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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얼음이 반짝인다 ㅡ 첫 추위]
살얼음이 반짝인다
ㅡ 첫 추위
가장 낮은 자리에선
살얼음이 반짝인다
빈 논바닥에
마른 냇가에
개밥 그릇 아래
개 발자국 아래
왕관보다도
시보다도
살얼음이 반짝인다
ㅡ 장석남 (1935 ~)
첫추위는 벌써 왔는데 살얼음을 보지는 못했다. ‘논바닥’ ‘냇가’ 라는 단어가 정겹다. ‘논바닥’ 은커녕 ‘논’ 도 본 지 오래되었다. 기차를 타고 푸른 물결처럼 출렁이는 논을 휙휙 지나치기는 했다. 아파트에 살면서 논도 밭도 냇가도 구경 못 하니 계절 변화는 달력을 넘기거나 ‘오늘의 날씨’ 를 검색해야 실감 난다.
5행의 “개밥 그릇” 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개를 무서워하는 나는 개밥 그릇만 봐도 무서워 멀리 도망갔다. 개를 키우는 친구 집에 갈 때는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개 붙잡아 둬” 를 애걸하곤 했는데, 내가 저를 무서워하는 줄 어떻게 알고 친구네 강아지는 나만 보면 크게 컹컹 짖었다.
“개밥 그릇” 뒤에 “개 발자국 아래” 를 붙인 게 신의 한 수. “가장 낮은 자리” 와 “왕관” 의 대비도 근사하다. 왕관보다도 낮은 자리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서 반짝이는 살얼음이 아름답다는 역설. 시보다도 예술보다도 자연이 가장 아름답다.
최영미 시인 · 이미출판 대표
[출처 : 조선일보 2023년 12월 11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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