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서울순례길]
교회와 시민사회의 각별한 관심 아래 순례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아왔던 ‘천주교 서울 순례길’ 이 2018년 9월 14일, 아시아 최초 교황청 승인 국제 순례지로 선포되었습니다. 많은 순례자 여러분의 지속적인 방문과 관심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는 천주교 서울 순례길의 교황청 국제 순례지 승인을 위해 2015년부터 각 성지의 정관을 새로이 정비하고, 관련 문화 기반시설 확충, 콘텐츠 제작 및 한국 천주교회 유물의 역사적 고증과 그에 따른 학술, 문화행사 개최 등의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순례길 속 순교자들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국제 순례지 ‘천주교 서울 순례길’ 이 신자들만의 순례길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문화 유산이자 나아가 아시아와 세계인 모두의 순례길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교황청 공식 순례길 선포식
국제순례지란?
교회법에서 정하는 순례지에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교구에서 승인하는 교구순례지, 주교회의의 승인으로 정해지는 국가 순례지, 그리고 성좌, 즉 교황청의 승인을 얻어야만 하는 국제 순례지가 그것입니다.
(교회법 제 1231조, 1232조 1항 참조)
2018년 9월 14일 교황청 승인 국제순례지로 선포된 천주교 서울 순례길은이 중 국제 순례지에 해당합니다.
추진경과
2013. 9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 '서울대교구 성지순례길' 선포
한국주교회의 '서울대교구 성지순례길' 국가순례지 승인
2017. 6
교황청에 국제순례지 지정 요청
2018. 4
한국주교회의 '순례지 선포 공동 희망 서신' 발송, 국제순례지 지정 요청
2018. 7
교황청 새복음화 촉진평의회에 성지정관 및 해설 제출
2018. 9. 14
교황청 특사 (새복음화촉진평의회 Rino Fisichella 대주교) 방한,
교황청 승인 국제순례지 선포식 개최
교황청 공식 순례길 선포식
천주교 서울 순례길 코스안내
1코스 말씀의 길
한국 천주교의 시작은 어땠을까요?
‘말씀의 길’을 따르다 보면 이 질문의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길은 한국 최초의 희생자로 기록된 김범우의 집터와 천주교 세례식이 처음으로 거행된 이벽의 집터를 둘러보며 시작하는 길입니다. ‘말씀의 길’ 은 한국 천주교회가 이처럼 전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자발적으로 복음 말씀을 받아들인 평신도 신앙 공동체라는 의미를 되새기며 붙여진 이름입니다. 또한 최초의 외국인 사제인 ‘주문모 신부’가 성수로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석정보름우물과 그의 활동지로 알려진 계동 일대의 가회동성당을 둘러보며, 타지에서 순교를 택한 그의 희생은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거리 : 8.7㎞
소요시간 : 3시간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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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길_ 코스소개
① 명동대성당
문의처 : 명동대성당
전화번호 : 02ㅡ774ㅡ1784
홈페이지 : http://www.mdsd.or.kr
명동대성당
사순 시기 고해성사 사순절의 시작인 재의 수요일부터 보신 고해성사는 부활 판공성사로 간주됩니다.
www.mdsd.or.kr
위치 : 서울시 중구 명동길 74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 대성당은 한국 천주교회의 상징이자 최초의 본당으로 한국 교회 신앙 공동체가 처음으로 탄생한 곳이며, 여러 순교자의 유해가 모셔진 곳이다.
한국 천주교회는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이후 이승훈, 정약전 · 약종 · 약용 삼형제, 권일신 형제 등이 이벽을 지도자로 삼아 종교 집회를 가짐으로써 시작되었다. 그 이듬해, 명례방에 살던 통역관 김범우는 이들의 영향을 받아 천주교에 입교하고, 자신의 집에서 교회 예절과 교리 강좌를 열었는데 이로써 명례방 공동체가 탄생하였다. 성당 설계와 공사의 지휘 감독은 코스트 신부가 맡았으며 1898년 5월 성령강림대축일에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봉헌식을 하면서 기해박해와 병인박해 때 믿음을 지킨 순교자의 유해를 받아 지하 성당에 모셨다.
현재 지하 묘역에는 앵베르 범 주교와 샤스탕 정 신부, 모방 나 신부의 유해 일부, 김성우 안토니오, 최경환 프란치스코 등 다섯 성인의 유해가 모셔져 있으며,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의 유해와 기해박해의 이 에메렌시아와 무명 순교자 한 분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 서울대교구 역사관
운영시간 : 화요일 ~ 일요일 09 : 00 ~ 17 : 00
위치 : 서울시 중구 명동길 74 사도회관 (서울대교구청 본관 건물 앞 벽돌건물)
※ 도슨트 설명 가능
② 김범우의 집터 (장악원 터)
위치 : 서울시 중구 을지로 66
한국 천주교회 창설 직후 명례방에 있던 김범우의 집에서 신앙 공동체인 ‘명례방 공동체’ 가 탄생하였다. 당시 이곳에 모인 신자들은 이승훈과 이벽을 비롯하여 권일신, 정약용, 최인길, 지황 등이었다. 또 김범우는 집주인으로서 신자들에게 ‘천주실의’, ‘칠극’ 과 같은 교회 서적을 보관하고 있다가 빌려주면서 교리를 전파하였다. 1785년 봄 명례방 집회에 모인 이승훈, 이벽, 정약용, 권일신, 권철신 등이 형조의 관리들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었는데, 이 사건을 ‘명례방 사건’, 또는 ‘을사 추조 적발 사건’ 이라 한다. 중인 (中人) 김범우는 가혹한 형벌을 받고 지방으로 도배 (徒配 : ‘도형정배’ 의 준말로 일정한 장소에 보내어 노역을 시킴)되어 그곳에서 고문의 여독으로 1786년 선종하였다. 현재 명례방을 알리는 표석은 없지만, 중구 을지로 66 KEB 하나은행 본점 앞 장악원 터 표석 앞쪽을 김범우의 집터로 보고 있다.
③ 한국 천주교회 창립 터
위치 : 서울시 종로구 청계천로 105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영세자인 이승훈은 북경 북당 (北堂)에서 예수회 선교사 그라몽 신부에게 1784년 2월경 ‘베드로’ 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고 귀국하여 그해 음력 9월 서울 수표교 부근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이벽 (요한 세례자)과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정약용 (요한) 등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벽은 다시 최창현 (요한), 최인길 (마티아), 김종교 (프란치스코) 등에게 세례를 베풀어 신자 공동체를 만듦으로써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되었다. 교회는 세례를 통하여 결속된 복음 선포 기능을 수행하는 신앙 공동체이기 때문에, 이 세례를 통해서 우리나라 천주교 첫 신앙 공동체가 출발하게 되었다.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는 2011년 8월 28일 ‘한국 천주교회 창립 터’ 기념 표석을 세우고, 이어 9월 26일 정진석 추기경의 주례로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이벽의 집은 수표교 남쪽, 현재 기념 표석이 있는 자리에서 청계천 건너편으로 추정되지만 마땅한 자리가 없어 이곳에 설치하였다. 2016년 10월 서울시가 고시한 도시 환경 정비 계획에 따라 앞으로 수표교 남쪽 이벽의 집터는 역사 공원으로 조성될 예정이다.
