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레길 등(누죽걸산 :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

[명동역에서 한성대입구역까지] 02

드무2 2025. 3. 13.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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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역에서 한성대입구역까지] 02

 

 

 

 

우당 이회영 길

 

이회영 선생 (李會榮, 1867ㅡ1932)은 서울 명동 출신으로 초대부통령 이시영의 형이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6형제 모든 가족이 중국 서간도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10년 동안 3,500여 명의 독립군 지도자를 양성하여 이들이 독립전쟁을 주도했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고, 1920년대에는 북경을 중심으로 아나키즘 독립운동과 의열투쟁을 주도하다가 1932년 일제 경찰에 검거되어 여순감옥에서 고문으로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서울특별시 중구청에서는 우당 이회영 선생 탄생 150주년을 맞아, 2017년 9월 20일에 명예 도로로 '우당 이회영 길' 을 지정하였다.

 

 

 

 

 

 

 

 

 

 

장악원 (掌樂院) 터

 

음악의 편찬 교육 행정을 맡았던 조선왕조 관아 자리

 

 

 

 

 

 

 

2. 김범우의 집 터 (장악원 터)

 

이곳은 한국 천주교회 창설 직후인 1784년 말 신앙 집회가 열렸던 곳으로, 김범우는 한국 최초의 천주교 증거자로 기록된 인물이다. 집주인이었던 김범우는 신자들에게 '천주실의', '칠극' 과 같은 교회 서적을 보관하고 있다가 빌려주면서 교리를 전파하였다.

당시 이곳에서 모임을 가졌던 신앙공동체를 '명례방 공동체' 라고 하는데, 구성원은 이승훈과 이벽을 비롯하여 권일신, 정약용, 최인길, 지황 등이었다. 명례방 공동체는 1785년 봄 형조의 관리들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었는데, 이 사건을 '명례방 사건', 또는 '을사 추조 적발 사건' 이라 한다. 끝까지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던 김범우는 가혹한 형벌을 받고 충북 단양으로 유배된 후 고문의 후유증으로 1786년 선종하였다.

 

 

 

 

 

 

 

 

 

 

 

 

 

 

 

 

 

 

 

우리은행 종로지점은 1909년 7월 3일 건립된 우리나라 은행 최초의 근대건축물입니다.

 

 

 

 

 

 

 

광통관

 

서울특별시 기념물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1가 19번지

 

이 건물은 1909년 탁지부 (度支部)에서 금융 관련 기관의 집회소로 쓰기 위해 지은 지상 2층의 벽돌조 건물이다. 같은 시기에 창립했던 천일은행 (天一銀行)의 어음조합에서도 사옥이 필요하게 되어 이 건물을 대여하였다. 1층에는 천일은행의 영업장과 사무실, 2층으로 오르기 위한 출입구가 있고, 2층에는 집회실, 흡연실, 예비실 등을 두어 집회시설인 광통관의 기능을 하도록 하였다. 절충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전면에 화강석으로 이오니아식 주두 (柱頭)의 붙임 기둥을 설치하여 건물의 중심을 강조하였다. 그 윗부분에는 삼각형 페디먼트를 두고 바로크 풍의 돔을 얹었다. 1914년 화재 후 지붕과 각 부위를 지금의 모습으로 복구하면서 각 부의 장식, 창문 주위, 지붕의 모습이 많이 바뀌었다. 현재 우리은행에서 영업장으로 사용하고 있어 내부에는 옛 모습이 남아 있지 않고 외관만 화재이후 수리된 모습으로 남아 있다.

 

 

 

 

회동서관 터 滙東書館 址

 

회동서관은 1880년대에 고재홍이 창업해 1950년대까지 존속한 서점 겸 출판사이다. 1907년 그의 아들 고유상이 회동서관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 이광수의 『무정』 등을 간행해 한국 근대 문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2016년 12월 서울특별시

 

 

 

 

 

 

 

 

 

 

광통교 廣通橋

 

조흥은행 앞 사거리에 있던 광통교는 원래 토교 (土橋)였는데 큰 비로 유실 (流失)되자 태종 10년 (1410)에 돌다리로 개축되었다.

