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과 함께하는 석탄시대] 08
생과 사의 경계
탄광 작업 현장은 예측 불가한 위험이 항상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조금 전까지 함께 작업하던 동료와 찰나의 순간으로 생존과 죽음이 엇갈렸습니다. 사고가 발생하면 미로 같은 갱도 구조 때문에 일반적인 구조 방식으로는 효율적인 대처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광산구호대를 별도로 조직해서 사고가 발생하면 신속하게 구조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탄광은 석탄가루가 많이 발생하기 때문에 호흡 과정에서 폐에 축적되어 발생하는 진폐증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진폐재해자들은 은퇴한 이후에도 폐질환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한편 탄광 형장에서 순직한 '산업전사' 광부들의 넋을 추모하는 위령탑이 곳곳에 세워져 매해 이들을 기리는 위령제가 거행되고 있습니다.
광산구호대 경연대회
광산 사고에 빠르게 대처하는 역량을 키우기 위해 열린 광산구호대 경진대회 사진이다.
1989 보령석탄박물관
광산구호대 훈련 | 1960년대 | 대한석탄공사
광산구호대의 인명구조 훈련 | 대한석탄공사
부서별 · 부위별 · 정도별 재해자수 도표
함테광업소에서 제작한 재해자 인원 파악 도표이다. 소속과 부상 부위에 따라 분류했으며 탄광에서 부상사고가 빈번헀다는 것을 볼 수 있다.
1998 태백석탄박물관
사고현장 견취도
광업소 내 재해사고 발생 전과 후의 상황을 파악하고 보고하기 위해 작성한 문서이다.
1987 태백석탄박물관
산소구명기
광산에서 긴급환자 발생시 사용하는 산소 호흡용 기구이다.
1990년대 보령석탄박물관
구호복
광산구호대가 입었던 구호복이다.
1980년대 보령석탄박물관
탄광 근로자 재해자수
재해상황보고서
광업소에서 발생한 재해 사고를 보고한 문서철이다.
1994 문경석탄박물관
순직관계철
광업소에서 작업 중 사고로 순직한 광부들을 기록한 문서철이다.
1979 문경석탄박물관
진폐자체보상철
진폐증 피해에 대한 보상을 기록한 문서철이다.
1989 문경석탄박물관
진폐 위로금 청구서
진폐의 예방과 근로자의 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 의거해 지급하는 장해 위로금 지급 신청서류이다. 진폐증 피해를 겪는 근로자가 소속 광업소의 증명을 받아 제출하는 서류이다.
1980년대 태백석탄박물관
산재 장해 퇴직자 명단
산재 장해 관련 퇴직자 명단을 정리한 문서철이다. 광업소에서 직업병으로 장해급여와 재해보상금을 받고 퇴직한 자가 다른 광업소에 재취업하는 문제를 예방하고자 정리했다.
1989 보령석탄박물관
무재해 사고 보고함
함태광업소 보안 감독실에서 사용한 사고 보고문서를 넣는 함이다.
태백석탄박물관
숨진 광부의 상여를 바라보는 시민들
1977. 11. 16 경향신문
산소통을 짊어지고 광구로 들어가는 구조대
1979. 10. 27 경향신문
장성광업소 화재사고
1977 국가기록원
문경탄광사고
전민조
1979. 10. 28
은성탄광 화재사고로 갱 안에 갇혀 있다 구출되어 손을 번쩍 즐어 인사하는 광부
1979. 10. 27 경향신문
화재사고가 난 은성탄광에서 동료들에 의해 구조되어 기뻐하는 광부들
1979. 10. 27 경향신문
탄광사고 현장
보령석탄박물관
"건물 地下 도면만 있었어도···"
현장투입 탄광 매몰구조대
感으로 통로뚫기 시간걸려 구조지연
"살려달라" 애원 아직도 귓가에 생생.