④ 좌포도청터
위치 : 서울시 종로구 돈화문로 28 종로3가 치안센터 앞
좌포도청은 한성부 정선방 파자교 동북쪽 (현 종로구 단성사 일대)에 위치하여 조선 시대 서울 동 · 남 · 중부와 경기좌도를 관할하였으며, 중종 무렵 설치되어 고종 31년 (1894년) 7월 경무청으로 개편될 때까지 존속되었다.
포도청에서 천주교 박해에 개입한 것은 1795년 북산 사건으로 발생한 을묘박해 때가 최초였다. 박해 시기 수많은 신자들이 좌 · 우포도청에서 순교하였으나, 기록상 좌 · 우포도청이 분명하게 구분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103위 성인 가운데 22명, 124위 복자 가운데 5명이 포도청에서 순교하였다. 기록상 명확하게 좌포도청에서 순교한 성인으로는 최경환 프란치스코, 유대철 베드로, 민극가 스테파노, 허임 바오로, 남경문 베드로, 임치백 요셉 성인이 있다. 복자 가운데에는 1795년 을묘박해 때 윤유일 바오로, 지황 사바, 최인길 마티아가 좌포도청으로 끌려와 혹독한 매를 맞고 순교하였다.
또한 기해박해 때 103위 성인 가운데 70명이 포도청에서 온갖 문초와 형벌을 받았는데, 정하상 바오로,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주교, 모방 나 베드로 신부, 샤스탕 정 야고보 신부가 형장으로 끌려가기 전 마지막까지 이곳에서 신앙을 증언하였다.
⑤ 종로성지성당
문의처 : 종로성지성당
홈페이지 : http://jongnocc.com
http://jongnocc.com
jongnocc.com
위치 : 서울시 종로구 동순라길 8
종로성당은 서울의 중요한 순교 터이자 최대의 신앙 증언 터였던 좌 · 우 포도청과 의금부, 형조, 전옥서 등의 관아들이 있던 곳을 관할하기 때문에 2013년 2월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이 ‘포도청 순례지 성당’ 으로 승인하였다.
좌 · 우포도청에서 103위 성인 가운데 최경환 프란치스코, 유대철 베드로를 포함한 22명의 성인이, 전옥서에서 이호영 베드로와 김 바르바라 등 2명의 성인이 순교하였다. 포도청에서는 성 앵베르 주교, 성 모방 신부, 성 샤스탕 신부가 형장으로 끌려가기 전 온갖 문초와 형벌을 받았고, 124위 복자 가운데 윤유일 바오로, 지황 사바, 최인길 마티아를 포함한 5명의 복자가 순교하였다. 또한 포도청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마지막으로 신앙을 증언하고 밤을 보낸 곳이기도 하였다. 성당 내에는 좌 · 우포도청 (옥 터)에서 일어난 한국천주교회의 역사적인 사건과 의미를 일깨우고 선조들의 신앙 모범을 따르기 위하여 순교자 현양관을 설치, 운영하고 있다. 현양관에서는 포도청에서 순교한 순교자들에 관한 기록물들과 포도청에서 신앙을 증언하다가 다른 처형지에서 순교한 증거자들에 관한 정보를 전시하고, 포도청 (옥 터) 순례 길을 안내하고 있다.
⑥ 광희문 성지
문의처 : 광희문 순교자 현양관
전화번호 : 02ㅡ2234ㅡ1456
위치 : 서울시 중구 퇴계로 348
광희문은 서울 성곽의 사소문 (四小門 : 홍화문, 광희문, 소덕문, 창의문으로 사대문 사이에 세웠던 문) 중에 동남 방향에 있는 성문으로, 장충단에서 한강 사이의 남소문 (南小門)이 없어진 뒤 북쪽의 수구문 (水口門)을 일컬어 광희문이라고 불렀다. 본디 수구문은 서소문과 함께 도성 안의 시체를 성 밖으로 운반해 내던 곳으로 송장 또는 시체의 문이라는 뜻에서 시구문 (屍口門)이라고도 불렀다. 서울과 수원, 용인 등 인근 지역의 교우들이 도성 안으로 끌려 들어왔고 가혹한 고문 속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다가 끝내 이를 거부함으로써 치명의 길을 가야 했다. 도성 안에서 참수 치명한 순교자들의 시신은 짐짝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광희문 밖에 내다 버려졌으니 실로 생 (生)과 사 (死)의 갈림길이었다. 살아서 이 문을 들어섰던 이들은 나중에는 시체가 되어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 채 이 문을 나와야 했다.
1396년에 지어진 광희문은 6 · 25 전쟁으로 문루와 성문 위 여장이 파괴되었다가 1976년 고증을 거쳐 복원되었는데, 도로를 개통하면서 원래 위치에서 약간 남쪽으로 옮겨졌다. 광희문과 함께 대표적인 시구문으로는 남한산성의 수구문이 있다.
⑦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문의처 :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총무팀
전화번호 : 02ㅡ740ㅡ9714
홈페이지 : http://songsin.catholic.ac.kr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신학과 철학 연구를 통해 시대적 표징을 가톨릭 정신으로 조명하여 현대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더불어 교회와 사회의 공동선에 기여하는 균형 잡힌 인재를 양성합니다
songsin.catholic.ac.kr
위치 : 서울시 종로구 창경궁로 296ㅡ12
가톨릭 대학교 성신교정 성당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본토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유해 일부가 모셔져, 오늘도 그를 본받아 이 땅의 참된 목자가 되려는 신학도들의 모든 삶에 함께하고 있다. 가톨릭 대학교 신학 대학의 효시는 183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선교사들은 정하상과 소년들에게 국내에서 신학 교육을 시키는 한편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등을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는데 그중 김대건과 최양업만이 사제품을 받고 귀국해 활동하다가 순교하였다. 그 후 1855년 배론에 성 요셉 신학당이 세워져 신학 교육을 시작했으나 1866년 병인박해로 폐쇄되었고, 1885년 강원도 여주군 강천면 범골 (부엉골)에서 현 가톨릭 신학 대학의 직접적인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예수 성심 신학교가 문을 엶으로써 최초로 국내 신학교의 설립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2년 뒤인 1887년에 신학교는 서울 용산 함벽정 (현 원효로 4가)으로 이전하였다.