우리나라에서 폭이 가장 넓었던 이 다리는 매년 정월 대보름날 다리밟기 (踏橋) 놀이가 성황을 이루던 곳으로 유명하였으나 1958년 청계천 복개시 도로 밑으로 그 모습을 감추었다. 여기 있는 광통교는 서울 정도 600년을 맞이하여 그 원형의 사분의 일로 축소 복원한 것이다.

 

 

 

 

 

 

 

베를린 광장 시설안내

 

베를린 장벽 (높이 3.5m, 폭 1.2m, 두께 0.4m)은 1961년 동독에서 설치했던 것인데, 독일이 통일되면서 1989년 철거되어 베를린시 동부지역에 있는 마르쨘 휴양공원 안에 전시되어 오던 것입니다.

 

서독쪽의 벽면은 사람들의 접근이 가능하였으므로, 이산가족 상봉과 통일을 염원하는 글들이 쓰이게 되었습니다.

 

베를린 장벽 오른쪽 전면에 설치된 '곰' 상은 베를린시의 상징으로서, 몸통 양쪽에는 남대문과 브라덴부르크 문 그리고 양 도시 시민들이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곳에 설치된 공원등은 독일 전통의 가로등으로서 100여 년 전에 만든 것을 옮겨 온 것이며, 독일 전통의 보도 포장과 의자를 함께 배치하였습니다.

 

서울특별시에서도 우리은행 (WOORI BANK)의 협찬을 받아 베를린시 마르쨘 휴양공원 안에 '서울정원' 을 조성하였습니다.

 

 

 

 

 

 

 

신석구 사택 터

 

관리번호 : 10ㅡ1ㅡ31

관  리  자 : 국민은행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중구 수표동 99ㅡ1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인 신석구가 1919년 3 · 1운동 당시 살던 곳이다.

신석구 (申錫九, 1875 ~ 1950)는 1907년 기독교에 입교하여 이듬해 세례를 받고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했다. 경기도와 강원도 등지에서 전도사로 일하다가 1917년 9월 남감리교 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18년 11월부터 서울 수표교교회 담임 목사로 재임하던 중 오화영의 권유를 받고 3 · 1운동 민족대표로 참여했다. 1919년 3월 1일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일경에 붙잡혀 2년 8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 1938년 7월 신사참배 반대투쟁을 일으켜 옥고를 치렀으며, 1945년 5월 일제가 강요한 전승기원 예배와 일장기 게양 등을 거부하는 활동을 펼치다 연행되어 감옥에서 해방을 맞았다.

1949년 4월 19일 진남포 반공비밀결사 사건의 주모자로 체포되어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6 · 25전쟁 때 희생되었다.

 

 

 

 

 

 

 

 

 

 

한국 천주교회 창립 터 韓國 天主敎會 創立 址

 

1784 (정조 8)년 겨울, 수표교 부근 이벽 (李蘗, 1754 ~ 1785)의 집이던 이곳이 세례식이 최초로 거행되어 한국 천주교회가 창립된 터이다.

 

 

 

 

 

 

 

 

 

 

파자교터 把子橋址

 

파자교는 재동천과 금위영천이 만나 옥류천으로 이어지는 물길과 돈화문로가 만나는 곳에 놓여 있던 돌다리다. 근처에 울타리나 발로 쓰이는 파자 把子를 파는 파자전 把子廛이 있어서 파자전교 把子廛橋라고도 불렸다. 파자교는 창덕궁에서 출발한 어가 행렬이 지나던 곳으로 혜정교, 철물교와 함께 도성 내에서 격쟁이 허용되어 백성이 임금에게 억울함을 알릴 수 있는 곳이었다.

