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 25전쟁 60년/낙동강 혈전

[6 · 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53) 처참한 살육의 현장

드무2 2021. 6. 20.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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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53) 처참한 살육의 현장

 

 

 

적은 쉴 틈 없이 공격해 왔다. 북한군은 애초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1950년 8월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한다는 목표를 세웠으나 국군과 미군의 강력한 방어막에 막혀 달성이 불가능해졌다. 그러자 8월 15일까지 대구만이라도 점령하기로 목표를 수정한 뒤 거세게 밀어붙였다.



21㎞ 전선 모든 곳에 아군과 적군이 뒤엉켰다
격전 때마다 부대원 30~40%가 사라졌다

 

 

낙동강 전선을 지키기 위해 벌인 다부동 전투는 격전(激戰)과 혈전(血戰)의 연속이었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국군 유해 수습에서도 다부동 일대의 야산과 들판에서 나오는 것이 가장 많다. 신생(新生) 대한민국의 숨통을 지켜내기 위해 국군과 미군, 탄약과 식량을 날랐던 노무원들이 이곳에서 쓰러져 간 것이다.



그해 8월 15일을 앞두고 다부동 전선의 위기감은 커져 갔다. 방어 전면의 중간을 맡은 국군 1사단 12연대는 처음부터 불리한 싸움을 벌였다. 적은 12연대가 유학산(839m)과 수암산(519m)에 포진하기 전에 먼저 그곳을 차지했다. 밑에서 위로 치고 올라가야 했던 12연대는 수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혈전을 거듭했다. 산등성이에 먼저 올라선 적을 향해 12연대는 계속 전진을 시도했다. 총격은 물론이고 적에게 가까이 다가가 수류탄도 투척했다. 수류탄이 바닥나면 돌멩이를 던졌다.



우익의 11연대도 위기를 맞고 있었다. 적은 상주와 다부동을 잇는 간선도로에 전차와 중포(重砲)를 집결해 정면 돌파를 시도하고 있었다. 새로 손에 쥔 3.5인치 로켓포를 동원해 필사적으로 저지에 나섰으나 11연대는 천평동 삼거리에서 진목동까지 3㎞를 밀려나고 말았다.



도로 양쪽의 산에선 아군인지 적군인지 서로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병력이 뒤섞였다. 각 대대와 중대 지휘관들이 앞장서 분전을 계속했다. 방어선 전체가 흔들리면서 간선도로 양쪽의 산에서는 아군과 적군이 한데 엉겨 찌르고 때리는 백병전(白兵戰)을 벌이고 있었다.



8월 15일에는 상황이 더 달아올랐다. 절정이었다. 아군과 적군 사이가 너무 가까워져 이제는 아예 소총보다는 수류탄으로 서로 공격하는 양상이었다. 21㎞의 모든 전선이 이랬다. 고지 곳곳에 시신이 쌓였다. 아군과 적이 그 시신을 방패 삼아 싸우고 또 싸우는 처참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전선의 상황이 너무 급해 학도병 등으로 신병(新兵)을 받아도 이들을 제대로 훈련시킬 여유가 없었다. 이들은 겨우 3~4시간 동안 기본적인 소총 사격 훈련과 수류탄 투척 요령만 습득한 뒤 곧바로 전선으로 향했다. 부대원들은 이들 신병을 ‘고문관’으로 불렀다.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다고 해서 붙인 별칭이다. 그 나이 어린 ‘고문관’들은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산으로, 고지로 올라가 젊음을 조국에 바쳤다.



유학산과 수암산의 능선이 이어지는 고지 곳곳은 시신 썩는 냄새로 가득했다. 적정(敵情)을 살피기 위해 낙동강을 건넜던 15연대 수색대의 경험담이다. 이들은 미군의 융단폭격이 펼쳐지기 전인 8월 13일 적의 집결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길을 나섰다. 밤 11시쯤 강을 건너기 위해 물에 들어선 그들은 그만 지독한 악취에 뛰쳐나와야 했다. 물속에서 시신 썩는 냄새가 너무 강하게 풍겼기 때문이다. 같은 핏줄, 같은 언어, 같은 모습의 민족끼리 벌이는 싸움의 비참한 광경이 전선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1950년 8월 낙동강 전선에서 국군과 미군은 북한군의 총공세를 막아 대한민국 최후의 숨통을 지켜내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이 과정에서 전쟁에 뛰어든 젊은 생명들이 수없이 스러져 갔다. 낙동강 전투 유해발굴단이 9일 전쟁 당시 부산 교두보의 최남단이었던 경남 함안군에서 국군 장병으로 추정되는 유해를 발굴했다. 발굴 작업에 참가한 장병이 60년 만에 햇빛을 본 유해를 작은 관에 옮긴 뒤 약식으로 제례를 올리고 있다. [창원=연합뉴스]

 

 

 

육군본부가 당시 우리 1사단을 조사한 적이 있다. 일선의 전투상황을 때맞춰 보고하는 ‘일보’를 제출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중령을 반장으로 한 조사단이 사단 사령부에 도착했다. 그들을 15연대 전투 현장에 가게 했다. 그들은 행정규정만을 들이댔다. 작전 지역의 대대장은 “그렇다면, 일단 가 보신 다음에 판단하시라”면서 현장으로 데려갔다고 한다.



조사단은 고지에 오르지 못했다. 그곳으로 올라가는 산길 곳곳에서 나는 시신 썩는 냄새로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무런 말 없이 돌아갔다. ‘일보’에 대한 재촉은 더 이상 없었다.



희생자는 계속 늘었고, ‘고문관’으로 불리는 신병들은 계속 도착했다. 한 차례 격전을 치르고 나면 부대원의 30~40%가 사라졌다. 이들은 신병으로 교체됐다. 나중에는 분대장이 자신에게 배속된 분대원의 얼굴과 이름도 모른 채 전투에 나서는 지경에 이르렀다. 군적(軍籍)도 없이 죽어간 무명용사들, 그들은 대한민국의 오늘을 떠받친 주역이다.



백선엽 장군

[출처: 중앙일보] [6 · 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53) 처참한 살육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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