1942년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는 일제에 의해 강제로 문을 닫게 되었다가 1945년 경성 천주 공교 신학교로 개칭하여 다시 설립되고, 그 후 성신 대학이라는 명칭을 거쳐 지금에 이른다.
⑧ 석정보름우물
위치 : 서울시 종로구 계동길 110
북촌에 있는 오래된 우물은 물맛이 좋아 궁궐에서도 사용하던 곳이라고 한다. 돌로 만들어진 이 특이한 우물은 15일 동안은 맑고 15일 동안은 흐려지곤 했기 때문에 보름우물이라 불렸다.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인 신부인 주문모 신부가 1801년 새남터에서 순교하기 전까지 계동 최인길 마티아 집에 숨어 지내면서 선교활동을 할 당시 이 우물물로 세례를 준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1845년 한국인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도 이 지역에서의 짧은 사목 기간 동안 이 물을 성수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⑨ 가회동성당
문의처 : 02ㅡ763ㅡ1570
홈페이지 : http://gahoe.or.kr
가회동성당
한국 천주교의 첫미사가 봉헌된 곳, 성지 가회동입니다.
gahoe.or.kr
위치 : 서울시 종로구 북촌로 57
가회동 성당은 한국 천주교 최초의 선교사인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1794년 조선에 밀입국하여 1795년 4월 5일 예수 부활 대축일에 최인길 마티아의 집에서(한국 땅에서) 첫 미사를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성당이다. 주문모 신부는 1801년 신유박해로 순교할 때까지 북촌에 있던 강완숙 골롬바의 집에 머물면서 미사와 고해성사를 집전하며 사목 활동을 하였다. 가회동은 주문모 신부의 사목 활동 거점으로서 한국 초기 교회의 신앙 중심지였다.
1955년 8월 9일, 병인박해를 일으켰던 흥선 대원군의 손자이자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 이강이 가회동 성당의 관할 구역인 안국동 별궁에서 임종 1주일 전에 세례받기를 원하여, 당시 보좌 신부였던 박병윤 신부에게 ‘비오’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는 자기의 선조가 천주교를 탄압하여 피로 물들인 점을 자손의 한 사람으로 속죄하고 싶었다고 입교 동기를 밝혔다. 의친왕 이강이 죽기 이틀 전인 15일에는 의친왕비 김숙 여사도 가회동 성당에서 ‘마리아’란 세례명으로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황족이 세례받았다는 역사적 사실은 순교 신앙의 승리를 입증한 것이다.
2코스 생명의 길
천주교 박해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길로, 순교자들이 순교하러 가는 길임과 동시에 영원한 생명을 얻으러 가는 길이기에 ‘생명의 길’ 이라 부릅니다.
조선 왕조는 임금의 명령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우선시하는 천주교를 사학으로 규정하고 여러 차례의 박해를 가했습니다. 이러한 박해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생명의 길’은 특히 가장 많은 신자가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던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를 포함하고 있어 그 의미가 더욱 깊습니다.
순교는 신앙에 대한 최상의 증거로, 순교자들은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에 대한 굳건한 믿음과 희망으로 자신의 목숨을 바치며 고귀한 진리를 찾았습니다. 이 길은 박해 시기 주요 관청 터와 형장을 잇는 길로, 순교자들이 순교하러 가는 길이었지만 동시에 영원한 생명을 얻으러 가는 길이었기에 ‘생명의 길’ 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지금은 그 형태를 볼 순 없지만, 이 길 위에서 이루어졌던 천주교 박해의 역사를 생각해보고 순교자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가치는 무엇이었을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거리 : 5.9㎞
소요시간 : 2시간 30분
생명의 길_ 경로안내
생명의 길_ 상세보기
① 가회동성당
문의처 : 02ㅡ763ㅡ1570
홈페이지 : http://gahoe.or.kr
가회동성당
한국 천주교의 첫미사가 봉헌된 곳, 성지 가회동입니다.
gahoe.or.kr
위치 : 서울시 종로구 북촌로 57
가회동 성당은 한국 천주교 최초의 선교사인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1794년 조선에 밀입국하여 1795년 4월 5일 예수 부활 대축일에 최인길 마티아의 집에서(한국 땅에서) 첫 미사를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성당이다. 주문모 신부는 1801년 신유박해로 순교할 때까지 북촌에 있던 강완숙 골롬바의 집에 머물면서 미사와 고해성사를 집전하며 사목 활동을 하였다. 가회동은 주문모 신부의 사목 활동 거점으로서 한국 초기 교회의 신앙 중심지였다.
1955년 8월 9일, 병인박해를 일으켰던 흥선 대원군의 손자이자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 이강이 가회동 성당의 관할 구역인 안국동 별궁에서 임종 1주일 전에 세례받기를 원하여, 당시 보좌 신부였던 박병윤 신부에게 ‘비오’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는 자기의 선조가 천주교를 탄압하여 피로 물들인 점을 자손의 한 사람으로 속죄하고 싶었다고 입교 동기를 밝혔다. 의친왕 이강이 죽기 이틀 전인 15일에는 의친왕비 김숙 여사도 가회동 성당에서 ‘마리아’란 세례명으로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황족이 세례받았다는 역사적 사실은 순교 신앙의 승리를 입증한 것이다.
② 광화문 시복터
위치 : 서울시 종로구 세종로 광화문 광장 북측 광장 바닥 돌 (124위 시복식 제단 위치)
광화문 광장은 조선 시대 의금부, 포도청, 서소문 형장 등 한국 교회 순교자들이 목숨을 바친 장소들과 가까운 곳이다.
2014년 8월 16일, 한국천주교회사에 길이 남을 역사적 순간인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식이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거행되었다. 보통 시복 미사는 교황청 시성성 장관이 교황을 대리하여 거행하는데,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순교자의 땅 한국에 와서 직접 시복 미사를 집전하였다. 하느님의 종 124위 시복식은 한국천주교회 역사상 세 번째로 열린 시복식이었다. 2015년 8월, 124위 복자 시복 1주년을 기념하여 표석 (바닥 돌)을 설치하였다.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는 8월 23일 오전 광화문 북측 광장에서 교구장 염수정 추기경 주례로 조규만, 정순택, 손희송 주교와 사제단이 ‘한국 천주교 순교자 124위 시복 터’ (기념 표석)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기념 표석에는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2014년 8월 16일 이곳에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복자 반열에 올려 이를 온 세상에 선포하신 것을 기리고자 이 돌을 놓습니다.” 라는 문구가 한글과 영어, 중국어, 스페인어로 새겨져 있다.