 

2022년 11월 서울특별시

 

 

 

 

 

 

 

좌포도청터 左捕盜廳址

 

조선조때 정선방 貞善坊에 있던 죄인을 다스리던 관청터.

 

 

 

 

천주교 신자 순교터 天主敎 信者 殉敎

 

포도청은 을묘박해의 계기가 된 북산사건을 계기로 천주교 문제에 직접 관여하기 시작하였으며, 천주교 신자들이 가장 많이 순교한 곳 역시 좌 · 우 포도청이다. 1795년 을묘박해 때 좌포도청에서 첫 순교자가 탄생되었으며, 1866년 ~ 1880년 병인박해 때 마지막 순교자가 탄생되었다.

 

2016년 9월

단성골드빌딩

 

 

 

 

최시형 순교터 崔時亨 殉敎址

 

동학 제2세 교조 해월 최시형이 동학혁명을 지도하다가 순교 (1898)한 터

 

 

 

 

단성사 터 團成社

 

1907년 6월 경성의 실업가 지명근, 박태일, 주수영이 공동 출자하여 이곳에 단성사를 설립하였다. 1919년 10월 27일 한국 최초의 영화 '의리적 구토' 가 상영되어 '영화의 날' 로 지정되었고, 1926년 10월 1일 나운규 감독의 '아리랑' 이 개봉되어 단성사는 민족의 아픔을 대변하는 영화관으로 한국 영화관의 상징이였다.

 

2016년 9월

단성골드빌딩

 

 

 

 

단성사 터 역사

1544

포도청의 기원과 정식 설립

 

조선 시대 성종 12년 (1481년)에 좌 · 우포도장을 임명하고 한성부 각 처와 경기도 일대를 관할하여 도적들의 도둑질과 작폐를 막는 임무를 수행하는데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포도청의 정식 설립은 종종 39년 (1544년)이다. 좌포도청은 이곳에 위치하여 서울의 동부, 중부, 남부와 경기좌도를 관할하였고, 우포도청은 혜정교 남쪽 (현 종로1가 98번지 광화문 우체국과 일민미술관 즉 옛 동아일보 사이)에 위치하여 한성부의 서부, 북부와 경기우도를 관할하였다.

 

포도청의 설치 목적

 

치안, 임금 행사 시 호위, 유언비어 유포자, 무기명 비방사건조사, 위조엽전 제조자, 도박 행위자 및 밀주 제조자 색출 등이 주목적이었다.

 

 

 

 

한말의 한성부 청사

 

 

 

 

한말의 포도대장 (捕盜大將)

 

 

 

 

1795

천주교와 포도청

 

포도청이 천주교 문제에 직접 관여하게 된 시작한 것은 1795년 (을묘년) 북산사건 때부터였다.

이 사건은 북산 (북악산) 아래의 계동에 숨어 지내던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의 거처가 밀고 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1795년에 일어난 을묘박해, 1801년에 일어난 신유박해, 1839년에 일어난 기해박해, 1866년에 일어난 병인박해를 포함한 천주교 박해시기에는 천주교인들을 색출해내는 일이 포도청이 주요 임무가 되었다.

 

 

1894

경무청으로 개편

 

1894년 (고종 31) 갑오경장 때에 좌 · 우포청을 폐합해 경무청 (警務廳)을 설치하고 내무아문 (內務衙門)에 부속시켰다.

 

 

 

 

1795

을묘박해 ㅡ 첫 순교자들

 

좌포도청에서는 주문모 신부를 체포하기 위해 포교와 포졸들을 계동으로 급파했으나 지도층 신자들의 기지로 체포에 실패하고 말았다. 대신 신부집 주인 최인길 (마티아), 밀사 윤유일 (바오로)와 지황 (사바) 등 3명이 체포되어 좌포도청에서 혹독한 매질로 순교에 이르도록 했으니, 이것이 을묘박해이다.

