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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역에서 한성대입구역까지] 01

드무2 2025. 3. 9.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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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역에서 한성대입구역까지] 01

 

 

 

 

 

 

 

명동성당

 

 

 

 

 

 

 

서소문 순례길

 

 

 

 

①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 → ②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 ③ 서울시립미술관 → ④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 → ⑤ 중림동 약현성당

 

 

 

 

한국 천주교 공동체의 시작인 명동대성당을 시작으로 아름다운 근대 건축물인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과 서울시립미술관을 지나간다.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건축물과는 상반되게 비극의 역사를 안고 있는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와 약현성당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명동대성당 (명동주교좌 성지성당)

 

지정번호 : 사적 제258호

 

명동대성당은 서울대교구 주교좌성당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본당이다. 이 자리는 초기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공동체가 있던 명례방 근처일 뿐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가 1845년에 귀국해 활동하던 돌우물골 (현 중구 소공동) 인근이기도 하다.

1898년에 지어진 이 아름다운 성당은 본당 설립 이후 줄곧 한국 천주교회 신앙의 중심이 되어왔다.

고딕 구조와 가까운 본격적인 서양식 성당으로 프랑스 코스트 신부가 설계하였다. 토지 매입은 1883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나 풍수지리설에 따른 정부와의 갈등, 청일전쟁 등으로 공사가 중단되면서 15년 만에 완공되었다. 파리외방전교회의 재정 지원으로 1892년 착공했는데 신자들이 무보수로 팔을 걷어붙이고 공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오랜 박해에서 획득한 신앙의 자유, 소외되고 가난한 민중의 안식처, 민주화운동의 상징이기도 하다.

성당 한편에 자리한 '천주교 서울대교구 역사관' 은 성당보다 앞서 1890년 '주교관' 으로 신축된 건물로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서양식 벽돌 건축물 중 하나이다. 주교관 및 경리부 건물로 사용되다가 2018년 6월 25일 '천주교 서울대교구 역사관' 으로 새로이 문을 열고 한국 천주교회의 태동부터 오늘의 서울대교구가 있기까지의 변천사를 다양한 유물과 자료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재명 의사 의거터 李在明 義士 義擧址

 

이재명 (1887 ~ 1910)은 친일 매국노인 이완용 (李完用)을 척살하려 한 평안남도 평양 출신 독립운동가이다.

1909년 명동성당 앞에서 벨기에 황제의 추도식을 마치고 나오는 이완용을 칼로 찔러 중상을 입히고 현장에서 체포되어 이듬해 순국하였다.

 

 

 

 

 

 

 

 

 

 

명동문화공원

 

 

 

 

 

 

 

명동 이야기

 

유행과 쇼핑 · 관광의 중심 명동 그 안에 숨겨진 역사적 이야기들을 알고 있나요?

 

명동이라는 이름은 조선시대 이 지역을 가리키던 이름인 명례방 (明禮坊)에서 유래되었는데, 당시 명례방에는 종현 (鐘峴, 종고개), 이현 (泥峴, 진고개), 동현 (銅峴, 구리개) 등 여러 고개가 있었습니다. 종현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대가 있었습니다. 종현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대가 주둔하며 숭례문에 있던 종을 걸어둔 데에서 유래한 지명으로, 1898년에는 명동성당이 들어섰습니다. 진고개는 땅이 질어서, 구리개는 흙이 구릿빛이어서 붙은 이름으로, 약방이 즐비했다고 합니다.

 

이렇듯 옛 명동의 모습은 지금과는 무척 달랐습니다. 명동은 시대를 따라 변화하면서 다양한 이야기들을 품어 왔던 것입니다. 명동에 읽힌 사람, 공간, 그리고 사건은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또 다른 명동의 모습을 만나보세요.

 

 

 

 

시를 사랑한 선비와

조선판 노블리스 오블리주

 

600년 수도 한양의 한복판에 위치했던 만큼, 명동에는 여러 명문가의 집터가 남아 있습니다.

