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세대, 1 세대 기업가들 불러내다]
그래픽 = 백형선
청년들 "영화같은 삶, 힘든 현실의 롤모델"··· 산업화 영웅들의 부활
정주영 · 이병철 · 구인회 · 박태준 스토리, 유튜브서 화제
無에서 有 창조한 도전에 자극 받고 기업가 정신 공감
정주영 · 이병철 영상, 수백만 조회수
70 ~ 80년전 기적같은 창업 스토리
2030들 이용 '유튜브 쇼츠' 서 인기
車 · 반도체 등 성공 신화에 감동
MZ "매순간 죽기 살기로 덤비면
안 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수 이찬원 "김우중 책 4번 정독"
기업들도 자서전 내고 캠프 열어
창업주 생가 찾아가 역사 공부도
‘새벽 3시에 시작하는 정주영 회장가의 아침’ (320만회), ‘이병철 회장이 73세에 던진 승부수, 반도체’ (274만회), ‘등소평이 영입하려 했던 포항제철 창업자 박태준’ (66만회), ‘금성사 구인회, 라디오와 TV의 시대를 열다’ (27만회).
최근 한국의 창업 1세대 기업인 관련 영상들이 유튜브에 올라와 수십만 ~ 수백만 조회 수를 기록하며 인기를 끌고 있다. 대부분의 영상은 1분 이내의 ‘쇼츠’ (짧은 영상)다. 10분 내지 길게는 1시간짜리 영상과 달리 쇼츠는 20 ~ 30대들의 이용 비중이 높은 영상물이다.
정주영 회장이 사우디에서 12억달러짜리 주베일 항만 공사를 수주한 일화, 새벽에 일어나 그날 할 일을 꼭 메모했던 이병철 회장의 생활 습관 등 수없이 많다. 네이버 이해진, 카카오 김범수, 엔씨소프트 김택진 같은 벤처 기업인들에게 익숙한 MZ세대들이 70 ~ 80년 전 창업에 나서 산업화 기적을 이룩해낸 1세대 기업가들을 다시 부활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영상에는 “매 순간 최선을 다해서 죽기 살기로 덤비면 안 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도 안되는 위기를 극복하는 걸 보면서 별거 아닌 데에도 좌절하는 나와 비교하니 소름이 돋았다” 등의 댓글이 달려 있다.
그래픽 = 백형선
1세대 창업가들이 소환되는 것은 MZ들이 처한 복합적 현실과 관련이 있다는 분석이다. 과거보다 경제적으로는 훨씬 부유해졌지만, 취업난 등 고달픈 현실을 이겨낼 내성이 떨어진 MZ들이 불굴의 정신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일군 산업화 영웅들의 이야기에서 힘을 얻는다는 것이다. 한 30대 스타트업 창업자 A씨는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만 급급한 세태에서, 1세대 창업가들이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국가까지 생각하며 업을 일궜다는 점이 존경스럽다” 고 말했다.
최근엔 1세대 기업가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는 청년들을 위한 캠프나 교육 행사, 자서전 등도 활성화되고 있다.
한국경제인협회는 지난 6월 롯데그룹과 함께 신격호 창업주 추모관이 있는 롯데인재개발원에서 기업가 정신 캠프를 열었는데, 이곳에 대학생만 200여 명이 모였다. 학생들은 신격호 회장이 일본 집무실에 한국 농촌 풍경 그림을 걸어 놓고 늘 고국을 떠올리며 사업을 일군 이야기 등에 큰 호응을 보였다고 한다. 김영은 한경협 경제교육팀장은 “기성 세대들은 1세대 기업가들에게 정경유착 같은 단어부터 떠올리지만 오히려 젊은 세대들은 무 (無)에서 유 (有)를 창조한 1세대 기업가의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이야기에 크게 감동하고 있다” 고 했다.
LG전자는 지난 6월 ‘담대한 낙관주의자, LG전자 사람들’ 이란 책을 발간했는데, 첫 에피소드로 구인회 창업회장의 일화를 담았다. 1948년 ‘럭키 크림’ 이 큰 인기를 끌 때, 불량품이 좀 나와도 괜찮다고 말하는 동생들에게 구 창업회장이 “보래이. 100개 중의 1개만 불량품이어도 다른 99개까지 다 불량품이나 마찬가진기라. 아무거나 많이 팔면 장땡이 아니라 1통을 팔더라도 좋은 물건 팔아서 신용 쌓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걸 느그들은 와 모르나” 라고 불호령을 내린 일화다.