 

 

 

 

최인길 (마티아)

 

 

 

 

윤유일 (바오로)

 

 

 

 

지황 (사바)

 

 

 

1801

신유박해

 

1801년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순조의 섭정으로 정순왕후가 천주교를 탄압, 교인들을 투옥하고 참형한 사건을 말한다. 이것은 서학 자체에 대한 동기보다는 정조가 죽은 이후의 정권 다툼에서 야기된 것이다. 당시 은밀한 활동을 하던 주문모 신부는 박해가 일어나자 이는 사신을 목표로 한 것임을 알고 자수하여 1801년 새남터에서 처형당했다. 순조 원년의 1년에 걸친 박해로 주문모 신부 외에 이승훈, 이가환, 등 100명이 처형되고 400명이 유배되었다.

이때 좌 · 우포도청에서는 심아기, 김기우, 박중환, 조신항 등 4명이 순교했다. 

 

 

 

 

주문모 신부

 

 

 

 

1839

기해박해

 

1839년에 일어난 제2차 천주교 박해다. 그 이면에는 안동 김씨의 세도를 빼앗으려는 벽파 풍양 조씨의 권력다툼이 있었다. 기해박해부터는 모든 순교자들이 1차적으로 포도청에서 심문을 받게 되었고, 이때 포도청에서 옥사하거나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고문을 받아 순교한 순교자만 민극기 (스테파노), 김성우 (안토니오), 최정환 (프란치스코) 등 39명에 달한다.

 

 

1846

병오박해

 

병오박해는 김대건 신부의 체포를 계기로 일어난 천주교 박해다. 그는 한국인 처음으로 사제 서품을 받은 신부였다. 병오박해때 포도청에서 순교한 순교자는 7명이며, 이 중 남경문 (베드로)과 임치백 (요셉)은 좌포도청으로 순교지가 명시되어 있다.

 

 

 

 

김대건 신부

 

 

 

1866

병인박해

 

1866년 일어난 병인박해는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할 때까지 무려 8년이나 계속되었으며 그 피해도 엄청났다. 이때 포도청에서 순교한 순교자는 252명에 달하며, 이는 병인박해기에 와서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고, 심문하고, 처형하는 포도청의 역할이 크게 강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78

리델 주교의 좌포도청 수감

 

조선 교구 제6대 교구장이었던 리델 주교는 1878년 1월 체포되어 우포도청에서 문초를 받고 이후 좌포도청에서 수감생활을 하였다. 아래 그림은 리델 주교가 기록한 좌포도청의 감옥 구조도이다.

 

 

 

 

 

1. 포졸 숙소

2. 자신이 수감된 감방

3. 채무 죄수가 수감된 감방

4. 도둑의 감방

5. 시체를 두는 곳

6. 물건을 두는 방

7. 화장실

8. 부엌

9. 웅덩이

10. 포졸 숙소

11. 법정

12. 감옥 출입문

 

 

 

포도청 천주교 순교자

구분 포도청 순교자 좌포도청 명시
을묘박해 3명 3명
신유박해 4명  
기해박해 39명  
병오박해 7명 2명
병인박해 252명 56명
305명 61명

 

 

 

 

리델 신부

 

 

 

 

 

1898

좌포도청에서 순교한 동학인 ㅡ 해월 최시형

 

1898년 동학 제2세 교조였던 해월 최시형이 이곳 좌포도청 교형장에서 순교하였다. 최시형은 경전간행과 교단정비에 혁혁한 공을 이루고 당시 약자인 여성과 어린이의 위상을 제자리에 찾게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하늘, 땅 만물이 함께 어우러져 사는 생태적 삶을 가르쳐준 인물이였다.

