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에 실린 여성]
▲ 프랑스에서 올해 여름부터 유통할 새 유로화 동전들이에요. 왼쪽 동전부터 시몬 베유를 새긴 10센트, 조세핀 베이커를 새긴 20센트, 마리 퀴리를 새긴 50센트. /파리 조폐국
佛 낙태 합법화 이끈 정치인 <시몬 베유 · 10센트> · 2차 대전 '스파이' (조세핀 베이커 · 20센트> 얼굴 새겼죠
50센트엔 '여성 첫 노벨상' 퀴리 부인
英 지폐엔 '오만과 편견' 작가 오스틴
튀르키예는 이슬람 여성 소설가 넣어
프랑스 화폐 발행 기관인 '파리 조폐국 (Monnaie de Paris)' 이 지난 6일 (현지 시각) 시몬 베유, 조세핀 베이커, 마리 퀴리 등 대표적 여성 위인들의 얼굴을 새긴 새 유로화 동전 디자인을 공개했답니다. 이들은 프랑스의 위인들을 안장한 국립묘지 판테온에 묻힌 여성 위인 7명에 속하기도 합니다. 유로화는 유럽 여러 나라가 함께 쓰는 돈이지요. 유로화 지폐는 나라에 관계없이 같은 디자인을 채택했지만, 유로화 동전은 발행하는 나라에서 재량으로 각국 상징을 새길 수 있도록 했어요. 프랑스의 새 동전은 올해 여름부터 유통한다고 합니다. 화폐에 새기는 인물은 각 나라나 각 문화권이 지닌 역사와 가치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어요. 화폐들을 잘 들여다보면서 앞으로 삶의 모델로 삼을 만한 위인을 발견할 수도 있을 거예요. 오늘은 화폐에 얼굴이 새겨질 정도로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여성 이야기를 살펴봅시다.
▲ 왼쪽부터 시몬 베유가 1974년 프랑스 의회에서 낙태 합법화를 설득하는 연설을 하는 모습. 조세핀 베이커가 1940년 프랑스 파리의 한 호텔에서 제2차 세계대전 중 휴가를 나온 영국군을 위해 노래하는 모습. 마리 퀴리가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중 파리 라듐 연구소에서 미국 원정군(AEF)과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 / 위키피디아
아우슈비츠서 살아남아 유럽 의회 수장까지
프랑스 의회가 지난 4일 세계 최초로 여성이 낙태할 자유를 명시한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켜 화제가 됐습니다. 프랑스는 여성이 원치 않는 임신을 중단하는 낙태를 이미 합법화한 나라예요. 이번 헌법 개정은 낙태 결정권이 여성에게 있다는 점을 더욱 분명히 했다는 의미가 있죠. 그런데 가브리엘 아탈 프랑스 총리는 "시몬 베유와 그 길을 닦은 모든 이의 두 번째 승리" 라고 소셜미디어에 축사를 남겼어요. 시몬 베유는 누구이며 그의 첫 번째 승리는 무엇이었을까요? 시몬 베유 (1927 ~ 2017)는 헌법 개정 이틀 뒤 프랑스 10센트 동전의 주인공으로도 올랐습니다. 그는 사상가이자 정치가로서 1975년 프랑스에서 낙태를 합법화하는 법을 통과시키는 데 앞장선 인물입니다. 이 법은 그의 이름을 따서 베유법 (Loi Veil)이라 불렀지요. 아탈 총리는 약 50년 전 베유가 이끈 낙태 합법화를 첫 승리로 보고, 나아가 이번 헌법 개정에도 그가 기여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지요.
베유는 어릴 적 독일 나치의 강제수용소 아우슈비츠에 갇혔다가 간신히 살아남은 아픈 경험을 했어요. 부모와 오빠를 잃었죠. 그러나 그는 꿋꿋이 법과 정치학을 공부해서 고위 공무원으로 사법부에 들어갔습니다. 1974년 베유는 보건부 장관으로 임명받습니다. 당시 프랑스 대통령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은 그에게 낙태를 더 이상 범죄로 처벌하지 않도록 형법을 개정하는 임무를 맡겼어요. 그해 11월 베유는 의회에서 직접 의원들을 설득하는 연설을 하는 등 고군분투하며 여성 차별에 맞서 싸우는 인권의 상징으로 떠오릅니다. 1979년에는 유럽 의회의 초대 의장으로 선출돼 3년간 활동했어요. 프랑스와 독일의 관계 회복과 유럽 통합의 촉진자 역할을 했지요. 이후 고국으로 돌아가 보건부 장관 등 고위직을 지내며 프랑스에서 깊은 존경과 신뢰를 받았답니다. 이제 베유는 10센트 동전 속에서 프랑스인들의 일상과 함께하게 됐습니다.