SK그룹이 지난 4월에 경기 수원 최종건 창업회장과 최종현 선대회장의 생가에 문을 연 ‘SK고택’ 에도 MZ세대들의 방문이 이어지고 있다. 6 · 25 전쟁 후 잿더미가 된 공장을 재건해 선경직물을 세운 창업회장과 “사업은 제품이 아니라 미래를 파는 것” 이라고 했던 선대회장의 이야기에 자극받는다고 한다.
지난달 경남 진주에서 1박 2일로 열린 ‘Kㅡ기업가 정신 청년 포럼’ 에 200여 대학생이 참석해 경남 출신인 삼성, LG, GS, 효성 창업주들의 ‘사업보국’ 정신을 배우고 있다. / 진주시
경제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려진 트로트 가수 이찬원 (28)도 최근 한 방송에서 “대우 김우중 회장 자서전을 네 번 정독했다” 고 밝혔다. 이씨가 언급한 자서전은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로, 이씨가 태어나기도 전인 1989년 초판이 나와 최단기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던 책이다. 이후 김우중 회장 별세 (2019년) 1년 전인 2018년 개정판이 나와 지금도 꾸준히 읽힌다.
지난 2021년 말 부산 기장군의 박태준 포스코 창업회장 생가 옆에 문을 연 ‘박태준 기념관’ 은 박 회장의 정신을 조명하는 다양한 행사를 열고 있다. 포스코 관계자는 “‘우향우 정신’ 같은 박 회장의 불굴의 의지에 10 ~ 20대 학생들이 특히 감동한다” 면서 “최근엔 대학생들의 방문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고 말했다.
지난달 초 경남 진주시에서 열린 ‘진주K기업가 청년포럼’ 에는 25개 대학 경제 · 경영 관련 전공 대학생 200여 명이 참석해 진주시 · 의령군 · 함안군 등에 있는 LG · GS · 삼성 · 효성 등 4대 창업주의 생가를 방문하고 창업 역사를 공부했다.
미래를 열어갈 20 ~ 30대에게 창업은 또 다른 선택지다. 하지만 이들 스스로는 기업가 정신이 높지 않다고 여기고 있다. 지난 4월 한국경제인협회의 국민인식 조사에 따르면, ‘기업가 정신이 높다고 생각하느냐’ 는 질문에 ‘그렇다’ 고 응답한 비율이 20대는 38%, 30대는 41%였다. 60대 이상 (51%)과 비교해 크게 낮았다. 2030세대는 또 ‘기업가 정신이 낮은 이유가 뭔가’ 라는 질문에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 (27 ~ 28%) ‘사회 전반적인 고소득 임금 근로 선호 풍토’ (25 ~ 26%)등을 이유로 꼽았다.
그런 젊은 세대들이 1세대 기업가들의 창업 정신에 감동하고, 이를 통해 창업으로 이어진다면 또 다른 국가 경쟁력이 될 것이란 기대도 크다. 후진국이었던 1960 ~ 70년대 한국에서 ‘근면’ 을 기반으로 조선 · 철강 · 전자 등 당시 선진국 산업에 뛰어들어 전후 재건을 넘어 도약을 이끌어낸 성공 방식이 현 시대에도 재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상만 성균관대 경영 교수는 “글로벌 기업가 정신의 공통점이 도전, 혁신이라면 한국의 1세대 기업가 정신은 ‘공동선 기여’ 가 최우선이었다” 며 “카카오, 네이버 등 최근 벤처인들의 정신과는 또 다른 ‘공공의 이익’ 철학이 몇 세대를 뛰어넘어 청년들에게 이어진다면 이 또한 큰 자산이 될 것” 이라고 말했다.
이정구 · 서유근 기자
[출처 : 조선일보 2024년 8월 8일 자]
美 · 日 교과서, 기업인들 비중 있게 다뤄
한국은 산업화 거목들 언급 없어
美, 카네기 · 록펠러 공과 소개
日, 시부사와 등 상세하게 서술
미국 철강왕 앤드류 카네기 (왼쪽)와 일본 제일국립은행 초대 총재 시부사와 에이이치.
“(초기 기업 창업가들의) 이념이 현대에도 통하는 생각이라는 것을 기술한다.”
일본 도쿄법령출판이 문무과학성에 교과서를 검정받기 위해 제출한 집필 방침에 적은 내용이다. 도쿄법령출판이 펴낸 고등학생 대상 ‘비즈니스 · 매니지먼트’ 교과서에는 ‘시부자와 에이이치의 이념과 기업의 발전’ ‘이와사키 야타로의 이념과 기업의 발전’ ‘메이지 시대를 대표하는 두 명의 경영’ 챕터가 18 ~ 22페이지에 걸쳐 서술돼 있다.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 라고도 하는 시부자와 에이이치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벤처 투자자로서 일본에서 기업을 500곳이나 세운 인물이다. 이와사키 야타로는 미쓰비시그룹을 창업했다.
