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혜의 살롱 드 경성

[불교 · 무속 · 민속 넘나들며 韓 기층문화 그린 박생광]

드무2 2023. 12. 3.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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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 무속 · 민속 넘나들며 韓 기층문화 그린 박생광]

 

 

 

박생광이 80세에 그린 1984년 작 ‘명성황후’. 흰옷을 입고 평안히 눈 감은 명성황후와 대조적으로, 백성들의 절규하는 표정이 인상적이다. / 개인소장

 

 

 

몸무게 40㎏의 작은 사내는, 화폭 위를 기어 大作을 그렸다

 

 

 

오방색 덮은 강렬한 회화

전통 기반한 새로운 표현

말년에도 日 건너가 수련

"후세에 보여주기 위해"

 

 

 

“징검돌을 딛고 기우뚱거리며 내를 건너 한 늙고 가난한 화가의 집에 갔다. 방바닥에 그림이 가득히 펼쳐져 있어 (작품을) 딛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고린내 나는 내 발자국이 그 위대한 노화가의 작품에 찍혀 역사 속에 남겨질 것을 생각하며 다시 징검돌을 건너 돌아왔다. 뭔가 장엄하고 감격스러운 경험이었다.”

이경성 전 (前) 국립현대미술관장이 북한산 자락 우이천 언저리 허름한 국민주택에 살던 화가 박생광 (1904 ~ 1985)의 집을 다녀오면서 쓴 글이다. 방바닥에 발 디딜 구석이 없었던 것은, 3평 남짓한 화실이 너무 작았던 탓도 있지만, 박생광이 그리던 그림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늙고 가난한 화가” 는 3m 넘는 종이를 바닥 전체에 펼칠 수가 없어서, 한쪽을 그리고 나면 말아가면서 다른 쪽을 그렸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한 번도 화면 전체가 화가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고린내 나는 발자국” 이 작품 위에 찍힐 것을 이경성 관장은 염려했지만, 박생광은 그것도 괘념치 않았을 것이다. 화가 자신은 아예 그림 위를 기어다니면서 작품을 제작했기 때문이다. 157㎝ 키에 40㎏ 몸무게를 지녔던 ‘소인’ 박생광은 한 손에 붓을 들고, 기는 자세로 엎드리거나 한쪽 무릎을 세우고 쪼그려 앉아 넓은 화폭 위를 굴러다니며 그렸다. 그러다 밤이 되면 방구석에서 “그냥 솜이불 하나 겹쳐 깔고 송충이처럼 기어 들어가 잔다” 고 했다. ‘명성황후’ 같은 한국미술사의 빛나는 걸작이 그렇게 탄생했다. 박생광의 나이 80세 무렵 일이다.

 

 

갈고닦은 실력

박생광은 러일전쟁이 한창일 때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한 전력이 있고, 일본을 거쳐 하와이로 망명 갔다가 돌아와 1941년 작고했다. 모친은 언제 돌아가셨는지 묘소가 어디 있는지조차 모른다. 양친 모두 원래 고향이 전라북도 전주 인근이었다고 하나, 박생광이 태어났을 때는 몸을 피해 경상남도 진주에 터를 잡은 후였다. 박생광의 운명은 시작부터 뭔가 심상치 않았다.

그를 화가의 길로 인도한 사람은 고등학교 선생님이었다. 진주고등농림학교 재학 시절 그림에 놀라운 재능이 있음을 알아본 일본인 교사가 1920년 박생광의 일본 유학을 도왔다. 박생광은 교토 회화전문학교를 다니면서 정통 일본화 기법을 기초부터 습득했고, 도쿄에서 꽤 저명한 화가였던 오치아이 로후 (落合朗風) 화숙의 신임받는 조교로 성장했다. 이중섭 · 김환기 등이 활동한 자유미술가협회에 출품했고, 메이로 (明朗)미술전을 주 무대로 탄탄한 회화 실력을 인정받았다. 간혹 조선을 다녀가긴 했지만 박생광은 해방될 때까지 대체로 일본에서 20년 넘게 살았다.

해방 후 귀국했지만, 일본에서 갈고닦은 그의 실력은 써먹을 데가 별로 없었다. 일본색 (日本色)을 탈피해야 한다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채색화 자체가 죄악시됐다. 그래도 할 줄 아는 것이 그림 그리는 것뿐이었기에, 그는 고향 진주에서 무던히도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아내가 대안동에 청동다방을 열어 겨우 생계를 유지했지만, 찢어지게 가난했다. 전기료가 하도 밀려 독촉하러 자주 오는 이가 있었는데 ‘저리 열심히 그려도 어찌 이리 가난할까’ 안타까워 전기세를 대신 내줄 정도였다.

