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섭의 그레이트 게임과 한반도

[<8> 러 · 청 체제의 탄생과 조선 ㅡ 네르친스크 평화조약]

드무2 2023. 11. 10.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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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러 · 청 체제의 탄생과 조선 ㅡ 네르친스크 평화조약] 

 

 

 

러시아군의 시베리아 정복 전투를 묘사한 바실리 수리코프 (Vassili Sourikov)의 유화 ‘예르마크의 시베리아 정복 (1895)’. 러시아는 시베리아 정복 등 동진을 추진하면서 17세기 청나라와 충돌하게 된다. 조선은 청나라의 파병 요청에 1654년과 1658년 두 차례 부대를 파견해 청나라와 함께 러시아와 싸웠다. 이 두 차례 ‘나선정벌’에서의 승전은 조선이 청과 러시아의 실체를 체험하는 군사적 기회가 됐다. / 게티이미지코리아

 

 

 

효종의 나선 <러시아> 정벌은 17C 북벌론 <"청을 응징하라">과 18C 북학론 <"청을 배워라"> 사이의 징검다리였다

 

 

 

남진하러 러, 흑룡강서 청과 충돌

만 · 한 대결에 골몰하던 청의 패퇴

청, 1654년 조선 효종에 파병 요구

 

 

조선은 羅禪, 청은 羅刹로 부른 러

나찰은 "사람 먹는 악귀" 라는 뜻

조선에는 청이 '악귀' 보단 나았다

 

 

청 · 조 연합군 나선정벌 승리 후

청 · 러는 네르친스크서 평화조약

상대 조심하며 각각 동 · 서로 팽창

 

 

 

17세기의 이상 저온은 유라시아 대륙의 반대편에서 러시아인들의 동진을 촉진시켰다. 강추위로 인해 모피 수요가 증대함에 따라 시베리아의 담비, 수달, 밍크 등을 사냥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시베리아의 하천들은 결빙기에는 썰매, 해빙기에는 배로 종횡무진 이동 가능한 고속도로가 되었다.

청나라는 양자강 이남에서 만ㅡ한 (만주족ㅡ한족) 대결에 골몰하느라 러시아 원정대의 등장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조선의 효종은 명나라의 부흥 가능성을 엿보며 반청 북벌군을 양성했다. 그러나 이 북벌군은 청을 도와 러시아라는 새로운 적과 싸워야 했다.

 

 

 

그래픽 = 양진경

 

 

 

러시아의 팽창과 러 · 청 분쟁

오늘날 우크라이나 인근의 코사크인들은 시베리아 정복의 선봉에 섰다. 러시아 정교는 새로운 공간을 소화해내는 정신력을 제공했다. 그 모습은 마치 잉글랜드인들에게 정복당한 스코틀랜드인들이 대영제국의 팽창에 앞장서기도 했던 모습을 연상시킨다.

러시아의 국경선은 15세기 “영토 수집가” 라고 불렸던 이반 3세 때부터 빠르게 바뀌었다. 그것은 지켜야 할 선이 아니라 특정 시점에서 형성된 힘의 관계에 불과했다. 1639년 모스크비틴 (Ivan Moskvitin) 원정대는 오호츠크 (Okhotsk)해에 도달했다.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태평양에 도달한 것이다.

1643년 코사크인이었던 포야르코프 (Vassili Poyarkov)의 원정대는 겨울에 동사한 동료들의 시신들과 함께 (식인설도 있다) 새봄을 맞이했다. 만주인들이 북경을 점령했던 1644년의 봄이었다. 살아남은 이들은 아무르강 (흑룡강) 유역을 밟은 첫 번째 러시아인들이 되었다. 이어서 하바로프 (Yerofey Khabarov) 원정대가 “시베리아의 파리” 라 불리는 하바롭스크의 토대를 닦았다.

러-청 분쟁의 초점은 1651년 (효종 2년) 아무르강 상류의 알바진 (Albazin)이었다. 러시아인들은 알바진에 목책 요새를 건설하고, 송화강과 오소리강까지 남진하다 만주인들과 충돌했다. 팔기군의 주력이 양자강 이남에서 명나라 잔존 세력과 싸우고 있던 만주인들은 1652년 우찰라 (烏札拉) 전투에서 러시아 원정대에 패배했다. 효종의 북벌군이 원래 목적대로라면 이때 러시아와 소통했어야 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러시아 원정대의 정체도 알지 못했다.

 

 

러 · 청 평화에 기여한 나선정벌

코사크인들로 구성된 러시아 원정대를 조선에서는 나선 (羅禪)이라고 불렀다. 러시안 (Russian)의 한자음이다. 그런데 청나라에서는 나찰 (羅刹)이라고 불렀다. 사람을 잡아먹는 악귀라는 뜻이다. 17세기 시베리아에서 잔혹하게 생존했던 코사크 원정대에게 붙여진 청나라식 명명이었다. 상대방을 괴물로 묘사하는 것은 자국민의 투항을 막기 위해 자주 사용되는 선전술이기도 하다.

1654년 (효종 5년) 2월 청나라는 조선에 파병을 요구했다. 효종은 청을 징벌하겠다던 원래 목표와 달리 변급 (邊岌) 부대를 파견하여 청을 지원했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그래도 유교 질서를 받아들이기로 한 만주인들이 북쪽의 나찰들보다는 나았다.