 

 

 

순교 직전의 해월 최시형의 마지막 모습이다. 그의 뒷편에 '동학 괴수 최시형' 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그의 발을 보면 순교 직전까지 얼마나 많은 고문이 가해졌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제1세 교조 최제우와 동학사상

 

1860년 동학 제1세 교조 수운 최제우는 경주 용담정에서 무극대도 (無極大道)를 득도하게 된다. 무극대도란 시천주 (侍天主) 인간은 원천적으로 신을 모시고 있는 존엄한 존재이므로 귀천의 구별이 없으며 절대로 평등한 존재라는 것이다. 득도를 하면서 동학이라 명명하게 되는데 동 (東)은 우리나라를 의미하며 동쪽에서 받은 학문이라는 뜻으로 동학이라 하였으며 도는 천도라고 하였다.

 

 

1905

의암 손병희

동학에서 천도교로 개칭

 

3 · 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의암 손병희는 최시형을 만나 수제자가 되었고 1세 교조 수운 최제우가 1864년 관에 잡혀 참수를 당한데 이어 1898년 2세 교조 해월 최시형마저 처형을 당하자 법통을 이은 3세 교조가 되었다. 1905년 12월 1일 그동안 동학을 탄압해 오던 광무정권 (光武政權)이 무력해지자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했다. 손병희는 기독교 · 불교 · 천도교 합작을 추진하여 3 · 1운동을 준비했다. 1919년 3월 1일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뒤 일본 경찰에 자진출두하여 검거되었다. 1920년 징역 3년형에 형집행정지를 언도받고 병보석으로 풀려나 치료받던 중에 1922년 5월 사망하였다.

 

 

 

 

손병희

 

 

 

 

1907

团成社

 

조선인 극장 단성사의 탄생

 

1907년 6월 4일 동대문 밖 영도사 (지금의 개운사) 대원암에 배우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경성의 실업가 지명근, 박태일, 주수영이 그들을 소집하여 단성사 발기대회를 열었던 것이 단성사의 시작이었다.

 

'힘을 모아 뜻을 이루자' 는 뜻의 단성사는 배우들에게 활동무대를 제공하고 공연으로 벌어들인 수익금으로 활발한 복지사업을 펼쳤다. 폐교 위기에 몰린 야학이나 고아원 등에 기부금을 기탁하고, 폭풍우 피해를 입은 서민들을 위한 성금 모금에 앞장섰다.

 

애초에 '단성사' 란 건물 이름이기 이전에 배우들로 구성된 단체의 이름이었다. 발기대회 당시 짓고 있던 연극장은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한국인 흥행사 박승필

 

 

 

1912

최초로 권투가 소개되다

 

1912년 10월 박승필에 의해 우리나라에 최초로 권투가 소개되었다. 격투기를 좋아했던 박승필은 유각권구락부 (柔角拳俱樂部)를 창설하고 단성사에 사무실을 두었다.

 

 

1914

단성사 신축 사진

 

 

 

 

1918

조선인 흥행사 박승필,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재개장

 

박승필은 일찍이 광무대라는 극장을 통해 뛰어난 수완의 기획, 연출가로서 '흥행사 박승필' 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는 상설민간극장으로 설립되어 전통연희 등의 공연으로 경영난에 시달리던 단성사의 운영권을 넘겨받고 대대적인 개축을 하여 1918년 12월 상설영화관으로 재개장하였다. 단성사는 이때부터 조선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북촌을 대표하는 극장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단성사 재개관에 대한 보도 (매일신보)

 

 

 

 

 

 

 

1919

한국 최초의 영화

<의리적 구토> 상영

 

1919년 10월 27일에 선보인 <의리적 구토>는 '연쇄극' 이었다. 연쇄극은 극 와중에 활동사진을 상영하여 무대에서 실현하기 불가능한 장면을 필름으로 연결하는 방법이었다. 즉 연극의 자료화면 정도였다. 비록 연극과 뒤섞인 활동사진이었지만 조선인 감독 (김도산)이 찍은 영상이 조선인의 극장에서 구현된 최초의 사례였다. 1962년 공보처는 이 역사적인 날을 기념하여 '한국영화의 날' 로 삼았고, 이후 이 날은 영화인의 축제 대종상이 열리는 날로 기억되고 있다.