 

 

청담 스님과 박생광

 

 

 

박생광이 1970년대에 그린 ‘모란’. / 개인 소장

 

 

 

끊임없이 정진하는 박생광의 정신 세계를 이해하려면 그가 평생 가장 존경한 인물인 청담 대종사 (1902 ~ 1971)에 대해 알아야 한다. 성철 스님이 “청담과 나 사이에는 물을 부어도 새지 않는다” 고 했던 성철의 지기 청담은, 박생광과도 오랜 친구였다. 청담과 박생광은 진주제일보통학교와 진주고등농림학교를 같이 다녔다. 학창 시절 3 · 1운동에 앞장서 일찌감치 옥고를 치른 청담을 박생광은 유달리 높이 보았다. 청담이 불교 입문 문제로 번민할 때 성금을 모아 그의 일본 유학을 도운 이도 박생광이었다. 그는 한때 불교에 귀의할 생각으로, 옥천사에 청담과 함께 수도하러 들어간 적도 있었다. 결국 청담은 득도한 후 박한영과 만공선사의 가르침을 거쳐 해방 후 한국 불교 정화 운동의 선봉장이 됐지만, 박생광은 옥천사에서 얼마 있지 못하고 나왔다. 술 생각이 나 안 되겠다며.

박생광은 스스로 말한 대로 “속정 (俗情)을 떠나지 못해” 스님이 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청담은 어머니와 아내, 두 딸과 절연한 채 세속의 인연을 끊고 정진을 거듭했지만, 박생광은 결코 그럴 수 있는 위인이 아님을 스스로 잘 알았다. 그는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그대로’ (박생광의 호) 자신을 맡긴 채, 사랑도 고통도 온전히 느끼는 삶을 더 바랐다. 첫사랑이 폐병으로 죽자 이틀간 시체와 함께 지낸 후 영혼 혼례식을 올렸을 정도로 그는 타고난 순정파였다. 부인과 두 아들을 먼저 저세상으로 보냈고, 남은 아들과 딸을 애절하게 사랑하던 그가 어찌 속세의 연을 끊을 수 있었겠는가. 그는 말년에 그림 모델 출신의 마흔 살 정도 어린 여인과 같이 살았다. “연애 감정 없이는 그림을 그릴 활력도 없다” 고 했다.

 

 

"그리고 싶은 그림"

 

 

 

프랑스 파리 ‘85 살롱’ 공식 포스터 이미지로 채택된 1982년 작 ‘무당’. / 가나문화재단

 

 

 

그렇게 속세에서 하루하루 흘러가던 박생광은 청담이 죽은 후 비로소 ‘각성’ 을 한 게 아닌가 한다. 1971년 박생광은 도선사 주지였던 청담 가까이에서 살겠다며 우이동에 터를 잡았건만, 청담은 바로 그해 그만 입적하고 말았다. 입적 하루 전날에도 이화여대에서 강의하고 왔던 청담은 평생 한 가지 교훈을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죽는 날까지 정진하라!

박생광은 1974년 70세 나이에 다시 일본에 가서 3년간 수련과 제작 활동에 집중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1977년 진화랑에서 개인전을 열면서 생애 처음 후원자를 얻는다. 박생광이 먼저 부탁했다. “죽기 전에 그리고 싶은 그림이 있으니 나를 도와 달라.” 그저 묵모란 한 점을 사려고 박생광의 집에 가는 징검돌을 건넜다가, 공무원 출신의 고향 후배 김이환이 그렇게 홀린 듯 후원자가 됐다.

박생광이 “그리고 싶은 그림”은 물감이 매우 많이 들었다. 한국의 오방색 (황 · 청 · 백 · 적 · 흑)이 화면을 뒤덮은, 무서울 정도로 강렬한 그림이었다. 일본에서 들여온 석채 값이 워낙 비쌌기 때문에, 당시 처음 후원한 물감 값만 300만원이었다고 한다. 동부이촌동 아파트가 평당 10만원 할 때였는데···.

