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龍]
▲ ①북한 평안남도 강서군 고구려 왕 무덤 '강서대묘' 벽화의 용. ②조선시대 후기 민화 ‘용호도’ 에서 용이 구불구불 구름 위를 날고 있어요. ③지금 중동 이라크 지역에 있던 고대 도시 '바빌론' 의 성벽 입구에 그려진 네 발로 걷는 용. ④⑤16세기독일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의 그림 '용을 처단하는 성 게오르그' 와 17세기 벨기에 화가 페테르 루벤스 (Peter P. Rubens)의 그림 '용과 싸우는 성 게오르그'. 후자가 싸움을 더 역동적으로 묘사했어요. / 위키피디아 · 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 독일 페르가몬 박물관 · 미국 국립미술관 ·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
'드래건 <dragon>' 어원은 큰 뱀··· 서양에선 영웅 방해꾼
중동에서 용은 도시 수호신
문무왕, 동해 용 되어 나라 지킨다
순우리말은 '미르' ··· 물이란 뜻
2024년은 십이지신 (十二支神) 중 용의 해입니다. 쥐, 소, 호랑이, 토끼 등 십이지신 열두 동물 중, 용은 유일하게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전설 속 동물이에요. 그렇지만 용과 관련한 전설과 신화는 동북아시아, 중앙아시아, 유럽 등 여러 지역에서 나타나요. 다만 용의 구체적인 모습은 조금씩 다르답니다. 용이 신비롭고 좋은 역할을 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무섭고 악한 괴물로 나타나는 곳도 있어요. 그림 속에 나타난 용의 다양한 모습을 살펴볼까요?
비 내려주고 복을 가져다주는 동양 용
<그림 1>은 우리나라 옛 고구려 왕의 묘지에 그려진 용 그림이에요. 용은 뱀처럼 긴 몸에 날개와 다리가 달렸고, 큰 눈과 두 뿔도 지니고 있네요. 길쭉한 몸통을 굽이치며 하늘로 훨훨 날아가는 힘찬 기운이 느껴지지요. 이 용은 왕을 지키는 4가지 동물 신을 그린 '사신도' 중 하나입니다. 무덤 중앙에 왕이 누워 있고 용은 동쪽을 수호하지요. 남쪽은 불새, 서쪽은 호랑이, 북쪽은 거북이가 지킨답니다.
우리나라 옛사람들은 용이 물을 다스리는 초자연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어요. 용의 순우리말은 '미르' 인데, 물을 뜻한다고 해요. 농사를 모든 일의 근본으로 삼던 우리 전통 사회에선 당연히 농사지을 물이 소중하지요. 제때 비가 내리는 것은 큰 축복이었고, 용은 물을 다스리며 비를 내려주는 신성한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이 때문에 용은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동물이 됐어요. 용이 고구려 왕 무덤을 지키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죠. 왕이 입는 옷이나 왕실 가구 무늬로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스스로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왕도 있었는데요. 바로 신라 문무왕입니다. 그는 죽어서 나라를 수호하는 용이 되겠다면서, 바다에 묻어달라는 말을 남겼다지요.
조선 시대 서민에게도 용은 복을 가져다주는 존재였어요. 민화 (서민층에서 유행하던 대중적인 그림)에도 용이 나와요. 여기서 용은 시험에 합격하고, 높은 자리에 올라 이름을 날리고, 모든 일이 잘 풀리기를 기원하는 길상 (吉祥 : 운이 좋고 복 됨)의 이미지였답니다.
<그림 2>는 19세기에 그려진 민화예요. 구름 속을 노니는 용을 그렸죠. 용은 구름을 몰고 하늘을 날 때 최고로 힘이 센 상태입니다. 용은 비를 다스리는 동물이니까요. 용이 몸을 S자로 틀며 발톱을 세우고 눈을 부릅뜨고 있네요. 자신의 위풍당당함을 만방에 드러냅니다. 먹구름은 용의 움직임을 돋보이게 합니다. 이런 용 그림을 출세와 행운을 기원하며 친지들에게 선물하기도 했고, 또 호랑이 그림과 더불어 새해 첫 달에 문 앞에 붙여놓아 액막이 용도로도 사용했습니다. 각종 재앙이 집의 문틈으로 슬며시 들어오려고 넘보다가, 문 앞을 지키는 용과 호랑이를 보고 놀라서 도망가 버리는 거죠.