 

 

 

 

1919년 10월 <의리적 구토> 개봉 광고 (매일신보)

 

 

 

 

매일신보에 실린 장화홍련전의 한장면

 

 

 

1924

최초의 우리 영화

<장화홍련전> 개봉

 

박승필은 단성사 촬영부를 두어 <장화홍련전>을 제작하였다. 시나리오는 이구영과 김영환이 맡고 변사였던 우정식과 최병룡이 출연했다. <장화홍련전>은 제작자본, 작품, 연출, 출연, 기술 등에 이르기까지 전부 한국인 손으로 만든 최초의 작품이다.

 

 

 

 

1926

민족영화 제1호, <아리랑> 개봉

 

1926년 10월 1일, 나운규 감독의 민족영화 <아리랑>이 개봉했다. 단성사 앞 종로통은 아리랑을 읊조리는 흐느낌으로 가득차고 있던 날, 조선총독부 신청사에서는 낙성식이 열리고 있었다. 그 날짜가 우연보다는 필연에 더 가까웠을지 모른다.

 

 

 

 

<아리랑>의 한장면

 

 

 

 

<아리랑> 스태프들

 

 

 

1932

 

1932년 가수 이애리수가 단성사에서 '황성옛터' 를 처음 불렀다. 관객들이 울음을 터트리자 일본경찰들이 공연을 중단시키기도 하였다.

 

 

 

 

 

 

1934

 

 

1934 건물 신축

 

 

 

1939

 

1939년 일본인이 단성사를 인수하여 '대륙극장' 으로 개명하였다가 1946년 해방 후 다시 단성사로 개칭하여 재개관하였다.

 

 

 

 

대륙극장으로 운영 당시 초대권

 

 

 

 

1935

 

1935년 10월 조선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이 개봉했다. 당시 발성기술을 조선인이 자체 개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춘향전>의 한장면

 

 

 

1977

 

장미희 주연의 <겨울여자>가 개봉하여 한국영화 흥행 1위, 서울 관람객 약 58만명을 동원했다.

 

 

 

 

 

 

1990

 

1990년 개봉한 <장군의 아들>은 한국영화 흥행 1위, 서울 관람객 약 67만명을 동원했다.

 

 

 

 

 

 

1993

<서편제> 첫 100만 관객

 

1993년 개봉한 <서편제>는 단성사 단관에서만 관람객 113만여 명은 한국 영화사 최대의 이변이자 경사였다.

 

 

 

 

<서편제> 관람을 위해 단성사를 방문한 김수환 추기경

 

 

 

 

 

 

2016

새로운 출발

 

2015년 영안모자 계열인 (주) 자일개발이 인수하고 1년여의 준바기간을 거쳐 단성골드 주얼리센터와 함께 새롭게 재탄생하였다.

 

 

 

 

 

 

 

 

 

 

종묘전교 宗廟前橋

 

종묘 (宗廟)로 들어가는 입구의 하천인 회동 제생동천 (灰洞 濟生洞川)에 축조된 다리로, 대동지지 (大東地志)에서 이 다리를 "종묘전교 (宗廟前橋)" 라 하였다. 종묘전교 (宗廟前橋)는 처음에 나무다리였던 것을 세종 (世宗) 3년 (1421) 돌다리로 개축 (改築)하였고, 이후 현종 (顯宗) 4년 (1663)에 개수 (改修)한 바 있었다.

역대 왕들이 종묘 (宗廟)에서 행하는 종묘대제 (宗廟大祭)를 비롯한 각종 주요행사 때에 이용하였던 중요한 다리였다.