 

조선 시조 문학의 최고봉 윤선도 (1587 ~ 1671) 또한 바로 지금의 명동성당 자리에 살았다고 합니다. 사계절 어부의 생활을 눈에 보이듯 묘사한 <어부사시사>, 물, 돌, 소나무, 대나무, 달을 선비의 다섯 벗으로 비유한 <오우가>가 윤선도의 대표작입니다.

 

'오성과 한음' 의 유쾌한 이야기로 유명한 오성 이항복 (1556 ~ 1618)의 후손들이 살았던 경주 이씨 집터 (지금의 명동1가 YMCA 앞)도 명동에 남아 잇습니다. 이항복은 특유의 대담함과 결단력을 통해 임진왜란을 극복하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윤선도의 대표작 <어부사시사> (위)

평생의 우정으로 유명한 오성 이항복 (1556 ~ 1618, 왼쪽)과 한음 이덕형 (1561 ~ 1613, 오른쪽) (아래)

 

 

 

 

윤선도의 대표작 <어부사시사>

 

 

 

 

오성 이항복

 

 

한음 이덕형

 

 

 

 

19세기 말 국난의 시기, 경주 이씨 명동 저택에서는 조상의 의기를 물려받은 인물들이 태어났습니다.

이항복의 10대손인 독립운동가 이회영 (1867 ~ 1932), 이시영 (1869 ~ 1953) 형제가 그들입니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후 이회영, 이시영을 포함한 6형제는 가문의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났습니다. 처분한 재산은 40여만 원으로, 당시 소 12,000마리를 살 수 있는 가격이었다고 합니다. 현재 가치로는 수백억 원에 이르는 엄청난 돈입니다.

 

이후 이회영은 일본 경찰에 체포당하여 순국했으며 다른 형제들도 모두 망명지에서 사망했습니다. 임시정부에 참여했던 이시영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아 광복 후 초대 부통령을 지냈습니다. 이회영, 이시영 형제가 보여준 조선판 '노블리스 오블리주' 의 정신을 오늘날 우리에게 큰 교훈을 전하고 있습니다.

 

 

 

 

부귀영화를 뒤로 하고 형제들과 함께 만주로 떠난 독립운동가 이회영 (1867 ~ 1932)

 

 

 

 

이시영 (1869 ~ 1953). 독립운동 중 임시정부에 참여했으며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냈습니다.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낭만의 거리 명동

 

명동이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떠오른 것은 일제강점기부터로, 그 중심에는 1936년 설립된 극장 '명치좌' 가 있었습니다. 명치좌는 해방 후 시공관으로 이름을 바꾸어 시립극장이 되었다가, 1957년 국립극장 명동예술회관으로 다시 개관했습니다. 국립극장을 중심으로 1960년대 명동은 문인과 예술인들의 거리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당시 명동의 명물은 다방들이었습니다. 다방은 문인과 예술인들의 살롱 역할을 했는데, 다방마다 모이는 사람들의 성격이 달랐습니다. '모나리자' 에는 문인들이, '금꿩다방' 에는 화가들이, '라이뿌룸' 에는 방송인, '은하수다방' 에는 연극인들이 모였습니다.

 

또 다른 명소로는 배우 최불암의 어머니 이명숙 여사가 운영했던 은성주점이 있었습니다. 소설가 이봉구를 비롯하여 시인 김수영, 작곡가 윤용하 같은 당대의 예술인들이 은성에 모였습니다,

 

 

 

 

 

 

 

일제시대 명치좌 (위)와 오늘날 명동예술극장 (아래)

 

 

 

 

명동의 명물이었던 다방들 (1945 ~ 1960)

 

 

 

 

박인환 기념관에 재현된 1960년대 명동거리

 

 

 

 

특히 소설가 이봉구는 명동과 은성주점을 사랑하여 '명동백작' 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습니다. 언제나 은성주점에 가면 그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에 아예 사람들은 이봉구에게 편지를 쓸 때 은성주점으로 보낼 정도였다고 합니다.