③ 형조 터
위치 : 서울시 종로구 세종대로 175 세종문화회관 앞 바닥 돌
형조는 조선 시대 중앙 관서인 육조 (六曹)의 하나이다. ‘추관’ 또는 ‘추조’ 라고도 하였으며, 사헌부, 한성부와 아울러 ‘삼법사’ (三法司)라 부르기도 하였다. 형조는 한성부 서쪽 적선방에 있었는데, 한국천주교회가 창설된 이후, 많은 천주교인들이 이곳으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았다. 그 시작은 정조 9년 (1785년)에 발생한 ‘을사 추조 적발 사건’ 으로, 명례방에 있던 김범우 토마스의 집에서 신자들이 집회를 하는 중에, 금리 (禁吏)들에게 발각되어 형조로 압송된 사건이었다. 이후 1801년 신유박해 때 최필공 토마스, 최필제 베드로, 윤운혜 루치아, 정철상 가롤로 등이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고, 김천애 안드레아,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윤지헌 프란치스코 등은 전주에서 서울로 압송되어 신문을 받았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이광헌 아우구스티노, 남명혁 다미아노, 김효임 골룸바, 김효주 아녜스,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 등이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으며,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전장운 요한, 최형 베드로 성인 등도 형조를 거쳐 갔다. 형조 터는 세종로 세종 문화 회관 앞 버스 정류장 바닥에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에서 설치한 바닥돌이 매립된 자리이다.
④ 의금부 터
위치 : 서울시 종로구 종로 47 SC제일은행 본점 앞
의금부는 조선 시대 왕명을 받들어 죄인을 추국하는 일을 맡아 보던 관청으로 금부, 금오, 왕부라 부르기도 하였다. 박해 시기, 천주교 신자들은 서울의 좌 · 우포도청과 지방의 각 진영과 군, 현에서 문초를 받았다. 그들 가운데 중죄인, 곧 주교와 신부, 평신도 지도자들은 국왕의 명령에 따라 의금부로 압송되어 국문을 받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 권철신 암브로시오가 순교한 이래, 많은 천주교 선교사와 지도층 신자들이 이곳에서 신앙을 증언하였다. 이승훈 베드로와 주문모 야고보 신부, 최창현 요한 회장도 의금부에서 문초를 당하였고, 성 라우렌시오 범 앵베르 주교, 성 베드로 나 모방 신부, 성 야고보 정 샤스탕 신부, 성 정하상 바오로 등 성직자와 교회 지도자들이 의금부에서 혹독한 국문과 문초를 받았다.
1866년 병인박해 때에도 베르뇌 장 시메온 주교, 브르트니에르 백 유스토 신부, 도리 김 베드로 신부, 볼리외 서 루도비코 신부와 전장운 요한, 최형 베드로, 정의배 마르코 성인이 의금부에서 문초를 당하면서도 꿋꿋이 신앙을 지켰다.
⑤ 전옥서 터
위치 : 서울시 종로구 종로1가 지하철 1호선 종각역 6번 출구 화단
전옥서는 형조 아래에서 감옥과 죄수를 관리하던 관서였다. 박해 시기 많은 천주교인들이 형조로 이송되어 심문을 받고, 형이 집행되기 전까지 전옥서에 구금되었다.
103위 성인 가운데 전옥서에서 순교한 성인은 이호영 베드로와 김 바르바라이다. 이호영 베드로 성인은 이소사 아가타 성녀의 동생으로, 1835년 이소사와 함께 체포되어 1839년까지 4년 동안 혹독한 옥살이로 얻은 병으로 순교하였다. 김 바르바라 성녀도 포도청으로 끌려가 심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으나 용감히 신앙을 고백하였고, 전옥서에서 3개월 동안 옥살이를 하면서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순교하였다.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인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도 의금부에서 형조로 이송되어 처형될 때까지 전옥서에 구금되었다. 형조 아래의 감옥인 전옥서는 1785년 명례방 사건 (을사 추조 적발사건) 때 김범우 토마스가 형조에 끌려가 신앙을 증언한 이래, 많은 신자들이 신앙을 고백하고 순교한 장소이다.
⑥ 우포도청 터
위치 : 서울시 종로구 종로 6 광화문 우체국 앞 화단
우포도청은 조선 중종 무렵 설치되어 1894년까지 350여 년 동안 존속한 서울의 포도, 순라 기관으로 중부 서린방 혜정교 남쪽 인근 (현 광화문 우체국 자리)에 위치하였으며, 서울 서부, 북부와 경기 우도 등을 담당하였다.
103위 성인 중 22위, 124위 복자 중 5위가 포도청에서 순교하였는데, 기록상 분명히 우포도청에서 순교한 성인으로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열세 살의 어린 나이로 순교의 영광을 얻은 유대철 베드로 성인이 있으며, 병오박해 때 한이형 라우렌시오, 우술임 수산나, 김임이 데레사, 이간난 아가타, 정철염 가타리나가 우포도청에서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다가 혹독한 매질 아래 순교하였다. ‘기해일기’ 를 쓴 현석문 가롤로 성인도 우포도청에 갇혔는데, 신자들을 위로하고 순교로 나아갈 수 있도록 권면하였다. 특히 우포도청은 한국천주교회의 마지막 순교자들을 탄생시킨 장소이다. 1879년 드게트 신부와 함께 체포되어 우포도청에 수감되었던 이병교 레오, 김덕빈 바오로, 이용헌 이시도로가 이곳에서 아사하여 한국천주교회의 마지막 순교자가 되었다.
⑦ 경기감영 터
위치 : 서울시 종로구 평동 234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3번 출구 왼편 화단)
박해로 숨어서 천주를 믿어야 했음에도, 점점 확산되어 가던 경기 지역의 신앙 공동체는 1801년 신유박해로 큰 타격을 입었다. 잡혀 온 경기 지역의 신자들은 한성 서대문 밖 반송방에 위치한 경기 감영으로 이송되어 혹독한 형벌과 문초를 받았다. 특히 가난하고 몸이 부실하며 배움도 부족했던 조용삼은,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에게 신앙을 배우며 따르다가 체포되어 11개월 동안 옥에 갇혔다. 옥중에서 ‘베드로’ 라는 세례명으로 대세를 받았다. 1801년 2월에 다시 감사 앞으로 끌려나가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형벌을 받았는데, 약해진 몸은 더 이상의 형벌을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다시 옥에 갇힌지 며칠 지난 3월 27일에 숨을 거두었다. 그는 마지막 형벌 때에 박해자들을 향해 이렇게 신앙을 고백하고 순교의 길을 걸었다. “하늘에는 두 명의 주인이 없고, 사람에게는 두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천주를 위해 한 번 죽는 것뿐이며, 다른 말씀은 드릴 것이 없습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조용삼 베드로를 시복하였다.
