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과학의 선구자들

[⑨ 최초로 아인슈타인 만난 황진남]

드무2 2024. 9. 16.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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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⑨ 최초로 아인슈타인 만난 황진남]

 

 

 

1919년 안창호 (왼쪽)와 황진남. 황진남은 1916년 UC버클리에 입학했지만, 1919년 3 · 1운동 때 대학을 자퇴하고 캘리포니아 각지를 돌며 동포들에게 조국의 만세운동을 알렸다. 당시 미주 한인 사회 지도자였던 안창호는 독립운동에 투신한 그를 이끌고 상하이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황진남은 임시정부에서 외교 업무를 맡았다. / 독립기념관

 

 

 

베를린 유학시절 첫 만남··· 조선의 아인슈타인 열풍에 불 지르다

 

 

 

UC버클리 다니다 자퇴, 독립운동

안창호 눈에 띄어 上海 임정 합류

 

임정 내분에 獨유학 중이던 1922년

아인슈타인 만난 뒤 국내 신문에

상대성이론과 그의 일대기 기고

 

팔레스타인에 유대대학 세우자

우리 선조들은 아인슈타인에 열광

그 중심에 황진남이 있었다

 

6 · 25로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고

1970년 혼자 지내는 숙소서 운명

임정 100주년에 건국 훈장 애국장

 

 

 

1922년 2월, 베를린 유학생 황진남이 독일 최고 학술 기구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에서 아인슈타인을 만났다. 1915년 아인슈타인은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에 발표한 일반상대성이론에서 빛이 중력 때문에 굴절된다고 예측했는데, 이 놀라운 현상이 1919년 개기일식에서 실제로 관측되며 세계적 스타가 된다. 힘을 얻은 아인슈타인은 팔레스타인에 대학 설립을 추진했다. 이스라엘이 건국되기도 훨씬 전에 교육기관부터 세운 것이다. 나라 잃은 민족의 대학이 만들어지는 데에 고무된 일제강점기 우리 선조들은 과학이 독립의 동력이 될 수 있음을 깨닫고 아인슈타인과 상대성이론을 파고들기 시작한다. 그 중심에 황진남이 있었다.

황진남은 1897년 함흥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하와이로 이민을 떠나 미국에서 교육받은 황진남은 1916년 UC버클리에 입학한다. 이 대학은 현재까지 노벨상 수상자를 무려 110명 배출한 명문 학교. 이민자 출신으로 장밋빛 미래를 꿈꾸던 황진남의 인생이 바뀐 것은 1919년 3 · 1운동 때다. 기억도 희미한 조국의 소식에 벅찬 감정을 이기지 못한 그는 대학을 자퇴하고 캘리포니아 각지를 돌며 동포들에게 만세 운동을 알렸다. 당시 미주 한인 사회의 지도자였던 안창호는 독립운동에 투신한 이 피 끓는 젊은이를 눈여겨보았다. 그래서 영어에 능통한 황진남을 데리고 상하이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임시정부에서 외교 업무를 맡은 황진남은 1920년 8월 안창호를 모시고 여운형 등과 베이징을 방문한 미국 의원들을 면담했다. 그의 나이 불과 23세였다.

1921년 임시정부가 내분에 빠지자, 미국에 가려고 유럽을 경유하던 황진남은 3 · 1운동으로 중단했던 학업을 이어가기로 결심하고 독일 베를린 대학에 입학했다. 이렇게 1922년 아인슈타인을 만난 황진남은 그해 가을 아인슈타인이 일본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는 조선에 아인슈타인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1922년 11월 14일부터 4회에 걸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대해 동아일보에 기고했다. 11월 18일부터는 3회에 걸쳐 아인슈타인을 만난 이야기와 그의 일대기를 들려주었다. 그가 특히 강조한 것은 아인슈타인이 황국주의를 배척하며 평화주의를 옹호하고 각 민족의 자유 발전을 위하는 인물이라는 점이었다.

마침 1922년 11월 13일 아인슈타인의 노벨상 수상 소식이 전해진다. 아인슈타인은 일본으로 가는 배에서 이 소식을 들었다. 일본 전체가 들썩이며 아인슈타인 붐이 일었고, 이는 1923년 조선 전역에서 벌어진 상대성이론 순회 강연으로 이어졌다. 원자폭탄의 원리가 되는 상대성이론의 유명한 공식 E=mc²의 내용까지 대중 일간지에 소개한 황진남은 아직은 젊은 과학자였던 아인슈타인을 이렇게 평가했다. “인류 문화사가 계속되는 한 아인슈타인이라는 이름은 영원할 것이며 또한 전 세계 인류가 갈릴레이와 뉴턴과 같이 숭배할 것은 부정 못 할 사실이다.” 이처럼 1920년대 조선에서 벌어진 아인슈타인 열풍에 불을 지른 것은 황진남이었다.