 

낭만의 거리 명동의 주제가라고 할 수 있는 노래 <세월이 가면> 역시 은성주점에서 태어났습니다. 30세로 요절한 박인환이 은성주점에서 즉석으로 지은 시가 노래로 만들어진 것이죠. <세월이 가면>은 이후 여러 차례 리메이크되면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2004년에는 EBS 문화사 시리즈의 제1편으로 1960년대 명동 문화예술인들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 《명동 백작》이 방영되었습니다. 이 드라마는 EBS 사상 최초로 시청률 1%를 돌파하며 많은 시청자들에게 그때 그 시절의 낭만을 추억하게 했습니다.

 

한편 국립극장은 1975년 폐관했다가 2009년 '명동예술극장' 으로 다시 태어나면서 명동문화예술의 명맥이 부활하게 됩니다.

 

 

 

 

 

 

 

박인환 기념관에 재현된 은성주점

 

 

 

 

2012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진행된 <명동 이야기> 포스터 (위) 및 전시풍경 (아래). <세월이 가면>의 가사를 메인 테마로 삼았습니다.

 

 

 

 

1961년의 《서울 안내 ㅡ 명동》 관광안내지도

 

 

 

 

 

 

 

1969년 신세계백화점 앞 명동 입구 풍경 (위)

같은 자리 현재 모습 (아래)

 

 

 

 

 

 

 

신앙과

민주화의 성지,

명동대성당

 

1882년, 천주교회는 조선 최초의 순교자였던 통역관 김범우의 집터를 포함한 명례방 종현 일대의 땅을 사들였습니다. 처음에는 신학생 교육을 위해 종현서당을 세우고 운영하다가, 1887년 주변 땅을 더 확보하여 성당을 짓기 위한 터 닦기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신자들은 한겨울의 큰 추위 속에도 자발적인 봉사로 터 닦기 작업에 니섰습니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이곳 인근에 역대 임금의 어진 (御眞)을 모신 영희전 (永禧殿)이 있는데다가 경복궁을 내려다 보는 곳이라 하여 제동을 걸었습니다. 몇 년간 이어진 정부와의 교섭에 청일전쟁, 최초 설계자인 코스트 신부의 사망이 겹쳐 명동성당은 1898년이 되어서야 완공되었습니다.

 

 

 

 

건축 중인 명동성당과 그 일대의 모습 (1894)

 

 

 

 

 

1898년 축성 지후 (위)와 현재의 명동성당 (아래)

주변은 바뀌었지만 성당만은 그대로입니다.

 

 

 

 

종현 언덕 위에 세워진 명동성당은 당시 서울에서 보기드문 서양식 건물이자 가장 높은 건물로 눈길을 끌었습니다. '이수일과 심순애' 로 유명한 《장한몽》 (1913)이나 이광수의 《무정》 (1917) 등 당대의 문학작품 속에서도 명동성당의 이국적인 풍경이 잘 묘사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1987년, 명동성당은 민주화운동의 성지가 되었습니다. 군사정권도 성당까지는 들어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해 2월, 명동성당에서는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한 박종철의 국민추도회가 개최되었고, 이를 계기로 민주화운동이 확산되었습니다. 이후에도 명동성당은 학생운동, 노동운동, 빈민운동 등 각종 사회운동의 거검 구실을 담당햇고, 1980 ~ 90년대 서울 도심에서 이루어진 시위는 대부분 명동성당 주변에서 벌어졌습니다.

 

 

 

 

명동성당 사도회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건물로,

명동성당에 앞서 1890년 완공되었습니다.