 

 

후세에 보여주고 싶은 것

 

 

 

청담이 불교에 입문해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그린 1981년 작 ‘사바세계의 청담대종사’. / 개인 소장

 

 

 

비싼 물감으로 작정하고 그린 박생광의 작품은 놀라운 것이었다. 일단 그는 청담 스님을 총 6점이나 그렸다. 청담이 출가해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담은 ‘사바세계의 청담대종사’는 3m에 달하는 대작이었다. 불교 탱화에서 본 것 같은 강렬한 색채와 빽빽한 화면 구성이 특징인데, 그렇다고 박생광의 작품이 불화 (佛畵)는 아니었다. 그의 그림에는 어떤 틀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이 있었다. 박생광은 황해도 출신의 만신 김금화의 굿에도 심취했다. 1981년 김금화가 신딸에게 하는 신내림 굿을 박생광은 사흘 밤낮 잠도 안 자고 지켜봤다. 그의 진지한 태도에 놀란 누군가가 무당을 믿느냐고 물었더니 “나는 무당을 믿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면 모를까” 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결국 박생광은 불교 · 무속 · 민속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 한국의 ‘기층문화’ 를 탐구했다고 할 수 있다. 기층문화는 외래의 새로운 사상이 아무리 들어와도 저변에 깔려 변하지 않는 ‘민초’ 의 자생적 문화다. 한국의 민초는 온갖 애증과 고통을 안은 채, 아주 단순한 바람을 지니고 있다. 아프지 않게 해 달라, 헛되이 죽지 않게 해 달라, 억울하지 않게 해 달라 ···. 뭔가 대단히 잘되기를 바라기보다, 그저 액운을 물리치는 데 만족한다. 한국의 기층문화는 애통함과 어리숙함과 염원이 뒤범벅돼 있지만, 또한 뭔지 모를 장엄함과 강인한 저력이 숨 쉬고 있다. 집에 걸기에는 너무 세고 무서운 이런 그림을 왜 그리냐는 말에, 박생광은 “후세에 보여주기 위해서” 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문화의 뿌리를 더듬어 가장 전통적이면서도 새로운 색채와 표현법으로 후대에 남기고 싶었던 것이다.

 

 

화가의 최후

 

 

 

죽기 전 마지막으로 그린 1985년 작 ‘노적도’. 누추한 모습으로 유유자적 떠나는 자신의 모습을 자조적으로 담았다. / 대구미술관

 

 

 

최후에 그는 역사화를 그렸다. 1984년 ‘명성황후’ 를 완성했고 이듬해 ‘전봉준’ 을 그렸다. 다음으로 안중근과 윤봉길을 그릴 참이었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박생광은 이미 1984년 7월 후두암 판정을 받은 상태였다. 허락된 시간이 얼마 없어 화가의 마음은 더 급했다. 하루 10시간 넘게 작업에 매달렸다. 김이환은 박생광이 후두암에 걸린 것이 늘 입으로 빨아서 다시 뱉어냈던 경면주사 때문이라고 한탄했다. 물감 중에서도 유독 비쌌던 주사 (朱沙)를 쓴 후에 박생광은 붓을 꼭 입으로 씻었다. 입안에서 애무하듯 물감을 빨아 당긴 후 물감 접시에 조심스레 뱉어 다시 사용했다. 이 대목에서 도선사 옆으로 흐르는 우이천 계곡물도 아껴 쓰라고 했던 청담의 얘기가 떠오른다. 흐르는 물조차 아랫물을 취할 사람들이 넉넉히 공유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는 생각. 그런 청담의 생각과 마찬가지로, 박생광 또한 물감을 아껴 후세에게 보여줄 그림이 그리 많았던 것이다.

이경성은 박생광의 ‘사바세계의 청담대종사’ 를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 걸어두었는데, 프랑스미술협회장이었던 아르노 도트리브가 이 작품을 그린 화가를 꼭 만나고 싶다고 해서, 1984년 징검돌을 함께 건넜다. 도트리브는 좁은 화실에 쪼그려 앉은 화가에게 이듬해 파리 살롱에 특별전을 꾸미고 싶다고 했다. 박생광의 작품 ‘무당’ 이 파리 그랑팔레에서 열렸던 ‘85 살롱’ 공식 포스터 이미지로 채택돼 그해 파리 전역에 걸렸다.

그러나 박생광은 파리에 가보지도 못하고 그해 영면했다. 그가 그린 마지막 작품은 ‘노적도 (老笛圖)’ 였다. 누추한 노인 하나가 긴 피리를 입에 물고 표표히 구름 위로 날아가는 그림이다. 박생광은 화실에서 “송충이처럼 기어 들어가” 잠을 자면 간혹 꿈을 꾼다고 말했다. “내가 두 손을 꼭 쥐면 어린애가 되어 두둥실 하늘을 나는 꿈을 꾼다.” 그는 그렇게 꿈같이 이승을 떠났다.

 

 

 

김인혜 미술사가

 

 

[출처 : 조선일보 2023년 9월 2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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