『수천m 지하갱도가 무너지는 사고야 숱하게 보아왔지만 서울시내 최고급 백화점이 폭삭 무너진 일까지 보게되니 ··· 』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이튿날인 지난달 30일 오전 군용헬기로 공수돼 동료 4명과 함께 사고현장에 투입된 강원 태백시 한국석탄공사 장성광업소 都周東씨 (53)는 3일 오전에도 구조통로 개척작업을 하고 나와 얼굴과 온 몸이 땀과 먼지 범벅이었다.
都씨 등 20명은 탄광매몰 사고시 인명구조를 전담하는 대한석탄공사 장성 도계 화순 3개 광업소의 「인명구조 특수구호대」 3대반으로 이번 사고현장에 투입돼 생존자 구출 및 시체발굴에 애쓰고 있다.
이들은 맨먼저 탄광매몰 사고시 사용해온 산소호흡기 자기구명기 (1시간용 인공호흡기) 안전모 안전등 방진마스크 등을 다른 구조대원들에게 나눠줬다.
채탄작업을 하다가도 탄광매몰 사고가 나면 최일선에서 진입로를 개척하는 일을 맡고 있는 이들은 이번 백화점 붕괴현장에서도 생존자의 소재를 확인하고 최소한의 통로를 마련하는 일을 맡고 있다.
일단 작은 통로가 마련돼 119구조대 경찰특공대 군구조요원 등이 진입통로 확장작업을 하면 이들은 곧장 작업통로가 무너져 내리지 않도록 지주대를 세우는 등 구조대원들이 안전하게 작업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고 잇다.
都씨와 함께 철야 구조작업을 하다 역시 3일 오전 잠깐 밖에 나온 白鳳鉉 씨 (54)는 「탄광매몰사고가 나면 갱도지도를 보면서 최대한 빠른 속도로 진입로를 개척하는 작업을 한다」면서 「이번 사고는 초기에 건물의 구조를 한 눈에 알 수 있는 도면도 없는 상태여서 구조작업을 진행, 크게 자연됐다」고 지적했다.
白 씨는 구조 첫날 벽을 두드리거나 「아저씨,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목소리의 환청현상 때문에 가슴이 몹시 아프다고 말했다. 이들은 도심에 「탄광매몰구조대」가 와 활동해야하는 원시적 상황이 언제까지 지속돼야 하느냐고 개탄했다.
具滋龍
동아일보 1995년 7월 4일 자
살아있는 小說 집념인생
漆黑 속 위험 死角地帶
「막장生命」을 지킨다
"太白山 두더지" ··· 長省탄광 救助요원 金榮澤씨
동료광부 모두 5百 여명 救助
金政秀씨 일 생각하면 罪責感으로 가슴 맺혀
"쥐꼬리 俸給에 事故 위험 언제나 ··· 저절로 신세타령"
"악몽 같아요. 김정수씨 일 생각하면 가슴에 맺힌 응어리가 풀어지지 않아요. 구조활동은 많이 했지만 제일 가슴아파요. 이번 장성탄광사고 구조반원의 한사람으로 구조작업을 했지만 갱내에서 남아있던 그 끈질긴 숨결이 갱 밖에 나와 끊어지다니··· 사고를 미리 막지도 못한 위에 좀더 일찍 구출했다면 살릴 수 있었을 것이란생각을 하면 탄광에서 같이 일하는 동료로서 또 구조요원으로 죄책감이 잎섭니다. 김정수씨 만이 아니지요. 가스에 질식돼 숨도 제대로 못 쉬면서 손톱에 피가 맺히게 허우적거리며 살려고 기어보다 끝내 숨지고만 다른 희생자들, 숨져간 광부들의 한이 얽히고 설켰을 시커먼 갱 안을 생각하면 한스럽기만 합니다." 지난 16일 하오 갱 내에 불이 번지면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광부들을 구조하려 막장에 들어갔다가 가스에 질식되어 쓰러지고 간신히 기어 나왔다가 다음 날인 17일 상오 다시 들어가다가 쓰러져 입원까지 했던 석탄공사 장성광업소 보안 감독 기사 김영택 씨는 말끝을 맺지 못하고 울먹였다.