1923년 9월 일본 관동 대지진이 일어나자, 독일 신문에 조선인 학살 이야기가 실린다. 이를 목격한 독일인 오토 부르흐하르트 (Otto Bruchhardt) 박사가 기고한 것이다. 기사를 읽은 황진남은 울분에 박사를 찾아가 일본의 만행 이야기를 듣고 기록했다. 그러나 베를린에서 황진남의 학업은 순탄치 않았다. 이 시기 독일은 1차대전 패배로 물가가 폭등한다. 1923년 10월 한 달에만 300배가 올라, 11월 히틀러가 주동한 뮌헨 폭동으로 나치가 급부상했다. 자신뿐 아니라 독일 유학생 전체가 곤란에 빠지자, 황진남은 미국에 있는 동포들에게 호소문을 보내고, 그의 호소로 1924년 미국에서 대대적 모금이 벌어진다. 하지만 황진남은 동포들이 보낸 후원금이 베를린에 도착하기 전 프랑스 파리로 옮겼다. 박사 학위를 받기 불과 1년 전이었다.

파리 소르본 대학에 입학해서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한 황진남은 1938년 고향 함흥으로 귀국했다. 파리에서 결혼한 프랑스인 아내 시몬뇨와 함께였다. 귀국 후 라디오에서 아인슈타인에 대한 과학 강연을 했으며, 함흥의과대학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1945년 해방되자마자 황진남은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에 합류해 새 국가 건설에 나섰다. 하지만 해방 공간에서 벌어진 좌우 대립은 중간을 허용하지 않았다. 함흥에 아내와 아들을 두고 온 황진남은 필사적으로 좌우 합작을 추진했지만, 양쪽에서 거친 공격을 받았다. 결국 1947년 7월 여운형이 암살되며 좌우 합작은 물거품이 되고, 이후 황진남의 정치 활동은 중단되었다.

6 · 25가 벌어지자, 황진남은 일본 도쿄에 있던 유엔군 사령부 방송사 VUNC (The Voice of UN Command)에서 대북 선전을 맡았다. 가족을 애타게 찾던 그에게 프랑스 외교부가 아내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북한군에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끌려다니다 프랑스 정부가 찾아냈을 때는 정신병원에 수용되어야 할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황진남은 겨우 아들을 데려와 도쿄에서 같이 살았지만 결국 아들도 캐나다에 있는 아내의 친척에게 보냈다. 이후 홀로 살던 황진남은 VUNC가 오키나와로 옮기자 함께 이동했고, 1970년 혼자 지내는 숙소 침대에 누운 채 숨을 거둔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2019년 상하이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황진남은 건국 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하지만 아직 가족이나 후손이 나타나지 않아 훈장은 누구에게도 전달되지 못하고 있다.

 

 

 

"과학기술로 대한독립을"··· 1920년 항공 부대 만든 미주 한인 농부들

 

 

 

1915년 6월 24일, 미주 한인들의 소식지였던 ‘신한민보’ 에 재미있는 기사가 실린다. 황진남에 대한 첫 기록이다. 하와이 학생 황진남이 미국 본토로 떠난 아버지 소식을 묻자, 신문은 “콜루사 땅에서 벼농사를 하는 중” 이라고 답했다. 콜루사 (Colusa)는 샌프란시스코 북동쪽에 있는 지역으로, 우리 선조들은 이곳이 벼농사에 적합함을 알게 된다. 하와이에서 이 소식을 들은 황진남의 아버지 황명선은 가족을 두고 콜루사로 향했고, 여기에는 먼저 벼농사를 시작한 철도 노동자 김종림이 있었다. 김종림은 황명선의 고향 함흥 바로 옆 정평 출신이다. 이 무렵 콜루사 한인들에게 행운이 왔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곡물 가격이 폭등하자 한인들의 쌀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특히 김종림은 백만 장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힘들게 번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친다.

 

 

 

1920년 설립된 캘리포니아의 한인 비행대. 김종림 등 미주 한인 농부들 주도로 만들어진 한인 비행대는 임시정부 노백린 장군이 총괄했다. 안창호는 독립군 비행대 계획 과정에서 사들일 기종과 가격을 황진남에게 알아보게 했다. / 미국 남가주대

 

 

 

1903년 라이트 형제의 비행 성공 얼마 뒤 벌어진 1차대전 때 비행기가 최신 무기로 등장했다. 1919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시 비행기의 위력을 주목했다. 독립군 편제에 비행대를 포함한 것이다. 특히 안창호는 비행대 계획을 구체화하며 사들일 기종과 가격을 황진남에게 알아보게 했다. 여기에 호응한 것이 벼농사를 짓던 미주 한인들이었고, 김종림을 중심으로 1920년 한인 비행대를 세우게 된다. 비행 학교 역할도 수행한 이곳은 임시정부 노백린 장군이 총괄했고 비행기를 여러 대 사서 파일럿을 수십 명 길러냈다. 비록 벼농사 흉작이 겹쳐 비행대 활동은 중단되었지만, 이미 100년 전 우리 선조들은 과학기술로 독립한다는 원대한 포부를 품었다. 그래서 아무리 어렵고 힘든 환경에서도 최신 과학과 첨단 기술을 받아들이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민태기 공학 박사 '조선이 만나 아인슈타인' 저자

 

 

[출처 : 조선일보 2024년 4월 24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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