미국에서는 9 ~ 12학년생을 대상으로 맥그로힐이 출판한 ‘미국인의 역사’ 중 ‘산업 부흥기’ 장에 ‘철강왕’ 이라는 앤드루 카네기를 비롯해 JP모건을 세운 존 피어폰 모건, ‘석유왕’ 존 록펠러 등이 사업을 어떻게 시작했고 부흥시켰는지 등과 업적이 소개돼 있다. 공과 (功過)에 대해서도 “기업인들이 불굴의 기업가 정신과 독창적 아이디어, 추진력 등으로 각 분야 산업을 일으켜 강대국 기반을 다졌다” 면서도 “독점 등의 문제로 경제적 · 사회적 문제도 일으켰다” 고 서술했다.
반면 한국의 고교 현행 정규 교육과정에는 이병철, 정주영, 박태준 등 한국 산업화를 이끈 거목 (巨木)들에 대한 언급은 아예 없다. 기업가 정신 관련 내용을 포함하는 과목으로 진로와 직업, 인간과 경제활동, 발명과 메이커, 진로와 기업가 정신 등이 있을 뿐이다. 진로와 직업 과목에 ‘변화하는 직업 세계 이해’ 단원과 ‘대인 관계와 의사소통 역량 개발’ 단원에 직업가 정신 관련 내용이 일부 들어가 있는 수준의 이론 교육에 그친다.
대한상공회의소 분석에 따르면, 미국 교과서에서는 기업가 정신에 대해 ‘새로운 사업 기회를 찾아 부가가치 상품을 만들어내는 특별한 재능’ 등으로 설명하며 스티브 잡스 등 여러 기업가 사례를 소개한다. 반면 국내 교과서는 기업가 정신의 질보다는 기업의 일반적 역할과 기능에 대해 설명한다고 분석했다. 정부는 최근 2025년 고교 학점제 전면 시행에 맞춰 기업가 정신 교과서를 개발하겠다고 발표했다.
서유근 기자
[출처 : 조선일보 2024년 8월 8일 자]
책 · 영상 넘어··· 초중고 4000명, 실전서 '기업가 정신' 배운다
아산나눔재단서 교육 프로그램
지난달 25일 서울 동대문DDP에선 ‘실패 페스티벌’ 이라는 행사가 열렸다. 무대에는 4명의 중 · 고등학생이 올라와 자신의 창업 실패담을 ‘자랑’ 했다. 한 학생은 고등학교 친구들과 창업 동아리를 꾸려 청바지를 재활용하는 사업에 도전했다가 친구들이 시험 공부를 한다며 빠져나가 실패한 경험을 발표했다.
이 행사는 아산나눔재단의 기업가 정신 교육 프로그램 ‘2024 아산 유스프러너 데모데이’ 행사 중 하나였다. 재단 관계자는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는 아산 정주영 창업회장의 신념을 반영해 준비한 행사” 라고 했다.
이처럼 책이나 영상을 뛰어넘어 직접 체험하고 실전처럼 준비해보며 기업가 정신을 배우겠다는 학생들이 늘고 있다. 1세대 창업가들의 도전 정신에는 성공도, 실패도 모두 성장을 위한 하나의 자산으로 작용한다는 점을 체득해보겠다는 취지다.
올해 8년 차를 맞는 아산 유스프러너는 청소년들이 스스로 스타트업의 방식으로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해보는 팀 프로젝트를 통해 기업가 정신을 함양하는 교육 프로그램이다. 해가 갈수록 참가 학생이 늘어 올해는 전국 200개 초 · 중 · 고생 약 4000명이 유스프러너에 참여하고 있다. 작년에 열렸던 데모데이 행사에서는 중 · 고등학생들이 수개월간 준비한 창업 프로젝트를 발표하고 부스를 운영하기도 했다. 청소년과 교사 등 1060명이 참가할 정도로 성황이었다. 자신의 관심사를 창업으로 연결하고 친구들과 협업해 창업 아이디어를 실행해보는 교육과정인 ‘창업 부캐 (부캐릭터) 육성 프로젝트’ 도 인기다. 2021년 해당 과정에 참가했던 한 여중생은 이듬해 충남 지역에서 진행한 창업 경진 대회에서 수상하며 “기업가 정신 교육을 받고 창업을 꿈꾸게 됐다” 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이정구 기자
[출처 : 조선일보 2024년 8월 8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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