4년 후인 1658년에는 신류 (申瀏)가 이끄는 약 200명의 조총부대가 파견되었다. 네덜란드인 벨테브레 (Jan Weltevree)와 하멜 (Hendrik Hamel) 등이 징용된 훈련도감 (訓鍊都監)에서 육성된 병사들이었다. 이들은 청군과 합세해 아무르강 (흑룡강)에서 러시아 원정대를 공격했다 (신류, ‘북정록’). 러시아 원정대는 스테파노프 (Onufriy Stepanov) 대장을 포함 약 270명이 전사하고, 패퇴했다.

나선정벌의 승전은 아직 송시열 등의 북벌론이 드세던 조선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그래도 그것은 대륙에서 청과 러시아의 실체를 체험한 소중한 군사학적 기회였다. 나선정벌은 17세기 북벌론과 18세기 북학 (北學)론 사이의 징검다리였다. 청으로부터 배울 것은 배우겠다는 18세기 북학론이 대두되기 앞서 나선정벌은 조선에 다른 세계를 보여주었다.

조 - 청 연합군이 나선정벌에서 승전한 이후 강희제는 강남의 주력군을 북상시켜 1685년 알바진을 공격했다. 러시아의 남진은 청과 조선의 힘에 꺾였고, 1689년 네르친스크에서 평화협상이 시작되었다.

 

 

네르친스크평화체제 속의 조선

1689년 동유라시아의 운명을 바꾼 네르친스크 조약의 원본은 라틴어로 쓰여졌다. 청황제 공덕비 (삼전도비)에도 쓰였던 몽골어 대신 라틴어가 사용된 배경에는 당시 통역을 담당했던 몽골인들이 몽골 잔존 세력에 유리하게 통역하고 있다는 의심이 있었다. 대신 강희제가 신뢰했던 예수회 신부 페레이라 (Thomas Pereira)와 제르비용 (Jean-François Gerbillon)이 러시아 정교의 사제들과 라틴어로 소통했다. 알바진 요새 철거, 새로운 경계선 획정, 투항자 송환 문제 등이 조약문에 포함되었다. 청-러 대전은 회피되었고, 조선도 ‘긴 평화’ 의 시대에 안주하게 되었다.

네르친스크 조약의 부본 (副本)은 러시아어와 만주어로 쓰여졌고, 한문본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강희제로서는 굳이 한문본을 만들어 이 조약을 한인 대중에게까지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명나라 황제를 계승해서 “유일한 하늘의 아들 (天子)” 로 보이고자 했던 그로서는 또 다른 동급의 지배자와 조약을 체결했다는 사실은 숨기는 편이 나았다.

네르친스크 조약을 통해 평화를 만든 두 신흥 강대국들은 각자가 노리는 새로운 공간에서 전쟁을 이어갔다. 러시아는 네르친스크 조약에서 약속했던 경계선을 우회하여 일본의 북부를 위협했다. 태평양도 러시아의 팽창을 막지 못했다. 러시아 세력은 베링해를 건너 알래스카로 이어졌고, 캘리포니아 북부까지 뻗었다.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북쪽 경계를 획정한 청 제국은 서쪽으로 팽창했다. 과거 몽골의 후예로서 러시아의 동맹국이었던 준가르는 청 제국의 ‘평정’ 에 의해 소멸되었다. 전통적 동맹국 러시아는 더 이상 준가르를 도와주지 않았다. 티벳과 위구르 지역도 청 제국에 정복되었다. 네르친스크에서 이루어진 강대국들 간의 평화는 약소국들에게는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었다. 그것은 1970년대 냉전의 일시적 해빙기 (데탕트)에 월남 (남베트남)이 소멸한 것과도 같았다.

 

 

 

김명섭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조선의 북벌군 양성에 네덜란드인 벨테브레이 · 하멜이 동원됐다

1637년 병자호란 당시 세 명의 네덜란드인들이 조선을 위해 싸우다 두 명이 전사했다. 살아남은 한 명은 전사한 네덜란드인들과 함께 1627년 제주도에 표착했던 벨테브레 (Jan Jansz Weltevree, 박연)였다. 그는 명나라를 통해 전해졌던 네덜란드 홍이포 (紅夷砲)의 사용 및 제작법을 알려주며 연명했다. 네덜란드로 귀환하고자 했지만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 날아갈 수 없다면 포기하는 것이 좋다” 는 답변을 들었다.

1653년에는 같은 네덜란드 출신의 하멜 (Hendrik Hamel) 일행이 제주도에 표착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으로 네덜란드 상관 (商館)이 있던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중이었다. 제주도로 파견된 벨테브레는 하멜을 만났다. 하멜은 송환을 원했지만 벨테브레와 함께 훈련도감에 징용되었다.

가까스로 여수에서 나가사키로 탈출한 하멜은 동인도회사로부터 13년간의 급여를 받기 위해 자세한 일지를 작성했다. 그리고 ‘스페르베르호의 난파 및 조난자들의 켈파르섬 (제주도) 및 코레아 본토에서의 모험들 (1653 ~ 1666)에 관한 이야기 : 그 왕국에 대한 설명과 함께’ 란 긴 제목의 단행본을 1668년 네덜란드에서 출간했다. 하멜과 함께 탈출하지 못한 네덜란드인들은 일본의 중재로 나가사키를 거쳐 귀환할 수 있었다. 17세기 조선 정부는 네덜란드 조난자들을 억류해 놓고 총포 기술을 배우기 보다 고향으로 송환하여 세계와 소통했어야 했다.

 

 

[출처 : 조선일보 2023년 8월 3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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