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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일러스트 = 박상훈
봄비
조용히 젖어드는 초 (草) 지붕 아래서
왼종일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월곡령 (月谷嶺) 삼십리 피는 살구꽃
그대 사는 강마을의 봄비 시름을
장독 뒤에 더덕순
담 밑에 모란움
한나절 젖어드는 흙담 안에서
호박순 새 넌출이 사르르 펴난다
ㅡ 박목월 (1915 ~ 1978)
봄비는 내리되 덜 요란하다. 소리는 작고 모양새는 찬찬하다. 떠들썩하지 않은 봄비 덕에 새순과 어린 움의 돋음이 한결 수월하다. 봄비는 내려 세계를 촉촉하게 적신다. 짚으로 인 지붕에도 봄비는 내려 지붕이 일층 낮아진 느낌이다. 사람 마음도 가라앉는다. 시인은 봄비 오는 내내 한 사람을 그리워하고 그리워한다. 그는 시인의 거소 (居所)에서 떨어진 곳에, 강마을에 살고 있다. ‘월곡령’ 과 ‘삼십리’ 라는 시어에는 가로막힘과 먼 거리가 느껴진다. 봄비를 보며 그에게도 상념이 있으리라고 여겨서 시인은 염려를 하는 듯도 하다.
그러나 다시 고개를 떨구고 바라본 곳에는 더덕순과 모란움의 약동이 있다. 집을 둘러막은 흙담 아래에는 호박순이 뻗어가고 있다. 무르고 산뜻한 호박순은 마치 뭉쳐있던 것이 살살 풀리는 것처럼 움직이는데, 머잖아 흙담을 타고 오를 것이다. 봄비로 인해 생활의 공간 그 안쪽에 푸릇하고도 또렷하게 생겨난 이 생명들의 생기 (生氣)와 생동 (生動)은 시인의 “봄비 시름” 을 잠시 잦아들게 할 것이다.
문태준 시인
[출처 : 조선일보 2024년 4월 8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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