 

 

 

 

명동성당에서 개최된 박종철 추모대회 (1987)

 

 

 

 

명동과 중국의

130년 인연

 

1882년, 임오군란을 계기로 명동에 중국인들이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고종의 파병요청으로 청나라 장수 우장칭 (吳長慶)이 병사와 상인들을 인솔하고 서울에 온 것입니다. 이듬해 청나라는 지금의 중국대사관 자리에 중화회관 (상공회의소에 해당)과 상무공서 (영사관에 해당)를 세웠고, 그 주변으로 청나라 상인의점포들이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청나라 상무공서 건물은 1910년 강제병합 이후 일본인이 차지했지만, 1920년대 중국과 일본의 국교가 재개되면서 중국인 소유로 바뀝니다. 광복 후에는 중화민국이 건물을 지어 대사관으로 사용하다가, 1992년 한중수교 및 대만 단교에 따라 명동 부지는 중국 측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청나라, 일본, 대만, 중국을 거치는 중국대사관의 역사는 그대로 격동의 근대 동아시아사의 축소판입니다.

 

현재 중국대사관 주변으로는 한성화교소학교를 중심으로 중국요리짐, 중국물품판매점, 화교협회 등이 밀집해 있는데, 특히 개화, 도향촌, 산동교자, 중국서국 등 오래된 점토들이 자리하면서 중국적 정취를 더하고 있습니다.

 

 

 

 

임오군란 당시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는 구식 군대

 

 

 

 

현재 중국대사관의 모습.

청나라, 일본, 대만, 중국을 거친 이곳의 소유권은

격동의 근대 동아시아의 축소판입니다.

 

 

 

 

개화, 도향촌, 산동교자 등 명동의 오래된 중국 점포들

 

 

 

 

대한민국 관광의 중심,

명동 관광의 역사

 

1970년대 명동은 대중문화, 휴행과 오락, 금융 등 모든 면에서 서울의 중심지였습니다. 조영남, 윤형주, 송창식 등 통기타 가수들의 무대였던 오비스 캐빈 (OB's Cabin), 첨단 패션을 선도하고 있었던 최경자, 노라 노, 앙드레 김 등의 의상실에다 증권거래소와 60여 개의 증권사까지 밀집해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1974년부터는 관광진흥법으로 인해 오늘날과 같은 국제관광명소의 기틀을 잡기 시작했습니다. 신세계, 미도파 두 백화점이 외국인 전용 관광백화점으로 지정되면서 명동은 관광객을 위한 쇼핑 중심지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1980년대 들어서 한국관광에 대한 해외의 관심이 더욱 커졌습니다. 특히 일본에서는 86 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통해 한국을 찾는 관광객들이 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겨울연가》와 함께 한류 붐이 일면서 많은 일본인 관광객들이 지금까지 꾸준히 명동을 찾고 있습니다.

 

 

 

 

1970년대 오비스 캐빈의 라이브 감상공간 코스모스 룸 광고지

 

 

 

 

1970년대 미도파 백화점 (위)과 현재의 롯데 영 플라자 (아래)

 

 

 

 

1966년의 신세계백화점 (위)과 현재의 모습 (아래)

 

 

 

 

오늘날 명동을 가장 많이 찾는 유커, 즉 중국 관광객들의 시작은 19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92년의 한중수교, 1998년에는 중국의 해외여행 자유화 국가로 한국이 지정되어 방한 중국인들의 숫자가 크게 늘어났습니다.

 

2000년대 이후에는 우리나라 드라마와 가요들이 아시아 전역에서 큰 인기를 얻으면서 많은 관광객들이 명동을 찾고 있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 명동은 화장품 가게들이 줄지어 들어서며 패션과 뷰티의 거리로 바뀌었습니다. 명동 방문객 가운데 절반 정도가 외국인인 만큼 화장품 가게들은 한류 마케팅으로 손님을 끌고 있습니다. 가게 앞에는 한류 스타들의 포스터가 간판보다 크게 붙어 있어 포스터와 촬영하는 외국인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50여 년의 시간을 거쳐, 대한민국 대표 번화가 명동은 쇼핑관광 중심지이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관광명소 1번지로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1960년대의 명동.

50년의 시간 동안 대한민국 대표 번화가의 명성을 지키고 있습니다.

 

 

 

 

화장품 거리로 변모한 명동의 현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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