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G 모태 된 '구매의 예술화' 이건희 삼성 회장]
고 (故)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 '상생' 의 개념 조차 없던 시절 이 회장은 협력사와의 공존을 모색했다. / 삼성전자
[다시 기업가 정신] (下) ESG 모태 된 '구매의 예술화' 이건희 삼성 회장
"삼성의 궁극적인 목표는 인재와 기술을 바탕으로 최고의 제품과 서비스를 창출해 인류 사회에 공헌하는 것입니다."
삼성의 경영철학과 목표이자 매년 펴내는 지속가능보고서의 서두다. 기업의 성장과 이익이라는 말대신 인재와 기술, 공헌이라는 단어가 눈에 띈다. 경영철학에서 '공헌' 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만큼 삼성의 ESG 경영의 성과는 눈부시다.
고 이건희 회장이 2003년 10월 경기도 화성 삼성전자 메모리 연구동 전시관에서 차세대 메모리 산업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 삼성전자
삼성의 ESG 경영 주요 성과를 살펴보면, 2022년 온실가스 BAU (배출 전망치) 대비 감축량은 1016만 톤CO₂e로 전년 대비 59% 증가했고 재생 에너지 전환율은 31%에 이르렀다. WBA (World Benchmarking Alliance) 기업인권벤치마크 (CHRB)는 ICT 제조기업 부문 2위, 디지털 포용성 평가 (DIB)는 7위를 기록했다. 협력회사 종합평가 우수 등급 취득률 62.1%, 스마트공장 지원사업 수혜 기업 수는 277개에 달했다. 사회공헌 수혜자 수는 66만 761명을 기록했으며 2012년부터 2022년까지 누적 수혜자 수는 2277만 명에 이르렀다. 올 1분기 또한 좋은 성과를 냈다. 4월 한국ESG평가원이 올 1분기 국내 100대 상장기업을 대상으로 ESG 평가 작업을 실시한 결과 삼성이 SK그룹과 함께 82점으로 평가등급 S 최고점을 기록했다.
2011년 이 회장이 21일 오후 서울 서초구 삼성서초사옥에서 경영진들과 사옥을 둘러보고 있다. 이날 이 회장은 "애플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삼성에 대한 견제가 커지고 있다" 고 언급했다. / 뉴시스
나열하기 벅찰 만큼 화려한 ESG 경영 성과에는 바로 고 (故)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의 기업가 정신이 있다. 그가 남긴 어록이자 경영철학인 '구매의 예술화' 는 바로 오늘날 말하는 ESG 경영의 핵심이다.
1993년, 이건희 회장은 구매담당 임직원들에게 마치 시구절 같은 주문을 했다.
"구매를 예술의 차원으로 승화시켜 달라."
모호한 표현이었으나 뜻을 들은 임직원은 모두 수긍했다. 협력업체와 공존경영의 관계를 맺고 성장을 도와 이를 통해 고객만족과 품질향상을 이뤄야만 한다는 뜻이었다. 기업에 있어 구매란, 품질 좋은 제품을 찾아 저렴한 견적서를 제시하고 제조원가를 최대한 낮추는 게 기본 원칙이다. 이 탓에 협력사와의 거래를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기업이 현재도 허다하다.
"'구매의 예술화' 란 말은 내가 직접 만들어낸 말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하며, 정확히 알고, 철저히 실천해야 할 개념이다. 조립양산업은 원가의 80 ~ 85%가 구매원가이므로 협력업체를 지도, 육성해 질을 높여야만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 (중략) 대기업과 중소기업은 '부부' 와 같다. 어느 한쪽도 혼자서는 불완전하며, 힘을 합쳐야 제대로 기능을 발휘한다. 서로 이끌고 밀어주면서 공존공영해야 한다. (이건희에세이)"
이 회장이 중소기업중앙회에 기중한 중소기업인력개발원 전경. / 중소기업인력개발원
협력사 또한 성장하고 상생할 수 있도록 적절한 마진을 남길 수 있도록 하자는 이 회장의 주문은 당장 괜한 비용을 발생시키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 회장은 자신의 생각을 밀고 나갔다. 삼성전자에 협력업체가 필요시 지원할 자금은 물론 정보제공과 현장기술지도를 전담하는 별도 부서를 뒀다. 또 협력업체 성장을 위해서는 국제적으로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는 생각으로 '중소기업인력개발원' 을 만들어 중소기업중앙회에 기증했다.
이 회장이 밀고 나간 상생의 기업가 정신은 곧 눈부신 성과로 돌아왔다. 1993년 매출액 41조원, 영업이익 5000억원이었던 삼성은 2002년 매출액 141조원에 영업이익 14조 2000억원의 글로벌 기업이 됐다. 세계 시장 점유율 또한 D램은 14.0%에서 32.0%로, S램은 6.2%에서 30.1%까지 뛰었다. 10년 사이 5배까지 시장 점유율이 뛰었다.
지난해 7월 열린 삼성의 협성회 회원사 분과회의 모습. 협성회는 1981년 39개사로 시작해 현재 208개사가 가입해 활동 중이다. / 삼성전자
하청업체라는 말은 1980년대 진작 협력업체로 바꿨다. 하청이라는 말이 곧 중소기업을 부리는 듯한 인상을 준다는 판단에서였다. 이를 계기로 삼성전자 협력사들의 협의회인 '협성회' 가 발족했고, 1차 협력사 39개사로 출발한 협성회는 2023년 208개 기업이 회원사로 가입하기에 이르렀다. 이 회장의 비전은 협력사의 성장으로도 성과가 나타났다. 삼성에 따르면 2019년 기준 협성회 201개사 매출 총액은 약 57조 9000억 원, 직원 수는 28만 명에 달한다. 매출액 1조 원 이상 기업은 9개다.
지난 2010년 김포공항 입국장으로 들어서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지긋이 지인들을 바라보고 있다. / 뉴시스
마치 새로운 개념처럼 다가온 ESG 경영은 삼성에는 이미 너무나 익숙한 개념이다. 이 회장이 주장한 구매의 예술화란 기업 활동에서 '구매' 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 경제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중소기업과 상생의 중요성에 대한 메시지다. ESG 경영은 이윤 추구를 위해 비용을 최대한 절감하려는 구시대 기업상과 정반대다. 환경을 생각하며 기업의 이익을 사회와 나누고, 기업 내부는 물론 관계 · 협력사에 이르기까지 성장을 장려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단기간 비용 발생을 감수해야 한다. 이 탓에 현재도 ESG 경영을 기업 성장에 다소 무의미한 것으로 여기는 경영인들도 많다. 이 회장은 30년 전 ESG 경영의 모태를 주장했고, 중요성을 기어이 입증해내고야 말았다.
1980년 고 이병철 삼성 회장과 이건희 삼성 회장의 모습. 이건희 회장은 선대 회장인 이병철 회장의 '사업보국' 정신과 반도체 산업에 대한 확신을 이어받았다. / 삼성전자
조동근 명지대학교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이 회장의 기업가 정신이 빛난 원인을 ▲기존 경영 관습에 대한 자기 부정 및 반성 ▲경영전략의 선도적 변화 등으로 꼽는다. 특히 비전 제시 후 기획과 실행이 이뤄지면서 추진력이 발휘됐다는 설명이다. 조 교수는 "제조업체와 납품업체의 공존공영체제" 로 설명하고 "협력포털, SCM (공급망 관리) 등으로 시스템화하는 데에 이르며 '구매의 예술화' 가 성공했다" 고 평가했다.
메트로신문 김서현 기자 seoh@metroseoul.co.kr
[출처 : 메트로신문 2024년 5월 31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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