⑧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
문의처 :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전화번호 : 02ㅡ3147ㅡ2401
위치 : 서울시 중구 칠패로 5
서소문 밖 네거리 성지는 조선 시대 공식 사형 집행장으로, 사직단 서쪽에 처형장을 두어야 한다는 ‘예기’ 의 가르침과 최종 사형 판결을 내리는 형조나 의금부와 그리 멀지 않다는 편의성, 그리고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칠패 시장’ 이 있어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대부분의 처형이 이루어지던 곳이다.
1801년 신유박해 이래 이곳에서 순교한 신자들은 신원이 확인된 이만도 100여 명이 된다. 이 가운데 44위가 시성 되어 단일 순교지로는 성인을 가장 많이 배출한 곳이다. 대표적인 인물로 정하상 바오로와 김효임 골룸바, 김효주 아녜스 성인 등이 있다. 또한 2014년 시복된 순교복자 124위 가운데 27위가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하였다. 한국 교회는 현재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순교자의 시복을 추진 중에 있다. ‘하느님의 종’ 133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세례자인 이승훈 베드로와, 신유박해 때 ‘백서’ 를 작성한 황사영 알렉시오를 비롯하여 서소문 순교자 6위가 포함되어 있다. 또한 서소문 밖 네거리 성지를 내려다보는 언덕에 한국 최초의 서양식 벽돌 교회 건축물로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사적 제252호), 중림동 약현성당이 서소문 성지 기념 성당으로 자리하고 있다.
예약: https://booking.naver.com/booking/6/bizes/237043/items/3065342
-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운영시간 : 화요일 ~ 일요일 09 : 30 ~ 17 : 30
위치 : 서울시 중구 칠패로 5
⑨ 중림동 약현성당
전화번호 : 02ㅡ362ㅡ1891
홈페이지 : http://www.yakhyeon.or.kr
중림동 약현성당
설 합동위령미사 안내 1월 29일(수)은 우리 민족고유의 명절인 ‘설’입니다. 조상을 위한 합동위령미사가 봉헌되며 연도는 미사 3…
www.yakhyeon.or.kr
위치 : 서울시 중구 청파로 447ㅡ1
중림동 약현성당은 한국천주교회에서 신앙의 자유가 인정된 이후 100년의 역사를 대변하는 성당이며, 한국천주교회를 태동시키고 이끌어 온 순교 성인들 가운데 44명의 성인이 탄생한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 주변에 세워진 성지 순례 기념 성당이다. 성당 근처에 이승훈 베드로의 집이 있었고, 신유 · 기해 · 병인 박해 때 많은 신자들이 이곳과 가까운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으므로 이 자리에 성당을 세웠다.
1991년 김수환 추기경이 주례한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 축복식에서 약현성당이 서소문 성지 순례 기념 성당임을 공식 선언하였다. 이를 통해 무관심에 방치되어 있던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는 새로운 관심과 기대 속에 성지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중림동 약현성당은 순교자들을 더욱 현양할 수 있는 성지 순례 기념 성당으로서 면모를 갖출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991년 본당 설정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본당 안에 서소문 성지 순례자들을 위한 서소문 순교자 기념관을 세웠다. 이곳에 마련된 기념 성당과 전시실에는 성인들의 유해와 함께 선조들이 사용하던 유품, 교리서와 성서를 비롯한 다양한 교회 출판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3코스 일치의 길
서울의 대표적인 순교성지들을 잇는 이 길은, 순례자들 모두가 순교자들의 신앙을 본받고 실천하자는 취지로 ‘일치의 길’ 이라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한국에서 세 번째로 많은 순교성인을 배출한 당고개 순교성지, 첫 외국인 선교 사제 복자 주문모 야고보 신부와 첫 한국인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순교한 새남터 순교성지를 지나 한강을 마주합니다. 한강 변을 따라 많은 순교자의 목이 잘려나간 절두산 순교성지를 지나면, 이 길은 순교자들이 매장되었던 노고산, 왜고개, 삼성산 성지로 이어집니다.
순교자들의 자취가 남아있는 성지들을 순례하는 여정을 통해 진정으로 순교자들의 신앙을 본받고 실천하는 모습은 무엇일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거리 : 29.5㎞
소요시간 : 7시간 20분
일치의 길_ 경로안내
일치의 길_ 상세보기
일치의 길_ 코스소개
① 중림동 약현성당
전화번호 : 02ㅡ362ㅡ1891
홈페이지 : http://www.yakhyeon.or.kr
중림동 약현성당
설 합동위령미사 안내 1월 29일(수)은 우리 민족고유의 명절인 ‘설’입니다. 조상을 위한 합동위령미사가 봉헌되며 연도는 미사 3…
www.yakhyeon.or.kr
위치 : 서울시 중구 청파로 447ㅡ1
중림동 약현성당은 한국천주교회에서 신앙의 자유가 인정된 이후 100년의 역사를 대변하는 성당이며, 한국천주교회를 태동시키고 이끌어 온 순교 성인들 가운데 44명의 성인이 탄생한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 주변에 세워진 성지 순례 기념 성당이다. 성당 근처에 이승훈 베드로의 집이 있었고, 신유·기해·병인 박해 때 많은 신자들이 이곳과 가까운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으므로 이 자리에 성당을 세웠다.
1991년 김수환 추기경이 주례한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 축복식에서 약현성당이 서소문 성지 순례 기념 성당임을 공식 선언하였다. 이를 통해 무관심에 방치되어 있던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는 새로운 관심과 기대 속에 성지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중림동 약현성당은 순교자들을 더욱 현양할 수 있는 성지 순례 기념 성당으로서 면모를 갖출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991년 본당 설정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본당 안에 서소문 성지 순례자들을 위한 서소문 순교자 기념관을 세웠다. 이곳에 마련된 기념 성당과 전시실에는 성인들의 유해와 함께 선조들이 사용하던 유품, 교리서와 성서를 비롯한 다양한 교회 출판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② 당고개 순교성지
전화번호 : 02ㅡ711ㅡ0933
홈페이지 : http://www.danggogae.org
당고개(용산) 순교성지
서울특별시 용산구 신계동에 있는 한국 로마 가톨릭교회의 순교 성지
www.danggogae.org
위치 : 서울시 용산구 청파로 139ㅡ26 (신계동 56)
용산 당고개 (堂峴)는 1839년 (헌종5년, 기해박해) 12월 27 ㅡ 28일 (음) 이틀간 10명의 교우들이 순교했던 곳이다. 당시 설을 앞두고 대목장에 방해받지 않으려는 상인들의 요청으로, 서소문 밖에서 한강 가로 나아간 이곳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27일에는 박종원 아우구스티노, 홍병주 베드로, 권진이 아가타, 이경이 아가타, 손소벽 막달레나, 이인덕 마리아, 최양업 신부의 모친 이성례 마리아 7명이, 다음날에는 홍영주 바오로, 최영이 바르바라, 이문우 요한 3명이 순교하였다.
