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박정훈 칼럼] 문 대통령은 ‘고종의 길’을 가려 하는가

드무2 2021. 7. 5. 0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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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훈 칼럼] 문 대통령은 ‘고종의 길’을 가려 하는가

구한말 같은 난세
나라 밖은 정글판인데 내부에 적을 만들어
우리끼리 지지고 볶는 편협한 리더십이 성공할 수는 없다

박정훈

박정훈 논설실장

입력 2019.06.28 03:17

 

 

 

세상 돌아가는 모양이 구한말 같다는 얘기가 도처에서 나온다. 인공지능(AI) 경쟁을 다룬 본지 기사에 “지금이 조선 시대냐”는 서울대 빅데이터연구원장의 한탄이 실렸다. 밖에선 각국이 AI 주도권 다툼에 혈안인데 우리는 낡은 프레임에 발목 잡혀 외딴 섬이 돼간다는 것이다. 산업 기술뿐 아닐 것이다. 국제 정세와 강대국 갈등, 무역 · 통상에서 지정학적 환경까지 100여 년 전 구한말을 연상케 하는 일련의 상황이 펼쳐졌다. 제국주의 열강이 우리 목을 조여온 19세기 말처럼 또다시 내 편이냐 아니냐의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숨가쁜 국제 정세보다 더 구한말 같은 것이 이 순간 한국과 일본의 통치 리더십이다. 지금 일본엔 화려했던 과거를 꿈꾸는 지도자가 등장해 있다. 일본 총리 아베가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을 롤모델로 삼았다는 건 비밀도 아니다. 총리로서 그의 행보는 이토 히로부미에 비유된다. 우리에겐 흉적이지만 일본에 이토는 근대화의 원훈(元勳)으로 추앙받는 존재다. 7년 전 미국 방문길에 아베는 이렇게 연설했다. "이제 일본은 (뒤에 앉아 있는) '2열 국가'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돌아왔습니다. 일본 역시 돌아올 것입니다." 100여 년 전 이토가 제국주의 팽창을 주도했듯이 아베도 '밖으로 뻗어가는 일본'을 말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리더십은 아베와 대조적이다. 아베가 국력 확대에 매달리는 부국강병론자라면, 문 대통령은 노동 중시의 분배론자다. '강한 일본'(아베)과 '포용국가'(문)의 슬로건만큼이나 차이가 크다. 아베는 국제적 영향력 확대를, 문 대통령은 국내적 공정 · 평등을 우선시한다. 아베가 밖을 본다면, 문 대통령의 시선은 안을 향해 있다. 외교 노선에서도 현실적인 아베와 이상주의자인 문 대통령은 대조적이다. 아베가 '트럼프의 푸들'을 자처한 반면 문 대통령은 미 · 중 간 '중재자론'을 내걸었다. 미 · 일이 유례없는 밀월인데 한 · 미 동맹이 서먹해진 것이 두 사람의 리더십과 무관하진 않을 것이다.

구한말 격동기, 지도자의 역량 차이가 조선과 일본의 운명을 갈랐다. 이토를 비롯한 일본의 리더들은 밖을 향해 눈과 귀를 열어놓고 있었다. 국제 정세에 기민하게 대응하면서 힘을 키워 근대화 문턱을 넘는 데 성공했다. 우리에겐 그런 지도자가 없었다. 대한제국 황제 고종은 제국주의 침탈을 헤쳐나갈 만큼 역량 있는 통치자가 아니었다. 스스로 개혁 군주임을 자처했지만 실상은 봉건 군주의 한계를 넘지 못했다. 고종의 좁은 세계관과 빈약한 국가 비전이 망국을 앞당겼다. 조선은 외침(外侵)에 앞서 지도자의 무능과 무기력, 무전략 때문에 자체 붕괴했다.

구한말만큼이나 어지러운 난세(亂世)다. 강대국과 강대국이 격돌하고, 힘과 힘이 부닥치는 거친 게임판이 벌어졌다. 세상은 약육강식의 정글이 됐는데 문 정부는 안에서 적을 만들고 편을 가르는 내부 경쟁에 몰두하고 있다. 바깥세상을 보지 않고 우리끼리 지지고 볶겠다는 편협한 리더십에 머물러 있다. 그 모습에서 100여 년 전 고종의 이미지가 연상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첫째, 고종은 강대국 역학관계를 잘못 읽고 치명적 판단 미스를 범했다. 당대의 패권국 영국 대신 비주류 러시아와 손을 잡으려 했다. 고종의 아관파천을 본 영국은 6년 뒤 영일동맹을 맺어 조선을 일본에 넘겨주었다. 문 정부도 비슷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패권을 쥔 미국과의 동맹을 약화시키고 패권에 도전하는 중국과 균형을 맞추겠다고 한다. 패권국에 등 돌린 나라가 국제 질서의 주류 진영에 설 수는 없다. 잘못된 선택으로 외교적 고립을 자초한 구한말 실패를 반복하고 있다.

둘째, 고종은 힘이 있어야 나라를 지킨다는 실력주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했다. 개혁 열정은 있었지만 관념에 머물렀을 뿐 의지도 노력도 약했다. 문 정부의 국정도 부국강병과는 결이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 국력을 키우기보다 경제를 쪼그라트리고 군사력을 약화시키는 쪽으로 국정을 이끌고 있다. 현실 대신 이념에 매달려 축소와 문약(文弱)의 길을 걷고 있다.

셋째, 고종은 기득권을 지키려 인적(人的) 역량을 제거하는 자해극을 벌였다. 급진 · 온건을 가리지 않고 개화파를 살해 · 축출해 부국강병 세력의 씨를 말렸다. 인재가 사라진 조선은 매국노 천지가 돼 자체 개혁의 추동력을 잃었다. 지금 벌어지는 '적폐 청산'도 국가의 인재 경쟁력을 훼손시키는 자충수일 뿐이다. 귀중한 인적 자산을 매장시켜 사회적 불구자로 만들고 있다. 두고두고 국가적 손실로 돌아올 것이다.

서울 덕수궁 후문에서 옛 러시아 공사관을 잇는 120m 거리에 ‘고종의 길’이 조성돼 있다. 고종이 러시아 편으로 도피한 아관파천(1896) 경로 일부를 서울시가 복원했다. ‘근대를 향한 고종의 열정’ 등으로 아름답게 포장했지만 그 길은 결코 미화될 수 없는 망국의 길이다. 구한말과도 같은 격변의 시대, 문 대통령이 갈 길이 ‘고종의 길’일 수는 없다.

#박정훈 칼럼

 

 

출처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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