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뉴스 속의 한국사

[제2대 국회의원 선거]

드무2 2024. 3. 13.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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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국회의원 선거]

 

 

 

 1950년 5월 30일 시행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성북구 후보로 입후보한 조소앙 후보의 선거 홍보물. 앞면에 조소앙의 사진과 함께 ‘던지자! 양심의 일표 조소앙 선생에게!!’ 라는 문구가 있어요.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의원 후보 3분의 2가 무소속··· 재선은 15%뿐

 

 

 

대한민국이 처음으로 주관한 선거

통일 정책 · 내각제 개헌이 최대 이슈

6 · 25로 의원 27명 납북, 3명은 피살

 

 

 

내년 4월 10일은 22대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선거가 있는 날입니다. 미군정 통치하에서 1948년 실시된 5 · 10 총선은 잘 알려져 있으나, 1950년 5월 30일 진행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 (5 · 30 선거)는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어요. 5 · 30 선거는 대한민국 정부가 최초로 주관한 선거이고, 제헌국회 2년의 활동을 국민에게 평가받는 선거였어요.

 

 

5 · 30 선거 이전 남한의 정치 상황

1948년 8월 15일 이승만 정부가 출범했으나 정국은 혼란스러웠습니다. 5 · 10 총선 직전 발생한 제주 4 · 3사건이 여전히 진행 중이었고, 이후 여수 · 순천 10 · 19 사건까지 발생했어요. 38선에서는 소규모 전투가 계속 발생했고, 총선에 참여하지 않은 김구와 중도파, 지하에 숨어든 남로당계는 반 (反)이승만 세력을 형성했어요. 농지개혁은 실시 전이었고, 정부 출범 후 물가 폭등이 진정되지 않아 서민의 불만이 컸어요.

제헌국회 내에는 친 (親)이승만 세력과 한국민주당 계열 국회의원이 중심이 된 민주국민당 (민국당), 그리고 이른바 '소장파 (少壯派 · 어떤 조직이나 단체 안에서 주로 젊은 층이 모여 이룬 세력)' 가 중심을 이루고 있었어요. 소장파는 미군 철수, 평화 통일, 강력한 반민족행위자 처벌을 주장했으나, 1949년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세력이 약화됐어요. 결국 제헌국회 내에서는 친이승만 세력과 민국당이 권력을 나눠 가졌습니다.

당시 국민은 국회의원, 정부 각료, 특히 이승만 대통령에게 많은 기대를 했어요. 국민은 이승만 대통령이 정치를 잘해 점점 나라가 안정되고 서민 경제는 좋아질 것이라고 기대했어요. 그러나 그러한 기대가 점점 약해져 이승만 대통령과 정부, 제헌국회의 인기는 시들해졌어요.

 

 

선거구 210개, 후보 2230명

국회의원 선거법은 1950년 4월 12일 제121호 법률로 공포됐어요. 전국 선거구는 오늘날과 같이 소선거구제로 하되, 선거구는 기존 200개에서 210개로 늘어났어요. 5 · 10 총선에서는 선거인이 선거인 등록소에 가서 등록을 마쳐야 선거를 할 수 있었으나, 5 · 30 선거에서는 시 · 읍 · 면의 장이 선거권자를 조사해 연명부를 작성했어요. 유권자 수는 908만4889명이었어요.

입후보자 등록 기간은 4월 21일부터 5월 5일까지였어요.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관위)가 발표한 입후보자 수는 2230명이었어요. 소속별로는 대한국민당 (친이승만 세력) 168명, 민국당 151명을 필두로 43개 정당·사회단체가 선거에 참여했어요. 입후보자 중 무려 1513명 (67.8%)이 무소속이었답니다.

5 · 30 선거는 입후보자가 난립하고 무소속 출마자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특징이 있어요. 정당이나 사회단체에 대한 국민 불신이 커 소속을 밝히지 않는 것이 당선에 유리했기 때문이에요. 당시 후보들은 김씨 · 이씨 등 문중을 배경으로 하거나 군수 · 면장 · 경찰서장 등 기댈 만한 경력이 있으면 출마했어요. 입후보자는 많으나 뚜렷한 인물이 없는 지역구가 많았다고 할 수 있죠. 또 같은 단체 소속 출마자가 동일 선거구에 입후보해 공천제가 무너졌어요.