한편, 증언에 따르면 1846년 9월 16일 (헌종 12년, 병오박해) 최초의 조선인 사제 김대건 신부가 새남터로 향한 참수 길에 잠시 쉬어 갔던 곳이기도 하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0명의 순교자 중 9명을 1984년 5월 6일에 시성 하였다. 어린 자식들 때문에 한때 마음이 약해져 배교했던 이성례는, 뒤늦게 프란치스코 교황에게서 2014년 8월 16일 시복되었다. 1986년 순교 기념비가 세워져 성지로 조성되었으나, 2008년 아파트 건립 공사로 기념비는 철거되었고, 주변이 정리된 2011년, 신계 역사공원 내에 ‘찔레꽃 아픔과 매화꽃 향기 가득 찬 어머니 성지’ 로 새롭게 단장되었다.
③ 새남터 순교성지
전화번호 : 02ㅡ716ㅡ1791
홈페이지 : http://www.saenamteo.or.kr
새남터 성당 – 천주교 순교성지 새남터 기념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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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enamteo.or.kr
위치 : 서울시 용산구 이촌로 80ㅡ8
새남터 순교성지는 한국 교회 역사상 순교한 성직자 열네 명 가운데 열한 명이 순교한 곳으로 이 가운데 여덟 명과 교회 지도자급 평신도 세 명이 성인 반열에 오른 한국의 대표적인 순교성지이다. 이곳에 순교의 피가 뿌려지기 시작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치명한 중국인 복자 주문모 야고보 신부부터이다. 주 신부가 입국한 지 6년만인 1801년 (신유박해), 자신 때문에 많은 희생자가 생기자 주 신부는 자진해서 의금부로 나섰고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 때에는 조선 제2대 교구장 성 라우렌시오 앵베르 범 주교와 성 베드로 모방 나 신부, 성 야고보 샤스탕 정 신부가, 7년 뒤인 1846년 병오박해에는 한국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기해일기’ 를 작성한 현석문 가롤로가 이곳에서 참수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베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 볼리외, 도리, 푸르티에, 프티니콜라 신부 등 6명의 사제가 순교하였다.
새남터가 다른 성지와 다른 점은 사제들의 순교지라는 것이며, 한국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성인이 군문효수형을 당한 바로 그 장소라는 의미에서 한국천주교회에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곳이다.
④ 절두산 순교성지
문의처 : 절두산 순교성지
전화번호 : 02ㅡ3142ㅡ4434
홈페이지 : http://www.jeoldusan.or.kr
절두산 순교성지
절두산 순교성지
www.jeoldusan.or.kr
위치 : 서울 마포구 토정로 6
절두산(切頭山)은 예로부터 가을두(加乙頭), 잠두봉(蠶頭峯), 용두봉(龍頭峰) 등으로 불리어 왔다.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을 통과해 서울 근교까지 침범해 오자 대원군은 서양 오랑캐들로 더럽혀진 한강을 천주교인들의 피로 씻겠다며 이곳에서 수많은 교인들의 목을 잘라 죽이는데(병인박해) 그때부터 이곳의 지명을 절두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국천주교회에서는 1966년 병인박해 순교 100주년을 기념해서 절두산에 기념관을 건축했는데, 기념관에는 성당을 비롯하여 27위 순교 성인과 무명 순교자의 유해가 모셔진 성인 유해실, 그리고 박물관이 있다. 특히 박물관에는 교회의 귀중한 사료들과 순교자들의 유품, 형구(刑具) 등 3,500여 점 이상의 유물이 소장되어 있어 그 수나 규모 면에서 한국천주교회를 대표하는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다. 야외에 조성된 조형물과 기념비들은 아름다운 주변 경관과 어울려 기도와 묵상의 시간을 풍요롭게 하며, 성지를 찾는 신자들뿐 아니라 지역 주민들에게까지 순교 신앙·선교·문화 체험 등의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 한국 천주교 순교자 박물관
운영시간 : 화요일~일요일 9:30~17:00
위치 : 서울시 마포구 토정로 6 절두산 순교성지 내
홈페이지 : http://www.jeoldusan.or.kr
⑤ 노고산성지
문의처 : 02ㅡ705ㅡ8161
위치 : 서울시 마포구 백범로 35 서강대학교 가브리엘관 앞
노고산 성지는 천주교 박해가 시작된 이후, 사형을 당하고 그대로 형장에 내버려진 순교자들의 시신을 신자들이 목숨을 걸고 관가의 눈을 피해 모셨던 곳 가운데 하나로, 여러 처형장과 가까워 많은 순교자들이 임시로 매장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고 세 명의 외국인 사제, 곧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가 9월 21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이때 앵베르 주교의 나이 43세,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36세로 동갑이었다. 이들의 시신은 사흘 동안 버려져 있다가 한강변 모래톱에 묻혔다. 그 뒤 이십 일가량 지나서 7ㅡ8명의 신자가 죽음을 무릅쓰고 감시의 눈을 피해 시신을 거두는 데 성공하였다. 신자들은 시신을 큰 궤에 넣어 현재 서강대학교가 자리한 노고산에 매장하였다. 4년 뒤, 시신을 훔쳐낸 신자 가운데 한 명인 박 바오로가 가문의 선산인 관악산 줄기 삼성산에 유해를 이장하였다. 그 뒤 유해는 다시 이장하여, 1901년부터 현재까지 명동 대성당 지하 묘소에 모셔져 있다. 서강대학교는 순교자들의 숭고한 정신을 받들고자 2009년 6월 15일 가브리엘관 앞에 순교 현양비를 봉헌하였다.
⑥ 용산예수성심신학교
문의처 : 옛 용산 신학교 생활관 (성심기념관)
전화번호 02ㅡ701ㅡ5501 (성심여자고등학교)
위치 :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 19길 49 옛 용산 신학교 성당
옛 용산 신학교 성당인 성심 성당은 조적조 양식으로 명동 주교좌성당과 중림동 약현성당을 설계한 코스트 신부가 설계하였다. 일반 교구 성당과는 달리 평면 형식을 가진 이 성당은 지형의 특성을 잘 이용하여 지은 아담한 성당으로 현재 성심 기념관 (옛 용산 신학교 생활관)과 더불어 사적 제255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1902 ~ 1958년까지 이 성당에 성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모셨다가 가톨릭 신학 대학 이전과 함께 혜화동 신학 대학으로 모셔 갔으며 또한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 소 브뤼기에르 주교와 제8대 교구장 뮈텔 주교의 유해를 모시기도 했었다.
