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좋은 글 .../최영미의 어떤 시

[눈보라]

드무2 2024. 3. 13.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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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

 

 

 

일러스트 = 박상훈

 

 

 

눈보라

 

들판에서 눈보라를 만나 눈보라를 보내네

시외버스 가듯 가는 눈보라

한편의 이야기 같은 눈보라

이 넓이여, 펼친 넓이여

누군가의 가슴속 같은 넓이여

헝클어진 사람이 가네

그보다 더 고독한 사람이 가네

그보다 더 기다리는 사람이 가네

눈사람이 가네

눈보라 뒤에 눈보라가 가네

 

ㅡ 문태준 (1970 ~)

 

 

 

‘눈보라’ 로 이런 시도 쓸 수 있구나. 강한 바람에 눈이 날려 시야가 흐려지고 심할 때는 몇 미터 앞도 보이지 않는다. 따뜻한 실내에 앉아, 카페의 유리창 밖에 흩날리는 눈을 바라보는 것은 기분 좋은 낭만이지만, 세찬 눈보라 치는 바깥을 걸어가는 일은 피하고 싶다. 어릴 적에는 눈보라가 두렵다기보다 신기했지만, 지금은 눈보라에 내 몸이 젖는 게 싫어 우산을 펼쳐든다.

그 매서운 눈 부스러기들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넓이’ 를 이야기하는 시인이 여기 있다. ‘눈보라’ 의 탄생에 대해 문태준 시인은 어디선가 이렇게 썼다. “아득하게 너른 들판을 지나가는 눈보라를 한참을 바라보았던 때가 있었다··· 눈보라는 앞뒤 사정이 많은 한 사람의, 신산한 세상살이 같기도 하고, 우리가 가끔 갖게 되는 쓸쓸한 내면의 풍경 같기도 하다.”

‘헝클어진 사람’ ‘그보다 더 고독한 사람’ ‘그보다 더 기다리는 사람’ 의 점층법도 효과적이다. 모두 가고 눈보라만 남았다.

 

 

최영미 시인 · 이미출판 대표

 

 

[출처 : 조선일보 2023년 12월 18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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