프랑스의 전쟁 스파이 맡은 미국 출신 가수
프랑스의 20센트 동전에 새겨질 조세핀 베이커 (1906 ~ 1975)는 미국에서 태어난 프랑스 댄서이자 가수입니다. 1920년대 파리에 돌풍을 일으킨 미국 흑인 문화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져 '검은 비너스' 라고 했어요. 베이커는 10대 때부터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댄서로 활약하다 19세였던 1925년 프랑스 파리로 진출했습니다. 그녀는 곧 프랑스에서 아주 인기 있는 연예인 중 한 명이 됐죠.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독일이 프랑스를 침략했어요. 프랑스 정보국은 프랑스에서 최고로 유명했던 여성 베이커를 스파이로 기용해 독일 쪽 정보를 캐내도록 했어요. 베이커는 프랑스의 스파이 제의를 흔쾌히 수락하며 "내게 마음을 준 파리 사람들을 위해 내 생명을 바칠 준비가 됐다" 고 했다고 해요. 곧 베이커는 프랑스 저항군의 일원으로 활동했습니다. 독일과 동맹을 맺은 이탈리아와 일본 대사관에서 열리는 외교 파티에 참석하는 등 간첩으로 활동했어요.
1944년 10월 프랑스 수도 파리에서 독일군이 쫓겨나면서 베이커는 프랑스 공군 제복을 입고 당당하게 파리로 입성했어요. 프랑스 최고 권위 훈장인 레종 도뇌르 (Legion d'Honneur)를 수상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베이커는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인권 시위에 참여하려고 미국을 여러 번 방문해 민권 운동에도 기여했어요. 그는 1975년에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요, 미국계 프랑스 시민이자 연예인으로서는 최초로 프랑스 애국자를 기리는 파리 판테온에 안장됐답니다.
"읽기는 즐거워" ··· 영국 돈에 담긴 소설 구절
프랑스 50센트 동전에 새겨질 '퀴리 부인' 마리 퀴리 (1867 ~ 1934)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과학자이지요. 또 그는 1995년에 파리 판테온에 안장된 첫 여성입니다. 마리는 원래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태어났지만 24세였던 1891년 파리로 유학을 가면서 프랑스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그는 프랑스 물리학자 피에르 퀴리와 결혼해 부부가 함께 방사능과 방사성물질을 발견하는 성과를 냅니다. 부부는 새로 발견한 화학원소 이름은 마리의 고향인 폴란의 이름을 따서 '폴라늄' 이라고 짓기도 했어요. 마리는 1903년 남편과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고, 1911년 노벨 화학상을 단독으로 받았어요. 그녀는 노벨상을 받은 첫 여성이며, 두 가지 과학 분야에서 노벨상을 받은 유일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여성 과학자의 모델이지요.
▲ 영국을 대표하는 여성 소설가 제인 오스틴의 얼굴이 그의 사망 200주년인 2017년부터 발행하는 영국 10파운드 지폐에 그려져 있어요. / 잉글랜드 은행
소설 '오만과 편견' 같은 작품으로 서양 문학사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긴 영국 작가 제인 오스틴 (1775 ~ 1817)은 영국 10파운드 지폐에 초상화가 실려 있습니다. 2017년 사망 200주년을 기념한 것이죠. 초상화 아래에는 '오만과 편견' 에 나오는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결국 읽는 것만큼 즐거운 것은 없다고 선언한다! (I declare after all there is no enjoyment like reading!)" 이 문장은 오스틴이 문학에 끼친 영향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 이슬람권 최초의 여성 소설가 파트마 알리예 토푸즈가 실린 튀르키예의 50리라 지폐. / 위키피디아
튀르키예 50리라 지폐는 2009년부터 파트마 알리예 토푸즈 (1862 ~ 1936)의 얼굴을 새겨 발행합니다. 19 ~ 20세기에 소설가로 활동한 그는 튀르키예와 이슬람 세계에서 최초 여성 소설가로 인정받았답니다. 그는 작품에서 여성의 지위 향상 문제를 지속적으로 다루며 사회 변화를 추구했답니다.
▲ 토푸즈 또는 그의 딸로 추정되는 인물이 자전거를 타는 시늉을 하며 사진을 찍고 있어요. 토푸즈가 태어난 19세기 말부터 서구권을 중심으로 여성도 자전거를 타는 문화가 생겨났어요. / 위키피디아
윤서원 서울 단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 · 구성 = 장근욱 기자 (muscle@chosun.com)
[출처 : 조선일보 신문은 선생님 2024년 3월 13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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