시 관련 교육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2층에는 수원을 대표하는 미술사학자 오주석 선생의 서재와
미술사 자료실, 쉼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후소 後素 오주석 (1956 ~ 2005) 선생은 대중들에게
옛 그림 감상법을 널리 알린 수원 출신의 미술사학자입니다.
| 건물소개
● 건물 터는 수원의 부자 양성관 99칸 가옥 토지
● 1977. 9. 5. 건축
● 설계자 김석철 (서울 예술의 전당 설계)
● 백내과병원 원장집 (1977 ~ 2017)
● 2018. 9. 5. 열린문화공간 후소 개관
2024 열린문화공간 후소 테마전
후소의 옛 터,
양성관 가옥
■ 전시를 개최하며
수원 남창동에 위치한 양성관 가옥은 수원 제일의 부자를 상징하는 집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 통용되었던 '아흔아홉칸집' 주인이라는 말은 곧 부잣집을 의미합니다. 1922년 이후 남창동 가옥의 주인이 된 양성관은 일제강점기 수원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던 사업가이자 지역유지였습니다.
이후 1973년 양성관 가옥은 용인 한국민속촌으로 이전되었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하였던 양성관 99칸 가옥의 흔적은 찾을 수 없지만 가옥은 그 모습 대부분 한국민속촌에 재현되어 있습니다.
양성관 가옥 터 일부에 1977년 백병원 원장이 당대 최고의 건축가에게 의뢰하여 2층 집을 지었고 이 집은 뛰어난 현대 건축물로써 행궁동에 자리잡았습니다. 그리고 40년 후인 2018년 '열린문화공간 후소' 가 건립되었습니다. 후소의 옛 터는 바로 양성관 99칸 가옥이었던 것입니다.
이번 테마전에서 다루는 조선시대 집 터와 규모의 제한, 출토 기와, 일제강점기 양성관 가옥 사진, 한국민속촌 중부지방 양반 가옥 등의 모습을 통해 수원을 대표하던 양성관 가옥 100년의 역사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열린문화공간 '후소 後素' 테마전시
후소의 옛 터,
양성관 가옥
열린문화공간 후소는 수원을 대표하던 부자 양성관의 99칸 가옥을 재조명하고자 <후소의 옛 터, 양성관 가옥> 테마전시를 마련하였다. 본래 열린문화공간 후소의 옛 터는 남창동에 위치한 양성관 가옥 자리였다. 일제강점기 수원을 대표하는 지역 유지였던 양성관은 1922년 남창동 99칸 기와집을 매입하였고 이후 이곳은 사람들에게 양성관 가옥으로 불이어졌다. 1973년 양성관 소유의 토지는 38개 필지로 분리 매매되었고 가옥은 한국민속촌으로 옮겨졌다. 이 중 남창동 99ㅡ28번지를 1977년에 백내과병원 원장이 매입하여 2층 집을 짓고 40년간 거주하였다. 그리고 2017년 수원시에서 백병원 원장의 집을 매입하여 수원화성박물관 부속시설인 열린문화공간 후소를 설립하였다.
이번 테마전시를 통해 양성관 가옥의 옛 모습과 한국민속촌으로 이전한 현재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전시자료로는 양성관 가옥 도면이 포함된 수원화성박물관 소장 <민속촌설계도>, 수원박물관 소장 양성관 가옥 출토 수키와, 양성관 가옥 사진이 실린 수원박물관의 발간 서적 등이 있다. 열린문화공간 후소의 옛 터인 양성관 가옥을 재조명함으로써 수원과 후소의 역사를 면밀하게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조선시대 가대규제
조선시대에는 신분에 따라 집 터 [가대 (家垈)]의 크기를 제한한 가대규제 (家垈規制)와 집의 칸 수 (間數) 및 장식을 제한한 가사규제 (家舍規制)가 실시되었다. 도성 (都城) 내 토지는 국가소유였으며 집은 사유였다. 조선초 왕실 가족은 물론 정1품부터 서인 (庶人)에 이르기까지 집 터를 한정하여 나누어 주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도성 안에 나누어 줄 토지가 부족해졌기 때문에 신분별로 지급되는 집 터의 규모를 줄였다. 이를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 (經國大典)』 (1469)을 통해 규정지었다. 이 때 정한 집 터 규모의 제한은 정조대에 편찬된 『대전통편 (大典通編)』 (1785)과 고종대 『대전회통 (大典會通)』 (1865)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품계 (品階) | 부수 (負數) | 현행평수 (現行坪數) |
대군 (大君) · 공주 (公主) | 30 | 1,170평 |
왕자군 (王子君) · 옹주 (翁主) | 25 | 975평 |