그래도 5 · 10 총선에 비해 긍정적인 측면은 중도파가 선거에 참여했다는 점입니다. 중도파는 1950년 1월부터 선거를 준비해 약 90명이 입후보했는데, 대표적으로 안재홍 · 조소앙 등이 있어요.

5 · 30 선거 유세 과정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주제는 통일 정책과 헌법 개정 문제였고, 경제 문제는 후보 간 큰 차이가 없었어요. 친이승만 세력은 무력 증강과 북진 통일론을 주장했고, 민국당은 국제연합의 협조, 민족 자체의 경제적 발전, 군사 실력 보유 등을 주장했어요. 이에 반해 중도파는 무력 통일에 반대하고 평화 통일을 내세웠어요.

내각책임제로의 헌법 개정은 선거 이전부터 가장 큰 논점이었고, 선거 후에도 개헌 논의가 계속됐어요. 제헌국회 내에서 반이승만 세력 중심이었던 민국당은 원내 · 외에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한 후 내각책임제 개헌을 추진했어요. 1950년 1월 27일 내각제 개헌안을 제출했으나, 3월 14일 표결 결과 재석 179명 의원 중 찬성 79표, 반대 33표, 기권 66표, 무효 1표로 부결됐어요. 이후 민국당은 내각책임제 개헌에 찬성하는 입후보자에게만 공천을 줬어요.

선거운동으로 도시에서는 전단과 포스터를 많이 이용했어요. 농촌에서는 마을마다 운동원을 둬 유권자 한 사람씩 접근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농촌 대부분 지역은 대개 유권자가 2만 ~ 3만명인 곳에 10여 명이 입후보했기 때문에 선거구 전체에서 유세하기보다는 2 ~ 3개 면 단위에서만 유세했어요. 입후보자는 농민에게 쌀 · 비누 · 수건 등을 나눠주거나 장날 장 보러 오는 농민에게 막걸리를 사는 경우가 많았다고 해요.

 

 

투표율 92.2% 달해

선관위 집계 결과 투표율은 92.2%로 매우 높았어요. 정당 단체별 당선 현황을 보면 무소속 127명, 민국당 24명, 대한국민당 23명, 국민회 14명, 대한청년단 10명 등이었고, 나머지 8개 정당 단체에서 당선자를 1 ~ 3명 배출했어요. 당선자 중 최고 득표자는 성북구에서 출마한 조소앙이었으며, 득표 수는 3만4035표였어요. 최저 득표자는 2220표로 경북 금릉군에서 당선된 서인환이었어요. 5 · 10 총선에서는 1만표 이하 당선자가 전체 198명 (제주도 2개구는 4 · 3사건으로 선거 연기) 중 무투표 당선자 12명을 포함해 76명 (38.4%)이었는데, 5 · 30 선거에서는 전체 210명 중 133명 (63.3%)을 차지했어요. 또 제헌국회 의원 중 재선된 의원은 31명밖에 되지 않았고, 초선 의원이 179명 (85.2%)이었어요. 선거 결과를 요약하면 '무소속 초강세, 민국당과 친이승만계의 패배, 중도파 성향 조소앙 등 일부 당선' 으로 요약할 수 있어요.

2대 국회는 개원 직후 6 · 25 전쟁이 발발해 정상적인 활동이 불가능했고, 서울 수복 후 원내 교섭단체를 결성해 활동을 시작했어요. 전쟁 중 의원 27명이 납북됐으며 3명은 피살되고, 5명은 사망했어요. 또 휴전협정 후 일부 의원의 지역구는 북한령이 돼 지역구가 사라졌어요.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리시 (현재 전북 익산시)에 출마한 김진태 (무소속) 후보 선전물.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리시에 출마한 기호 7번 이종만의 명함형 소형 인쇄물.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제2대 국회의원 선거법 소책자.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2대 국회의원 선거 때 전북 제17선거구 (부안군) 투표 용지.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2대 국회의원 선거 기념우표.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이환병 관악고 교감

 

기획 · 구성 = 김윤주 기자 (yunj@chosun.com)

 

[출처 : 조선일보 신문은 선생님 2023년 12월 14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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