안전시설 장비 허술해
생계를 위해서라지만 직장이라는 것이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 지 몰라 석탄을 캐는 것인지, 위험을 캐는 것인지 모르는 갱 안은 탄도 새까맣고, 지하라 캄캄하고, 곡괭이 휘두르고 삽질하는 광부마저 탄가루에 새까매진 흑색뿐인 막장엔 인명을 위협하는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부실한 갱목과 동바리가 받치는 천장에서 부식이 떨어지다 갱이 무너지면 매몰사고, 갱안 천장이나 벽에서 한 두방울 떨어지다가 수도관이 파열한 듯 지하수 물줄기가 터져 순식간에 갱 안을 물바다로 만드는 출수, 갑자기 메탄가스가 퍼지거나 갱안 곳곳에 시설한 전선이 누전되거나 스파크로 일어나는 화재와 가스폭발 등등
김씨는 한 말로 "탄광의 광부는 죽음과 대결하며 봉급을 캐고 있는 막간에서 일하는 사람들" 이라며 '산업전사' 란 허울 좋은 이름이라고 씁쓰레한 표정이다. "위험부담이 이토록 큰데도 봉급은 밑바닥 수준에서 못 벗어나고 안전시설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고··· 쥐꼬리 봉급이라도 벌려고 버둥대는 아무리 "막장인생" 들이라고는 해도 어느 땐 스스로 신세타령이 저절로 나와요." 사고가 나면 허물어진 갱 안을 남먼저 들어가 축탄과 가스, 불길 속을 헤쳐 광부를 갱밖으로 구출해 나오는 김씨 등 20명의 구조요원은 그래서 장성광업소 안에선 위험도도 제일 높단다. 그러나 이들은 메탄가스 및 일산화탄소 측정기와 산소호흡기 만을 장비했을 뿐 특별한 안전복이나 기타 장비는 갖추고 있지 못한 실정.
27년간의 광부생활 동안 막장 선선부로 탄을 캐다 보안감독기사로 일하며 지난 연말까지 1백57회의 각종 탄광사고로 갱도에 갇힌 동료 5백3명을 구조한 김씨는 장성광업소의 5개갱 (장성, 김천, 문곡, 철암, 중앙)의 개미굴처럼 얽혀있는 갱도를 손바닥처럼 알고 있어 동료들로부터 "태백산 두더지" 로 불린다.
18세때부터 가장으로
김씨는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이제까지 군대생활 3년을 빼고는 장성을 떠나본 적이 없이 오로지 석탄과 더불어 일생을 살아왓다. 김씨가 직접 광산과 인연을 가진 것은 해방직후인 45년. 8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여동생 3명, 남동생 1명과 병든 아버지를 모셔야하는 소년가장으로서 곡괭이를 들었다. 아버지가 극구 만류했으나 초등학교 (황지국민교) 졸업 학력 밖에 없는 김씨가 탄광촌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것밖에 없었던 것.
"처음 선산부가 되어 키보다 큰 동발을 지고 막장으로 내려가 숨 막히는 석탄가루를 들이마시고 비지땀을 흘릴 때는 죽어도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러나 어떻게 하루하루를 지내다보니 어느덧 두더지 인생 27년이 됐어요." 워낙 나이가 젊고 기운이 좋았던 때여서 한달에 60원 (당시 황소 1마리 값)이나 받을 수 있어 어린 동생들을 공부시키며 살 수 있었다. 그때는 광부가 모자라 광업소 측에서 각지로 광부를 모집하러 다니던 때여서 선산부에서 일하면 월급이 후했던 것. 워낙 험한 태백산 산골짜기여서인지 6 · 25전쟁 당시에도 김씨는 피난을 가지 않고도 무사할 수 있었다. "공산군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돌면 가족들은 갱 속으로 피난시키고 광부들은 삽과 곡괭이 등으로 무장하고 갱구를 지켰지요.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어처구니 없는 짓이 없었지만 그 당시는 어떻게든 가족과 탄광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앞 뒤를 가리지 않고 빈손으로 나선거지요." 김씨는 61년 6월 안전기사로 발령받아 수많은 동료들의 생명을 죽음 직전에 구출해왔다.