1 · 2품 | 15 | 585평 |
3 · 4품 | 10 | 390평 |
5 · 6품 | 8 | 312평 |
7품 이하 · 음관의 자손 | 4 | 156평 |
서인 (庶人) | 2 | 78평 |
가사규제와 '99칸집' 명칭의 유래
조선시대 가사규제 (家舍規制)는 신분에 따라 가옥의 규모와 치장을 제한하는 제도다. 품계별로 주택의 전체 칸수를 제한하는 규제는 『조선왕조실록 (朝鮮王朝實錄)』에 기록되어 있다. 대군 (大君)의 집은 60칸 (間), 군 (君)과 공주는 50칸, 옹주 (翁主) 및 종친, 2품 이상은 40칸, 3품 이하는 30칸, 서인 (庶人)은 10칸 이하로 규정하였다. 두 기둥 사이 길이, 또 네 기둥 안의 면적을 1칸 (間, 간으로도 불린다)이라고 하는데 기둥 사이 길이가 일정하게 정해진 바가 없었기 때문에 칸 수 제한만으로는 의미가 없었다. 따라서 집 터 면적과 가옥의 총 규모뿐 아니라 각 건물을 구성하는 들보 · 도리 · 기둥의 높이 등을 세세하게 제한하였다. 이처럼 각 부재의 척수를 규제하는 것을 '간각척수제한 (間閣尺數制限)' 이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류층에서 가사규제 위반 사례가 많아지자, 민간에서는 99칸까지만 집을 지을 수 있고 100칸 이상은 궁궐에 해당한다고 인식하였다. 그래서 아흔아홉칸집 [九十九間家]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상류주택 중 규모가 큰 공경대부의 큰 집 [大家]을 전통적으로 제택 (第宅)이라 하고 왕실 가족의 집은 궁가 (宮家)라고 불렀다. 그리고 실제로는 99칸에 못미치더라도 큰 제택 (第宅)을 통틀어서 '99칸집' 이라 불렀던 것이다.
| 조선시대 집 터와 집 규모 제한
조선시대에는 품계에 따라 집 터 [家垈]와 집의 규모 [家舍]를 규제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경국대전』 등 법전과 『조선왕조실록』에 자세하게 기록되어있다. 김홍도의 《단원 풍속도》 중 <기와이기>는 조선시대 유일한 건축 작업 그림이다. 건축 장인 (匠人)들의 역동적인 모습과 구도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김홍도, 《단원풍속도첩》 중 <기와이기>
종이에 채색, 18 ~ 19세기, 28.0 × 24.0㎝,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기와이기란 기와로 지붕을 덮는 작업을 의미하며 와즙 (瓦葺)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건축 노동이 그려진 유일한 작품으로 다양한 장인 (匠人)들이 협업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림 우측 목수 (木手)들과 좌측 와공 (瓦工)들의 옷차림과 작업 방식이 대조적이다.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밑에서 띄운 기와를 손으로 받는 와공과 다음 기와를 올리려고 지붕을 쳐다보는 와공의 협업이다.
김홍도의 뛰어난 공간 구성과 각기 개성 있는 인물 간 협업의 모습이 생동감 있게 그려진 작품이다.
양성관 가옥의 연혁
1861년 수원 유학자 이병진이 99칸 대저택 지음
1906년 을사오적 이근택 (李根澤) 수원으로 이주, 남창동 가옥 매입
1922년 양성관이 이근택의 집 매입
1951년 바깥사랑채에 수원지방검찰청 입주
1950년대 한국전쟁 이후 바깥사랑채에 남창동사무소 입주
1960년대 국회의원 이병희 바깥사랑채 앞에서 민주공화당 행사 진행
1973. 10. 양성관 가옥 용인 한국민속촌으로 이전
1974. 10. 03. 한국민속촌 개관, 22호집 중부지방 양반가옥으로 조성
1977. 09. 05. 백내과병원 원장 의뢰로 건축가 김석철 설계, 2층 주택 건축
2017. 11. 수원시에서 매입 후 수원화성박물관 부속시설로 리모델링
2018. 09. 05. 열린문화공간 후소 개관
솟을대문 (좌) / 양성관 가옥 바깥사랑채에 들어선 남창동사무소 (우) 수원박물관 소장
양성관 가옥의 역사
열린문화공간 후소의 본래 터는 소위 양성관 99칸 가옥이라 불리는 남창동 대저택의 일부였다. 훗날 수원의 부잣집을 상징하던 남창동 가옥은 1861년 (철종 12) 유학자 이병진이 지은 것이다. 1906년 을사오적 중 한 명인 이근택 (李根澤, 1865 ~ 1919)이 의사 (義士)들에게 척살될 뻔하다가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수원으로 이주하였다. 그는 이병진이 지은 저택을 매입하고 죽을 때까지 살았다. 일제강점기 남창동 99칸 기와집은 남창리 225번지 1,600평 대지 위에 자리잡고 있었다.