– 옛 용산 신학교 생활관 (성심 기념관)
현재 성심 수녀회 한국 관구 사무실과 성심 기념관으로 쓰고 있는 옛 용산 신학교 건물은 1892년 배론 예수 성심 신학교가 용산구 원효로로 이전되면서 코스트 신부에 의해 학교 건물로 지어졌다. 6 · 25 전란 때 일부 파괴된 건물을 보수하여 사용하다 2007년 완전하게 복원하였고 옛 용산 신학교 성당과 더불어 사적 제255호로 지정되었다.
⑦ 왜고개성지
문의처 국군 중앙 성당
전화번호 : 02ㅡ798ㅡ2457
위치 : 서울시 용산구 한강대로 40길 46
왜고개는 기나긴 조선의 천주교 박해 시기 동안 여러 순교자들의 시신이 옮겨져 매장되었던 곳이며, 병인박해 순교성인 중 새남터 순교자 일곱 분이 33년 동안, 그리고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자 두 분이 43년간 묻혔던 곳이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베르뇌 주교와 남종삼, 최형 등이 박순집 베드로와 몇몇 신자들에 의해 안장되어 잠시 머물다 간 곳이다. 또한 병오박해 때 순교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시신도 새남터에서 교우들이 찾아내어 잠시 이곳 근처에 가매장했다가 미리내로 모셔 갔다고 증언하고 있다. 후에 이들의 유해는 명동성당과 절두산 성당으로 옮겨져 안치되어 있다. 기해박해 순교자 이광헌 아우구스티노 성인 등 9명이 앵베르 주교의 지시에 따라 왜고개에 묻혔으나, 그 후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고도 한다.
현재 국군 중앙 성당이 위치하는 이곳은 기와를 만드는 곳이었는데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중림동 약현성당, 명동성당 건물에 쓰인 붉은 벽돌도 여기에서 구운 것이라 전해진다.
⑧ 삼성산 성지
문의처 : 삼성산 성지
전화번호 : 02ㅡ875ㅡ2271
홈페이지 : http://www.ssssd.or.kr/
삼성산성당 – 천주교 삼성산성당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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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ssssd.or.kr
위치 : 서울시 관악구 호암로 545
삼성산 성지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군문효수 (軍門梟首)형을 받고 순교한 조선 제2대 교구장 성 라우렌시오 앵베르 범 (范) 주교와 성 베드로 모방 나 (羅) 신부, 성 야고보 샤스탕 정 (鄭) 신부의 유해가 안장된 곳이다. 이들은 1836년부터 차례로 조선에 입국하여 천주교 신자들을 찾아 복음 전파에 힘썼으며, 아울러 모방 신부는 당시 소년이었던 김대건 안드레아,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 등을 선발하여 마카오로 유학을 보내 최초의 조선인 신부를 양성하였다. 한 배교자의 책략 때문에 앵베르 주교의 거처가 알려지자 주교는 여러 교우들에게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해 스스로 잡힌 몸이 되었고, 두 신부에게도 자헌치명 (自獻致明), 곧 스스로 관헌에 나아가 신앙을 고백한 후 순교하기를 권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고 세 명의 외국인 사제는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세 성직자는 1925년 7월 25일 시복되었으며, 한국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인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시성 (諡聖)되자 이를 기념하여 1989년 명동성당에서 세 성인의 유해를 일부 옮겨 와 안치하고 봉헌식을 가졌다.
김대건 신부 치명 순교길
김대건 신부 치명 순교길은 교황청 승인 국제 순례지인 ‘천주교 서울 순례길’ 에 속해 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이 순교성인으로 다시 태어나 영원한 생명의 길을 향해 걸으셨던 마지막 순교길이었습니다. 우포도청 터에서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 당고개 순교성지, 새남터 순교성지, 그리고 절두산 순교성지에 이르는 치명 순교길 순례를 통해 그의 순교영성을 기억해보고자 합니다.
‘2021년 유네스코 UNESCO 세계 기념 인물’ 로 선정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 을 맞이하여, 그의 말씀과 행적 그리고 순교정신을 기억하고 재조명하며, 우리 모두 새로운 자세와 각오로 교회와 세상 안에서 복음의 기쁨을 전하는 희년을 보냈으면 합니다. 2020년 11월 29일 희년 개막 미사시작과 함께 첫 순례단이 ‘김대건 신부 치명 순교길’ 을 함께 하며 치명순교길 도보순례는 계속 될 예정입니다. 신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동행을 부탁드립니다.
거리 : 약 12.7㎞
소요시간 : 약 4 ~ 5시간 (도보)
김대건 신부 치명 순교길_ 경로안내
김대건 신부 치명 순교길_ 상세보기
김대건 신부 치명 순교길_ 코스소개
① 우포도청 터
위치 : 서울시 종로구 종로 6 광화문 우체국 앞 화단
우포도청 (현 광화문 우체국)은 최초의 한국인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성직자영입을 위하여 새로운 장소를 찾으려고 건너갔던 순위도에서 체포되어 순교하기 직전까지 3개월간 투옥되어 국문을 거치면서 신앙을 증언한 장소이다. 김대건 신부는 1846년 6월 19일 한양 포도청으로 이송되었고, 처형에 앞서 이곳에서 조선 교우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옥중 서한을 작성하였다. 마지막 서한에서 ‘부디 서로 우애를 잊지 말고 돕고, 아울러 주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환난을 걷기까지 기다려라’ 고 당부하며, ‘내 죽는 것을 부디 서러워하지 말고 큰 사랑을 이뤄, 한 몸같이 주님을 섬기다가 사후에 한가지로 영원히 천주 대전에서 만나 길이 누리기를 천만 바란다.’ 는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아울러 우포도청은 한국천주교회의 마지막 순교자들이 희생된 곳이기도 하다. 충청도 공주 지방에서 사목하던 드게트 신부와 신자들이 공주 감영을 거쳐 우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박해가 최고조에 다다랐던 시기처럼 혹독한 고문이 자행되지는 않았지만 투옥된 교인들을 괴롭힌 것은 가혹한 굶주림이었다. 결국 압송된 신자들 중 이병교 레오, 김덕빈 바오로, 이용헌 이시도로 등이 우포도청 옥에서 아사로 순교하였으며 이들이 바로 한국천주교회 마지막 순교자들이다.