지금의 중동 지역에 있던 고대 왕조 바빌로니아에서도 용은 도시를 수호하는 동물이었어요. <그림 3>은 기원전 6세기쯤 세워진 이슈타르 문에 새겨진 무슈슈 (고대 메소포타미아 신화에 등장하는 용)의 모습입니다. 머리에서 목과 꼬리로 이어지는 몸통 부분은 뱀과 같네요. 또 사자의 앞발과 새의 뒷발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슈슈는 인간을 도와주기도 하지만 두려운 존재이기도 해요. 고대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용 이미지를 소와 사자 이미지와 함께 도시의 진입구에 새겨넣어 바빌론시 (市)를 지키게 했답니다.
서양 용은 영웅이 이겨낼 시험 상대
그러나 어느 나라에서나 용이 좋은 의미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에요. 용은 유럽에서 중세를 배경으로 한 동화 속에도 등장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용은 공주를 잡아가고 왕자의 공주 구출을 방해하는 골치 아픈 괴물일 뿐이지요. 유럽 문화의 바탕이 된 그리스 · 로마 신화에서부터 용은 방해꾼이었답니다. 올림포스의 영웅들은 구하기 어려운 귀한 보물을 얻기 위해 모험을 떠났다가 꼭 도중에 시험 상대로 뱀처럼 생긴 각종 괴물을 만나게 돼요. 그 괴물을 넘어서지 못하면 보물 근처로 아예 갈 수가 없답니다. 유럽 사람들은 왜 이렇게 용을 싫어했던 걸까요?
영어로 용은 'dragon' 인데, 이의 라틴어 어원인 'draco' 는 본래 큰 뱀을 뜻한다고 합니다. 유럽의 용은 악어처럼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아가리를 무섭게 드러내고 있어요. 입에서 불을 내뿜기도 하지요. 유럽의 용은 아마도 뱀에게 각종 무서운 이미지가 덧붙어서 탄생한 상상의 괴물인 듯합니다.
그런데 유럽의 그림들에서는 용 자체보다는, 용에게 맞서는 용감한 사람이 강조돼요. <그림 4>는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독일 화가, 뒤러 (Albrecht Dürer)가 목판화로 그린 '용을 처단하는 성 게오르그' 입니다. 기독교 성인 (saint) 중 하나인 성 게오르그는 중세의 기사로,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는 사악한 용을 무찌르고 용의 제물로 바쳐진 공주를 구한 영웅이지요.
뒤러는 말에 올라탄 성 게오르그가 긴 창으로 용의 아가리를 찌르는 순간을 차분한 태도로 보여줍니다. 이를 <그림 5>와 비교해보세요. 17세기 바로크 시대의 벨기에 화가 루벤스 (Peter P. Rubens)가 그린 그림 '용과 싸우는 성 게오르그' 는 한결 긴장감을 주는 장면입니다. 루벤스는 용이 만만치 않은 괴물이고, 그래서 싸움이 거칠고 격렬했다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말이 앞발을 높이 쳐들고 성 게오르그는 그 위에서 막 칼을 휘두르려는 찰나입니다. 이미 아가리에 십자 나무 창을 맞은 용은 요동치고 있지요.
이처럼 용이 나타내는 의미는 타고난 것이 아니라 지역마다 조금씩 달라요. 하지만 대부분 용은, '용틀임' 이라는 단어도 있듯, 움직임이 강한 역동적인 이미지라는 공통점이 있답니다. 용을 상징하는 2024년, 용의 좋은 기운을 골라 받으면서 역동적으로 시작해보는 건 어떨까요?
이주은 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기획 · 구성 = 장근욱 기자 (muscle@chosun.com)
[출처 : 조선일보 신문은 선생님 2024년 1월 15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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