이 다리는 널다리 (平橋) 형식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 (폭 9.6m, 길이 6.9m) 규모인데, 다리의 바닥 (廳板) 한가운데가 좌우보다 한단 높은 어도 (御道) 형식이고, 다리가 설치된 가장자리 네 모서리에는 해태상을 새긴 화표주 (華表柱)가 마련되어 있다.

 

 

 

 

 

 

 

 

 

 

 

 

 

 

 

 

 

 

 

 

進新都八景詩

 

甸山河 (기전산하)

沃饒畿甸千里 (옥요기전천리) 表裏山河百二 (표리산하백이)

德敎得兼形勢 (덕교득겸형세) 歷年可卜千紀 (역년가복천기)

 

都城宮苑 (도성궁원)

城高鐵甕千尋 (성고철옹천심) 雲繞蓬萊五色 (운요봉래오색)

年年上苑鶯花 (연년상원앵화) 歲歲都人遊樂 (세세도인유락)

 

列署星拱 (열서성공)

列署岧嶤相向 (열서초요상향) 有如星拱北辰 (유여성공북진)

月曉官街如水 (월요관가여수) 鳴珂不動纖塵 (명가부동섬진)

 

諸坊碁布 (제방기포)

第宅凌雲屹立 (제택능운흘립) 閭閻撲地相連 (여염박지상연)

朝朝暮暮煙火 (조조모모연화) 一代繁華晏然 (일대번화안연)

 

東門敎場 (동문교장)

鐘鼓轟轟動地 (종고굉굉동지) 旌旗旆旆連空 (정기패패연공)

萬馬周旋如一 (만마주선여일) 驅之可以卽戎 (구지가이즉융)

 

西江漕泊 (서강조박)

四方輻湊西江 (사방복주서강) 拖以龍驤萬斛 (타이용양만곡)

請看紅腐千倉 (청간홍부천창) 爲政在於足食 (위정재어족식)

 

南渡行人 (남도행인)

南渡之水滔滔 (남도지수도도) 行人四至鑣鑣 (행인사지표표)

老者休少者負 (노자휴소자부) 謳歌前後相酬 (구가전후상수)

 

北郊牧馬 (북교목마)

瞻彼北郊如砥 (첨피북교여지) 春來草茂泉甘 (춘래초무감천)

萬馬雲屯鵲厲 (만마운둔작려) 牧人隨意西南 (목인수의서남)

 

 

기름지고 풍요로운 진리의 경기 땅

안팎의 산하는 천하의 요새지로다.

덕교에다 형세마저 어울렸으니

왕업은 천세기를 길이길이 누리리라.

 

성은 높은 천 길의 철옹성이고

구름에 싸인 궁궐 오색 찬연해.

연년이 어원에는 봄 경치가 좋은데

해마다 도성 사람 즐겁게 노네.

 

관청은 우뚝우뚝 서로 맞서서

뭇별이 북두성에 읍하고 있는 듯

달 밝은 새벽 한길 물 같이 맑아

귀인의 수레에는 먼지 하나 일지 않네.

 

저택은 구름 위로 우뚝 솟았고

민가는 땅에 가득 서로 닿았네.

아침저녁 연화는 끊이지 않아

한 시대는 영화롭고 태평하다네.

 

북소리 둥둥 땅을 흔들고

깃발은 펄럭펄럭 하늘 덮었네.

만마가 한결같이 굽을 맞추니

몰아서 전장에 나갈 만하네.

 

사해 선박 물말듯이 서강에 와서

용처럼 재빠르게 만 섬 곡식 풀어놓네.

창고에 가득한 저 곡식 보소

정치란 의식의 넉넉함에 있다네.

 

남쪽 나루의 물결은 도도히 흐르고

나그네들 사방에서 줄지어 오네.

젊은이는 짐지고 늙은이는 쉬고

앞뒤로 화답하며 송덕가 부르네.