②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
문의처 :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전화번호 : 02ㅡ3147ㅡ2401
홈페이지 : www.seosomun.org
서소문 성지 역사 박물관
www.seosomun.org
위치 : 서울시 중구 칠패로 5
박순집 증언록에 따르면,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우포도청에서 3개월간 투옥되고 사형을 언도받은 뒤, 이곳 서소문 밖 네거리를 거쳐 당고개를 지나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이에 앞서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도 1839년 기해박해 당시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는 조선 시대 공식 처형장이었다. 사직단 서쪽에 처형장을 두어야 한다는 『예기』의 가르침과 최종 사형 판결을 내리는 형조나 의금부와 그리 멀지 않다는 편의성, 그리고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칠패 시장’ 이 있어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대부분의 처형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그리고 1866년ㅡ1873년 병인박해를 거치면서 이곳에서 순교한 신자들 가운데 그 신원이 확인된 경우만 100명이 넘는다. 이 가운데 44위가 시성되었는데, 단일 순교지로는 가장 많은 성인을 배출한 곳이다. 대표적인 인물로 정하상 바오로와 김효임 골룸바, 김효주 아녜스 성인 등이 있다. 또한 2014년 시복된 순교복자 124위 가운데 27위가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하였다. 2019년 6월 1일 염수정 추기경에 의해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가 그 장소성과 역사성을 기념하고자 지상은 ‘서소문 역사공원’ 으로, 지하는 정하상 기념경당을 비롯한 문화복합시설인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으로 조성되었다.
③ 당고개 순교성지
전화번호 : 02ㅡ711ㅡ0933
홈페이지 : http://www.danggogae.org
당고개(용산) 순교성지
서울특별시 용산구 신계동에 있는 한국 로마 가톨릭교회의 순교 성지
www.danggogae.org
위치 : 서울시 용산구 청파로 139ㅡ26 (신계동 56)
박순집 증언록에 따르면, 당고개는 1846년 9월 16일 (헌종 12년, 병오박해) 최초의 한국인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새남터로 향한 참수 길에 서소문 밖 네거리를 거쳐 새남터 형장에 도착하기 전 잠시 쉬어 갔던 곳이기도 하다. 용산 당고개는 음력 1839년 12월 27일과 28일 이틀 간 10명의 교우들이 순교했던 곳이다. 당시 설을 앞두고 대목장에 방해받지 않으려는 상인들의 요청으로,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한강가로 나아간 이곳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27일에는 박종원 아우구스티노, 홍병주 베드로, 권진이 아가타, 이경이 아가타, 손소벽 막달레나, 이인덕 마리아, 이성례 마리아 7명이, 다음날에는 홍영주 바오로, 최영이 바르바라, 이문우 요한 3명이 순교하였다. 당고개 순교성지는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가 순교한 곳으로, 어머니의 성지로도 불린다. 김대건 신부는 죽음을 앞두고 열아홉 번째 편지에서 최양업 신부에게, 스무 번째 편지에서는 주교님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간곡히 부탁하였다. 사제이자 자식으로서 그분이 느꼈을 고뇌는 우리의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④ 새남터 순교성지
전화번호 : 02ㅡ716ㅡ1791
홈페이지 : http://www.saenamteo.or.kr
새남터 성당 – 천주교 순교성지 새남터 기념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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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enamteo.or.kr
위치 : 서울시 용산구 이촌로 80ㅡ8
1846년 9월 16일 한국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성인이 군문 효수형을 당한 바로 그 장소라는 의미에서 한국 천주교회에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곳이다. 김대건 신부는 새남터 순교성지에서 순교하였지만 영원한 생명의 길로 나아갔다. 새남터 순교성지는 조선 시대에 순교한 성직자 열네 명 가운데 열한 명이 순교한 곳으로, 이 가운데 여덟 명과 교회 지도자급 평신도 세 명이 성인 반열에 오른 한국의 대표적인 순교성지이다. 한강변에 있는 새남터 순교성지는 조선 초기부터 군사들의 연무장으로 사용됐고 국사범을 비롯한 중죄인의 처형장으로 사용되어 왔다. 이곳에 순교의 피가 뿌려지기 시작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치명한 중국인 복자 주문모 야고보 신부부터이다.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지 6년 만인 1801년 신유박해 때, 자신 때문에 많은 희생자가 생기자 주문모 신부는 자진해서 의금부로 출두하였고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 때에는 조선 제2대 교구장 성 라우렌시오 앵베르 범 주교와 성 베드로 모방 나 신부, 성 야고보 샤스탕 정 신부가, 7년 뒤인 1846년 병오박해에는 한국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기해일기’ 를 작성한 현석문 가롤로가 이곳에서 참수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베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 볼리외, 도리, 푸르티에, 프티니콜라 신부 등 6명의 사제들이 순교하였다.
⑤ 절두산 순교성지
문의처 : 절두산 순교성지
전화번호 : 02ㅡ3142ㅡ4434
홈페이지 : http://www.jeoldusan.or.kr
위치 : 서울시 마포구 토정로 6
한국 천주교회는 1846년 김대건 신부의 순교 후 100년이 지난 1946년, 전국 단위의 순교자현양위원회를 결성한 이후 10년간의 모금활동의 결과로 양화진에 부지를 매입하고 성지를 조성하였다. 1966년 병인박해 100주년을 기념해 김대건 신부 광장과 기념관을 준공, 1967년에 축성된 절두산 순교성지는 광장과 기념성당, 성인 유해실,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성지 일대는 1997년 ‘서울 양화나루와 잠두봉 유적 (사적399호)’ 으로 지정되었다. 또한 김대건 신부 탄생 150주년이 되던 1972년에는 김대건 신부 기념동상이 광장에 세워졌다. 특히, 박물관에는 교회의 귀중한 사료들과, 순교자들의 유품, 형구 (刑具) 등 3,500여 점 이상의 유물이 소장되어 있어 그 수나 규모면에서 한국 천주교회를 대표하는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다. 김대건 신부 광장이 조성된 야외에는 다양한 조형물과 기념비들이 설치되어 아름다운 주변 경관과 어울려 기도와 묵상의 시간을 풍요롭게 하며, 성지를 찾는 신자들뿐 아니라 지역 주민들에게까지 순교신앙 · 선교 · 문화 체험 공간의 역할을 하고 있다. 절두산은 예로부터 가을두, 잠두봉, 용두봉 등으로 불리어 왔다.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을 통과해 서울 근교까지 침범해 오자 대원군은 서양 오랑캐들로 더럽혀진 한강을 천주교인들의 피로 씻겠다며 이곳에서 수많은 신자를 목을 잘라 죽이면서 [병인박해] 이곳의 지명을 절두산 (切頭山)이라 부르게 되었다.
순교성지
순교한 곳이나 순교자들의 무덤이 있는 장소로서, 전례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곳
교회 사적지
순교자들과 관련이 있는 장소
(잡혀갔던 감영, 생가나 생활 터전, 기념 성당이나 장소)
순례지
좁은 의미로 순교자들과는 관련이 없지만 신앙 신조들의 삶과 그들의 영성이 담겨있는 곳.
또는 교구 직권자가 정한 곳
[출처 : 천주교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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