상만도 모두 17차례나
광산사고 중 구조에 제일 애를 먹는 것은 출수사고, 붕락사고는 한 지점에 국한되기 때문에 보통 인명피해는 적지만 지하수가 터지면 석탄과 사람이 한꺼번에 곤죽이 되어 몸뚱이가 이리저리 잘려나가는 일도 있단다. "지난 74년 10월 3일 하오 9시 40분에 금천갱 3백m 레벨 7크로스 채탄막장에서 출수사고가 일어나 김만희, 김재규 등 광부 2명이 축탄에 매몰되었어요. 사고현장에서 즉각 출동하여 4일간 (96시간)이나 축탄과 생명을 건 싸움 끝에 2명의 시체를 발굴할 수 있었습니다." 김씨는 또 지난해에도 갱도붕락으로 매몰되었던 38명의 광부들을 악전고투 끝에 전원 무사히 구출하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
16년간 안전기사로 일하는 동안 5백 여명의 동료 광부를 구출한 김씨는 그동안 대통령방위포장을 비롯하여 상공부장관 표창 (2회), 강원도지사 표창 (2회), 석공사장 표창 (6회) 등 모두 17차례나 상을 받았다. "아무리 상을 많이 받았어도 숨져간 동료들과 유족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플 뿐입니다." 그래서 김씨는 한 달에 한 버씩 쉬는 날이면 4백여 명의 동료 광부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장명사를 찾아 명복을 빈다.
오랜 갱내 생활로 두더지가 다 되어서인지 김씨는 이제는 사고에 대한 예감까지 하게 됐다. 어느 막장에 무엇이 있는지 훤히 아는 김씨는 동료들과 함께 갱 속에 들어가며 기분이 이상하면 광부들에게 주의를 시켜 사고를 피한 일도 여러 번 있다는 것.
서독간 아들 오면 떠나
위험을 캐며 살아서인지 광부들에게는 금기도 많다. 여자는 절대로 갱 내에 못 들어가며 개고기는 재수없어 안 먹는다. 갱내에서 광부들이 먹다 남은 밥찌꺼기나 오물을 먹고 사는 쥐들이 많지만 절대로 잡지 않는다. 쥐들은 공기에 예민하여 사고위험이 있으면 미리 피하므로 쥐가 있으면 사고가 없다는 미신을 철저히 지키는 광부들이다. 또 갱내에서 휘파람을 부는 것은 절대금물. 가스가 새어나오는 소리와 혼동할 염려가 잇어 신참이 휘파람을 불다가 고참 선배들에게 뺨을 얻어맞는 일이 흔하다.
"금년 봄 신체검사 때 폐가 나쁘다는 진단을 받았어요. 지금 노동청에 규폐증 확인신청을 내놓고 있지요." 라고 씁쓸해하는 김씨.
18살에 결혼한 부인 이봉선 씨 (49)와의 사이에 2남 7녀의 자녀들이 있다. 장남 김명경 씨 (28)는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광부생활을 2년간 하다가 지난해 3월 서독으로 떠났다. 또 장녀도 석공광업소의 교환양으로 일하고 있는 광부가족인 김씨일가. 앞으로 정년 (53세)이 3년 밖에 안남은 김씨는 퇴직금을 타야 고작 7백만 ~ 8백만 원에 불과해 걱정이 태산이다. 앞으로 3년간은 더 일하고 서독간 아들이 돌아오면 광산촌을 떠나 공기 좋은 농촌에 가 조용히 농사를 짓는 것이 소원인 김씨는 오늘도 무게 20㎏이나 되는 가스점검기와 산소통을 메고 사고가 나지 않을 것을 기원하며 갱구로 들어선다.
경향신문 1977년 11월 26일 자
金昌善 씨 드디어 救出
死鬪 열엿새 6日 밤 9時 15分 땅 위로
맥박 · 호흡 障碍없어 응급 檢診
오늘 아침 서울로 헬機 空輸
劇的 순간··· 일제 歡聲
온 국민 성원 속에 現場人波 千餘名
인간은 이겼다. 광부 金昌善 씨는 마침내 구출되었다. 땅 속 깊이 1백25m 갱내에서 열엿새 (만 3백 68시간 35분) 동안 死神과 맞서 싸워온 金씨는 죽음을 물리친 승자가 되어 6일밤 9시 15분 땅 위로 돌아왔다.