 

숫돌같이 평평한 북녘들 바라보니

봄 오자 풀 성하고 물맛도 좋아

만마가 구름처럼 모여 뛰놀고

목자는 마음대로 여기저기 서성이네.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인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는 1821년 충남 당진군 솔뫼에서 태어났다. 15세에 마카오로 유학 1845년 상해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귀국 후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사목하다가 1846년 체포되어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1984년 성인품에 올랐으며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가 되었다. 종로 본당 창립 40주년을 기념하여 고통을 딛고 서 있는 이 성상을 건립하였다.

 

1995. 7. 5.

글씨 경후 김단희  조각 김미영 수녀

 

 

 

 

 

 

 

 

 

 

 

 

 

 

 

 

 

 

 

6. 광희문 성지

 

광희문은 1396년 한양도성을 창건할 때 세운 서울의 4 대문 사이에 위치한 4 소문 중 동남 방향에 있는 성문으로, 장충단에서 한강 사이의 남소문이 없어진 뒤 북쪽의 수구문을 일컬어 광희문이라고 불렀다. 또한 서소문과 함께 한양도성 안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시신을 도성 밖으로 내보내는 문으로 사용되어 시구문으로도 불렸다.

 

박해시기 서울과 수원, 용인 등 인근 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이 도성 안으로 끌려 들어왔고 가혹한 고문 속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다가 끝내 이를 거부함으로써 순교의 길을 가야 했다. 도성 안에서 참수 치명한 순교자들의 시신은 짐짝보다도 못한 취급은 받으며 광희문 밖에 내다 버려졌으니 실로 생과 사의 갈림길이었다. 광희문 밖은 단순히 조선의 죄수와 무연고자들의 시신이 방치괴었던 곳이 아닌 순교자들의 주검과 피를 통해 성화된 중요한 성지라 할 수 있다.

 

광희문은 6 · 25 전쟁으로 문루와 성문 위 여장이 파괴되었다가 1976년 고증을 거쳐 복원되었는데, 도로를 개통하면서 원래 위치에서 약간 남쪽으로 옮겨졌다. 광희문과 함께 대표적인 시구문으로는 남한산성의 수구문이 있다.

 

 

 

 

 

 

 

광희문 달빛로드 코스 안내

 

 

 

 

 

 

 

 

 

 

 코스

광희문과 성곽 중심으로 알아보는

역사투어

 

거리 | 2㎞

소요시간 | 약 2시간

 

흥인지문 (동대문)

오산수교 (오간수문지)

이간수문

동대문디자인플라자 (DDP)

(구) 서산부인과 (옆 성곽 흔적)

광희문

광희문성지순교현양관

대장간거리

동활인서 터

무당천 (무당고개)

신당동떡볶기거리

황학동 싸전거리

 

 


 코스

명소들만 다니고픈 사람, 여기 모여라 ~

하이라이트 투어

 

거리 | 2.5㎞

소요시간 | 약 2시간

 

충무아트센터

신당동떡볶기거리  
신당동 봉제골목
무학빌딩   

광희문

광희동 중앙아시아거리

뉴금호타워

훈련원공원

국립중앙의료원

동대문디자인플라자 (DDP)

 

 

주변 명소 둘러보기

 

ⓐ 경성궤도회사 터 표지석

ⓑ 동대문 전차차고 터

ⓒ 청계천 헌책방 거리

ⓓ 광희문교회

 

 

 

 

 

 

 

 

 

 

 

 

 

 

 

 

 

 

 

 

 

 

 

 

 

창조의 알

 

여기 커다란 알이 있다. 알은 단순한 형태를 가졌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한다. 기하학적인 완전한 구사 아닌 타원형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진동으로 생명이 시작되고 만물이 창조된다. 인류문화의 역사를 지문으로 새겨 놓은 이 커다란 알은 디자인의 창조적 힘을 상징한다.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가 장자의 붕새처럼, 이 거대한 알에서 부화하여 정신의 초월적 자유로 힘차게 비상하기를 기원한다.

 

2013년 조병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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