1922년 수언의 대지주 양성관이 이 집을 매입하여 이후 '양성관 가옥' 으로 널리 알려졌다. 양성관의 본명은 성환 (聖煥)이며 성관은 그의 자 (字)이다. 우리에게는 본명보다 양성관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일제강점기 수원의 대표적인 유지로 활동하였다. 한국전쟁 중인 1951년 바깥사랑채에 수원지방검찰청이 자리잡았으며 전쟁 후에는 남창동사무소로 사용되었다. 한편 수원의 정치 유력자 이병희 (李秉喜, 1926 ~ 1997) 의원도 나중에 바깥사랑채에 살기도 했다. 이후 양성관 99칸 가옥의 토지는 38개의 필지로 분리 매매되었고 한옥은 1973년 10월 용인 한국민속촌으로 옮겨졌다. 이로써 19세기 중반부터 100년 넘게 수원을 대표하는 부잣집이었던 양성관의 가옥은 더 이상 수원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수원박물관 소장 『水原』 중 수원읍내상류저택 사진 (사진 속 인물 양성관)
양성관 가옥 출토 수키와
일제강점기, 6.5 × 29.0 × 13.5㎝ (좌), 6.5 × 29.0 × 14.0㎝ (우), 수원박물관 소장
1973년 양성관 가옥을 한국민속촌으로 이전할 때 출토된 수키와다. 기와에 '水原' 등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양성관 가옥의 바깥 사랑채에는 한국전쟁 당시에 수원지방검찰청이 자리하였다.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남창동사무소가 들어섰다.
양성관 가옥의 바깥사랑채 건물과 공간의 규모가 컸기 때문에 수원의 주요 관공서에 적합하였다.
양성관 후손이 기억하는 가옥 배치도
2024년, 종이, 그림 : 백진주
화성 현황지적도 내 양성관 가옥 위치
1898년 『수원군읍지 (水原郡邑誌)』가 간행되고 12년 후인 1911년에 제작된 지적도다. 정밀도가 높은 지적도로 이를 통해 당시까지는 상당수의 관청 소유지가 남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양성관 99칸 가옥은 행궁 근처인 남창리 225번지 1,600평 대지 위에 위치하였으며 열린문화공간 후소의 터가 바로 이곳이다. 양성관 가옥 중에서도 바깥사랑채 뒤편에 해당된다.
<민속촌설계도> 중 수원 남창동 가옥 배치도
1973년, 종이, 49.5 × 76.8㎝, 수원화성박물관 소장
1973년 한국민속촌 조성 당시의 설계도다. 전국 팔도의 유명한 전통가옥 36개소 375장의 방대한 청사진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중 양성관 가옥은 '수원 남창동' 이라는 명칭으로 총 46장이 있다. 설계도 맨 앞에는 '수원 남창동 배치도' 가 있으며 이를 통해 양성관 가옥의 형태를 한눈에 볼 수 있다. 현재 한국민속촌 양성관 가옥은 당시 배치도와 거의 유사한 상황이다.
1973년 양성관 가옥은 한국민속촌으로 이관되었다. 전국팔도 유명 가옥들의 민속촌 이관 당시 제작된 <민속촌설계도>에는 양성관 가옥 도면이 다수 실려 있다. 도면을 통해 민속촌에 조성된 양성관 가옥이 기존보다 건물 몇 채가 신축된 것을 알 수 있다. 수원의 대표적인 부잣집인 양성관 99칸 가옥은 용인 한국민속촌에서 확인 할 수 있다.
한국민속촌 중부지방 양반가 솟을대문
<민속촌설계도> 중 수원 남창동 내당 정면도
1973년, 종이, 49.5 × 76.8㎝, 수원화성박물관 소장
남창동 가옥의 내당 정면도로 현재의 모습과 일치한다. 다만 현재 건물 정면의 벽체에는 십장생이 조각되어 있다.
혼례와 같은 집안 중대사는 내당의 대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조선시대 유교적 관습이 자리 잡으면서 내당은 여성들의 공간이 되었으며 사랑채는 남성들의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민속촌설계도> 중 수원 남창동 내당 평면도
1973년, 종이, 49.5 × 76.8㎝, 수원화성박물관 소장
남창동 가옥 내당 정면도에는 스케일과 평수가 표기되어 있다. 내당은 안채로도 불리는데 집의 중심인 정당 (正堂) 역할을 한다. 안방과 건넌방, 안대청, 부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열린문화공간 후소의 설립
양성관 가옥의 필지 중 남창동 99ㅡ28번지는 1977년 백내과병원 백성기 원장이 매입하였다. 백원장은 예술의 전당을 설계한 김석철 (1943 ~ 2016)에게 의뢰해 1,170㎡ (약 350평)의 터에 연면적 334㎡ (약 100평) 규모 2층 집을 짓고 이후 40여 년 동안 거주했다. 건축과 교수이자 건축가 김석철은 한국 건축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다.