이날 저녁 8시 22분 金씨를 최초로 만난 구조원 최수봉 씨는 김씨에게 플라스틱으로 만든 빨강색 보안안경을 씌워 비옷을 입히고 구멍을 부축해 나온 다음 환부대를 씌워 밧줄로 묶은 후 드럼통에 태워 60㎝의 구멍을 벗어났다. 구멍을 벗어난 다음 환부대를 벗긴 후 4인승 캡슐을 바꿔 타고 조심조심 위로 올라왔다. 온 겨레의 애타는 성원 속에 살아올라온 김씨는 갱도 입구 근처에 마련된 임시의료본부에 5, 6시간 동안 응급처치를 받았는데 맥박, 호흡엔 장애가 없었다고 현지에서 검진한 서울 가톨릭 의대 서주영 박사가 말했다. 김씨는 7일 오전 7시 헬리콥터 편으로 서울에 공수되어 메디컬센터에 입원 치료를 받게 된다. 김씨가 다시 오랜만에 땅을 밟는 구봉광산 현장에는 1천여 명의 광부동료, 친지, 주민들이 환성을 올리며 한 생명이 살아서 돌아오는 기쁨을 뜨겁게 나누었다. 초인적인 투지와 인내력으로 목숨을 건져낸 김씨는 구출된 후 자신의 몸맵시를 다듬는 등 사선을 넘어온 사람답지 않게 차분한 태도를 보였다.
동아일보 1967년 9월 7일 자
산업전사위령팁
- 위 치 : 태백시 강원남부로 13
- 위령탑 제원 : 높이 17m (탑신 14m 기단 3m)
- 면 적 : 9,813㎡ (2,968평)
※ 위령탑 9,705㎡/ 위령각 108㎡ - 건립사항
- 준공일자 : 1975년 11월 29일
- 건립예산 : 13백만원
- 시설현황
- 휘호 : “산업전사위령탑”
※ 박정희대통령 친필 - 비문 : 노산 이은상 글
- 위패안치소 1동 (66.70㎡, 20.2평)
- 관리사무실 1동 (28㎡, 8.5평)
- 휘호 : “산업전사위령탑”
건립배경
국가 유일의 산업동력 자원인 석탄을 생산하기 위하여 순직한 광부들의 넋을 추모하고자 1975년 박정희 대통령께서 채탄현장에서 사고로 사망한 광부들을 "순직산업전사"라 추서하고 그 영령들을 안치하고 위무할 수 있는 위령탑의 건립을 주문하여 그 탑신에 "산업전사위령탑" 이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휘호를 내려 당시 강원특별자치도와 4개 시ㆍ군(강릉, 영월, 정선, 삼척군/당시 태백시 행정구역)과 광업성금을 모아 건립하였음.
여기, 이곳에서
Here, in This Place
마을의 풍경, 광부 아버지의 삶, 어른들에게 들은 탄광의 모습 등 어린이들의 시각으로 바라본 탄광마을은 어떤 모습일까요? 솔직하고 담백한 어린이의 표현이 담긴 10편의 동시를 통해 탄광마을 곳곳을 산책해 보면 어떨까요?
동시 출처 : 『탄광마을 아이들』 실천문학
『아버지 월급 콩알만 하네』 도서출판 보리
아버지는 가끔
하늘 올려다보며 말씀하셔요
햇빛이 없으면
이 세상 어떻게 될까
굴 속 걸어나올 때마다
점점 밝아지는 길 밟으며
세상 밖으로 나올 때마다
햇빛처럼 반가운 게 없대요
탄을 캘 땐
까마득히 잊었다가도
굴 속을 빠져나올 때면
온 세상 햇빛으로 둘러싸였음을
온 세상 햇빛으로 빛나고 있음을
비로소 볼 수 있대요
비로소 느낄 수 있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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