2017년 11월 수원시에서 이 집을 매입하고 이듬해 수원화성박물관의 부속시설로 설립하였다. 이렇게 탄생한 곳이 열린문화공간 후소다. 양성관 가옥 옛 터에 위치한 후소는 백원장 주택을 전시와 문화시설 공간에 적합토록 리모델링한 것이다. 특히 기존 건축물의 높은 담장을 낮게 조성하여 외부 공간의 시각적인 변화를 주었다. 이처럼 시민들의 접근성을 높여 '열린문화공간' 으로 재탄생하였다.
열린문화공간 후소
한국민속촌에 재현된 양성관 가옥
1973년 양성관 가옥은 용인의 한국민속촌으로 이전되었다. 현재 민속촌에 '중부지방 양반가' 라는 이름의 22호 집으로 조성되어 있다. 한국민속촌 안내문에 따르면 '유교사회에 있어 큰집 살림의 필요한 모든 공간이 규모 있게 갖추어진 전형적인 가옥' 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한국민속촌에 재현된 양성관 가옥의 특징은 내외 구분이 명확하며 줄행랑이나 회랑, 안초당 등 현존하는 다른 곳에서는 찾기 힘든 전각 명칭도 다양하다. 그만큼 규모와 넓이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7세기 후반 이후 지어진 상류주택은 공통적으로 행랑채, 안채, 사랑채, 사당이 유교사회 양반 가옥의 기본 구성요소다. 한국민속촌에 재현된 양성관 가옥은 각 건물 간의 공간도 넓으며 특히 중부지방 가옥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한국민속촌 양성관 가옥 내당
① 솟을대문
양반집에서는 바깥 행랑채에 대문간을 두었다.
대문 지붕이 행랑채 지붕보다 높이 솟아 있어 솟을대문이라 부른다.
초헌 (바퀴 하나 달린 가마)을 타고 출입해도 지장없도록 대문간을 높게 만든다.
중부지방 가옥 대문은 계단을 높이 쌓았는데 본래 양성관 가옥과는 다른 형태다.
② 바깥사랑과 바깥 행랑채
행랑 (行廊)은 대문과 연결되어 집의 가장 바깥 쪽에 위치한 남성 하인들의 생활공간이다. 마굿간과 마부방, 하인방, 부엌, 화장실, 창고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중문을 두고 있다. 바깥사랑에서는 손님이 머물고 유숙할 수 잇으며 사랑채의 공간이 부족할 때 활용된다.
③ 안사랑과 안 행랑채
안사람은 살림을 며느리에게 물려준 시어머니나 자녀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안 행랑은 여성 하인들이 생활하는 곳으로 유모, 침모, 찬모 등이 함께 생활한다.
부엌이 별도 설치되어 있고, 안 행랑채에 연결되어 곳간이나 광을 갖추고 있다.
④ 내당 (안채)
내당은 여성들의 사회문화적 활동이 이루어지는 일상생활 공간으로 안채라고도 불린다. 안채는 중부지방 가옥의 특징인 'ㄱ' 자형에 안방 뒤편으로 윗방이 추가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청은 방과 방 사이에 있는 넓은 마루로 안채의 대청을 안대청이라고도 한다.
민속촌으로 이전한 양성관 가옥
⑤ 안초당
결혼 전 딸들이 거처하는 공간으로 신부로서 갖춰야 할 심신을 수양하는 곳이다.
주로 내당 옆의 조용한 곳에 위치하며 대청과 방으로만 구성된 작은 건물이다.
기와지붕이 아닌 이엉으로 된 지붕이라 초당 (草堂)이라 한다.
⑥ 사당
조상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가장 조용하고 신령스러운 곳을 선택한다.
집주인이 아침저녁으로 사당에 가서 인사를 올리기 때문에 사랑채에 가깝게 모신다.
.
⑦ 사랑채
가장의 일상생활과 자녀의 교육을 위한 사회적 공간이다.
건물은 ㄱ자 형태이며 큰 대청을 사이에 두고 큰방 (사랑방)과 건넌방이 있다.
큰방 아래에는 서고 (書庫)가 달려 있고 옆에는 작은 온돌방이 있다.
⑧ 외별당
남성들의 공간으로 사랑채의 담장 밖에 위치하며 일각문을 통해 출입한다.
ㄱ자형의 마루 중심의 집이며 온돌방과 대청, 누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중부지방 양반 가옥 중에서도 외형적으로 가장 빼어난 건물이다.
손님접대, 모임과 풍류를 즐길 때 사용된 곳으로 집주인의 사회문화적 활동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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